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일 월요일

유교 , 儒敎.

유교 , Confucianism, 儒敎.
공자를 시조()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옛날 중국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도덕 사상. 인()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공교() ·공자교()라고도 한다. ()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이었으나 고국인 노(魯) 나라에서는魯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의 도()’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 《서()》의 2경을 정리하고 예() ·악()을 선정하였으며 《춘추()》를 저술하고 또한 《역()》을 좋아하여 그 해석 서라 할 수 있는 《십익()》을 저술하였다.
그의 사상의 진수()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이며 제()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의 예악()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의 덕을 내세워 인의()를 병창()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로서의 왕도론()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공자에 의해 창시되어 맹자순자, 한유, 주자왕양명 등으로 이어진 사상 체계로서, 현실 생활에서의 인·의·예·지·신() 등의 도덕적 덕목을 중시한다.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착하다는 입장은 유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특히 맹자는 인간의 공통적인 경향성은 선을 지향하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소체(), 정신적인 면을 대체()라 하고 소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별 차이가 없으나 대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독특함 내지 우수성이 있다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선을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시켜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은 이()로서 인의예지()의 사단 지성(四端之性)이며, 맹자가 말하는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부끄럽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에서는 이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게는 본능적 '식색()의 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성리학자들도

인간과 동물은 다 같이 기[(음양오행)]로서 신체를 이루지만, 인간의 기와 다른 동물의 기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정욕()에 의한 불선()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선악의 기로에 서게 되어 악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욕구로 지향하는 감성적인 마음을 인심()이라 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마음을 도심()이라 한다. 퇴계(退溪)는인심을

7정()으로 기()의 발()이라 하였고, 도심을 사단()으로 이()의 발이라 하였다.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고 천명에 귀의[(천인합일)]하기 위해 수양()이 요구된다. 특히 퇴계는 참되려고 노력하는 인지도()를 이()에 대한 경()에서, 율곡()은 기질의 변화에 의한 입지()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라고도 한다.

