2019년 3월 27일 수요일

열하일기, 熱河日記.

열하일기,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 일기(燕行日記). 26권 10 책. 필사본.
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은 종형인 금성 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건륭제(고종)의 칠순연(七旬宴)에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중국 연경(燕京)을 지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지인 열하(熱河)까지 기행한 기록을 담았는데 중국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내용을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데 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다시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이 열하까지 가게 된 이유는 연경에 도착해보니 청나라 황제는 열하에 가고 연경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연암이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충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암 수택본(手澤本) 26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 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 ·건물 ·경목(耕牧) ·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 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권 2 <성경잡지(盛京雜識)>:십리 하(十里河)에서 소 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특히 <속재 필담(粟齋筆譚)> <상루필담(商樓筆譚)> <고동록(古董錄)>은 흥미 있는 내용이다.

권 3 <일신 수필(馹汛隨筆)>:신 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하다.

권 4 <관내 정사(關內程史)>: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권 5 <막 북행 정록(漠北行程錄)>: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권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권 7 <구외 이문(口外異聞)>: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 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권 8 <환 연도 중록(還燕道中錄)>: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橐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권 9 <금료소초(金蓼小鈔)>: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권10 <옥갑 야화(玉匣夜話)>: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 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권 11 <황도 기략(黃圖紀略)>: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 ·전각(殿閣) ·도지(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권 12 <알성 퇴술(謁聖退述)>: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 한 기록이다.

권 13 <앙엽기(盎葉記)>: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 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권 14 <경개 록(傾蓋錄)>: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권 15 <황교 문답(黃敎問答)>: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권 16 <행재잡록(行在雜錄)>: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 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권 17 <반선 시말(班禪始末)>: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권 18 <희본 명목(戱本名目)>.

권 19 <찰습륜포(札什倫布)>: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권 20 <망양록(忘羊錄)>: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권 21 <심세편(審勢編)>: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권 22 <곡정 필담(鵠汀筆譚)>:중국 학자 윤가 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권 23 <동란섭필(銅蘭涉筆)>: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권 24 <산장 잡기(山莊雜記)>:열하 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권 25 <환희기(幻戱記)>:광 피사 표 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권 26 <피서 록(避暑錄)>: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최근 <양매시화(楊梅詩話)>가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 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한시화(漢詩話)로서, 당시 옮겨 쓰려다가 우연히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6 책 활자본으로, 19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1956년 타이완[臺灣]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또 최근 민족문화 추진회의 《고전국역 총서(古典國譯叢書)》 18∼19 책으로 간행된 26권 2 책의 이가원(李家源) 국역본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로서 26권 10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 하사로 베이징[북경(北京)]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했다. 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7권은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여행과 관련된 일화를 사실적으로 서술하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창작하기도 했다.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 燕巖集≫ 원집에 이어 간행한 동 속집 권1·2(고활자본)에 들어 있고,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했다. 당시 박지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 11∼15에도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편도 있고 1956년 자유중국의 대만대학(臺灣大學)에서 동 대학 소장본을 영인한 것도 있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 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견문하고 그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 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 하(十里河)에서 소 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 수필>은 신 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 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 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 북행 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 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 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 연도 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옥갑 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 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 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 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 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 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 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 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 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 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 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 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 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 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 잡기>는 열하 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 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 산장에서 주로 시문 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라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 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허베이 성(河北省)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장기간 체류함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청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의 외교사절들로 붐볐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 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두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 아울러 그 나름의 창안을 가미하여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주요 여정은 첫째 유형의 연행록처럼 날짜별로 충실히 기록해 나가되, 해당 일자의 기사에 포함시키기 힘든 중요한 사항은 독립된 한 편의 글로 서술해 두었다. 이는 둘째 유형의 연행록이 지닌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특색은, 열하나 북경에 장기간 머물 때 얻은 잡다한 견문들을 시화(詩話)·잡록(雜錄)·필담(筆談)·초록(抄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시화와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행재잡록(行在雜錄)」, 「피서 록(避暑錄)」, 「구외 이문(口外異聞)」, 「황도 기략(黃圖紀略)」, 「알성 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등이다. 이러한 시화나 잡록을 통해 박지원은 당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학계와 문단의 최신 동향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속재 필담(粟齋筆談)」, 「상루필담(商樓筆談)」, 「황교 문답(黃敎問答)」, 「망양록(忘羊錄)」, 「혹정 필담(鵠汀筆談)」 등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필담들을 『열하일기』에 원고 그대로 싣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린 대화록으로 교묘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밖에도
중국 여행 중에 입수한 청나라의 공문서, 도서목록, 비문(碑文), 신간 서적 등 각종의 희귀한 자료를 초록하여 소개해 놓았다. 예컨대 『열하일기』의 마지막 편인 「금료소초」는 청나라 문인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향 조필기(香祖筆記)』란 책에서 의약(醫藥)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다.

