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팔상전.(국보 제55호), 1984년 쌍봉사 삼층목탑이 화재로 불탄 후 유일한 목탑이 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이 5칸, 3층과 4층은 3칸, 5층은 2칸의 정방형 건물이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나 5층은 기둥 사이에도 포를 올린 다포식이다.
내부는 층별 구분 없이 트인 공간으로 가운데 네모진 벽을 세우고,,폭씩의 팔상도(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그림)를 모셔놓아 팔상전이라고 한다.
쌍사자석등... 모두 국보 석등(국보 제5호).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까지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서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는 획기적인 시도였으며 지붕돌과 화사석, 디딤돌부터 사자가 받치는 앙련석이 각각 하나씩 모두 3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금강문 [法住寺金剛門] 바로 왼쪽에 높다랗게 솟은 철당간은 원래 고려 목종 때 16m로 제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을 만드는 데 사용(1866년)했다고 하며 1907년 순조 때 22m로 다시 세운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1972년 새로 세운 것이다.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그 가운데 왼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밀적금강이고 오른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나라연금강이다. 밀적금강은 입을 벌리고 있고 나라연금강은 입을 다물고 있어 합쳐서 우주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상징하는 신성한 진언인 옴()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제각기 상체를 벗어 젓힌 채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매우 역동적인 자세들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향해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당으로는 드물게 사모지붕을 올린 원통전(보물 제916호)과 안에 모신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정방형 건물로 불국사 비로전과 법주사 원통보전만이 사모지붕을 얹은 네모꼴 불전이다.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높이 약 6m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며, 옆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과 함께 미륵 신앙이라는 법주사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겼는데 의신조사의 창건설화를 나타낸 암각화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세계유산,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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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사찰 중 불교 문화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담장 안 경내 전체가 사적 제503호로 지정돼 있고, 넓고 평평한 터에 자리 잡은 사찰과 어우러진 경관은 명승 61호로 보호받는다.
사찰 안에는 16점의 국가 지정 문화재가 산재했다. 한마디로 눈길 주는 곳마다 국보급 문화재가 널려있는 보물창고인 셈이다.
국보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55호)을 비롯해 쌍사자석등(5호), 석연지(64호) 3점이다.
여기에다가 사천왕석등(15호), 신법천문도 병풍(848호), 마애여래좌상(216호), 대웅보전(915호), 원통보전(916호), 괘불(1259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1360호), 목조관음보살좌상(1361호), 철솥(1413호), 복천암 수암화상탑(1416호), 석조희견보살입상(1417호), 복천암 학조화상탑(1418호), 동종(1858호) 13점이 보물로 관리된다.
충북도 지정 문화재 20점과 문화재 자료 2점도 별도로 지정돼 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년) 의신조사가 창건해 776년(혜공왕 12)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해진다.
법주사라는 이름은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길상사(吉祥寺)', 고려시대에는 '속리사(俗離寺)'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이후 중창을 통해 빠르게 복원되면서 한국 불교 미륵신앙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사찰 안에는 미륵신앙의 상징인 33m 높이의 미륵대불이 우뚝 서 있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금동으로 처음 조성한 이 불상은 조선 고종 9년(1872년) 경복궁 축조자금으로 쓰기 위해 해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60여년 지난 1939년 복원이 시작돼 25년 만에 현재 크기의 거대한 시멘트 불상이 만들어졌고, 1990년 청동불로 다시 세워지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불상의 청동 표면을 갈아내고 금 옷을 덧씌우는 개금불사(改金佛事)가 3차례나 이뤄졌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쌍사자탑
능인전
석연지(국보 제64호)통일신라지대 제작
극락세계를 표현함
석조
당간지주
마애여래좌상(보물)216호 높이6m 고려초기에 조성한 불상
세존 사리탑
철솥높이1.2m 지름2.7 둘레10.8m 두께 10cm 쌀40가마를 담을수 있는 솥
벽암스님 부도탑
속리산 사실기비와 벽암대사비
석등
쌍사자탑
정이품소나무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법주사 일주문(一柱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한 줄로 있어 일주문이라고 하는데 사찰의 첫 번째 문으로 일심(一로 들어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쪽에 걸린 현판은 光武六年(1903년)에 썼다고 하는데 일주문 자체는 근래에 세운 것으로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지정문화재는 아니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당대의 석학이며 명필인 송시열, 송준길, 낭선군 이름을 들으니 대단한 비석임을 알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벽암대사비 옆에 서있는 또 다른 비석에 있는 禁遊客除雜役(금유객제잡역: 할 일없이 떠도는 이를 금하고 잡스러움을 제한다)라는 글귀인데 여느 절에 있는 하마석(下馬石) 보다 강력한 경고로 보인다.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고스란히지니고 있다는 '속리산 법주사'. (입장료 4,000원) "속세를 떠난 듯이 아름답다"는 뜻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1970년 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광명산, 미지산, 제 2금강산또는 소금강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일주문'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기둥을 한 줄로 세워서 '일주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워진 것으로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비이고
- 보은 속리산 벽암대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워진 것으로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글씨를 쓴 비입니다.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를 '속리산 일대'라고 말하는데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정교'를 지나 대한불교 조계종 '법주사'로 들어가려면
- 금강문 -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상'이 안치 되어 있는 '금강문'을 지납니다.
