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광화문.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google_ad_client: "ca-pub-4162949345545299",
          enable_page_level_ads: true
     });
</script>

광화문.
  •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57)
    조선 시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 정문의 이름. 정종 원년(1399) 경복궁의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웠는데, 세종 8년(1426)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이라 하였음.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 셋째 문을 광화라 하고, 근정전 동곽 협문을 일화, 서쪽 문을 월화라 하고, 궁성은 동쪽을 건춘, 서쪽을 영추라 하고, 근정전 앞 석교를 영제라 하였다. ; 命集賢殿修撰 定景福宮各門及橋名 勤政殿前第二門曰弘禮 第三門曰光化 勤政殿東廊夾門曰日華 西曰月華 宮城東曰建春 西曰迎秋 勤政殿前石橋曰永濟 [세종실록 권제34, 4장 앞쪽, 세종 8년 10월 26일(병술)]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고 오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개의 홍예문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 · 내삼출목, 외부는 제공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을 만들었으며, 첨차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을 그려넣었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 ·호조 ·예조 · 병조 ·형조 · 공조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매일 09:00 - 18:00(입장마감 17:00)
화요일 휴무

  • 3,000원
  • 무료
  • 무료
  • 무료
  • 무료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더보기

새 모습 드러낸 ´광화문의 변천사´

경복궁의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1865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과 원래 축에서 틀어졌던 각도를 원래 위치로 돌려 2010년 8월 15일 광화문 복원공사를 마친 바 있다. 뒤큰건물은 예중앙청사' 일본잔제의산물이라 철거되었다.
외국어 표기
(한자)
건립
1385년(태조 4년)

광화문과 경복궁의 전경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섬세한 건축 기법으로 지어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여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된다. 경복궁이 처음 지어진 태조(이성계) 때 정도전이 ‘사정문’과 ‘오문’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지어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 본문 이미지 1
광화문 앞의 큰 길은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이곳에는 주요 관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① 커다란 석축 위에 올린 문루.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이며,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 적을 감시하고 지키는 병사와 관원들이 이곳에서 일을 했다.
② 사람이 드나드는 홍예문. 궁궐을 드나들 때에도 예법을 엄격히 지켜,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③ ‘해태’라고도 부르는 해치상. 선과 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광화문
광화문은 돌로 만든 커다란 축대 위에 문루를 얹은 모습으로, 조선의 궐문 가운데 이렇게 만든 것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처리된 홍예문이다. 3개의 홍예문 중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광화문은 경복궁과 더불어 여러 번 시련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다시 중건했고, 일제가 조선 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안에 지으면서 철거하려다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동쪽에 있는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광화문 광장
광화문 광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로 이어지는 세종로에 조성된 광장'


6 · 25 전쟁 때에는 폭격을 당해 모두 불타고 석축만 남았으나 1968년에 원래 자리에 옮겨 지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문루를 콘크리트로 복원한 데다 옛 조선 총독부 건물에 맞춰 놓아 중심축이 맞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 주도로 고종 중건기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시작했고, 2010년 8월 15일에 공개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광화문 양 옆에는 흔히 ‘해태’라고 불리는 해치상이 있다. 
1910년대의 서울 광화문 전경
1910년대의 서울 광화문 전경1910년대 촬영된 광화문의 모습이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전경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전경1926년 이전 촬영된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의 모습이다.
원래 위치는 광화문에서 40~50미터 떨어진 곳으로 현재 놓인 곳보다 더 멀리 떨어진 사헌부 앞이었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서울에 위치한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광화문 앞의 큰 길을 조선 시대에는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그곳에는 이조, 호조, 예조 등 정부의 6개 주요 관청을 비롯해 지금의 서울 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사헌부 앞, 지금의 정부 청사 앞길 양쪽에 해태가 앉아 있었다. 해태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져 정치의 잘못을 가리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와 잘 어울렸다.

소설광화문'
<광화문>은 급변하는 역사와 당대 정치의 격랑을 불화살처럼 뚫고 나간 지도자 흥선대원군의 일생과, 구한말 개혁과 보수의 첨예한 대립을, 당대의 정사를 철저히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한말의 위기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이란 강력한 개성의 정치가를 중심으로 사태 전개를 다면적으로 펼쳐 보이는 우람한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이를 해석, 비판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풍부한 경국과 제민에 관한 책이다.