유교의 근본정신

유교의 인간학적 특징과 학문의 다면성
유교는 공자()를 조술()한다. 공자의 사상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유교 학파의 원조인 공자의 사상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공자는 “은대()의 예()는 하()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대()의 예는 은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 주()를 계승할 이가 있다면 비록 100세가 지나더라도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배경은 하은주() 시대이지만, 하()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은주(殷周) 시대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자는 은주 문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관념적 측면과 외면적·경험적 측면을 주체적 자각을 통해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중국 은대의 종교문화는 은 부족(殷部族)의 상고 신앙을 중심으로 조상신 및 귀신 숭배 사상이 성행하였다. 상제()는 초월적·절대적 존재로서 인간과 만물을 주재하고 천지자연과 길흉화복을 점지해 인간으로 하여금 이를 좇아서 모든 시책을 결단하게 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갑골 복사(甲骨卜辭)에 보이듯이 인간은 상제에 대해 수직적 절대복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중요한 일은 점복()에 의해 결정되었다.
주대()에서도 초인간적 주재자를 숭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사상()의 등장과 함께 인간을 중심으로 지상의 사회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절대적 주재자가 ‘상제’에서 ‘천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관념적·무형적 존재의 실체와 권위에 대한 회의가 나타났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했던 공자는 초월적 주재자에 대한 교설()이나 의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천()’ 또는 ‘천명()’에 대해 강한 신념과 외경심을 표시하였다.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그 뜻을 행하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인간은 천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천명사상()이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가 되었다.
공자는 은대의 상고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문화와 주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예제 문화(禮制文化)에 근거해 형이상학적 요소와 사회 역사적 요소를 통합하였다. 공자는 인간성의 주체적 각성을 통해 천사상과 천명사상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공자의 인간관의 핵심은 ‘인사상()’이다. ‘인’은 인간의 본질이며 삶 그 자체라고 보았다. 공자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용어인 ‘성()’이나 ‘이()’라는 용어보다는 ‘도()’·‘직()’·‘덕()’·‘충()’·‘신()’·‘의()’ 등의 말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낱말들은 인간의 소이()와 당위()에 관련된 덕목으로 본질적으로는 ‘인()’에 귀속된다고 보았다. 인은 인간의 성취할 바람직한 가능성이며, 어느 일면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유연성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종교성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에서 볼 수 있다. 은주시대에 걸쳐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와 ‘천’은 『시경』·『서경』을 비롯한 오경 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절대신에 대한 숭경()의 자취를 담고 있다. 상제는 인간을 감찰하고 화복을 내려주는 무한한 권위를 지닌 절대 타자()로서 인식되었다.
상고에는 ‘상제’와 ‘천’에 대한 신앙이 비슷했지만, 주대로 내려오면서 천의 의미가 변화하였다. ‘천()’이라는 글자 속에 이미 ‘대()’라는 사람의 뜻이 내포되어 있듯이 초월적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함으로써 인간과의 관련성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일컫기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중시해 덕()의 개념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제’나 ‘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였다. 공자는 ‘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신성성과 구극성을 인간에게 내재화했다.
‘천‘은 외경적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성숙()과 주체적 각성()에 의해서 ‘천’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천인 관계(天人關係)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파악하였다. 공자는 초월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상제’에 대한 관념은 ‘천’ 속에 수렴되고, 그것은 다시 인격 속에 내재되어 인간의 실질적 태도와 삶 자체가 중요시되었다. ‘하늘’의 문제를 인간의 삶의 행태 속에 수렴시킴으로써 인간 행위를 떠난 상념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 행사(祈福行事)이지만, 유교의 제의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교의 제의는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구복()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유교의 제의는 주술적 요구를 배격하고 세속 세계를 도덕 화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습속, 오사()나 절사()와 같은 국가행사나 민간신앙과 습합()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제의는 건실한 윤리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외형적·절차적 관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고무 진신(鼓舞盡神)’하고 ‘신이 명지(神而明之)’하는 신명성()을 다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적 체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 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인간다움, 즉 도와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공자는 인생에서 인격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성취함으로써만 인생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자는 “믿음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참되게 하며()”,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라고 말하였다. 누구나 스스로의 본분을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자식을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친자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식은 부모의 몸에서 직접 발생한 관계이므로 부모()-자식()은 무조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본질적 특성은 ‘사랑’과 ’ 존경‘이다.
인간관계는 일반 사물과 다르게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인격이 없으면 인간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과 존경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하면 이기주의적 상업 정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부모가 죽어서도 제사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정신적 방향이 정립된다. 조선()에 대한 제사는 자신이 생겨난 근원을 반성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는 데 있다.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낀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세에 살아 있는 이들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기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라고 했고, “내가 직접 제사하지 않으면 제사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吾不與祭如不祭).”라고 하였다. 효는 존경의 마음이 조상뿐만 아니라 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교의 중요한 종교적 덕목이다.
유교의 현실관
공자는 “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한다(修己而安百姓).”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는 자기도야()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한다()는 수기치인()의 도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도는 수도적() 측면과 행도적() 측면을 병행하기 때문에, 개인의 수양은 사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유교의 도는 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은자()의 출세간과 세상에 영합해 사리()를 도모하는 속물주의를 거부한다. 유교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성을 수양하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유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밝은 덕을 세상에 밝히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현실 지향적 성격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데 특징이 있다. 인간에 내재된 참된 가치를 현실 속에서 보존·함양함으로써 현실에서 현실을 개혁하는 적극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에 대해 『중용』에서는 “높고 밝은 진리를 극진히 하면서 일상 일용을 말미암는다(極高明而道中庸).”라고 했고, 풍우란()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남()”이라고 하였다.
전 시대의 문화 전통을 집대성했던 공자는 요()·순()·우()·탕()·문()·무()·주공() 등의 인물들을 고성 왕(古聖王)으로 칭송하였다. 나중에 도학파()는 이 인물들을 도통으로 숭상하였다.
공자는 주의 문화가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을 개탄하였다. 나중에 공자가 과거를 숭상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유교에서 “요순을 근본으로 삼고 문무를 본받는다( 憲章文武).”라고 하는 정신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부정의 표시이며, 현실을 개변시켜 이상적 목표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하대는 ‘충()’을, 은대는 ‘질()’을, 주대는 ‘문()’을 숭상했는데, 공자는 내용과 현실이 균제 한 문질빈빈(文質彬彬) 한 상태를 가장 바람직하게 보았다.
이러한 개혁과 발전의 논리에 근거하여 공자는 시대에 따라 없앨 것과 새로 보충할 것을 올바로 처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신을 ‘시중 지도(時中之道)’라고 부른다.
유교의 교화 방법
유교에도 중심 경전이 있지만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교 조화된 신앙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후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로서 대성전(殿)과 같은 사우()를 태학()과 향교에 설치하거나,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터전으로서 서원을 세웠지만, 집단적으로 예배하기 위한 종교적 조직체로 볼 수 없다.
선비들은 국·공립기관인 성균관·향교와 사립 기관인 서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제나 승려와 같은 일정한 종교적 신분이 아닌. 혼인도 하고 가정도 돌보는 일반인으로서 생활을 해나갔다. 오히려 인간의 범상한 생활 자체를 중시하고 고양시키면서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인간에게 있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존중했기 때문에 금욕주의적 멸정론()을 부정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삶의 현장에 알맞게 조절()해 삶을 가꾸고자 하였다. 이상 세계는 현실 세계를 떠날 수 없다고 봄으로써 일상과 이상, 감성과 이성 등의 이원적() 분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교는 성()·속()은 인간의 삶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뿌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성속이라는 개념 이전의 성속이 하나로 수렴한 상태, 즉 중화를 이룬 상태를 소중하게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개인은 부여받은 순수 정신(理性, )을 확립하고 감정을 순화해 각성된 인격 주체를 이루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고 예를 지킴()’, ‘생각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 ‘몸을 닦음()’과 같은 수양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가정의 질서와 행복을 성취하는 일이다. 유교에서 가정은 성과 속이 만나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가정의 장로()는 사제 격이며, 어린이()는 교인인 셈이다. 이는 대소 가족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민생을 보양()하고 교화를 펴기 위한 기반으로서 인도주의 국가의 건설이다. 국가는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의해 구성한 조직체이다. ‘군()·사()·목()’을 통해 기강과 질서를 세우며, 인륜을 가르치며, 의식주를 제공한다.