-천왕문 - 시도유형문화제 제46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답니다.
- 팔상전 - 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은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사찰 당시에 의신대사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1624)에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답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인'팔상도'가 모셔져 있어서 '팔상전'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팔상도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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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 천왕문 - 시도유형문화제 제46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답니다.
- 천왕문 - 시도유형문화제 제46호로 지정된 '천왕문'은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답니다.
금강문 [法住寺金剛門] 바로 왼쪽에 높다랗게 솟은 철당간은 원래 고려 목종 때 16m로 제작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을 만드는 데 사용(1866년)했다고 하며 1907년 순조 때 22m로 다시 세운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1972년 새로 세운 것이다.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그 가운데 왼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밀적금강이고 오른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나라연금강이다. 밀적금강은 입을 벌리고 있고 나라연금강은 입을 다물고 있어 합쳐서 우주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상징하는 신성한 진언인 옴()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제각기 상체를 벗어 젓힌 채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매우 역동적인 자세들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향해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각기 다른 신격인지 아니면 동일한 신격을 두 몸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금강역사란 본래 어원적으로 볼 때 금강저를 손에 쥔 자라는 뜻으로 ‘집금강신’ 혹은 ‘금강수’라고도 번역되는 것은 그 때문인데 밀적금강과 나라연이란 말은 금강역사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밀적’은 자취를 드러내보이지 않는다는 성격을 나타내고 ‘나라연’은 힘이 몹시 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 2층 팔작지붕 건물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2005년 원형 복원공사를 마쳤으며 높이 20m에 이르는 2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하나의 공간이다.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 중 하나이며 대웅보전 앞에 세운 사천왕 석등은 보물 제15호이다.
대웅보전 내부에 모신 삼존불(보물 제1360호)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앉은키가 5.5m로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큰 불상이다.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금강문을 들어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법당으로는 드물게 사모지붕을 올린 원통전(보물 제916호)과 안에 모신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정방형 건물로 불국사 비로전과 법주사 원통보전만이 사모지붕을 얹은 네모꼴 불전이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자연암반 지대석 위에 받침돌을 얹고 그 위로 보살상을 세워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최대의 공양을 올리고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자연암반 지대석 위에 받침돌을 얹고 그 위로 보살상을 세워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최대의 공양을 올리고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금동미륵대불, 임진왜란 때 훼손되고 대원군 때 헐려나갔다가 시멘트 불상으로 복원 후 마침내 청동미륵대불을 세웠으며 옛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금동불로 완성하였다. 25m 미륵불은 시무외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지하 용화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높이 약 6m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며, 옆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과 함께 미륵 신앙이라는 법주사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겼는데 의신조사의 창건설화를 나타낸 암각화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스스로 시설투자 등과 관련한 사전 협의를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은군은 케이블카 설치 노선으로 법주사 다비장 앞∼문장대(3.6㎞) 구간을 유력하게 검토됐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추진되면서 용역이 중단된 바 있다.
군 관계자는 "세계문화유산도 국가 지정 문화재와 동일한 법적 제한을 받기 때문에 케이블카 등 인공 구조물 설치가 어려워진다"며 "케이블카 설치를 다시 추진하더라도 노선 변경 등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입장료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