옛스러운 문체와 풍부한 옛말 속에서도 깨우치는 바가 많지만 뜨거운 정치의 계절에 정치인에게도 유권자에게도 정치 교육이 될 것이 틀림없는 진지한 소설이다. <광화문>이라는 제목으로 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낼 가장 합당한 작가로 서기원말고 또 누가 있을까. 작가는 특히 당시의 왕권과 사대부 계층과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맟줘 일종의 대중정치를 지향했던 대원군의 자취를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또 19세기 중엽의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정치의 상황을 오늘과 오버랩시키면서 지금의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진 작가 서기원 선생이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한 <광화문>은 역사소설이면서 미래소설이다. 조선왕조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초기를 다룬 <광화문>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과거 역사 속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소설은 지난 세기말에 주체적 근대화와 산업화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역사를 냉철하게 탐구함으로써 21세기를 눈앞에 둔 한국인들의 의식에 미래지향적 교훈을 새겨둔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이란 제목은 역사의 상징이면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의식의 문이기도 하다. 왕권 회복을 내건 대원군의 정치 개혁과 그 좌절의 드라마를 객관적 시점에서 조명한 이 소설에는 1백 년 전 엘리트들의 사상과 삶이 눅눅하게 배어 있다.
<광화문>은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지배층과 민중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분석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인공 흥선대원군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흥선대원군은(순조20년(1820) ∼ 광무2년(1898)) 조선왕족이고 정치가였다.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이름은 하응이다.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의 아들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8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이 동안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면서도 철종의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를 포섭하여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에 접근,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내락()받았다.

1863년에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진봉,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선포되자 안동 김씨의 반발을 억누르고 그는 정책적 정권을 받아 섭정을 맡았다.

당시 외척 세도의 아성인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부패 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키고, 47개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여 국가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기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했다.

또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고, 관복의 제정과 서민들의 주속광복의 착용을 금하여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상인에 차별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근절하기 위해 사창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삭감하여 다소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그러나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키 위해 원납전을 강징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1866년(고종 3)대동강에서 제너럴·셔어먼호 소각사건, 이해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의 마찰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강화에서의 미군과의 전투로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는 등 세계정세에 어두운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 문명의 흡수가 뒤늦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편 그의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고종비 민비가 그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를 포섭하고 어린 왕 고종도 성장하여 친정을 계획하게 되자 이 기회를 틈탄 민비의 조종으로 1873년 그의 실정의 조목을 든 동부승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11월 3일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고 그의 정치 간여를 금하자 운현궁을 떠나 양주 직곡에 은퇴했다. 이때부터 민비와의 정치적 숙원이 깊어져 재집권을 노리던 중 1882년(고종19)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쓰며 재빨리 행방불명이 된 민비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충주에 피난해 있던 민비의 책동으로 청나라의 군사가 출동하고 마건창에 의해 납치되어 청나라에 건너가 천진의 보정부()에 4년간 유폐되었다가, 1885년(고종 32) 귀국,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5년 원세개와 협력하여 고종의 폐위와 함께 장남 재황을 웅립하려다 실패했다.

1895년(고종 32) 재집권을 위해 일본 공사 미우라와 결탁,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일본의 괴뢰 역활에 불과했다. 민비 시해사건으로 미우라 공사가 본국에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 아들 고종이 그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부자관계가 악화된 채 죽었다.

<광화문>이,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좀더 확실히 나타난다. <작가의 말>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작가 서기원의 평가도 담겨있다.

수백년을 통틀어 대원군은 리더십을 발휘한 몇 안되는 통치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시대의 변화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권력을 유지하고 경륜을 펴자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주변 정세에 대응하려 했지만 왕비 민씨를 비롯한 척신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심신을 소모하여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치에는 일종의 미학이 있었다. 이것은 방법론의 문제라기보다 결코 빙공영사하지 않은 그의 인간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흔히들 당시의 내외 정세와 오늘의 그것이 닮았다고 한다. 닮았다면 북한이 남한보다 더 닮았다.

남한은 어떤가? 주변 강대국간의 역학 속에서 시달림과 압력을 받고 있는 구도는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국력이 조금 나아졌다고 우리가 무슨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호언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힘이 있을수록 겸손해야 하고 이웃 나라들과 잘 사귀어야 한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 형식과 내용의 상반 등의 현상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두 대목이 지나치게 엇갈리면 허위와 위선이 만연하고 사회적 통합이 무너진다.

대원군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과함한 개혁으로 이같은 모순을 고치려고 했다. 그러나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실각한 뒤 국정을 개혁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고 권력의 비리와 부패는 더욱 심화되었다. 거개가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보전만을 생각하였다. 이 점만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는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역사관이 많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가치체계가 조선 왕조를 통해 형성되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부채도 유산에 속한다. 대원군은 소설가의 흥미와 호기심을 끄는 인물이다.