요·순·우·탕·문·무·주공 등이 통치하던 유교의 이상 국가에서는 교화와 통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하면, ‘나라에 도가 없는 상태()’를 맞게 된다.
따라서 성인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교화의 기능을 현인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어떠한 경우이든 국가 경영에서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은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입덕()·입공()·입언()의 근본 취지가 여기에 있다.
공자는 스스로 ‘성인’의 명호()를 사양하였다. 종교를 창설한 교조는 아니었지만, 10 철(十哲)·72현(七十二賢)·3,000 제자라 불리는 많은 문도를 배출했으며, 2,500년의 유교 전통에서 ‘만세 종사(萬世宗師)’로서 숭앙을 받고 있다.
공자는 주대의 지식인 계층인 사인 출신(士人出身)이었다. 사인은 지배 귀족으로서의 통치 계층도 아니요, 생산자로서의 서인()도 아닌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를 행하고자 ‘천하를 돌았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와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부귀 빈천을 가리지 않고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유교는 공자를 종사()로 하여 조정이나 향리에서 정사를 도모하고 생활 관습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학파()의 정치 참여와 사림파()의 교육 정신도 공자의 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윤리사상
공자는 인()을 비롯해 덕()·예()·의()·지()·신()·용()·충()·서()·효()·제()·경() 등 많은 윤리적 덕목을 말하였다. 공자는 그의 언행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구체적 사례에 따라 말하였을 뿐 실지의 삶을 떠난 추상적 관념의 체계를 서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 설한 가르침()은 맹자에 의해 더욱 자세하게 밝혀졌다().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의 총체적 표현이요, 전인성()을 뜻한다. 인을 추구하는 군자는 인의 극치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인 개념은 인자()라든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지·용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공자는 “지자()는 의혹하지 않고() 인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不懼).”라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안연()에게는 ‘극기복례()’라 했고, 자장()에게는 ‘공()·관()·신()·민()·혜()’라 했으며, 중궁()에게는 “문밖에 나설 때는 큰 손님맞이하듯,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제사 받들 듯할 것이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대답하였다. 유교는 효제와 충서를 중요시한다. 전자는 친애 즉 효도와 존경의 원리이고, 후자는 진실 즉 성실과 이해의 원리이다.
효는 만행의 근본으로 경애·자애·우애의 뿌리이다. 종적으로 어버이에 대한 경애로부터 멀리 조상에까지 보본 추원 하며, 횡적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애휼()을 확대해 타인의 부모와 자녀에까지 미루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유교에서도 보편적인 사랑으로서의 인류애를 말하지만, 방법적으로 자기의 가장 절실한 부모 형제와의 관계를 토대로 궁극적으로 사해 동포에까지 추급()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충서는 충실성과 이해심이다. 공자는 ‘충신을 주로 한다(主忠信)’고 하여 거짓 없는 성실과 믿음을 다할 것을 말했고, 남의 처지와 심경을 나의 것으로 헤아리는 ‘서’의 마음을 중시하였다. 증자()는 공자의 ‘모든 것에 통하는 하나의 도()’를 “충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대학』에 의하면, 유교 윤리가 제가·치국·평천하로 연결되어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정에서는 효·제·자가 바탕이 되며, 이것을 미루어 효는 임금을 섬기는() 도, 제는 어른을 섬기는() 도, 그리고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使) 도가 된다고 보았다.
가정의 윤리는 곧 사회 국가의 윤리로 연결되는 바탕이다. 그 기본 원리를 ‘서’라 하여 자기의 진실한 소망에 비추어 타인에게 한결같이 베풀기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곧 ‘혈구 지도(絜矩之道: 자로 헤아리는 방식)’이다.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남도 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바는 남도 싫어할 것이니, 자기의 본심을 헤아려 남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요순을 좇고, 걸주()를 좇지 않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민중을 얻을 수 있으며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논리이다. 지도자 자신이 이러한 가치 정향(價値定向)의 의식적 기반이 얼마나 튼튼히 되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중용』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 두고 있으며, 인성은 천명에서 유래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지()와 행()에 과불급이 없는 이상적 상태를 중용이라고 하였다. 상황에 적절한 도를 추구하는 중용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성()’의 덕목이 요구된다. ‘성’은 존재의 원리이며 존재의 방식으로 자기완성이자 타인 완성이다.
성은 내외 양면의 통합 원리이며, 인간의 주체적 참여에 의해 객관적 상황을 알맞게 처리함을 말한다. 이러한 내외 합일의 원리는 인간관계를 통해 달성된다. 『중용』에는 ‘삼달 덕(三達德)’과 ‘오달도()’라 하여, ‘군신()·부자()·부부()·형제()·붕우()’ 등을 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내면적 실천덕목으로서 지·인·용을 일컫는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공자의 윤리사상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맹자에 이르러 보다 이론화되었다. 맹자의 사덕(:)·사단(···)은 윤리설의 기반이 되어 후세의 성리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정치사상'
유교에서는 사람에 토대를 두고 정치제도를 완비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인간다운 생을 누리도록 하며 이를 수호함을 말한다. 그래서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의 안부를 먼저 묻고 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람에 근거한 사람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공자는 ‘안인()’과 ‘안 백성(安百姓)’을 말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재 배출에 힘썼다.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성취함이 지대한 임무였고, 이를 저해하는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인의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정치사상의 취지이다.
유교에서는 위정자들이 바람직한 자질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였다. 위정자들이 본래의 사명을 망각·일탈하지 않도록 뚜렷한 목적의식을 확인시키고 본래의 사명을 일깨워야 한다. 공자는 살상과 투도()가 없는 정치를 추구했고, 맹자 또한 백성의 안업()과 인륜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덕치와 왕도로써 인도주의 국가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유교의 정치사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인격을 존중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주체적 가치가 존중되지 못하던 당시에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는 매우 계몽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어 뭇별이 그것을 향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감화로써 다스리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다.
공자는 “명령으로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망을 피하려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지만 양심과 인격()으로 이끌고 자율적 정신()으로써 질서 있게 하면 백성들이 잘못을 부끄러워해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타율적 명령과 형벌에 의한 강제가 아닌, 양심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한 인도주의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맹자가 살던 당시에는 부국강병과 패권 국가만을 추구하였다. 이에 맹자는 세력과 부만을 추구하기에 앞서 백성을 근본으로 인의()의 정치를 실현할 것을 여러 왕들에게 권유하였다. 맹자가 말했던 민본주의와 인의에 의한 왕도정치는 유교 정치원리의 근본정신이다. 나아가 유교는 이권다툼만을 하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겸양과 애휼 보민(愛恤保民)의 정치 원리를 제시하였다.
국가가 잘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군사적 요소보다는 백성들의 신뢰가 가장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인의’에 입각해 신뢰를 강화하고 통치자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인간 존중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의 양대 지주로서 예와 악을 꼽을 수 있다. 예는─문물제도 일반을 일컫기도 하지만─ 이성적 질서의 측면이고, 악은 정서적 자유의 측면이다.
예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경건한 엄숙성을 강조하고, 악은 정서적이기 때문에 화열()을 중시한다. 예는 자기반성적이고 악은 감정을 발산한다. 구심적인 예와 원심적인 악의 양면을 기초로 생활 방식을 운영하면 자유와 질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개체와 집단의 조화를 추구한다. 공자는 “군자는 널리 소통하되 편당 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 하되 널리 소통하지 않는다( 小人比而不周).”라고 하였다. 사사로운 편당 성(偏黨性)을 버리고 보편적으로 널리 소통함을 뜻한다. 전체적인 조화는 개체의 특수성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군자는 화합하되 일률적이지 않고, 소인은 똑같이 하되 조화롭지 못하다( 小人同而不和).”라고 하였다.
유교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개인의 존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집단에 예속시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도 아니며, 동시에 개인을 위주로 사회·국가를 무시하는 개인적 방임주의도 아니다. ‘나라에 도가 있다면()’ 즉 질서와 자유가 있다면, ‘가까이 있는 이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들이 오고자 할 것( )’이다. 훌륭한 국가는 훌륭한 개인들을 보호하는 고향이어야 한다. 개인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가를 소중히 여기고, 국가를 수호하고자 의인·열사가 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도 이와 동일한 원리의 적용이 요망된다.
유교는 정치를 명실상부하게 운영하기 위해 정명 사상(正名思想)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 )”이라고 했듯이 정명이란 명분과 사실이 일치함을 말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 다우며, 부모()는 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것이 뒤바뀌면 기강이 무너지고, 기강이 무너지면 백성이 살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춘추』는 노나라 242년간(서기전 722∼481)의 정치사를 시비()한 비판서로 유교의 정명 사상에 기초해 여러 사례들을 해석하였다.

