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0일 수요일

괭이.

흙을 파고 고르는 데 쓰이는 연장.
돌괭이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나타나 함북 서포항 · 평남 궁산 · 양양 오산리 · 서울 암사동 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신석기 전기에 속하는 서포항유적에서 출토된 돌괭이는 길이가 13~17cm 정도의 신바닥 모양이었지만 중기 이후에 나오는 것들은 가늘고 길어서 그 길이가 10~28cm 안팎이 된다. 고고학에서는 돌괭이와 함께 돌삽돌보습과 석기()를 통칭하여 굴지구()라고 한다.

돌괭이의 날은 자루에 매기 위해 어깨가 날 부분에 비해 좁은 편이고, 작은 것은 길이는 13~20cm 정도에서 큰 것은 30cm가 넘는 것도 있다. 각암 · 안산암과 같이 단단한 돌을 깨서 만든 것이 많고, 드물게는 갈아서 만든 것도 있다. 나무 자루를 붙이는 방법에 따라 따비나 삽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고, 농사이외에 야생식물의 뿌리를 채취하거나 집터를 파고 산림을 개간하는데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하위지()의 유서에는 ‘괘이()’로 표기되었으며, 『고사신서 』 농포문()에 쓰인 ‘노작()’도 괭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농정촬요 』에는 ‘송곳광이’·‘곳광이’·‘가래갓튼광이’·‘장도리갓튼광이’라고 적혀 있다. 지역에 따라 ‘광이’(경기도 안산, 강원도 도계)·‘깽이’(경상남도 창녕)·‘꽹이’(전라남도 구례·강진·거문도)·‘쾡이’(인천광역시 덕적)·‘곽지’·‘괘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날을 이루는 넓적한 쇠 끝은 ‘ㄱ’자로 구부러져 괴구멍을 이루고 여기에 자루가 달렸다. 괭이 날의 형태는 매우 다양한데, 이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위아래의 날 너비가 같은 것으로 너비는 매우 좁으며 날 끝만 둥그레한 것.
"볼이 엷고 넓적하며 자루를 끼는 부분이 수숫잎의 밑동처럼 된 것으로 자루와 날 사이의 각도가 좁은 것.
"날의 위쪽은 둥그레하나 끝이 뾰족하게 좁아져 가지의 잎과 비슷한 ‘가짓잎괭이’.
"위는 넓으나 날 끝으로 가면서 차차 좁아지는 괭이인 ‘토란잎괭이’.
"날이 엄지손톱과 같이 판판하고 끝이 둥그레한 것.

"황새의 주둥이처럼 가늘고 뾰족한 것으로 날이 양쪽에 달린 것은 가운데의 괴통에 자루를 박은 것과 외날뿐인 것이 있는데, ‘곡괭이’ 또는 ‘뿔괭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괭이는 토질에 따라 날의 길이와 너비, 자루와의 각도, 중량 따위가 다르다. 예전에는 날 끝에 강철을 입혔으나, 현재는 전부 강철로 만들어서 흙이 날에 들러붙는 일이 드물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느티나무와 같이 단단하고 질이 치밀한 목재로 만든다.


길이는 날의 형태, 토질, 사용자의 키, 목재의 종류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150㎝ 내외이며, 지름은 3, 4㎝이다. 괭이의 생김새는 길이 약 1~1.5m의 긴 자루 막대기에 쇠로 만든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날을 꽂아 만든다. 괭이의 날은 날카롭게 다듬어 사용하는데 날이 무뎌지면 숫돌에 갈아서 사용했다. 주로 겨울동안 굳어버린 땅을 파서 토질을 부드럽게 한 다음 씨앗을 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보하는 일에도 괭이가 주도적으로 사용된다. 나무의 뿌리를 캐내거나 자르는데도 괭이는 제몫을 한다. 

괭이를 높게 쳐든 다음 찍어내리듯 땅을 찍어내어 흙을 파내거나 뒤집어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데 용이하게 한다. 괭이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함경도에서는 '곽지'또는 '괘기'라고 불렀다. 괭이는 그 모양과 크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사용 원리나 용도는 같다. 농사에서 괭이는 씨를 뿌리기 위해 골을 켤 때, 덩어리진 흙을 잘게 부술 때, 땅을 판판하게 고를 때 쓴다. 이것으로 김을 매거나 극젱이로 갈고 남은 땅을 갈기도 하며, 구덩이를 팔 때도 쓴다. 기능은 토질에 따라 큰 차이가 있으나, 강원도 도계에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논은 30평, 밭은 1백 평 정도 다룰 수 있으며, 무게는 1㎏ 내외이나 2㎏에 이르는 것도 있다.