출처 &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문예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로고 http://munjang.or.kr/광화문 - 아름답고 웅장한 경복궁의 정문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광화문 (한국문예위원회, 한국문예위원회)경복궁 광화문 [Gyeongbokgung Gwanghwamun Gate, 景福宮光化門] (두산백과)광화문 [光化門]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메뚜기 [Orthoptera].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SCRIPT
https://goodlucks6200.tistory.com/manage/newpost/%3Ca%20href=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3E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3C/a%3E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google_ad_client: "ca-pub-4162949345545299",
          enable_page_level_ads: true
     });
</script>
방아깨비·딱다기·풀무치 등으로 불리는 곤충을 포함하며 성충과 약충(若蟲:불완전변태를 하는 어린 곤충)이 모두 초식성이다. 메뚜기떼는 예로부터 무서운 피해를 끼쳐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성충은 머리 양쪽에 큰 겹눈이 있고 홑눈은 3개로 작으며 더듬이에 접하여 1개씩 있고 겹눈 위쪽에 1개가 있다.
더듬이는 몸의 길이보다 훨씬 짧은 것이 보통이며 실 모양 또는 채찍 모양이 보통이다. 안면에는 중앙부에 세로 1쌍의 융기선이 있고 입틀은 큰턱이 잘 발달하여 씹기에 알맞다. 전흉배판이 잘 발달하여 배면과 측면은 뚜렷한 융기선으로 구분되며 측면은 거의 수직이다.
등쪽에 3개의 가로로 난 홈이 있는데 이러한 형태적 특성을 고서에서는 “대이방수수유왕자(大而方首首有王字)”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흉복판은 길이보다 너비가 크며 앞다리 기절 사이에는 돌기가 있다. 앞다리와 가운뎃다리는 뒷다리에 비하여 훨씬 작고, 뒷다리의 넓적다리마디는 대단히 굵고, 종아리마디는 가늘고 길어 뛰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앞날개는 복시(覆翅)이고 뒷날개는 막질이다.
메뚜기의 수컷 중에는 소리를 내는 것이 많다. 소리는 다리와 앞날개를 마찰시키는 경우와 날 때 양쪽 뒷날개를 비벼서 내는 경우가 있다. 앞의 경우 뒷다리 넓적다리마디 안쪽에는 80∼90개의 작은 돌기가 일렬로 있는데 이것을 앞날개의 날개맥의 줄판에 비비게 되어 있으며 뒤의 경우는 뒷날개의 날개맥에 있는 마찰기가 날개의 움직임에 따라 비벼져서 소리가 난다. 따라서 앞의 경우는 정지하고 있을 때 소리가 나며 뒤는 날아갈 때에 소리가 난다.
배에는 첫째마디에 1쌍의 고막기관이 있어 소리를 듣는다. 암컷의 경우 배의 끝에는 산란관이 있다. 변태는 점변태(漸變態)를 하며 약충은 몸에 비하여 머리가 크다. 암컷은 배 끝을 땅속에 꽂고 시멘트상의 물질을 분비하여 산란할 구멍을 만든 다음 그 속에 20∼100개의 가늘고 긴 알을 덩어리로 낳는다.
온대지방에서는 알로 월동하는 것이 보통이나 아열대 또는 열대지방에서는 연중 여러 가지 형태를 볼 수 있다. 탈피횟수는 종에 따라 5∼8회에 이른다. 우리 나라에서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 중 해충으로 알려진 것은 7종이며 그 중 벼메뚜기는 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뚜기로 약충과 성충이 벼잎을 먹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농약의 살포 등으로 수가 줄어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 큰 피해를 받은 것은 풀무치에 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큰 피해를 주는 것은 풀무치와 같은 이동형 메뚜기이다. 이들 이동형 메뚜기는 보통은 이동범위가 좁고 그 밀도도 낮아 문제가 되는 일이 없으나, 때에 따라서 밀도가 높아지면서 무서운 피해를 준다. 그 원인은 확실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초생(草生)의 피폐와 건조가 중요한 원인으로 추측된다. 이동형 메뚜기는 정주형에 비하여 날개가 길고 폭식성이며 신경질적이어서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방제법
이들 메뚜기떼의 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문헌에 많은 기록이 있다. 기원전 1200년경 상나라 때에는 방제를 위한 관리가 임명되었고 횃불이 이용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중국 전역에 걸쳐 예찰조직이 생겼다. 1182년에는 방제법이 공포되었다.
≪임원경제지≫에서는 메뚜기의 방제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혼식(混植):메뚜기는 토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작물에는 가해하지 않는 고로 이들과 혼식할 것. ② 알채집:메뚜기는 약간 높은 곳의 굳고 마른 땅에 1촌 정도 길이에 산란하므로 난괴(卵塊)를 겨울철 한가할 때 채집하여 박멸할 것(1930년 황해도에서는 8석을 수집한 일이 있다고 함). ③ 약충포살(若蟲捕殺):발생시기를 예찰하여 관 주도하에 포살할 것.
④ 차단집충법(遮斷集蟲法):부화 약충을 2척 정도의 깊이 판 골에 여러 사람이 비로 쓸거나 소리나는 물체를 두드려 모이게 한 다음에 죽일 것. ⑤ 성충포살(成蟲捕殺):떼를 지어 날을 때 그의 낙하지점을 알아내서 포살할 것. ⑥ 자기 논과 밭에 못 오게 한다:긴 장대에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아 쫓는다. ⑦ 작물체(作物體)의 보호:볏짚을 태운 재나 석회를 살포할 것. ⑧ 포살은 작물이 어릴 때 아침에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때 할 것.
곤충강의 한 목(目).
긴날개밑들이메뚜기
계문강목몸의 빛깔서식장소분포지역
동물
절지동물
곤충류
메뚜기목(Orthoptera)
녹색, 갈색
땅 위, 풀 위, 나무 위
전세계, 특히 열대 지방
‘메뚜기목’에 속한 종들을 통칭하여 ‘메뚜기’라고 부른다. 메뚜기목은 귀뚜라미, 꼽등이, 땅강아지, 베짱이, 여치 등을 포괄한 ‘여치아목(Ensifera)’과 벼메뚜기, 섬서구메뚜기 등을 포괄한 ‘메뚜기아목(Caelifera)’으로 분류된다. ‘~메뚜기’라는 이름이 붙은 종은 모두 메뚜기아목에 속한다. 열대 지방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2만여 종이 분포해 있으며, 한국의 경우 200여 종이 확인되었다.
몸의 길이는 5mm 이하인 것부터 115mm를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전체적으로 납작하거나 둥근 통과 같은 모양을 띠며, 종에 따라 녹색, 갈색, 흑색 등을 띤다. 크게 머리, 가슴, 배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슴은 앞가슴, 가운데가슴, 뒷가슴의 3체절로 구성된다. 앞가슴은 앞가슴등판으로 이어지고, 각 가슴 체절은 한 쌍의 다리를 지닌다. 다리는 걷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는 가운데 뒷다리는 도약에 알맞게 발달되어 있다. 메뚜기아목 중 좁쌀메뚜기는 자신의 몸길이의 몇 배가 넘는 긴 거리를 뛸 수도 있다. 이처럼 가슴은 다리 6개를 모두 달고 있어 운동근육의 밀도가 높은 부위에 속한다.