한국 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상고시대와 유교
유교는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여러 나라의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 인접해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군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다.
한국 상고시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해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분야는 한중 양국의 현존하는 여러 문헌과 금석학·갑골학·고고인류학·민속학 등의 방증자료를 통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흔히 한국 사상을 말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 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대학()’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 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 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 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 숭배 등 각종 ‘음사()’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 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같은 조에 기자()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고, 이어서 위만조선·마한·부여 등 여러 나라를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후조선·기자조선을 일컫고, 다시 위만의 기사를 기록한 뒤 삼국이 성립하기까지 열국의 분열상을 적어놓고 있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을 상고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하늘과 조상을 모시는 숭천 경조(崇天敬祖)의 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각기 지역적 특색이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건의로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왔다. 당태종이 도사 서달() 등 8인을 보내오자 이들을 유불()보다 높이 대접하였다. 이들은 중국식 도교를 전파하고 고구려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고래의 유풍을 변화시키고 파괴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혹은 영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석’에 대해 “민간에서는 ‘도제 암(都帝嵓)’ 또는 ‘조천석()’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 성제()께서 이 돌을 타고 상제를 조현()했기 때문이다.”라고 주()를 달았다.
먼 옛날 상제가 하늘과 교통 하는 자리로서 신성한 바위를 택해 ‘영석’·‘조천석’ 또는 ‘도제 암’이라 하였으며, 훗날 영석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의 도사들은 왜 ‘영석’을 파괴했으며, 또한 옛 성제란 어느 시대의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 내용을 이색()의 시 「서경(西)」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 “성(城) 머리 노수는 햇빛을 가리는데/산정() 높은 누각은 멀리 바람을 이끄누나/듣건대 하늘 조회 드림에 일찍이 바위 있었다 하니/단군의 영상()하심이 군웅의 머리 되시도다(  檀君英爽冠群雄).”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삼국유사』의 옛 성제와 「서경」의 ‘단군’을 일치시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 조에 보면, 동 11년 단군사()를 세웠는데 여기에 동명사()를 합사 했다고 하면서 단군을 서편, 동명을 동편으로 모셔 모두 남면()하도록 하고 봄과 가을마다 제향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 은탄(白銀灘)에 조수에 따라 바위가 드러났다 잠겼다 하는데 이름을 ‘조천석’이라 하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명이 기린을 타고 굴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 천상에 주사()한다고 하였다. 이승휴()는 ‘천상을 왕래해 천정()을 참예(參詣) 하니, 조천석 상의 기린 자취가 그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외래의 도사들이 파괴하려 했던 고유한 전통의 상징물인 ‘영석’ 또는 ‘조천석’의 유서가 매우 오래되고, 아래로는 동명왕으로부터 멀리 상고의 단군에 이르기까지 추원()해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신앙과 습속이 원래로부터 일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래의 제천 행사와 공동체 의식도 이와 연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일실 되어 이름만 전하는 『해동 고기(海東古記)』·『삼한 고기(三韓古記)』·『단군기(檀君記)』·『신지 비사(神誌秘詞)』을 비롯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이란 본디 선인 왕검의 집이었다( 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고려의 백문보()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600년이 되었다.”라고 했으며, 권근()은 명 태조에게 단군의 “역년()이 천년이 넘었다.”라고 하였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서거정()의 『동국통감』, 안정복()의 『동사강목』 그리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의 중요한 사서 문전을 보면, 우리의 선인들은 적어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때 단군조선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고조 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해 인신()이 된 웅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함이 묘 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에 보면 그 첫머리에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어 풍운을 헤쳤을까, 하느님의 손이시니 이름은 단군이라 하시니라( 帝釋之孫名檀君).”라고 하였다. 그의 웅거()한 영역을 표시해 『본기』의 내용으로 주를 붙여 “조선 지역을 거(據) 하사 왕이 되셨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 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夫餘)·예(濊)·맥(貊)이 모두 단군의 수(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이색의 시에 ‘단군 영상관 군웅(檀君英爽冠群雄)’이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동국사략()』에서도 본래 동방에는 ‘구이()’가 있었을 뿐 군장()이 없었으나, 신인()이 하강함에 국인()이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열어 구이를 통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간 것이 단군조선이었다고 추측된다. 사서()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문헌에 의거해 고조선의 사상적 인식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보고자 한다.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한국과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고, 고구려도 기자사()를 두어 숭배했다는 점에서 우리 선인들은 기자조선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禮義)·전 잠(田蠶)·직작(織作) 등과 팔 조교(八條敎)를 가르쳐서 의식() 등의 생활을 개선하고 인륜 도덕으로 교화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아 문호()를 닫는 일이 없었으며, 부인이 정신()하고 음벽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앞서 고찰한 대로 이미 단군조선의 개국 이전부터 동방에는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구족()이 있었는데, 단군이 임금이 되어 군재()하고 영솔()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절요』에 “동방에 견이·방이……등 구이가 있었으되 처음에는 군장이 없었다(…… 而初無君長).”라고 했으며, 『동사강목』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었다. 견이()·방이()·우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라고 일컬으니 모두 토착민이었다.”라고 하여 구이의 선주민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혹 변()을 쓰고 비단을 입었으며, 그릇으로 조도(俎豆)를 사용하였다. 하나라 임금 태강()이 실국()함에 비로소 반(叛)하였다.”라고 하였다.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 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의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 異於三方之外).”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왕검 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을 주제()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 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로서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 봐,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 경조 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 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삼국의 발전과 유교 고구려의 유교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이었다. 이미 고조선 시대 즉 위만 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의 자연사상도 혼입 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 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에는 일찍이 100권에 달하는 사서로 『유기()』를 편찬한 바 있고, 영양왕 때(600)에는 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고사()를 축소해 『신집()』 5권을 수찬 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유기』·『신집』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서 찬수 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 내용은 경()·사()·제자백가()·문장()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상류의 귀족층은 ‘대학’에서 교육했고, 민간의 일반 서민에게는 어디에나 공회당과 같은 학원을 세워서 경서와 무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빈천하고, 짐승이나 먹이는 집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대옥()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불렀으며, 미혼의 자제들이 주야로 이곳에서 글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교 경전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양하고 강용()한 상무 정신()을 수련함으로써 고구려는 강대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오경()·삼사()·『삼국지()』·『진춘추()』가 있었다().” 또한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한서』·『후한서』·『진춘추』·『옥편』·『자통()』·『자림()』이 있었으며, 『문선()』을 특히 소중히 여겼다.”라고 한다. 그 내용은 경전()·사학()·문자학·문장학이었는데, 경학이 으뜸이자 기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를 보면, 『시경』 관저장()과 내용·형식이 흡사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정치 이념과 후사()에게 주는 고명() 등은 『서경』의 요전()이나 『상서()』에 보이는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그밖에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류에 나오는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오경과 관계되는 요소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오경 이외에 삼전()·삼례()에 이르기까지 행위 규범·사회 제도·정부 조직·율령 반포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경전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예속과 유교 문화와의 상관성을 지적해볼 수 있다. 혼인을 할 때 고구려에서는 재물의 교환을 수치스럽게 여겨 재폐()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례에서도 부모와 부상()에 대해 빈소를 차리고 3년 상을 지낸 것은 유교의 『의례』와 상통한다.
고구려 이전부터 구상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시기적으로 앞서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를 보면 고구려의 예속이 유교 문화와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해갔음을 살필 수 있다.
백제의 유교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이 잡거()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 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천신 신앙·귀신 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 지례(郊祀之禮)와 종묘 제도의 방식으로 형태 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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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교 [儒敎]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유교 [儒敎]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 유교 [Confucianism, 儒敎] (두산백과)
  • 유교 [儒敎] - 조선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 (한국사 개념사전, 2010.)
내용과 또 다른 동영상.