1830년대 초에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선(金景善)은 역대 연행록 중 가장 뛰어난 저술로 김창업의 『연행 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으면서, 『열하일기』는 '입전체(立傳體)'적 특징을 지닌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입전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로 계승되어 온 기전체(紀傳體), 그중 특히 열전(列傳) 형식을 가리킨다. 김경선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일종의 '열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 본다.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곡 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산장 잡기(山莊雜記)」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그는 마음을 차분히 다스림으로써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며, 사물을 인식할 때 선입견이나 감각에 현혹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생처음 코끼리를 본 충격을 표현한 「상기(象記)」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처럼 광활하고 경이로운 현실 세계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인 자세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 수필(馹汛隨筆)」편 7월 15일 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범'과 '북곽(北郭) 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뿐더러, '범'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로 알려진 「호질」과 「허생전」에 소설적인 속성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징이 다분한 반면, 『열하일기』에는 얼핏 소설과 거리가 먼 형식을 취한 듯한 부분들에서 도리어 소설적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강록」 이하 「환 연도 중록(還燕道中錄)」에 이르는 전반부 7편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갔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식 표현 기법을 종횡무진 구사하여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소설적 특징으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에 겪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이를 장면 중심으로 교묘하게 구성하여 매우 풍부하고도 흥미 있는 체험담으로 재현해낸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이 장면 묘사를 추구한 대목들에서는 육성을 방불케 하는 생기 있는 대화를 구사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반드시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표현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화 장면에서는 조선식 한자어와 우리 고유의 속담을 구사하여 토속어의 맛을 살리면서 해학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 북행 정록(漠北行程錄)」편 8월 5일 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열하일기』의 도처에서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보고 겪은 자연 풍경과 기상(氣象)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직접 여행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그는 수레와 기계류,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선박과 교량 등 청나라의 갖가지 문물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하에서 구경한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들이나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한 세계 각국의 기이한 새와 짐승 따위를 여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세계가 경이로운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써졌을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 편 6월 28일 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망양록」 편에서 왕민호(王民皞)는 박지원이 양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은 제(齊)·노(魯) 같은 대국(大國)을 즐기지 않습니까?"하고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박지원이 소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국의 음식 맛을 모른다고 놀린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대국은 노린내가 나서요" 하고 응수함으로써 왕민호를 무안케 하고 만다.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서 싫다"는 뜻의 이 해학적인 답변은 "청나라가 비록 대국이지만 노린내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도 함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담은 사상서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예작품으로도 재인식되면서, 그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에서도 『열하일기』에 주목하고,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갔던 박지원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기획을 다투어 추진했다. 그 결과물로 여행기들이 잇달아 신문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TV 다큐멘터리도 이미 여러 차례 제작·방영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로 인해 『열하일기』 번역본을 찾는 독자들이 날로 늘고 있으며, 열하 여행도 이제 관광코스의 하나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박지원과 달리,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게다가 전 세계가 급속히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라고 한다면, 『열하일기』는 그에 대해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는 『열하일기』야말로 세계화 시대에 다시 주목되어야 할 값진 문학적 유산이 아닐까 한다.

박지원은 「황교 문답」의 서문이나 '심세(審勢) 편'에서 청나라를 여행할 때 중국인에게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청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외국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정을 관찰할 때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알아보자. 박지원이

열하를 방문했을 당시 마침 티베트 불교계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도 건륭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묵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티베트 불교와 판첸 라마에 관해 소개한 부분을 찾아보고, 청나라가 이처럼 판첸 라마를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박지원의

중국 여행을 상상하기 위해 중국 지도를 펴 놓고 그의 여행길을 짚어 보자.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벌판을 지나고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경과 열하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가 보았던 중국의 명승고적들을 조사해 보자.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처음 접한 소감을 토로한 「도강록」 6월 27일 자 일기나,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을 소개한 「환희기(幻戱記)」에 덧붙인 글 등에서 박지원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야말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역설적 주장을 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등에서 박지원은 새로운 천문 학설로서 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고 있다는 지구 자전설(地球自轉說)을 주장하면서, 아울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중국의 지식인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문헌
『열하일기 해제(熱河日記解題)』(민족문화 추진회, 1983)
「열하일기의 서술 원리」(이종주,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열하일기의 문학적 연구」(강동엽,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2)
열하일기 [熱河日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열하일기 [熱河日記]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2006.)
열하일기 [熱河日記] (두산백과) 

2019년 3월 21일 목요일

경주

경주 역사 지구에는 조각, 탑, 왕릉, 산성 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수도로 신라인의 생활 문화를 잘 보여 준다.

신라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100여 년 전인 기원전 57년, 한반도 동쪽에 자리한 사로국에서 시작되었어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는 작은 국가였어요.

4세기 후반, 신라의 제17대 왕인 내물왕이 주변 소국을 정복한 뒤 왕권을 강화했어요. 이때부터 신라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힘 있는 나라로 성장했지요. 6세기 후반, 제24대 왕인 진흥왕 때에는 강한 군사력으로 한강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등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7세기 후반, 제30대 왕인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루었지요.

통일 후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가 더욱 발달했어요.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도 이 시기에 탄생했지요. 지리적으로 가까운 당나라와 왜뿐만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1)했어요.

왕족과 귀족 간의 다툼이 심해져 점차 혼란에 빠진 신라는 제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935년에 멸망했어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신라의 천 년 역사가 담긴 살아 있는 박물관이에요. 신라 시대 초기부터 통일 이후까지 신라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적과 유물들로 가득하지요. 경주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지와 수많은 문화재들은 국보로 지정되었답니다.
박혁거세는
박혁거세는 신라를 세운 인물이에요.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찬란한 빛이 나오는 알이 있었는데,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신화가 전해져요. 박혁거세는 기원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여섯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세우고 60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어요.
경주 본문 이미지 1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첨성대예요.
경주의 유적지를 유네스코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의 예술과 문화를 보여 주는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어요. 경주의 신라 문화 유적 지구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지요. 경주의 유적지는 남산 지구, 월성 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 산성 지구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보호되고 있어요.

신라의 천 년 역사 속으로"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늦게 발전했지만 삼국 통일을 이루었어요. 신라는 어떤 나라였는지, 함께 살펴볼까요?

골품제로 이어진 귀족 사회

신라는 왕족과 귀족, 평민, 노비 등 사회 계층이 구분된 신분 사회였어요. 신라는 골품제로 귀족의 등급을 나누었어요. 이 제도에 따라 왕족인 성골과 진골 이외에 1~6두품까지 귀족을 구분했지요. 신라 사람들은 골품 제도의 품계2)에 따라 집의 규모, 옷의 색깔, 장신구까지도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했다고 해요.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처음으로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지요.
원광 법사
신라 진평왕 때의 승려예요. 수나라에서 11년간 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신라 불교 발전에 공을 세웠지요. 세속오계를 지었는데, 이것이 후에 화랑도의 중심 이념이 되었어요

신라, 화랑도 

화랑도는 진흥왕 때 만들어진 청소년 단체예요. 화랑도는 전체 지도자인 국선과 그 밑에 여러 무리를 이끄는 다수의 화랑, 화랑이 거느린 수천 명의 낭도로 이루어졌지요. 화랑과 낭도들은 유능한 스승들을 찾아가 공부하고, 노래와 춤, 무예 등을 배우고 익혔어요.