날개는 앞날개와 뒷날개가 한 쌍씩 있다. 앞날개는 가운데 가슴에, 뒷날개는 뒷가슴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앞날개는 뒷날개보다 더 좁고 두껍다. 이처럼 두껍고 질긴 앞날개를 ‘복시(覆翅, tegmen)', 혹은 ‘두텁날개’라고도 부른다. 뒷날개의 경우 앉은 자세에서는 부채처럼 겹쳐 앞날개 밑에 접히고, 나는 자세에서는 크게 펼쳐져 날갯짓을 한다. 그러나 메뚜기는 날개에 비해 굵은 몸을 갖고 있어 비행 거리가 짧은 편이다. 종에 따라 날개가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퇴화된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 서식하는 꼽등이와 한국민날개밑들이메뚜기의 경우 날개가 없다.

숨구멍(기문)은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체절마다 한 쌍씩 있다. 숨구멍을 통해 산소는 몸 안으로 들어오고, 탄산가스는 몸 밖으로 나간다. 공기를 들이마실 때 앞쪽 숨구멍이 열리고, 공기를 내쉴 때 뒤쪽 숨구멍이 열려 공기의 흐름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고막은 소리를 내어 우는 종의 경우 앞다리의 정강이마디 위쪽에, 메뚜기과의 경우 첫 번째 배마디 옆쪽에 있다.
얼굴의 모양은 보통 긴 육각형이지만 섬서구메뚜기처럼 삼각형을 띠는 경우도 있다. 머리에는 한 쌍의 겹눈과 3개의 홑눈이 있다. 정수리 밑 겹눈 사이에 위치한 홑눈은 빛을 감지한다. 종에 따라 홑눈이 없는 것도 있다. 더듬이는 한 쌍이 있는데, 첫 번째 마디인 병절과 두 번째 마디 경절, 이외의 여러 편절이 더듬이 하나를 구성한다. 입은 물고 씹기에 적합한 저작구형(咀嚼口形)을 띤다. 먹이를 섭취할 때 큰 턱은 으깨거나 씹는 역할을 하고, 작은 턱은 큰 턱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내부형태

내부의 형태와 기능은 곤충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을 갖는다. 단, 메뚜기목 대다수가 액체가 아닌 고체, 동물이 아닌 식물을 먹기 때문에 장은 짧으면서도 넓고 곧은 형태를 띤다. 이러한 형태는 지속적인 섭취와 배설을 가능하게 한다.
메뚜기는 번데기 시기를 거치지 않고 알, 애벌레, 어른벌레로 자라는 불완전변태를 한다. 불완전변태를 하는 애벌레를 약충(nymph)라고도 부른다. 교미는 수컷이 암컷 위에 앉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암컷은 체내수정을 통해 알을 낳는다. 식물이나 땅 위에 여러 개의 알을 가로 눕혀 낳는 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종이 산란관을 땅 속에 넣어 여러 개의 알을 한꺼번에 낳는 편이다.

애벌레는 날개가 발달하지 않은 작은 어른벌레의 모습을 띤다. 어른벌레만큼 먹이를 먹고 어른벌레처럼 생활하기 때문에, 어른벌레와 경쟁하면서 성장한다. 어른벌레는 탈피를 하지 않으며, 생식에 주력한다.
서식은 땅 위, 풀 위, 나무 위 등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종이 식물의 잎을 먹지만 어리여치나 여치처럼 곤충을 먹는 종도 있다. 대부분 의태가 발달하여 주변 환경에 따라 보호색을 띠며, 여치아목은 밤에, 메뚜기아목은 낮에 활동하는 편이다. 보통 알로 겨울을 나지만, 각시메뚜기처럼 어른벌레로 겨울을 나는 종도 있다.