김치.

김치, 沈菜. 

세계적인 음식"
무·배추·오이 등과 같은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고추·파·마늘·생강 등 여러 가지 양념을 버무려 담근 채소의 염장 발효식품. 우리 음식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발효() 식품을 든다. 
발효 식품이란 채소나 어패류를 농도가 묽은 소금에 절인 후 숙성()시킨 식품이다. 식품에 스민 소금은 삼투 작용()을 하여 채소의 수분을 빼앗는다. 미생물의 생육()을 막고 인체에 이로운 아미노산과 젖산을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겨울에는 채소가 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냉장고가 없어 저장도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를 ‘지(漬)’라고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 이상국 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東國李相國集 김치 담그기를 ‘염지(鹽漬)’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가 물에 담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는 유교가 도입되어 복고주의로 흘러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저(菹)’라는 명칭이 쓰였다. 즉 본래 지라고 부르던 것이 유교의 복고주의에 따라 고려말부터 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딤채’라는 말이 보이는데, 1518년(중종 13)의 『벽온방(辟瘟方)』에는辟瘟方 “무 딤채 국을 집안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말이 나오며, 1525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저를 ‘딤채조’라 하였다.
우리 겨레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독자적으로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沈漬)된다. 또 국물이 많은 동치미 같은 것에서는 채소가 국물 속에 침전되고 만다.
우리네 고유의 명칭인 침채가 생겨난 것이다. 박갑수(朴甲秀)는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는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다시 구개음화의 역현상이 일어나서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김치에 관한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2,600∼3,000년 전에 쓰인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시경』에는 “밭두둑에 외가 열었다. 외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는 구절이 있는데 이 ‘저’가 바로 김치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석명(釋名)』에도 저에 관한 설명이 있다. 『석명』에 의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가 짓무르는 것을 막아준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저는 채소를 젖산 발효시켜서 저장하도록 하는 젖산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때의 『주례(周禮)』에도 순무·순채·아욱·미나리·죽순 등 일곱 가지 저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므로, 이러한 한나라의 김치가 낙랑을 통하여 부족국가시대의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문헌상의 자료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식품에 관한 서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우리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문헌을 통하여 그 시대의 식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의 『쇼쇼원문서[正倉院文書]』나 『연희식(延喜食)』 같은 문헌에 의하면 소금·술지게미·장·초·느릅나무 껍질에 절인 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수 보리지란 김치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쌀가루와 소금에다 채소를 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쌀가루로 담그는 김치는 500년경의 중국 식품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나와 있다. 『제민요술』에는 이밖에도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고 있다.
일본은 기후가 온습하기 때문에 쌀가루를 쓰는 김치가 쉽게 산패하므로 쌀가루를 쌀겨로 바꾸게 되어 일본의 대표적인 김치인 단무지가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단무지의 원조는 수수 보리지라 하겠는데 다른 김치들과 달리 수수보리라는 고유명사를 붙인 것이 주목된다.
일본의 옛 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오진왕[應仁王] 때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건너와서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수수보리지는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져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백제에는 수수 보리지뿐만 아니라 『제민요술』의 여러 김치가 식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백제에서 뿐 아니라 삼국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려 중엽에 이규보가 지은 「가포육영」이라는 시 속에 순무를 재료로 한 김치가 우리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다. “무 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 되네.” 이로써 고려시대의 김치로는 무장아찌와 무 소금절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달충(李達衷)의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서는 여뀌에다 마름을 섞어서 소금절이를 하였다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초로도 김치를 담갔던 것 같다.
고려 때의 문헌에 의한 기록은 이것뿐이지만 일본의 『쇼쇼 원문서』나 『연희식』에는 채소에 조 피나무 열매·여뀌·양하 등의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보이고, 원나라 때의 식품서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채소에 마늘이나 생강 같은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우리네 김치에도 채소와 향신료를 섞은 것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엽에 들어와서 고추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 김치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이전의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천초·회향 등 향신료를 이용하여 담갔다.
1670년(현종 11)경의 『음식디미방』에는 동아를 절여서 담그는 소금절이 김치나 산갓을 작은 단지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붓고 뜨거운 구들에 놓아 익히는 김치가 보인다. 이것은 무염 침채(無鹽沈菜)처럼無鹽沈菜 채소 자체를 소금 없이 숙성시키는 것이다.
생치침채 법(生雉沈菜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김치는 식물성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아울러 이용하는 데 커다란 특색이 있는데, 1600년대 말엽에 비록 고추를 쓰지 않았어도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김치의 재료로서는 동아·오이 등의 외무리가 많고 무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음식디미방』에는 ‘생치잔지 히’·‘생치지히’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오이지를 재료로 하여 꿩고기와 함께 간장 기름에 볶은 것이다. 이로써 2차 재료로 쓰이는 소금절이 가공품도 역시 ‘지히(지)’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55년(효종 6)에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에 「사시찬 요초」라는 월령식 농서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침과 저(沈瓜菹)와沈瓜菹 침즙저(沈汁菹)가 나온다. 침즙저는 가지·장·밀기울을 섞어 뜨거운 마분(馬糞)에 묻어 20일이 지난 뒤 먹는 것으로 오늘날의 즙장이다. 즙장에 가지가 들어가니 이것은 장아찌의 일종이 되기도 하겠는데 이것을 저로 보았다.
1600년대 말엽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요록(要錄)』이라는 문헌에는 11종류의 김치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김치류에도 고추를 재료로 쓰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배추·동아·고사리·푸르대콩 등의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冬沈]가 설명되어 있다. 또 무염침재라 하여 무에 맑은 물을 넣고 4일쯤 두어서 거품이 일면 즙을 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넣어 만드는 것도 있다.
오이김치인 엄황과(淹黃瓜)에서는 향신료를 쓰고 있다. 즉 오이를 뜨거운 물에 데쳐내고 건조해 소금· 당· 천초· 회향· 식초를 넣어서 담갔다. 이로써 당시에 고추가 전래되었으나 아직 김치에 이용되지는 못하였고 향신료로 천초나 회향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15년(숙종 41)경의 『산림경제(山林經濟)』의 김치류를 보면, 고추가 들어온 지 1백 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그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鮓) 만들기鮓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석명』에서는 자가 저의 일종으로 소금과 쌀로써 물고기를 익혀서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생선 식해이다. 「고 사십이 집」에서는 쌀·누룩·소금·기름 등을 써서 채소를 발효시켜 먹는 것도 자라고 하였다. 이를 『임원십육지』에서는 자채(鮓菜)라鮓菜 하고 있다.
이 채소로 만드는 자는 백제의 수수 보리지와 같은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도 식해를 담글 때 무를 함께 섞는 일이 있다.
그러다가 50년이 지난 1766년(영조 42)에 나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김치에다 고추를 도입한 것이 보이고 있다. 침나복함저법(沈蘿葍醎菹法)을 보면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채·호박·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천초·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즙을 듬뿍 넣어서 담그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것이다.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은 오이의 3면에 칼자리를 넣고 속에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서 삭히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오이소박이이다. 그밖에 동치미· 배추김치· 용인 오이지· 겨울 가지김치· 전복김치· 굴김치 등 오늘날의 김치가 거의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김치는 중국에도 전해졌다. 1712년(숙종 38)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든 동치미의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1803년(순조 3)의 『계산 기정(薊山紀程)』에薊山紀程 의하면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라고 하였다. 『계산 기정』의 김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18세기에는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중국의 유명한 김치의 하나인 쓰촨포채(四川泡菜)는 포채항아리에 8% 정도의 소금물을 6할 정도 되게 넣은 다음 여기에 소금물의 0.1% 정도의 천초, 3%의 고추, 3%의 술을 넣고, 따로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20%의 소금물에 절였다가 꺼낸 것을 항아리에 담고 약 1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와 비슷하다.