원광 법사가 전한 ‘세속오계’는 화랑들이 평생 지키고 실천해야 할 화랑도의 중심 이념이었어요. 나라를 위할 때에는 충성을 다하고, 부모님께는 효도를 다하며, 친구를 사귈 때에는 믿음을 주며, 싸움에 나가서는 후퇴함이 없이 용감하며, 분명한 이유 없이는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는 다섯 가지 가르침이었지요.
신라의 수도 오랫동안 경주 ??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어요. 신라 천 년 역사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지요. 경주는 낙동강 동쪽 일대에서 육지를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였어요. 경주는 한반도 전체는 물론 경상도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주변 지역과 쉽게 연결되는 길이 있어서 신라의 수도로 손색이 없었답니다.

종교 와 이념

신라는 종교로는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는 유교를 선택했어요. 유학이 발달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문화도 발전했지요.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한문학과 유학이 더욱 발달했어요.

신라의 무역

신라는 당나라, 일본, 발해,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과도 교역을 했어요.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울산을 국제 무역항으로 삼아 활발하게 무역을 했지요.

당나라의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 일대에는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생겼을 정도로 무역이 활발했지요. 아라비아 상인들도 신라를 찾았어요.

특히 신라의 황금은 다른 나라에서 인기가 많아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부를 정도였지요. 신라는 이처럼 다양한 나라들과 교역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답니다.
황금의 나라 신라??

《일본서기》와 아라비아 사람인 이븐 쿠르다지바의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신라가 황금이 많이 나오는 나라라고 적혀 있어요. 전 세계 10여 점 남짓한 금관 가운데 6점이 신라의 금관일 정도로, 황금으로 만든 신라의 유물이 많이 전해져요.

발전시킨 왕들

* 지증왕(제22대 왕, 재위 기간 500~514년) : 지증왕은 신라 발전의 디딤돌을 놓은 왕이었어요.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왕을 부르던 신라 특유의 호칭3)을 ‘왕’으로 바꾸었어요. 지증왕은 강해진 왕권으로 신라의 발전을 위한 정책을 펼쳤지요.

지증왕은 왕의 무덤에 강제로 사람을 함께 묻게 하는 순장 제도를 없애고, 소로 논밭을 갈아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실시했어요. 지증왕의 업적 가운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지금의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복속시킨 일이에요.

* 법흥왕(제23대 왕, 재위 기간 514~540년) : 모즉지왕은 불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널리 전파되도록 했어요. 그래서 모즉지왕은 불교를 일으킨 왕이란 뜻으로 ‘법흥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불교를 일으킨 것 외에도 법흥왕은 많은 업적을 이루었어요. 율령을 만들어 법 질서를 확립4)하고 금관가야까지 영토를 확장했지요. 이로써 신라는 김해 지역의 넓은 평야와 중요한 항구,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답니다.
동맹 관계 신라와 백제.

진흥왕 때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백제와 동맹 관계를 맺고 었다. 548년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는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진흥왕은 3,000명의 군사를 보내 백제군과 함께 고구려군을 물리쳤지요. 그러나 그 후 백제를 함께 공격하자는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인 진흥왕은 백제를 공격해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의 경기도 일대 지역까지 전부 빼앗았어요.
* 진흥왕(제24대 왕, 재위 기간 540~576년) :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많이 영토를 넓힌 왕이었어요. 진흥왕은 백제와 함께 강대국 고구려를 대규모로 공격했어요. 한강의 상류를 차지한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백제 땅이던 한강 하류의 경기도 일대 지역까지 차지했지요.

진흥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도 멸망시켜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어요. 또한 북쪽으로 함경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답니다. 진흥왕의 활약으로 신라는 삼국 통일을 꿈꾸는 큰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 문무왕(제30대 왕, 재위 기간 661~681년) : 문무왕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를 공격해 온 당나라를 물리쳐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루었어요.

당나라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지만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어요. 당나라는 거듭된 전투에 지치고, 신라에게 계속 패배하는 상황이 되자 군대를 철수했어요.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는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던 문무왕의 공이 컸어요.

삼국 통일로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로 출발해 하나의 민족 문화를 이루는 기반이 마련되었답니다.

문화의 꽃 불교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그 후 원효 대사와 자장율사 등 위대한 승려들이 불교를 발전시켰고, 사찰과 불탑도 많이 지어졌지요. 불교는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답니다.

* 황룡사 : 황룡사는 진흥왕부터 선덕 여왕까지 93년 동안 지어졌어요. 그런데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어요.
황룡사 옛터에서는 불상, 생활 자기, 장신구, 사리함, 청동으로 만든 무기 장식들이 출토되었어요.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82미터나 되었다고 해요.

* 불국사 : 불국사는 법흥왕 때인 528년에 지어진 사찰이에요. 불국사에는 부처의 나라를 만들고 싶은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지요. 경덕왕 때인 751년에는 더 많은 건물을 짓고 석가탑과 다보탑도 세웠어요. 당시 불국사는 80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어요.
지금은 불국사의 출입문인 자하문과 석조 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석가탑과 다보탑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지요.

기술  의 발달

신라는 과학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어요. 천문학, 석조 기술, 건축술, 제지술, 금은 세공 기술 등 다양한 기술이 발전했답니다.

* 성덕 대왕 신종 :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요. 크고 장중하면서도 맑고 고운 소리가 고르고 길게 울려 퍼진답니다. 종을 최대한 바닥 가까이에 매달고, 밑에 항아리를 묻거나 움푹하게 파 놓아 종 소리가 오래 머물거나 되울려 퍼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 :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에요. 한지로 만들어진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1,200년이 넘게 보존되어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어요.
한지는 무엇으로?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어요. 닥나무로 만든 섬유는 가느다랗고 형태가 뚜렷하기 때문에 질기고 오래 가는 특징이 있어요. 또한 촉감이 부드럽고 공기가 잘 통하며 보온성도 뛰어나지요.

신라 시대에 냉장고가? 
신라 시대에는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가 있었어요. 석빙고는 커다란 무덤 모양으로 생겼는데, 천장은 바람이 잘 통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들었지요. 입구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만들고 바닥은 물이 흘러 나갈 수 있도록 경사지게 했답니다

옛날 신라의 숨결을?

추천 체험 학습 코스 ①
대릉원 → 안압지 → 감은사 터와 문무 대왕릉
추천 체험 학습 코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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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등 23기의 고분이 있는 곳이에요.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고분 사이로 다니며 고분을 살펴볼 수 있어요. 특히 황남대총은 경주 고분 중에서 가장 큰 무덤이에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황금 그릇과 금동관 장식 등 5만 점이 넘어요. 그런데 황남대총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어요.