일부 종의 수컷은 소리를 낸다. 여치과와 귀뚜라미과는 양 앞날개를 이용해 소리를 내고, 메뚜기과 중 일부는 앞날개와 뒷다리의 종아리마디를 문질러 소리를 낸다. 따라서 종마다 내는 소리가 다른 것은 앞날개의 형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방울벌레, 철써기, 풀종다리 등 비교적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은 예부터 애완곤충으로 사육되기도 했다.

메뚜기떼

메뚜기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곤 한다. 메뚜기떼의 밀도는 메뚜기의 발육상태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메뚜기떼의 밀도 및 어른벌레의 발육형태에 따라 메뚜기의 종류는 크게 개별형(solitary)과 집단형(gregarious)으로 나뉜다. 낮은 밀도에서 자란 개별형 어른벌레는 일정한 색깔을 띰과 동시에 큰 넓적다리마디와 앞가슴등판을 갖고, 높은 밀도에서 자란 집단형 어른벌레는 짧은 넓적다리를 갖는다. 개별형과 집단형의 중간 형태는 애벌레에서 어른벌레로 성장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개별형은 서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야간에 떼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이 있고, 집단형은 알과 애벌레 시기부터 서로 경쟁을 시작해 서로 생리적, 신경적 자극을 주고받는 특징이 있다.

메뚜기떼는 취식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기르는 작물에 해를 입히기도 한다. 땅강아지(채소, 보리), 벼메뚜기(벼) 쌕쌔기(벼), 풀무치(각종 작물) 등이 대표적인 해충으로 꼽히는 가운데 초식성인 메뚜기아목은 대부분 해충의 성격을 갖는다. 이들은 벼, 채소, 과일 등을 갉아먹거나 나뭇가지에 산란을 하는 방식으로 식물에 크고 작은 해를 입힌다.

전 세계에서 메뚜기떼 피해가 심한 대표적인 지역은 아프리카이다. 1784년 남아프리카에서 약 3천억 마리의 메뚜기가 약 3천㎢의 농토에 해를 입힌 것이 최악의 기록으로 꼽힌다. 20세기 이후에도 1986년 8월 말리를 비롯한 아프리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메뚜기떼 피해가 있었고, 마다가스카르에서는 1957년·1998년·2011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메뚜기떼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2011년 마다가스카르에서 메뚜기떼가 피해를 입힌 농토는 3천㎢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 바 있다.

한국 역시 예부터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8번, 백제 5번, 신라 19번의 대규모 피해가 있었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메뚜기목 곤충을 순우리말로 '누리'라 칭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종이 벼메뚜기인데, 벼메뚜기는 1960~1980년대 농약사용이 보편화하면서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친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농약 사용량이 줄면서 1990년대 이후 개체수가 늘어난 상태이다.
볶은메뚜기
옛 어른들에게는 추억의 간식거리이자 고단백 식품으로 아시아에서 요리 재료로 쓰이고 있답니다. 고소한 맛으로 술안주로도 사랑받고 있는 메뚜기 요리를 추천합니다.

기본정보

· 구입요령 : 시중에서 말린 것으로 구입 가능하며 색깔이 바랜 것과 오래되어 냄새가 나는 것은 피한다.
· 보관온도 : -20℃~0℃
· 보관일 : 1개월
· 보관법 : 깨끗이 손질하여 냉동 보관한다.
· 손질법 : 이물질을 골라내고 물에 한 번 살짝 씻은 뒤 요리에 이용한다.
· 산지특성 및 기타정보 : 들녘이 있는 곳에서 잘 잡힌다.

섭취정보

· 섭취방법 : 기름에 볶아서 먹는다.
· 궁합음식정보 : 간장 (메뚜기의 비릿한 맛을 완화시켜주고 간을 하여 섭취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 다이어트 : 고단백 식품으로 단백질 보충에 좋다.
· 영양성분
니아신
1.80mg
나트륨
254.00mg
단백질
64.20g
당질
0.00g
레티놀
0.00㎍
베타카로틴
0.00㎍
비타민 A
276.00㎍RE
비타민 B1
0.25mg
비타민 B2
5.60mg
비타민 B6
0.74mg
비타민 C
20.00mg
비타민 E
0.34mg
식이섬유
0.00g
아연
7.90mg
엽산
13.50㎍

585.00mg
지질
2.40g
철분
42.00mg
칼륨
814.00mg
칼슘
25.00mg
콜레스테롤
192.00mg
회분
3.50g


영양성분 : 100g 기준
섬서구메뚜기

괴물메뚜기 습격사건

수백만 마리의 괴물메뚜기 떼가 습격하는 바람에 호주 전역이 몸살을 앓았다.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을 기근에 허덕이게 만들었던 사막메뚜기 떼에 버금간다. 하늘을 뒤덮은 괴물메뚜기는 사막메뚜기처럼 곡물을 모조리 갉아먹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마치 성경의 출애굽기에 기록된 황충의 떼와 같은 재앙이 현실 속에서 펼쳐진 셈이다.

사막메뚜기 명성에 도전장을 내민 괴물메뚜기가 나타나자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가장 먼저 국민 MC 유재석을 떠올렸다. 혹시 말이라도 통하지 않을까 희망을 걸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분위기다. 그러나 호주에 대발생한 괴물메뚜기는 몸길이 8㎝ 정도의 악명 높은 북부메뚜기였다. 특히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을 중심으로 천문학적인 메뚜기 떼가 발생했다.