쓰촨지방은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중 쓰촨 출신의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므로 우리의 동치미가 쓰촨에 전하여졌다는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조리·가공법은 1872년(고종 9)경의 『임원십육지』 속에 집대성되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김치의 종류를 엄장채(醃藏菜)·자채(酢菜)·제채(虀菜)·저채(菹菜,醃藏菜)·자채(酢菜)·제채(虀菜)·저채(菹菜, 沈菜)의 넷으로 크게 분류하였다.
엄장 채란 소금·술지게미·향신료 등에 채소를 섞어 넣어 겨울을 위하여 저장하는 것이고, 자체와 저 채는 같은 종류이지만 자는 소금과 쌀로써 발효시킨 것이고 저는 젓갈·장·생강·마늘·식초 등의 짜고 시고 매운 것과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저 채에 대한 설명에서는 “엄장채·자채·제채가 다 같이 저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종류의 저를 특히 저 채라고 한다. 이들을 구태여 구별한다면 저 채는 발효시킨 뒤 그대로 먹는 것이고 엄장채는 물에 씻어서 2차 가공이나 조리 재료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 채와 제채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는 잘게 썬 것이고, 저는 채소를 통째로 발효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채와 자체의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누룩이나 곡물을 쓰는지의 여부로 구별된 것 같다.
우리나라 김치류의 주종은 저채(침채)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존재가 되어 있고 나아가서는 저 채로 써 저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임원십육지』에는 또 젓갈을 섞어주는 김치인 해저 방(醢菹方),醢菹方 곧 섞박지가 등장한다. 이것은 소금에 절인 잎줄기가 달린 무에 오이·배추 등의 다른 채소, 청각채와 같은 해초, 고추·생강·천초·마늘·겨자 등의 향신료, 조기·젓갈·전복·소라·낙지 등의 해산물, 산미 완화제(酸味緩和劑)가酸味緩和劑 되는 전복껍데기 등을 함께 버무려 알맞은 소금 농도에서 젖산 발효시킨 것이다.
이로써 오늘날의 김치가 규모상으로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그 뒤는 과실·짐승 고기·잣 등 기호에 따라 보충하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고, 또 채소의 품질개량에 따른 재료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김치는 우리나라 전통 발효(醱酵) 식품으로醱酵 주로 가정에서 만들어 많은 국민들이 주요 부식(副食)으로 먹고 있다. 김치는 지역과 김치 재료의 종류와 특성 및 담그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200여 종 이상이 있다. 김치는 카로틴, 식이섬유(dietary fiber), 페놀성 화합물과 같은 여러 가지 생리활성 물질들이 함유되어 있어서 항산화, 항암, 고혈압 예방 등 여러 가지 기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소를 소금이나 식초에 절여 만든 음식을 침채(沈菜)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김치, 중국의 파오차이, 일본의 스케모노, 서양의 피클 등이 침채류(沈菜類)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치가 다른 나라 침채류와 다른 점은 김치는 두 번 발효(醱酵)시킨다는 점이며, 바로 이것이 김치의 우수성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기법이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김치류의 제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증보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대 및 현대의 김치 변화의 주된 요인은 김치 재료의 품종개량과 젓갈 및 조리법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우리 식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배추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1960년대까지도 서울 배추, 개성배추라고 하는 반결 구형의 배추를 사용하여 김치를 담그는 집이 많았었다.
반결구형 배추 중 서울 배추는 조직이 단단하고 수분이 적고 저장성이 좋아 김장 김치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직도 드물지만 김치를 담글 때 서울 배추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김치 재료의 하나인 젓갈도 전에는 각 지역에서 잡히는 생선을 이용하여 각 가정에서 젓갈을 많이 담가서 김치에 넣었으나 요즈음 대도시에서는 집에서 젓갈을 담그는 일이 매우 드물게 되었고 공장에서 김치용 액젓이 생산되어 많은 가정에서 이용하고 있다.
김치 조리법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25 전쟁과 도로시설과 교통수단의 발달과 매스컴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지역 사이를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아 각 지방의 고유한 김치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 지방에서 장기간 머물게 되면서 서로 다른 지방의 김치를 먹어보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어 다양한 조리법을 접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는 도로시설이 좋아지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게 되면서 물자의 유통이 빨라진 데다 TV 등 매스컴의 영향으로 각 지역의 독특한 김치는 지역성을 잃은 대신 조리법이 일반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00년에는 일본·미국·영국 등 외국에 7,900만 달러의 김치를 수출하였다. 또한 2001년 7월 5일에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김치를 ‘국제식품’으로 공인을 하여, 앞으로 해외로의 수출 전망이 밝아졌다.
우리나라의 김치는 지방에 따라, 그리고 각 가정에 따라 특유한 것이 있어서 실로 다양하다. 특히 지방에 따른 특색은 고춧가루의 사용량과 젓갈의 종류들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는 고춧가루를 적게 쓰는 백김치·보쌈김치·동치미 등이 유명하며, 호남지방은 매운 김치, 영남지방은 짠 김치가 특색이다.
젓갈로는 새우젓·조기젓·멸치젓 등이 쓰이는데, 중부·북부지방에서는 새우젓·조기젓을 쓰고 남부지방에서는 멸치젓·갈치젓을 많이 쓴다. 지역에 따른 김치의 종류 및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서울: 궁중음식으로 고춧잎 깍두기·오이소박이·장 김치 등이 독특하였으나 요즈음은 여러 지방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므로 특징을 잃어가고 있다.
② 경기도: 풍요하고 모양이 화려하다. 용인 오이지·순무 짠지·순무김치·꿩김치·고구마 줄기 김치·숙김치·보쌈김치·섞박지·비늘김치·백김치 등이 있다.
③ 강원도: 바위와 산이 많아 산물이 많지 않으므로 다음 해 봄까지 먹도록 저장해야 한다. 서거리깍두기·채 김치·동치미 등이 있다.
④ 충청도: 젓국을 쓰지 않고 소금만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박김치·파 짠지·열무물김치·가지김치·시금치 김치·새우젓 깍두기 등이 있다.
⑤ 전라도: 조기젓·밴댕이젓·병어 젓을 사용하고, 참깨와 찹쌀 풀을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갓쌈 김치·고들빼기김치·배추 포기김치·검들 김치·굴깍두기 등이 있다.
⑥ 경상도: 멸치젓을 사용하며, 기후 관계로 간이 세며 국물이 없고 양념이 비교적 적다. 전복김치·속새 김치·콩잎김치·우엉김치·부추김치 등이 있다.
⑦ 제주도: 전복김치·동지 김치·해물 김치·나박김치 등이 있다.
⑧ 황해도: 동치미·호박김치·갓김치·고수김치 등이 있다.
⑨ 함경도: 생선이 흔하여 김치에도 생태·대구 등 기름기 없는 것을 넣어서 시원한 맛을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콩나물김치·갓김치·함경도 대구 깍두기·채칼 김치·봄김치 등이 있다.
⑩ 평안도: 양념이 간단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며 육수를 사용해서 단맛을 낸다. 가지김치·영변 김장김치 등이 있다.
우리나라 김치의 가장 큰 특성은 김치에다 고추를 섞는 것이라고 하겠다. 고추는 비타민 C가 매우 많아서 사과의 50배, 밀감의 2배에 이른다. 또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캅사이신과 고추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E는 비타민 C의 산화를 막아주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긴 겨울 동안 부족되기 쉬운 비타민 C를 이 김치를 통하여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캅사이신은 젓갈의 지방이 산패하여 비린내가 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김치에 들어가는 고추와 마늘은 김치를 발효시키는 젖산균의 번식을 크게 도와준다고 한다. 그 밖에도 김치는 식물섬유로서의 구실도 크게 하고 있다.
이렇듯이 김치는 미각·촉각·시각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영양상으로도 식물성과 동물성을 아울러 가진 완전한 영양식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양념에서 밥반찬을 거쳐 하나의 부식량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849년(헌종 15)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김장과 장 담그기는 일 년의 2대 행사라고 하였다. 1816년(순조 16)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보이는 김장 모습은 다음과 같다. 무·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다. 앞 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鹹淡)을 맞게 하소. 고추·마늘·생강·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 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김치는 종류나 먹는 시기에 따라 독·중 두리·바탱이·항아리 등에 담는다. 김치항아리도 정성을 다하여 만든 것이라야 김치가 제 맛을 낼 수 있다. 우수·경칩이 지나 땅이 풀린 직후의 흙을 빚어서 이른 봄에 제일 처음 구운 독이라야 잡내가 나지 않고 단단하다는 것이다.
김치를 잘 관리하자면 얼지 않고 시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정도에서 4∼6주간 보관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농가월령가」에서 보듯이 김치항아리를 짚에 싸서 깊이 묻어 온도의 변화를 막는다.
김치의 산패를 막으려면 공기와의 접촉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김치항아리에 김치를 단단히 눌러서 넣고 위에는 우거지를 덮어 이것으로 공기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는다.
김치는 이런 한국의 기후적 특성을 고려하여 추운 겨울에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다.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고 해서 침채()라고 하였다. '침채'를 당시 발음으로는 '딤채'로 읽었고, 이것이 '김치'를 거쳐 '김치'가 되었다.