안압지

통일 신라 시대에 궁궐 안에 있던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연못이에요. 당시 임해전이라는 궁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임해전지라고도 부르지요.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 겨울에 연못을 파고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짐승들을 키우면서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 연못은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형태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답니다. 여기에서 나무로 만든 배, 기와류 등을 비롯하여 당시 궁중 생활을 보여 주는 많은 유물들이 나왔어요.

천마총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
천마총은 5~6세기에 만들어진 고분으로 지증왕이나 소지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천마도장니가 있어요. 날개가 달린 말이 그려진 나무판이지요. 이 고분을 천마도가 발견된 무덤이라고 해서 천마총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감은사 터와 문무 대왕릉

문무왕은 자신이 죽은 후에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왕릉을 바다에 세우라고 유언을 남겼어요. 그래서 문무 대왕릉은 바닷속에 자리하게 됐어요. 문무 대왕릉은 대왕암이라고도 부르는데,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중 왕릉이지요. 문무 대왕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감은사 터에는 2개의 감은사지 3층 석탑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어요.
경주 본문 이미지 2
문무 대왕릉의 모습이에요.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를 감상"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천마도장니예요. 장니는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용도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지요. 자작나무 껍데기에 하늘을 나는 천마가 그려져 있어요.

유적지에 비치된 스탬프를"
석굴암을 비롯해서 안압지, 양동 마을, 오릉, 포석정 등 경주의 주요 유적지 15군데에 스탬프가 준비되어 있어요. 내가 체험한 문화재를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스탬프를 찍어 보세요.

어린이 문화 학교에 참여.
교과서에 나오는 문화재를 답사하고 전통 놀이와 문화 체험도 함께하는 어린이 문화 학교가 운영되고 있어요. 신라의 지혜, 신라의 호국 정신, 양동 민속 마을 탐방 등 일 년 동안 매달 다른 주제로 답사를 떠난답니다.
추천 체험 학습 코스 
첨성대 → 포석정 터 → 불국사 → 석굴암
추천 체험 학습 코스 ②
추천 체험 학습 코스 

첨성대

현재 동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예요.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이지요. 기단부, 원통부, 정상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일 년 365일을 의미하는 총 360여 개의 돌로 만들어졌답니다. 모두 27단이고 맨 위에 긴 돌을 얹어 하늘을 살필 수 있게 했어요.

포석정 터

포석정은 왕이 행차를 나왔을 때 머물던 곳에 만들어졌어요. 포석정은 돌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했는데, 그 위에 술잔을 놓으면 술잔이 빙글빙글 돌면서 물길을 따라 흘렀다고 해요. 자연 현상과 당시의 기술이 조화를 이룬 곳이랍니다.

불국사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이에요. 불국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어요. 청운교와 백운교는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대웅전 앞뜰에는 동쪽에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이 세워져 있어요.

석굴암

석굴암은 토함산 기슭에 있는 신비로운 석굴이에요. 돌로 만든 인공 동굴 안에 인자한 미소를 띤 본존 불상이 동쪽 바다를 향해 앉아 있지요. 석굴암은 세계에서 유래 없는 뛰어난 석조 건축 기술을 보여 줘요.
경주 본문 이미지 3
석굴암에는 본존 불상 주변을 장식한 불상들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요.
신라 역사 과학의 원리.
신라 역사 과학관은 신라의 과학 기술을 보여 주는 첨성대, 석굴암 등의 모형을 전시하고, 이곳에 어떤 과학의 원리가 적용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곳이에요. 첨성대에서 어떻게 별을 관찰했는지, 석굴암은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어요. 이 외에도 앙부일구, 측우기, 별시계와 같이 과학적으로 우수한 우리 역사 속의 문화재들도 만날 수 있답니다.

달빛 신라 역사 기행.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달빛과 별빛 아래에서 신라 문화를 체험하는 달빛 신라 역사 기행 프로그램이 있어요. 매달 다른 주제에 따라 문화 유적을 답사한 후에 소원을 적은 등을 들고 첨성대를 돌며 탑돌이를 하고 국악 공연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추천 체험 학습 코스 
국립 경주 박물관 → 보문 관광 단지 → 신라 밀레니엄 파크
추천 체험 학습 코스 ③
추천 체험 학습 코스 

국립 경주 박물관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신라 천 년의 문화를 간직한 곳이에요. 이곳에서는 10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3,000여 점의 유물들을 공개하고 있어요. 고고관에는 경주와 인근 지역에서 수집한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미술관에서는 불상, 조각, 장신구 같은 유물들을 볼 수 있지요. 안압지관에서는 화려한 귀족들의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답니다. 야외 전시관에는 성덕 대왕 신종을 비롯한 각종 석조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보문 관광 단지

보문 관광 단지는 아시아 3대 유적으로 지정된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5)되어 있어요. 보문 관광 단지는 경주시를 둘러싼 명활산의 옛 성터를 포함하고 있어 ‘경주의 사랑방’으로도 불려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산책하는 사람들로 늘 붐빈답니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

신라 밀레니엄 파크는 신라를 주제로 한 복합 체험형 역사 테마파크예요. 1,500석 규모의 주 공연장과 8세기 4대 도시, 장보고 공연장, 석빙고, 비말지, 족욕장 같은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어요. 신라 유물을 주제로 꾸민 놀이 공간과 신라 건축물을 복원해서 만든 신라 마을, 화랑 무예 훈련을 재현하는 화랑 공연장이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역사를 체험하며 즐길 수 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유적지를 .
경주는 도로가 평평하고 한적한 곳이 많아 자전거를 타고 답사를 다녀도 좋아요. 보문 관광 단지의 벚꽃길, 대릉원 지구, 첨성대, 계림이 있는 월성 지구 등을 자전거로 돌아보세요.