메뚜기 대발생과 홍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호주는 120년 만에 최악의 홍수가 발생했다. 홍수가 끝난 뒤 수분 공급이 풍족해지자 습도가 매우 높아졌다. 또한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기온도 올라갔다. 높은 습도와 기온은 북부메뚜기 번식에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제철 만난 괴물메뚜기는 활개를 치며 논밭을 초토화시켰다.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먹어치우는 식량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다. 농부들이 황충의 떼를 보며 근심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초대형 홍수와 산불에 이어 메뚜기 떼 습격까지 받게 된 호주 국민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퀸즈랜드를 넘어 뉴사우스웨일즈, 빅토리아 주, 남호주 주까지 호주 절반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호주 농업부에서는 75년 만에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헬리콥터까지 동원해서 살충제를 대규모로 살포했지만 메뚜기 떼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메뚜기 떼를 박멸하지 못 하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환경 변화로 대발생한 메뚜기 떼를 인간이 쉽게 조절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연에 의해 대발생한 건 오로지 자연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74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도 메뚜기 재앙으로 농작물에 큰 손실이 발생했다. 그런데, 주지사 필스베리는 살충제 대신 기도의 날을 선포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자연의 도움으로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 지 3일 만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고 한파가 닥치면서 메뚜기 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학자들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애타는 농민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까지 전달되었던 것일까? 자연 재앙을 조절하는 힘은 오로지 위대한 자연에게 달려 있다. 자연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도 괴물메뚜기 떼처럼 주목받은 녀석이 2010년 출현했다. 전국을 들썩거리게 만든 꼽등이다. 춘천 지역에 대발생한 꼽등이는 메뚜기 대발생 때와 똑같은 원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름철 비가 많이 내려서 습도가 높아졌고,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자 꼽등이 번식에 최적의 조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꼽등이 개체수가 증폭했고, 사람들은 괴상한 모습의 꼽등이를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긴 더듬이와 굽은 등을 가진 흉측한 모습의 꼽등이는 메뚜기보다 훨씬 더 소름끼치고 혐오스러운 모양새다. 몸속에서 기다란 선충 연가시까지 나와서 단기간에 가장 혐오스러운 해충의 대표가 되었다. 괴상한 모습의 꼽등이는 꼽등이 괴담과 꼽등이 송을 유행시킬 만큼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호주 괴물메뚜기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괴물메뚜기와는 달리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하나도 없다. 다만, 환경 조건이 좋아서 급증한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몸서리친다.

황충의 떼가 『고려사』와 『성종실록』에 등장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도 메뚜기 떼 피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농사에 피해를 주는 메뚜기' 하면 가장 먼저 벼메뚜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호주 괴물메뚜기와 벼메뚜기는 다르다. 괴물메뚜기가 고온다습한 날씨를 좋아하는 반면 벼메뚜기는 고온건조한 날씨를 좋아한다. 이처럼 메뚜기는 종류에 따라 번성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이 각기 다르다.
벼메뚜기는 성충과 약충 모두 벼과 작물을 장기간에 걸쳐서 갉아먹는다. 벼, 밀, 보리, 조, 목화, 배추, 고구마, 콩 등 다양한 기주식물을 가해한다. 알로 월동하다가 6월에 부화되면 새끼 메뚜기가 출현한다. 처음엔 논 주변의 벼과 작물을 갉아먹다가 곧 본논으로 이동한다. 잎을 갉아먹다가 이삭까지 피해를 입힌다. 8~9월이 되면 성충이 된 벼메뚜기는 짝짓기를 하고 논둑이나 흙덩이 사이에 100여 개의 알을 몇 개의 무더기로 낳는다.
긴날개밑들이메뚜기
요약 메뚜기목 메뚜기과의 곤충.
들,밭,둑, 주서식지~~~
긴날개밑들이메뚜기
학명계문강목과이칭/별칭멸종위기등급크기몸의 빛깔분포지역
Ognevia longipennis Shiraki
동물
절지동물
곤충류
메뚜기목
메뚜기과의 곤충
긴날개거품메뚜기
미평가(NE : Not Evaluated, 출처 : IUCN)
몸길이 24~40mm
푸른색
한국·일본·중국·극동 러시아
몸길이 24~40mm이다. 몸은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띤다. 겹눈은 암갈색이며 겹눈 뒤에서 가슴에 이르기까지 검은색 세로줄 무늬가 있다. 앞다리와 중간다리는 검은색에 가까우며 뒷다리는 초록색이다. 뒷다리의 대퇴마디에는 검은색 줄무늬가 있으며 끝쪽에는 잔털이 있다.
긴날개밑들이메뚜기 짝짓기메뚜기목 메뚜기과.
알에서 애벌레로 부화하여 어른벌레가 되는 안갖춘탈바꿈을 한다. 벼메뚜기와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우나 크기가 다소 큰 편이다. 어른벌레는 물이 잘 빠지는 흙속에 알을 낳으며 알로 겨울나기를 한다. 한여름부터 시작하여 가을철까지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긴날개거품메뚜기라고 한다. 한국·일본·중국·극동 러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친환경 농업을 알리는 홍보대사'
농부들은 벼메뚜기만 보면 이맛살을 찌푸린다. 벼메뚜기 때문에 주름살이 늘어가던 농부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메뚜기 퇴치를 위해 농약을 잔뜩 친 것이다. 그러나 살충제는 벼메뚜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숫자를 일부 조절할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수확된 쌀에 농약이 축적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래서 최근 유기 농업이 다시 기세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상위 포식자로 갈수록 농약이 축적되는 생물 농축 현상의 무서움을 실감하면서 친환경적인 농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