괭이의 부분 명칭은 다음과 같다.
"괴통: 자루를 박기 위해 날의 다른 끝이 둥글게 목을 이룬 부분.
"등씸: 괭이 바닥 복판에 우뚝 선 날.
"괴구멍: 자루를 박는 괴통의 구멍.
이와 같은 부분 명칭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칠월 초순경, 세번째의 논을 다 맨 뒤에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일꾼들을 하루 쉬게한다. 이때에는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을 골라 그 집의 일꾼을 괭이자루에 태우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주인집에서는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낸다. 이를 ‘괭이자리탄다’라고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새해 첫 장에 가서 괭이는 사지 않는다. 이 연장은 땅이나 흙을 파헤치는 데 쓰므로, 괭이를 사면 그 해의 재복이 뿔뿔이 흩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괭이는 `ㄱ`자 모양의 넓적한 쇠 날과 나무 자루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에 따라 명칭에 차이가 있어, 광이·깽이·꽹이·쾡이·?이·꾕이·곽지·괘기 등으로 불린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뿔괭이·돌괭이·곰배괭이 등으로 보아 괭이의 사용은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괭이는 땅을 파는 데에도 쓸 수 있지만 그보다는 씨를 뿌리기 위해 골을 내거나 땅을 평평하게 고를 때, 그리고 흙덩이를 잘게 부술 때 알맞은 농사도구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출토되는 괭이는 대체로 날이 넓고 어깨가 좁은 이른바 곰배괭이 형태이다. 그런데 흔히 돌괭이로 분류하는 석기는 나무자루를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호미·따비·삽 등으로 그 쓰임새가 달라질 수도 있다. 

평안남도 온천군의 궁산()유적에서는 돌괭이와 뿔괭이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로써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괭이의 쓰임새가 다양하고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유적, 경상남도 통영시 상노대도유적 등에서도 신석기시대의 곰배괭이 형태의 돌괭이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나무 농기구를 많이 만들었으므로 나무괭이도 적지 않았겠지만, 돌괭이가 반달돌칼·돌낫·돌보습 등과 함께 자주 쓰였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함경북도 회령시 오동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어은유적·옥방유적 등이 있다.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청동기()에는 따비와 괭이로 밭고랑을 일구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괭이의 재질이 나무인지 돌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돌괭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괭이는 농기구 중에서 땅을 가는데 쓰는 도구이다. 땅을 가는 도구에는, 소에게 매달아 사용하는 세모꼴의 쟁기, 쟁기의 전신()으로 보이는 따비, 생나무의 끝을 넓적하게 남기고 깎아 자루와 몸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고 그 끝에 쇠 날을 끼워 만든 가래, `ㄱ`자로 구부러진 넓적한 쇠 날을 자루에 붙여 만든 괭이, 갈퀴 모양의 발이 서너 개 달려 있고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날이 긴 나무 자루에 붙어 있는 쇠스랑 등이 있다.


괭이의 일반적인 형태는 넓적한 쇠끝이 `ㄱ`자로 구부러져 괴구멍(자루를 박기 위해 둥글게 목을 만든 날의 한쪽 부분 중 자루를 박는 구멍)을 이룬 날에 긴 자루를 박은 것이다. 괭이는 날의 모양에 따라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는데, 날의 위쪽이 넓고 끝이 뾰족하게 좁은 가짓잎괭이, 토란잎처럼 위는 넓고 끝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좁아지는 토란잎 괭이, 가로로 길고 가는 날의 양쪽이나 한쪽이 뾰족하며 날 가운데 자루를 박은 곡괭이, 그리고 삽괭이·왜괭이·벽채 등이 있다. 괭이 날의 형태는 토질에 따라 길이와 너비, 자루와의 각도, 중량 등에 차이가 심하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나 느티나무 등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며, 자루의 길이는 날의 종류·토질·사용자의 키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5m 정도이며, 굵기는 3-4cm이며 원형이나 타원형을 이룬다. 괭이는 주로 흙을 파고 깨며 골타기(밭에 고랑을 만드는 일)나 김매기 등에 쓰고 밭을 일구거나 정지(: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작업을 할 때에도 사용된다.