‘계림’에서 신라의 전설을 .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숲이에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청솔모 같은 동물도 만날 수 있답니다.
체험 학습  
경주는 역사의 고장이라 유적들이 많아서 구경할 곳이 정말 많았다. 사진에서만 보던 문화재를 직접 보니 정말 신기하고 조상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인상 깊었던 점
첨성대 :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 시대의 천문 관측대이다. 첨성대는 27단과 맨 윗부분의 네모난 1단까지 합하면 28단이 된다. 28은 기본 별자리를 뜻하는 숫자이고, 아래 1단을 합치면 29단이 되는데, 29는 바로 음력 한 달의 날수와 같다. 또 창문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에 있는 12단은 일 년 열두 달과 24절기를 뜻한다. 첨성대를 쌓은 돌은 362개인데, 이것은 음력으로 일 년의 날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천문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새롭다.

불국사와 석굴암 : 불국사와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 문 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에서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인상적이었다. 석굴암에는 커다란 본존 불상이 미소를 띠고 앉아 있었다. 이 석굴암 본존 불상은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한다.

느낀 점
우리나라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천 년 동안이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앞으로도 옛 무덤이나 문화재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분황사

신라 시대 때 유명했던 사찰 중 하나예요. 자장 율사와 원효 대사가 거쳐 간 절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기도 해요. 이곳에는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분황사 석탑이 있고, 신라 시대의 우물, 비석 받침돌 등이 있어요.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

월성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에요.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반월성이라고도 하지요. 성의 동쪽, 서쪽,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어요.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석빙고가 있지요.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387-1

문화 체험장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전문 강사들과 함께 탁본 뜨기나 연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어요. 신라 시대의 왕족 복장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답니다. 종이로 금관을 만들고, 초콜릿으로 경주의 유적지를 만들어 보세요. 신라 문화 체험장에서는 어린이 문화 학교와 달빛 신라 역사 기행도 함께 운영해요.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99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도시입니다. 약 천 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로 크게 발전한 경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대한 보물 창고이지요.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알려진 남산을 중심으로 도시 여러 곳에 다양한 문화재가 흩어져 있습니다. 경주에 이토록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이유는 신라가 긴 세월 동안 도읍지를 한 차례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는 오랫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가 많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중국 시안, 일본 교토 등은 분명 경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하지만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유적지가 있는 곳은 경주가 유일합니다.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경주 전체에 흩어져 있어 5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경주의 토함산에는 독립된 세계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자 고대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 경주로 떠나 볼까요?

천년 고도, 경주

경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2년 동안 신라와 통일 신라의 도읍지였습니다. 삼한 시대 진한의 12국 중 사로국이 있던 곳이었고,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계림)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경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지요.
경주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 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성기 때는 경주에 주택이 약 18만 호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경주의 주택이 10만 호가 조금 넘는 것에 비교하면 얼마나 커다란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놀랍게도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고, 황금으로 장식된 집이 자그마치 35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장 넓은 면적에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은 불교문화의 보고로 알려진 남산 지구입니다.
그리고 왕조의 궁궐 터가 자리한 월성 지구,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고분군이 있는 대릉원 지구, 신라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가 자리한 황룡사 지구, 천년 고도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한 산성 지구가 있습니다.

신라의 흥망을 지켜본 남산

신라는 남산에서 시작해서 남산에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남산 서쪽 기슭 나지막한 언덕에는 과거에 우물이 있었던 나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정은 신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곳이랍니다. 신라가 생기기 전 경주 근처에는 6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사로국이란 나라가 있었어요.
어느 날 6개 마을의 촌장들이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백마를 발견하였지요. 이상하게 여겨 그곳으로 가 보니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알을 깨뜨리자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이 사내아이가 훗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으로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우물은 없고,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적힌 비석만 남아 있습니다.

나정 남쪽에는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이 있어요. 신라의 왕들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해요. 포석정에는 폭이 30cm쯤 되고 길이가 22m쯤 되는 물길이 있어요. 구불구불하게 구부러진 물길을 따라 술잔이 돌게 만들었지요.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지요.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고 해요.
그러나 이렇게 풍류를 즐기는 풍조는 신라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왕 견훤의 침략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천 년 동안 이어 온 신라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곳도 남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박혁거세가 태어난 경주 남산의 나정
박혁거세가 태어난 경주 남산의 나정
신라의 왕들이 유상곡수연을 즐겼던 포석정
신라의 왕들이 유상곡수연을 즐겼던 포석정

야외 박물관, 남산

경주 남산은 동서 4km, 남북 10km에 달하는 타원형 모양의 산으로, 커다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남산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남산을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여기며 많은 절과 불상, 불탑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만들어졌지요.

남산에는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이 너무 많아 기관마다 발표하는 자료가 다르지만, 경주시의 자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산에서 발견된 왕릉은 13기, 절터는 150여 곳입니다. 그리고 불상이 120여 점에 석탑은 96개, 석등도 22기나 됩니다. 그 밖에도 각종 유적지와 유물이 수없이 많습니다.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특한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매혹적인 유적지와 유물이 많아서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곳이지요.
남산 선각아미타육존불
남산 선각아미타육존불
경주 남산 동쪽에 위치한 염불사지 삼층 석탑
경주 남산 동쪽에 위치한 염불사지 삼층 석탑

빼어난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산

남산 동쪽 지역은 서쪽에 비해 유적지도 적고 분포된 유물도 적습니다. 그러나 유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 보면 서남산 지역에 있는 유물보다 세련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문화재가 더 많습니다.
동남산에 남아 있는 주요 유물은 석탑과 불상으로, 작품성과 문화재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보리사에 모셔진 미륵곡 석불좌상(석조여래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보리사라는 아담한 절의 왼쪽 언덕에서 세련된 자태로 토함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미륵곡석불좌상은 보존 상태가 무척 좋은 불상입니다. 이전의 신라 불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선이 돋보이지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으로 신라 불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남산에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있지만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은 칠불암 마애석불 하나뿐입니다. 칠불암 암자 옆 커다란 2개의 바위에 모두 7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지요.
병풍바위라는 곳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은 1~2.7m 크기로 삼존불이라고 하고, 바로 옆 사각형 바위에는 동서남북으로 4기의 사방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칠불암 마애석불 중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삼존불의 여래상과 보살상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칠불암 위쪽에는 남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불상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토함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낭떠러지 위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조각이 세련되고 섬세한 것은 물론, 이른 아침과 안개가 많은 날이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불상입니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7개의 불상이 새겨진 칠불암 마애석불
7개의 불상이 새겨진 칠불암 마애석불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불교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서남산