김치를 나타내는 한자로는 저()가 있다. 저()는 채소를 소금에 절여 차가운 곳에 두어 숙성시킨 것을 말한다. 양념하지 않고 그냥 절이기만 한 것은 지()라고 하였다. 오이 절임은 오이지라 하고, 무 절임은 단무지라고 한다. 김치의 사투리 중에 짠지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짠 지()', 즉 짜게 절인 음식이란 뜻이다. 무나 오이 등을 소금에 절인 뒤 간장을 붓고 양념을 해서 먹는 반찬은 장아찌라고 한다. 한자말인 장지()가 변한 말이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겨울이 오기 전에 집집마다 김장을 담근다. 김장은 침장()에서 나온 말이다. 소금에 절여 보관하는 것을 염장()이라고 하는데, 소금물에 담가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침장(), 즉 김장이 되었다. 김치가 세균에 대해 강한 면역력을 길러 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최근 김치는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세계의 음식으로 거듭나고 있다.

보관법의 예: 속리산 법주사의 돌 항아리"
땅 속에 큰 돌 항아리를 묻어 두고 겨우내 김치를 싱싱하게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김치는 마치 한식의 대표 선수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우리 음식을 대표하는 아이콘처럼 되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아예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김치는 주로 배추김치입니다. 여러분들은 배추김치가 생긴 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新) 식품’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TVTV 사극에서 고종고종 초기의 수라상에도 이 배추김치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배추김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주재료의 변천"
김치에서 고추가 빠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고추의 수입에서부터 보아야 하겠습니다. 고추가 임란임란 뒤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사실은 꽤 잘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리고 이 고추가 한식에 도입되면서 한식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음식의 대가였던 고 강인희 교수 같은 분은 고추의 수 입기를 한식의 완성기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추가 들어와서 곧 김치에 쓰였던 것은 아닙니다. 김치에 고추가 쓰였다는 기록은 18세기 중엽의 문헌인 [증보산림경제](1766) 같은 책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고추가 들어온 지 150년쯤 지나서야 김치에 쓰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김치에 무엇을 넣었을까요? 한국인들은 매운맛을 좋아했던지 그 전에는 김치에 초피가루초피 가루를 넣었다고 합니다. 흔히 산초와 많이 혼동되는 초피는 초피나무의 열매로 만드는 토종 향신료로 추어탕 등지에 넣어 먹는 까만 가루를 말합니다. 
이 가루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가루로 가공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 이용에 불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고추는 재배하기도 쉽고 가공하기도 쉬워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아마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고추는 최고의 향신료였을 겁니다.
문제는 배추입니다. 지금의 배추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재래종 배추는 잎사귀에 힘이 없고 무엇보다 성겨서 옆으로 처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배추는 잎사귀도 많고 아주 실해 단단합니다. 이 배추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우장춘 박사가 배추를 들여와 우리나라 토양에 맞게 품종 개량해 현재의 배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김치가 나온 것이 약 100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김치를 전 국민이 자유롭게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치를 만들 때 중요한 재료 중의 하나인 소금은 원래 비싼 식품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반 평민들은 지금처럼 소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부잣집에서 김치 담그고 남긴 소금물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바닷물로 배추를 절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치를 담그면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얼마나 질 좋은 김치를 먹는지 알아야 합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발효 식품" 다양한 암 억제에 유용, 정장 작용"

저장과 보존 방식의 우수성. 김치는
순수 우리말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자의 ‘침채(沈菜)’가 세월 따라 변해서 생긴 단어입니다. 우리나라는 김치의 종주국답게 약 200 종류나 되는 김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서울 코엑스에 있는 김치박물관에 가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 김치가 왜 대단한 식품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흡사 한국인들이 입을 모아서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칭송하면서 정작 어떤 면이 그런가 하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치 하면 그저 발효식품이다, 유산균이 많은 식품이다 하는 정도만 알 뿐 그게 왜 대단한 식품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치의 위대성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김치 담그기는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까지 ‘채소를 겨울 내내 싱싱한 상태로 저장 및 보존시켜주는 제일 뛰어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하고 냉장고도 보편화되어 있어 겨울에 채소를 먹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존상 비타민C를 먹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채소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은 겨울엔 채소를 먹을 수 없어 인류는 많은 저장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많이 썼던 방법이 소금에 절이거나 말려서 보관하는 방법인데 이렇게 했다가 먹으면 아무래도 영양이 많이 파괴되고 맛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김치가 대단하다는 것은 겨울 내내 채소의 신선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끔 저장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식품에는 이렇게 한겨울에 채소를 싱싱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김치는 신기하게도 겨울 내내 싱싱할 뿐만 아니라 어떤 단계든 모두 제각각의 맛이 있습니다.

담근 바로 직후에 먹는 ‘겉절이’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맛있게 잘 익은 단계를 거쳐 마지막 시어질 때까지 맛이 없을 때가 없습니다. 아무리 ‘시 어빠 져도’ 김치찌개로 해 먹으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김치찌개는 원래 신김치로 조리하는 게 더욱더 맛있기도 하며 이런 훌륭한 저장법 덕에 우리 조상들은 겨울에도 비타민C를 섭취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히 고추에는 사과의 50배, 밀감의 2배나 되는 엄청난 양의 비타민C가 있다고 합니다.

만드는 과정 특징과 효과.
김치 만드는 과정과 단계에 대해서?? 나타나는 특징에 대해서  우선 배추를 소금으로 절입니다. 원 상태의 배추는 서걱서걱해서 사람이 씹기에는 다소 뻣뻣합니다. 소금은 이 뻣뻣함을 줄여줘 먹기 좋게 바꾸되 신선함은 유지시켜줍니다. 그다음으로는 소금물에 들어 있던 효소들이 배추의 섬유질과 화학반응을 하면서 발효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미노산과 젖산이 생기고 김치의 독특한 발효 맛이 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양념을 넣는데 이 양념은 지방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추는 말할 것도 없고 마늘, 파, 젓갈, 오징어, 잣 등등 그야말로 다양한 양념이 들어갑니다.
양념은 소금 때문에 열려 있는 배추의 섬유질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엄청난 양의 유산균이 만들어집니다. 김치의 독특한 맛은 이 유산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며, 이 균은 창자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 다른 나쁜 균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유산균이 발효되는 과정에 이산화탄소가 아주 조금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물에 녹으면 탄산이 되어 김치에 시원한 맛이 나게 합니다. 나중에는 탄산이 너무 많이 배출돼 김치에 기포가 생기도 합니다. 조상님들은 이 과정을 더디게 진행시키기 위해 김치를 땅에 묻었던 것입니다. 
"김치를 소금에 절여 놓으면 배추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고 아미노산과 젖산이 생성되어 독특한 맛이 나게 된다.
김치는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냉장 기술이 발달되어 그 우수함이 더욱더 입증됩니다. 게다가 김치 냉장고까지 나왔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김치가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특히 라면 먹을 때가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이 김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김치가 그만큼 훌륭한 식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턱대고 외국에 수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치는 언제나 밥이나 국수와 같이 먹는 반찬이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김치 하나만 먹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치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온상재배의 발달에 따라 김치재료인 채소가 계절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게 되고 인구의 도시집중과 아파트 생활자의 증가에 따라 옛날처럼 많은 김치를 한꺼번에 담그는 일이 적어지고 소량씩 담그게 되었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의 경우 김칫독을 묻을 땅이 없으므로, 스티로폼이 들어간 이중벽의 플라스틱 김칫독이 등장하게 되었고, 김치항아리를 톱밥이나 왕겨에 묻는 방법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김치 전용 냉장고가 만들어져서 김치를 최장 4개월까지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김치에도 현대문명의 물결이 몰려들고 있다.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가정에서는 김치를 담글 시간이 없다. 그래서 김치 만들기의 일부는 이제 공장으로 빠져나가 합성수지 주머니로 진공 포장한 김치제품이 나오게 되었으며, 김치를 담가 각 가정에 배달해주는 전문업체들도 생겼으며,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김치를 담가 배달해 주는 업체도 생겨났다.
사람은 비타민이나 무기질이 풍부한 채소의 섭취가 필요한데 채소는 곡물과 달라서 저장하기가 어렵다. 물론 채소를 건조해 저장할 수는 있지만 건조하면 본래의 맛을 잃고 영양분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장·초·향신료 등과 섞어서 새로운 맛과 향기를 생성시키면서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우리 고유의 식품이 바로 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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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는 종주국 배추가 제격” | 아시아 경제 2010-08-17 
‘원조 김감 맛의 비밀은 배추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aTaT(농수산물 유통공사, 사장 윤장배)는 부산대학교 김치연구소, 대상 FNFFNF 한국식 신선연구소의 협조로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 한국 배추로 김치를 담갔을 때 일본 배추보다 씹는 맛이 뛰어나다는 연구에 발혀젔다발혀젔다.. 
김치,  넌 누구냐? | 해럴드경제 생생뉴스 2010-02-05
연말연시에 불우이웃 돕기로 김장을 담그는 일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풍경이다. 이탈리아에서 스파게티를 말거나 일본에서 초밥을 싸서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본 것 같다. 김치는 한국인에게 부식이기도 하지만 끼니때마다 밥상에 올라와야 하고, 넉넉히 쓰러스 올라왔다.
김치에서 발효식품에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능성 유산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전북도 농업기술원은 지난 2년간 전통식품에서 기능성 미생물을 탐색한 결과, 김치 및 동치미에서 발효식품에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산균(락토바실러스 파라카제이 등 6종) 분리에 성공도 했다.
"김치의 경우, 김치 10g에는 1억∼10억 마리의 미생물이 들어 있지만 우주식품으로 인증받으려면 1만∼10만 마리의 미생물만이 허용된다. 이에 김장 김치에서 별도 분리한 안전한 유산균만을 우주인 김치에 집어넣어 발효, 숙성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김치 숙성 온도는 15℃가 이상적이다. 즉 김치가 발효되면서 13가지 정도의 유산균이 생성되는데 DNA 분석 결과 15℃에서 생성되는 유산균에서 영양학적 가치가 가장 높았다고 한다. 김치를 가장 맛있게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온도는 평균 -1.4℃이다. 또한 김치냉장고에서 6개월까지는 맛 변화 없이 저장이 가능하다.
한방에서는 김치를 음양(陰陽)이 조화된 완전식품이라고 한다. 즉 성질이 서늘한 배추와 무에 열이 많은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 등을 넣어 음양을 맞추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고춧가루를 쓰지 않은 백김치나 동치미는 성질이 서늘해 열이 많은 소양인(少陽人)에게 알맞고, 매운 양념을 많이 쓴 배추김치는 몸이 차고 속이 냉한 소음인(少陰人)에게 알맞다고 한다. 잘