예전의 괭이는 날 끝에 강철을 입혀서 사용했지만, 현재는 날을 강철이나 주철로 만들어 사용하며, 날의 모양이 위와 아래의 너비가 같고 끝이 둥근 것을 주로 사용한다. 단단한 땅을 파고 고르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농경초기의 뒤지개에서 발달한 원시적인 형태지만 지금까지 그 형태가 변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연장이다〈그림 1-11〉〈사진 1-14〉. 나비가 5∼10cm 되는 쇠날을 ‘ㄱ’자로 구부리고 짧은 쪽에 괴통을 만들어 1m 가량의 자루를 박았다. 그러나 보다 전통적인 괭이는 나무를 가지와 함께 잘라서 가지는 자루로 하고 가지가 난 줄기 부분을 괭이의 몸통으로 깎아 거기에 말굽쇠 모양의 쇠날을 박았다.

오늘날의 괭이는 땅을 파거나 일구는 기능을 가진 괭이, 단단한 땅을 쪼아 일구는 곡괭이, 쟁기를 간 흙덩이를 부수고 골을 타거나 김을 매는데 쓰는 가짓잎괭이 · 수수잎괭이 · 삽괭이 · 긁괭이, 그리고 무논을 가는데 사용하는 화가래〈사진 1-15〉, 자갈밭을 일구는데 쓰는 벽채괭이 뿌리가 깊은 인삼이나 황기 따위를 캐는데 쓰는 약초괭이 따위가 있다. 가짓잎괭이나 수수잎괭이는 ‘괭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자루가 긴 호미(선호미)의 일종이다.

조선조 말 정병하(, ?∼1896)가 지은 『농정활요』에는 ‘송곳광이’ · ‘곳광이’ · ‘가래같은 광이’ · ‘장도리 같은 광이’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약초괭이 · 곡괭이 · 화가래 · 괭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동농서』에 등장하는 과  〈그림 1-12〉은 오늘날의 괭이와 가짓잎괭이와 다를 바가 없다. 예전에는 ‘광이’(『역어류해』 · 『해동농서』) · ‘광히’(『물보』)라 했고, 한자음으로는 (『하위지 유권』) · (『증보산림경제』) · (『천일록』)로 썼으며, 한문으로는 (『해동농서』 · 『물보』) · (『역어류해』)라고 적었다. 괭이로 한사람이 하루 150여 평의 밭을 일굴 수 있다.

괭이는 인류가 고대부터 사용한 농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구에 속한다. 농경문화의 발상과 함께 출현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 발달과정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괭이가 발견되었고 경작을 하거나 김을 매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당시에는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돌낫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신석기시대가 끝날 무렵, 시베리아 ·화북() ·만주를 거쳐 청동기시대 문화가 한국에 들어왔고, BC 200년 경 화북의 주민들이 랴오둥[]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철제()의 괭이와 낫, 따비 등을 만드는 철기문화()를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1927년 발견된 평북 위원군 용연면()의 적석총()에서는 그러한 농기구들이 명도전(), 철제무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괭이는 농법의 발달과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유사·관련용어
광이(경기 안산·강원 도계), 깽이(경남 영산), 꽹이(전남 구례·강진·거문도), 쾡이(경기 덕적), 곽지, 괘기, 왜괭이, 가짓잎괭이, 삽괭이, 수숫잎괭이, 나무괭이, 긁괭이, 물고괭이, 보토괭이.

문헌

  •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69)
  • 빛깔 있는 책들-농기구(박대순, 대원사, 1990년)
  •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년)
  • 괭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괭이 (한국의 농기구, 2001.)
  • 괭이 [hoe] (두산백과)
  • 괭이 (e뮤지엄)
  • 돌괭이 (두산백과)

2019년 4월 9일 화요일

진시황"