남산 삼릉 계곡에 새로 복원한 삼릉계 석불좌상
남산 삼릉 계곡에 새로 복원한 삼릉계 석불좌상
남산 서쪽 지역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개성이 강한 유적지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주요 유적지는 계곡과 산 능선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남산에서는 우선 삼릉 계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삼릉 계곡의 입구 부분에는 세 명의 왕이 잠들어 있는 능과 초기 불교 미술을 잘 보여 주는 배리석불입상이 있어요.
이름도 특이한 배리석불입상은 가운데에 부처님이 있고 양쪽에 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세련미가 없고 둔탁한 모양새로 보아 신라 초기 불상으로 보고 있지요. 신라 초기 불교 미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삼릉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목과 손이 잘린 불상을 비롯하여 마애관음보살입상, 석불좌상, 선각육존불 등과 만나게 됩니다. 이 불상들과 눈인사를 마치고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6m로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큽니다. 자연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으로 통일 신라 후기 때 완성한 작품입니다. 선으로 새겨진 몸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고, 얼굴은 입체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느다란 눈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요. 지금도 불심 깊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애석가여래좌상에게 전하고 있답니다.

마애석가여래좌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하면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의 삼층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용장사곡 삼층 석탑입니다. 용장사곡 삼층 석탑은 옛 신라 장인의 멋과 지혜가 동시에 느껴지는 탑입니다.
낭떠러지 끝에 세워진 탑인데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건너편 산과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아주 특이한 모양의 용장사곡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3층짜리 대좌 위에 세워진 1m 길이의 불상은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간직하고 있지요.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삼릉 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용장사곡 삼층 석탑
용장사곡 삼층 석탑
용장사곡 석불좌상
용장사곡 석불좌상

신라의 정치 중심지, 

월성 지구는 천년 고도의 정치 중심지로, 초기 유적지부터 화려한 유적지까지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성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는 신라 왕조를 이끌었던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숲인 계림이지요. 이 숲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 궤짝의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알지라는 건국 신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신라와 통일 신라 왕조는 초대왕인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것은 김씨입니다. 그리고 계림의 서쪽에는 내물왕의 능을 중심으로 3기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계림 남쪽에는 신라 최고의 문화 공간이었던 궁궐 유적지 월성이 있습니다. 이곳 터의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월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월성은 남천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동쪽, 서쪽, 북쪽으로 인공 호수인 해자를 만들어 궁궐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답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곳, 월성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곳, 월성
옛 신라의 궁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임해전지(임해전이 있던 터)가 있습니다. 임해전은 삼국을 통일한 30대 왕인 문무왕이 건설한 궁궐로,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왕자가 머물렀던 동궁이었어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한편으로 당나라에 통일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설한 궁궐이었지요.
임해전은 바다에 접해 있는 건물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육지 한가운데 바다라니 조금 생뚱맞지요?
신라 사람들이 임해전에 접해 있던 큰 연못을 바다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다를 좋아했던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기도 했어요. 훗날 문무왕이 죽자 유언을 받들어 경주에서 가까운 동해 감포 앞바다에 수장했지요.

임해전은 동궁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희귀한 새와 짐승을 기르는 정원으로 사용되었고,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장소이기도 했어요. 임해전지는 조선에 이르러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임해전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면서 조선 시대에는 임해전지의 연못을 ‘안압지’라고 불렀답니다.
임해전지는 발굴 과정에서 통일 신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연못 속에서 발굴된 유물은 실제로 왕족과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문대, 첨성대가의문이 많은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 세운 건축물입니다. 첨성대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용도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습니다.

첨성대는 월성과 계림 근처 사방이 확 트인 평탄한 곳에 우뚝 서 있습니다. 높이는 9.17m로 우물이나 호리병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이에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지그재그로 쌓아 지었지요. 건물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 자 모양으로 긴 화강암이 2단으로 쌓여 있어요.

창문 아래쪽은 흙이 채워져 있어요. 지진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흙을 쌓은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어요. 창문을 통해 별을 관측한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관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첨성대 안쪽에는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해요.

첨성대가 별을 관측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건물의 과학적인 구조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요. 첨성대를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가 362개인데(세는 방법에 따라 365개라는 주장도 있어요) 이 숫자는 1년을 음력으로 사용했던 당시 날짜와 같습니다.
또 첨성대의 몸통 부분을 27단으로 쌓았는데, 창문의 3단을 빼고 창문 아래쪽까지가 12단, 창문 위쪽이 12단으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첨성대를 기념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학자는 제례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와 기록에 의해, 별자리를 관측하여 계절과 절기를 알아보고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던 천문 관측대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천문 관측대, 첨성대
신라의 천문 관측대, 첨성대
첨성대 내부 모형도
첨성대 내부 모형도

대릉원 왕가의 휴식처,  

경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평지에 커다란 동산 모양의 무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경주의 왕릉은 마치 작은 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서 예로부터 ‘조산’이라고 불렸지요.
경주에는 옛 신라와 통일 신라를 다스렸던 왕과 왕비, 귀족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250여 기나 있어요. 그중 거대한 봉분을 갖춘 왕릉은 23기이고, 나머지 무덤은 일반 묘처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신라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을 대릉원 지구라고 해요.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오릉 등이 대릉원 지구에 속하지요.

가장 흥미로운 왕릉으로는 천마총을 꼽을 수 있어요. 공식 명칭은 155호 고분이지만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가 왕릉에서 발견된 이후 천마총이라 불리고 있어요. 천마총에는 많은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천마도장니를 비롯하여 장신구와 무기, 유리병, 그릇 등 총 1만 1500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현장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놀라게 만들 정도였지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대 미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요.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병과 생활용품을 통해 신라가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과도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유물을 감상하려면 천마총 전시장도 좋지만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진품을 보는 것이 좋답니다.