발효된 김치에는 젖산과 젖산균(유산균)이 풍부하며, 김치 1g에 젖산균 1억 마리쯤 함유되어 같은 무게의 요구르트보다 약 4배 많다. 또한 비타민 A와 C, 칼슘, 철, 인 등 무기질이 풍부하여 몸에 좋으며 배추와 무에 함유되어 있는 식이섬유는 변비와 대장암 예방에 좋다. 최근
김치가 적당히 숙성했을 때 항암 효과가 커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마늘, 생강, 고춧가루, 파 등 다양한 양념이 들어간 김치를 적당히 익힌 뒤 위암세포(MKN45)에 가했더니 발효시키지 않은 김치보다 암세포 성장 억제 효과가 4∼10% 높았다는 것이다. 양념의 종류별로 암세포 성장 억제율은 고춧가루, 마늘 등의 순서로 나타났다. 
김치가 위암, 대장암, 간암, 폐암, 방광암 등 다양한 암의 억제에 유익한 것은 김치 속에 항암성분인 인돌-3-카비놀, 아이소 사이오 시아네이트, 알릴 설파이드, 캅사이신 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김치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유산균(乳酸菌)으로 인하여 소화가 잘되고 장(腸)을 깨끗이 하는 정장 작용도 하게 된다. 부산대학교 김치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김치를 하루 300g 정도 먹으면 김치를 안 먹은 사람에 비해 대장에 유산균이 100배 정도 증가한다. 또한 유산균은 김치 내 식중독균 등 유해균의 번식을 억제한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김치를 다이어트 식품으로 애용하는 이유는 김치의 열량이 100g당 9㎉(동치미), 29㎉(배추김치), 55㎉(파김치) 등으로 낮으며, 김치에 포함되어 있는 식이섬유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여 과식을 피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캅사이신'은 몸의 지방을 분해, 연소를 돕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치의 단점은 소금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이다. 특히 남부지방에선 소금과 젓갈을 많이 쓰기 때문에 맛이 더 짜다. 이에 소금 섭취를 많이 하면 발생할 수 있는 고혈압, 위암 등을 예방하기 위하여 김치를 싱겁게 담그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기산 등 김치 맛 성분은 저염(低鹽) 김치가 고염(高鹽) 김치보다 더 풍부하다. 김치의 소금 농도를 2% 이하로 줄이면 건강에 좋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2001년 국제식품으로 공인한 우리나라 전통 음식인 김치(Kimchi)에 대하여 미국의 건강전문지인 『헬스(Health)』는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웰빙 음식 '김치'는 비타민(B1, B2, C 등)과 무기질(칼슘칼륨 등)이 풍부하고 소화를 도우며 암 예방에 유익하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김치는 건강의 측면에서나 맛의 측면에서나 세계에서 으뜸인 식품이다.
2008년 2월 한국식품연구원과 한국 원자력연구원이 국내 기업들과 함께 개발한 김치 · 볶은 김치 · 고추장 · 된장국 · 녹차 · 홍삼차 · 수정과 분말 · 즉석밥 · 라면 · 생식바 등 한국형 우주식품 10종이 러시아 의생물학연구소(IBMP)로부터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먹을 수 있는 '우주식품'으로 인증받았다.
또" 다른 방식의 음식.
1) 식혜와 식해는 모두 삭혀서 먹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이렇게 발효시키고 삭혀서 먹는 음식 문화가 발달해 왔다. 그러면 식혜와 식해는 어떻게 다른 음식일까? 식혜(食醯)는 엿기름을 우린 물에 밥알을 넣어 삭힌 음료이다. 단술 또는 감주(甘酒)라고도 부른다. 요즘에는 시중 판매 음료로도 개발되어 인기가 높다. 혜(醯)는 신맛이 나는 국물이라는 뜻이다.
2) 식해(食醢)는 생선을 토막 내어 소금과 조밥, 고춧가루와 무 등을 넣고 버무려 삭힌 음식을 말한다. 해(醢)는 고기나 생선으로 담근 젓갈을 뜻한다. 식해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 모두 있는 음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도의 가자미식해가 유명하다. 혜(醯)와 해(醢)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 두 글자를 구분하는 것으로 서당 선생님의 실력을 가늠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식품재료학』(조재선, 문운당, 2000)
  • 『한국식품 문화사』(이성우, 향문사, 1984)
  • 『한국 민속 종합조사보고서』향토음식 편(문화재관리국, 1984)
  • 『조선시대 조리서의 분석적 연구』(이성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 『고려 이전 한국식 생활사』(이성우, 향문사, 1978)
  • 「우리나라 젓갈의 지역성 연구」(서혜경,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7)
  • 김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김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세계의 음식이 된 김치[沈菜]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2011.)
  • 세계의 음식이 된 김치[沈菜]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2011.)
  • 김치 - 한국의 대표 음식 (위대한 문화유산,)
  • 김치 (파워푸드 슈퍼푸드, 2010. 12.)
  • 김치 (파워푸드 슈퍼푸드, 2010. 12.)

내용과또다른동영상.

https://youtu.be/xpqCHcEUvaU

https://youtu.be/0ezy25PUkTU

https://youtu.be/6Y5mcLxlSgU?t=36

https://youtu.be/xpqCHcEUvaU

https://youtu.be/xDFjE2WJmws

https://youtu.be/Ctk33ldX2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