벼의 주요 해충인 벼메뚜기를 품질 좋은 쌀의 대명사로 홍보하는 지역도 있다. 반달가슴곰 복원지로 유명한 지리산 자락의 경남 산청이다. '산청 메뚜기 쌀'이라는 상호로 청정 지역에서 생산된 좋은 쌀임을 홍보하고 있다. 살충제에 약한 벼메뚜기가 많이 살고 있는 논은 그만큼 살충제를 적게 친 친환경 쌀이라는 걸 입증하는 셈이니까. 요즘은 품질 좋은 쌀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벼메뚜기 잡기 행사까지 벌이고 있다.
벼메뚜기 (우리벼메뚜기) (♀)Oxya chinensis sinuosa Mistshenko, 
해충 벼메뚜기가 좋은 쌀을 알리는 생물이 되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좋은 쌀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반딧불이, 두꺼비 등의 청정지역 생물을 내세워 홍보하고 있다. 청정지역 생물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된 쌀은 질 좋은 친환경 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지표가 된다.
벼메뚜기 (우리벼메뚜기) (♀)Oxya chinensis sinuosa Mistshenko,


배고픈 시절 벼메뚜기는 개구리와 함께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해주던 중요한 식품이었다. 요즘도 뷔페식당에 가면 간혹 볼 수 있다. 농가에서 소, 돼지, 닭 등의 가축을 사육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메뚜기를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동물들이 떼죽음 당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일각에서는 벼메뚜기 같은 곤충이 미래의 훌륭한 식량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벼메뚜기와 달리 땅에서 잘 발견되는 송장메뚜기는 맛이 써서 절대 먹지 않았다. 땅색, 혹은 말라죽은 흑회색 빛깔을 띠는 송장메뚜기는 어떤 한 종류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를 포함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옛날에는 무덤가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땅 빛깔 닮은 메뚜기 전체를 송장메뚜기라 불렀다. 송장메뚜기는 본래 각시메뚜기를 말하는데, 땅에 많아 땅메뚜기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남부지역에만 주로 살기 때문에 중북부 지역 사람들은 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팥중이와 두꺼비메뚜기를 송장메뚜기라고 불렀다.
송장메뚜기라 불리는 여러 메뚜기들
각시메뚜기
두꺼비메뚜기
등검은메뚜기
팥중이
지금도 무덤가나 야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팥중이를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송장메뚜기라고 생각한다. 몸빛깔이 거무튀튀해서 붙여진 팥중이는 땅과 빛깔이 매우 닮아서 땅색메뚜기라고도 불린다. 땅과 닮은 보호색은 천적의 눈을 피하게 해준다. 벼에 사는 벼메뚜기가 초록빛깔을 갖는 것처럼. 몸이 우툴두툴한 두꺼비 피부를 닮은 두꺼비메뚜기와 등 부분이 검은 등검은메뚜기도 풀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종이다.

그런데, 땅과 비슷한 빛깔을 갖는 메뚜기를 왜 송장메뚜기라 불렀을까? 메뚜기들의 천국은 햇볕이 잘 들고 넓은 풀밭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공동묘지가 늘었고 그 곳에 가면 메뚜기들이 많았다. 아이들도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공동묘지에서 곧잘 뛰어놀았다. 공동묘지에 많은 흑회색 빛깔의 메뚜기를 발견한 아이들은 질색한다. 송장메뚜기의 창백한 모습을 보면 죽음을 떠올리게 되니까. 마치, 중국 귀신 강시의 핏기 없는 얼굴처럼 말이다.
메뚜기를 꽉 쥐고 있으면 입에서 거무죽죽한 냄새나는 소화액을 토해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물질을 분비하여 천적을 쫓아내기 위한 기지를 발휘한다. 특히 팥중이, 두꺼비메뚜기 같은 송장메뚜기들은 시꺼먼 소화액을 더 많이 방출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서 자연스럽게 기피하게 마련이다. 벼메뚜기와 방아깨비는 쉽게 잡아서 가지고 놀지만 송장메뚜기는 모두 외면했다. 메뚜기 중에는 몸집이 가장 작은 4~5㎜의 좁쌀메뚜기도 있다. 좁쌀처럼 작지만 점프 실력은 여느 메뚜기 버금간다. 마름모 모양의 모가 난 몸통을 지닌 모메뚜기는 체색변이가 심해서 몸 빛깔과 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우리나라에는 좁쌀메뚜기과, 모메뚜기과, 메뚜기과, 섬서구메뚜기과 등 60여 종의 다양한 메뚜기가 살고 있다.
풀밭이나 작물에 사는 섬서구메뚜기, 방아깨비, 벼메뚜기 등은 성충과 약충 모두 식물을 갉아먹고 산다. 그래서 농작물의 해충이 된다. 그런데, 같은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녹색, 갈색, 회갈색 등 체색변이가 심하다. 그렇다고 카멜레온처럼 몸빛깔이 수시로 바뀌는 건 아니다. 처음 태어날 때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는 빛깔을 갖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빛깔을 지닌 채 살아간다.
체색변이를 하는 방아깨비녹색형과 갈색형이 있다.
섬서구메뚜기는 길쭉한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머리를 갖고 있어서 언뜻 보면 방아깨비와 닮았다. 그러나 방아깨비보다 몸집이 훨씬 더 작다. 또한 섬서구메뚜기는 뒷다리가 다른 다리와 길이가 비슷하지만 방아깨비는 유난히 뒷다리가 길어서 구별된다. 섬서구메뚜기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방아깨비 수컷은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따닥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성냥개비라 해서 따닥깨비라고도 불린다. 물론 방아깨비 암컷은 소리를 내지 않고 몸집도 수컷보다 훨씬 더 크다.