천마총 옆에는 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는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황남대총에서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황남리 고분군
황남리 고분군
천마총 입구
천마총 입구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
천마총 발굴 현장을 재현한 모습
천마총 발굴 현장을 재현한 모습

신라를 상징하는 황룡사 지구 (불교 국가)

황룡사 구층 목탑 상상도
황룡사 구층 목탑 상상도
경주는 도시 전체가 불교 유적지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로 황룡사 지구를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은 건물 터와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만 있지만 황룡사는 신라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절이었어요.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은 553년에 황룡사 터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서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뒤 궁궐 공사를 멈추고 절을 짓기 시작했지요. 17년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황룡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모습의 절이었다고 해요.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황룡사 구층 목탑이에요. 황룡사 구층 목탑은 선덕 여왕이 세웠다고 해요. 바닥 면적이 약 500m2, 한쪽 면의 길이가 22.2m에 높이가 75m나 되는 거대한 목탑이었지요. 이 거대한 목탑을 짓는 데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크게 기여했어요.
당시 신라는 건축은 물론이고 생활 수준이 백제와 고구려에 못 미치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에 부탁하여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와야 했지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모두 불교를 믿고 있어서 절이나 탑의 건축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은 1238년 몽골에 의해 잿더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찬란했던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드넓은 터와 받침석만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발굴된 4만여 점의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지요.
황룡사 우물 터
황룡사 우물 터
황룡사 터
황룡사 터
황룡사 법당 터
황룡사 법당 터
황룡사 옆에는 또 다른 절 분황사 터가 있어요. 분황사 역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지만, 모전 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답니다. 모전 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 만든 탑으로 선덕 여왕 때 세워졌어요. 바위를 쌓아 만든 바닥 위에 마치 건물처럼 생긴 독특한 3층 탑이 서 있지요. 처음 세워졌을 때는 지금과 모습이 달랐다고 해요.
몇 층짜리 탑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는 탑으로 볼 때 7~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분황사 탑은 동서남북으로 굴방이란 문이 달려 있어요.
문 입구에는 각각 2기의 인왕상 조각이 있고, 앞쪽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가 세워져 있어요. 분황사 탑에서는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과 가위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의 인왕상 조각
분황사 모전 석탑의 인왕상 조각
분황사 모전 석탑
분황사 모전 석탑

천년 고도를 지켜 준 산성 지구

초기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일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사방으로 국경을 마주했던 신라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경주에도 궁궐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월성과 경주로 진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습니다.

궁궐 주변에 흙과 돌로 쌓은 월성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산성 유적지로는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북서쪽의 부산성 등이 있지요.

경주에 있는 산성도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았어요. 짧게는 수백미터에서 길게는 10km가 넘는 산성들은 모두 방어를 목적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지요. 남아 있는 산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경주 동쪽에 쌓은 명활산성이에요.
명활산성은 산마루를 따라 쌓았는데 전체 둘레가 약 6km에 달합니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성벽의 높이가 지형에 따라 5~10m로 다르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토목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경주 역사 지구에는 조각, 탑, 사지, 궁궐지, 왕릉, 산성을 비롯해 신라 시대의 여러 뛰어난 불교 유적과 생활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유적이 많으며 이들 유적을 통해 신라 고유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신라의 1,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인의 생활 문화와 예술 감각을 잘 보여 주는 곳이다. 경주 역사 지구는 총 5개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불교 유적을 포함하고 있는 남산지구, 옛 왕궁 터였던 월성지구, 많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지구, 불교 사찰 유적지인 황룡사지구, 방어용 산성이 위치한 산성지구가 이에 해당한다.
왜구로부터 경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명활산성

포인트

 제도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아주 특이한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품 제도에 따라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지요. 골품 제도에 의하면 신분이 혈통에 따라 8등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었고 그 아래로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신분이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평민층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이 점차 사라졌지요.
골품 제도에 대해 기록된 《삼국사기》
골품 제도에 대해 기록된 《삼국사기》
최고 신분인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인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높은 신분인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 왕족인 경우에 그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답니다.
그리고 신라에 의해 멸망하거나 항복해 온 왕족에게도 진골 신분을 주었습니다. 6두품은 왕족이 아닌 사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초기와 중기까지는 성골 출신만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진골 출신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29대 무열왕 김춘추였지요. 이후 진골 출신도 많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의 골품 제도는 왕위 계승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철저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는 집의 규모와 재산의 정도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골품 제도는 옷과 장신구,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까지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였지요. 골품 제도는 국가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덕 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은 진평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선덕 여왕입니다. 선덕 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선덕 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탄생 시기와 가족사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는 맏딸로 기록되어 있고, 둘째 딸로 기록된 문서도 있습니다.

선덕 여왕은 왕이 된 초기에 백성의 궁핍한 삶을 보살피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불교를 적극적으로 들여와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지요.
선덕여왕은 동양 최대 규모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설인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선덕 여왕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노력한 정책입니다. 약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한 뛰어난 외교력도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외교와 군사력을 외국의 세력에 의존한 부분은 선덕 여왕의 잘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선덕 여왕은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최초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화백 회의는 골품 제도와 함께 신라의 독특한 제도로, 신라의 중앙 관료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토론하여 결정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주 근처에 살던 여섯 촌장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제도에서 시작되었지요. 물론 화백 회의에는 진골 이상의 지위를 가진 왕족들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왕족 회의인 셈이었지요.

화백 회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었습니다. 초기 상대등은 모두 왕족 출신인 성골이 맡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골 출신도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상대등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왕의 지휘와 감시 아래 놓여 있었지만, 왕이 세상을 떠나면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일부터 중요한 건축물을 세우는 일까지 나라의 중요한 일을 실질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신라의 상대등과 비슷한 일을 했던 관직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대대로라는 관직이 있어 왕과 함께 나랏일을 처리했지요. 백제에는 상좌평이란 관직이 있어 나랏일을 총괄했습니다. 상좌평은 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옛 신라의 궁궐이 있던 월성 근처에는 국립 경주 박물관이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신라와 통일 신라는 물론이고 이전의 다양한 문화와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라와 통일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지요.