진시황"
중요한 인물임에도, 진시황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지 않으며 확실히 믿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진왕조 자체의 역사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진시황 관련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와 유향의 <전국책>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진시황의 시대보다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씌어진데다 사실과 전설의 구분이 모호하고, 일부는 의도적인 왜곡을 했다는 의심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따금 출토되는 진나라의 죽간이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보태 주지만, 진시황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진시황의 상.
그의 명성은 사실과 전설을 넘어 우뚝 서 있다
아무튼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탄생은 매우 위태로웠는데다 모종의 음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 진나라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의 아들 영정()이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 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특이한 상품()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초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서 인기를 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유력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한다(장양왕). 이로써 최고권력의 으뜸가는 후원자가 된 여불위는 이후 3년 간, 그리고 다시 장양왕이 죽고 영정이 왕위에 오른 한동안 진나라의 최고실권자로서 세력을 떨친다.
<사기>에는 여불위가 이처럼 대담한 도박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몽땅 속이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적혀 있다. 자초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보냈는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 미래의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교묘한 이야기로, 여불위와 자초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한때 나는 새도 떨어트렸던 여불위의 세도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아닌가 하고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사마천이 이를 <사기>에 기록한 것은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진나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자초가 대권을 잡는 과정도 기이하다. 여불위의 억지스러운 음모가 그렇게 척척 통할 만큼 당시의 진나라 왕실이 허술했다면 과연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13세에 왕이 된 영정은 10년 뒤에 태후(기록대로라면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하는)와 손잡고 역모를 꾀하던 노애를 처단하고 태후는 옹이라는 고을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까지 숙청했다. 1년 뒤 여불위는 자살한다. 이제 진나라는 명실공히 영정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하’가 진짜 ‘온 천하’로 확대되기까지는 불과 15년이 더 걸렸다.

암살도 아랑곳없는 제국의 탄생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평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 나라씩.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역시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기록으로만 볼 때 우선 진나라가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 진효공 시절 상앙의 변법()을 비롯한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이 미친 부국강병의 효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라는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 경우 그 한 사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또 장군 왕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왕전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는 곧바로 몸소 왕전의 거처로 달려가 용서를 빌고는 재기용했다고 한다.
진시황(진왕 정)은 이처럼 여러 국보급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켰고, 병사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경우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용맹하게 싸우게끔 부추겼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에 은밀히 공작을 해서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하고, 밖으로 여러 나라가 단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에 한 나라씩, 전력을 기울여 단번에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무너뜨려갔다. 또 자료를 잘 살펴보면 진시황이 잔인무도하다는 점에서 폭군이라는 비방은 숱하게 있지만, 사치향락을 일삼았다는 쪽의 비방은 별로 없다(적어도 통일 이전까지는 그랬고,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주지육림이나 삼천궁녀 같은 이야기는 전설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도무지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므로 괴롭다는 푸념이 많이 보이고, 스스로는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하니, ‘일 중독자’로서 부하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호랑이 같은 관리자’였으되 자기 개인의 쾌락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희생시키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고, 때로 비정한 결단도 숱하게 내려야 하는 정복-통일 군주에게는 적합한 성격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진시황과 진나라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합종()은 과거에 진나라의 야심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241년에 마지막으로 연나라를 제외한 5개국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로 다시 합종이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단숨에 진나라의 중추를 파괴하는 방법, 즉 암살이었다. 227년에 연나라의 형가()가 암살에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며 연나라의 멸망만 가져온다.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에서 따온 ‘황제’라고 칭했다.
분서갱유는 ?
황제가 된 진시황은 무력 통일을 뒷받침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 또한 강력하게 추진한다. 여러 나라의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정부에서 주조한 통일 화폐를 쓰도록 하며, 나라마다 제 각각이었던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북부의 장벽(이것이 증축 보완 과정을 거쳐 만리장성이 된다)만 남기고는 국내의 성벽들을 헐어 버리고, 로마의 아피아 도로에 비할 만큼 넓고 잘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여 중국이 두루 하나로 이어지도록 했다. 무엇보다 오랜 전통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것은 혁명적인 조치였다. 
국가는 중앙의 군주 직할지 외에는 여러 제후의 분봉지로 나뉘어져분봉지마다 독립된 왕국에 가까운 자치를누렸다. 지방행정의 단위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이 있었으되 그 역시 지방관의 세습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전국을 일체 군현으로 나누고는 모두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하고, 세습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세계사에서 전례가없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이었다.
혁명적 조치였던 만큼 반발도 많았으리라 여겨지는데, 기록상 두드러진 반발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통일’, 즉 자유 언론과 사상 탄압을 촉발하는데, 진시황 최대의 악행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말 그대로 “기술서적 외에 모든 경전과 역사서를 불태우고, 모든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 많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전 사서도 많으며, 유학 역시 죽지 않고 머잖아 중국의 지배 이념이 된다. 
<사기>에 따르면 분서갱유를 제안한 사람은 승상 이사인데, 그의 표현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박사들 말고 사사로이 경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빼앗아 불태우고….”라고 되어 있다. 떳떳이 경전을 갖고 연구해도 되는 박사(유학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한문제 때의 인물인 가의()는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돌이켜 보며 이를 거울삼아 올바른 정치를 하기를 권하는 <과진론>을 올렸는데, 여기서 진시황의 여러 악행을 지적하면서도 분서갱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갱()이라는 한자를 문자 그대로 ‘파묻어 죽인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다만 ‘처형한다’ 또는 ‘직업을 그만두게 한다’로 읽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이를 볼 때 분명 언론과 사상을 탄압하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보통 ‘분서갱유’에서 연상되는 정도의 잔혹함이나 철저함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스러진 꿈, 그림자는 길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으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시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다. 
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다), 서복(, 서불(巿) 또는 서시()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말년에 접어든 그는 점점 죽음이 두려웠던지, 암살을 피하기 위해(218년에 박랑사에서 암살을 모면한 적이 있다. 이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나중에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장량이었다고 한다)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로 했다. 이 밖에 거대하고 화려한 본궁을 지었는데, 그 일부인 아방궁만 완성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함과 화려함을 갖고 있어, 이후 ‘사치스러운 건물’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전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정말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며 세월을 보냈다면 이미 과거의 ‘일 중독자’다운 근면함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통일 제국이라고 해도 민생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진시황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가혹한 법률에만 의존했는데, 이는 당장은 폭정을 유지시켜도 끝내 종기가 터지듯 반정부적 힘이 터져 나오게끔 하는 방법이다. 앞에 말한 가의는 <과진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를 정복할 때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며,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백성에게 권력이 잘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7국이 할거하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의 임금 노릇을 하면서도 예전의 방법을 답습하고 혹독한 정치를 거두지 않았으니, 그만큼 빠르게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10년 9월 10일, 진시황은 다섯 번째로 천하를 순행하는 길에 나섰다가 사구()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사기>에 따르면 이 때 진시황은 북방에 가 있던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다른 황자인 호해()를 내세우고는 부소와 그를 지지하던 공신들을 살해하고 2세 황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지체되어 심하게썩어 냄새가 나므로, 절인 생선을 실은 마차를 써서 은폐했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의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다. 제국 자체도 그 뒤 겨우 4년 만에 어이없이 멸망해 버린다.
진시황 관련 자료는 크게 부족하고,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유학자들이 군주가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유교적인 모범 군주는 효성이 지극해야 하며(진시황은 “친아버지를 핍박해 죽게 하고” “친어머니를 유폐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늘 수양과 학문에 힘써야 하며(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했다”), 거대한 토목공사를 비롯한 불필요한 사업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다”), 스스로 국사를 챙기기보다 훌륭한 신하를 기용해 그에게 매사를 위임해야 한다(진시황은 “신하들을 믿지 않아 일일이 참견했고,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려고 했다”). 여기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환관이 날뛰게 한” 점까지 본다면 진시황이야말로 후대의 제왕이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모델인 셈이다.
이런 ‘교훈’을 주게끔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드는 것이다(불로초 이야기도 뜬소문을 적당히 가공한 것이며, 서복 등은 동방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진시황은 이후 수천 년간 중국의, 아니 동양 군주들의 모델이었다. 결국 한왕조를 비롯한 역대 왕조는 진시황의 군현제를 유지하고, 황제라는 이름과 지배원리를 답습했으며, 사상을 통일하려고 했다(이 경우에는 유교가 핍박 받는 쪽보다는 핍박하는 쪽에 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진시황이 수립한 강력한 동양적 군주제는 천하가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국가적 사업이 의욕적으로 추진되는 장점을 낳은 반면, 폭정이 행해질 가능성과 사상의 자유가 심하게 억압될 가능성도 낳았다. 그리하여 군주 제도를 인정하고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 견제하고 구속하려는 정치사상의 모순된 입장이 생기지 않았을까. 진시황에 대한 사실의 왜곡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지 모른다.

참고"
사기는 중국 고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저작이다. 사마천은 진나라의 통일과 멸망 과정을 많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어, 진시황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사기>를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천징의 <위대한 폭군 진시황 평전> 은 그런 <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쓰루마 가즈유키의 <중국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진시황제> 도 대략 그런 입장인데, 천징의 책에 비해 학술서적의 냄새가 짙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기에는 다소 버거운 책이다.

최무선, 崔茂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