국립 경주 박물관은 실내와 야외 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내 전시장은 고고관, 안압지관, 미술관, 특별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고관에는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경주 왕릉에서 발굴된 금관,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고관 서쪽에는 임해전지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따로 모아 놓은 안압지관이 있습니다. 안압지관에는 나무로 만든 배와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련되고 화려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황금으로 만든 못까지 볼 수 있지요.
안압지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신라의 왕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별 전시관은 기획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성덕 대왕 신종(에밀레종) 등 매혹적인 유물들이 박물관 야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남산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불상과 지금은 물속에 잠겨 버린 고선사 터에 남아 있던 고선사 터 삼층 석탑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국립 경주 박물관
국립 경주 박물관
성덕 대왕 신종
성덕 대왕 신종
경주 역사 지구의 5개 지구는 각기 다른 종류의 유산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있어 진정성이 높으며, 건축, 조각, 탑, 왕릉, 산성은 모두 그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지 또는 궁궐지의 경우에는 그 터만이 남아 있으며 건물의 원래 배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기존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본문

경주 역사 유적 지구에는 7세기~10세기에 절정을 이룬 한국 불교예술의 뛰어난 전형들이 조각, 부조, 탑파(stupa), 사찰 및 왕궁 유적 등의 형태로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는 약 1,000년 동안 신라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경주와 그 주변에 있는 기념물과 유산들은 신라의 문화적 업적을 웅변해 주고 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한국의 불교 건축 및 일반 건축 발달에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다수의 기념물과 유산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유적과 기념물이 있는 경주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살던 곳이었다. 신라의 씨족은 기원전 57년, 한반도 남동쪽을 지배했다. 이후에 한반도 내에서는 오랫동안 경쟁하는 왕국들 사이에 투쟁이 있었으며, 신라는 7세기에 중국의 당()과 손잡고 경쟁국을 물리치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통일신라는 10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왕조를 유지하였다. 신라의 지배층은 도시에 많은 공공건물, 궁궐, 사찰과 성채를 건설했다. 지배층의 무덤은 이 고대 도시의 인근에 남아 있다.

7세기에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고 신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여러 토착 신앙을 숭앙하였던 장소인 남산은 불교의 성산이 되어 신도들을 끌어 모았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과 장인들이 사찰, 사당, 수도처를 지었다.
신라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는 한 차례 내부 투쟁의 시기를 겪었다. 한반도는 조선에 의해 다시 통일되어 1910년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18세기에는 만주족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었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 긴 기간 동안 많은 주요 건축물이 쇠락하고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그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경주 역사 유적은 세 군의 주요 지구로 구분된다. 더욱이 세계유산에는 황룡사()와 산성이 포함된다. 남산지구는 경주시의 북쪽에 있고, 지정된 지역에 수많은 선사시대 유적과 사적들이 있다. 월성지구의 주요 기념물은 황성옛터, 경주김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의 계림(), 임해전지(殿)에 있는 안압지()와 첨성대()이다. 
고분 공원 지구는 세 그룹의 왕실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고분들은 돔 형태지만 몇몇은 반달 모양, 조롱박 모양이다. 고분에는 자갈로 덮인 이중 목관이 안치되어 있다. 풍부한 금제 부장품, 유리, 질 좋은 도자기들이 발굴되었으며, 초기 고분 중 한 군데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날개 달린 말을 그린 말다래 천마도()가 발굴되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경주 역사 지구는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명활산 지구 등 5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산 전역과 지역 안의 많은 문화재들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또한 매장 문화재가 풍부한 지역 특성상, 경주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토목, 건축 행위에는 문화재 영향 검토가 의무화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경주 역사 지구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 및 유지 관리,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된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경주시는 구체적인 보존 관리 및 정비 사업을 담당하며, 남산의 경우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유기적으로 협력해 관리한다.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경주 역사 지구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좋다. 유산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지정된 유산 주변의 토지를 꾸준히 매입해 관련 유산을 보다 잘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 유적 지구 사이의 연결성을 높여 왔다. 등재 당시 동해남부선 철로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권장되었으며, 철로는 2014년에 철거될 예정이다.

등재기준

기준 (ⅱ) : 경주 역사 지구에는 불교건축 및 생활 문화와 관련된 뛰어난 기념물과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 있다.

기준 (ⅲ) : 신라 왕실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르며, 남산을 비롯해 수도 경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신라 문화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

경주 역사 유적 지구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역도 넓고 보아야 할 문화재도 많아서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야 신라 문화의 진면목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정이 짧다면 먼저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순서를 정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동 경로를 정한 다음에는 각 지역에 관하여 미리 안내 책자를 살펴보고 둘러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추천하는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서 주요 유적지에 관한 정보를 얻고 유물을 관람한 뒤 걸어서 월성과 계림, 대릉원, 임해전지, 황룡사 터 등을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옛 시가지와 궁궐 유적지를 둘러본 뒤 시간이 허락되면 남산에 올라 불상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남산을 답사할 때는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아침 일찍 동쪽 칠불암 방향으로 산에 올라 용장사 터를 거쳐 삼릉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반나절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면 서남산의 삼릉 계곡 지역을 둘러볼 것을 추천합니다.

• 국립 경주 박물관 ➞ 월성, 석빙고 ➞ 계림 ➞ 첨성대 ➞ 황남리 고분군(천마총) ➞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 ➞ 임해전지 ➞ 황룡사 터와 분황사 터 ➞ 나정, 포석정 ➞ 남산
경주 역사 유적 지구 본문 이미지 1

경주 역사 유적 지도

경주 역사 유적 지구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에 흩어져 있는 신라시대의 유적 지구()로서, 한국 불교 예술의 전신을 이루는 지역으로 그것과 관련된 조각, 부조, 탑이 산재해 있다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경주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라시대의 역사 유적들은 그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뉘는데,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이들 5개 지구를 통틀어 일컫는다.

첫째, 신라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이다. 남산동 남산 일원의 불교유적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구로, 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187),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200), 불곡 석불좌상(보물 198),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201),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186),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1188), 남산리 삼층석탑(보물 124) 등 37개의 보물과 시·도 유형문화재, 사적이 있다.

둘째, 신라 1000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이다. 계림(사적 19), 경주 월성(사적 16), 임해전지(殿:사적 18), 첨성대(국보 31), 내물왕릉(사적 188) 등이 있다.

셋째, 신라 왕·왕비·귀족들의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릉원()지구이다. 미추왕릉(사적 175), 황남리 고분군(사적 40), 노동리 고분군(사적 38), 노서리 고분군(사적 39), 오릉(사적 172), 동부사적지대(사적 161), 재매정(:사적 246) 등이 있다.

넷째,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로, 황룡사지(사적 6), 분황사 석탑(국보 30)이 있다.

다섯째,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사적 47)이 여기에 속한다.

경주역사유적지구 전체를 통틀어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문화유산 명
등록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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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
경주 역사유적지구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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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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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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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 지도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 역사지구
경주 역사지구
경주 역사 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