섬서구메뚜기는 종종 새끼를 업고 다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새끼라고 말하는 건 수컷이다. 섬서구메뚜기 수컷은 25㎜ 내외지만 암컷은 42㎜ 정도로 수컷보다 훨씬 더 크고 뚱뚱하다. 수컷이 짝짓기를 위해서 암컷 위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모습인데도 크기 차이가 심하다 보니 새끼를 업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몸집의 차이가 심하면 같은 종류인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아서 곧잘 오해가 발생한다.

섬서구메뚜기는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뚜기다. 벼, 보리뿐 아니라 콩, 옥수수, 국화, 들깨, 감자, 고구마 등 다양한 농작물을 갉아먹는다. 잎을 불규칙하게 갉아먹기 때문에 여기 저기 구멍이 뚫린다. 약충과 성충 모두 똑같은 먹이를 먹기 때문에 피해 시기가 길고 광범위하다. 특히 주변에 풀이 많은 산간 지역이 있다면 발생이 더욱 많아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짝짓기를 위해 암컷 위에 올라탄 수컷 섬서구메뚜기
물론 어린 약충 시기에는 섭식량이 적어서 문제가 덜하다. 그러나 노숙 약충과 성충은 잎을 많이 갉아먹기 때문에 피해가 크다. 나방 유충처럼 1년에 다발생하지 않고 단 1회만 발생한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알로 겨울을 지내고 5월 하순부터 6월 상순에 부화하여 약충이 된다. 6월에서 11월까지 잎을 가해한다. 발생량이 많은 8~9월경에는 줄기만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우는 바람에 피해가 심각하다.

방아깨비는 산과 들판, 경작지의 벼과식물이 자생하는 초원에 살면서 벼과 작물을 가해한다. 섬서구메뚜기와 마찬가지로 알로 겨울을 나고 연 1회 발생한다. 성충은 7~10월에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메뚜기 종류 중 크기가 가장 크다. 몸집은 크지만 섬서구메뚜기에 비해서 피해는 크지 않다. 방아깨비는 벼과식물만 주로 가해하지만 섬서구메뚜기는 가해 작물 범위가 매우 넓어 피해가 더 크다.
모습이 비슷해서 간혹 헷갈리는 섬서구메뚜기와 방아깨비
메뚜기 때문에 잎에 구멍이 뚫리면 보통은 약제 방제를 실시한다. 그러나 메뚜기들은 이동성이 좋기 때문에 포장 주위의 밀도를 잘 살펴야 한다. 다행스러운 건 나방이나 노린재에 비해 피해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점이다. 피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약제 방제보다는 목초액 등의 유기농 농약을 사용하는 게 좋다. 작물이 메뚜기 피해에 내성을 갖도록 품종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땅을 유지시켜 생존력 강한 작물을 기른다면 메뚜기 피해쯤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아직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발생한다면 농작물 피해가 심각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적은 양의 메뚜기 떼가 하루에만 약 2천 500명 분량의 식량을 먹어치우니까! 무시무시한 메뚜기 떼의 대발생을 막으려면 우선 자연 환경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 뒤에는 반드시 해충이 들끓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환경을 보존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길만이 우리의 식량을 지키고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등검은메뚜기
학명생물학적 분류크기출현시기분포정보
학명계문강목과멸종위기등급크기몸의 빛깔서식장소분포지역몸길이는 31~40mm이다. 몸은 갈색이다. 앞가슴등판은 짙은 갈색을 띠고 좌우로 가는 황색 테두리가 있다. 겹눈에는 가는 세로 줄무늬가 있다.
Shirakiacris shirakii
동물
절지동물
곤충류
메뚜기목
메뚜기과
미평가(NE : Not Evaluated, 출처 : IUCN)
몸길이 31∼40㎜
적갈색 바탕에 점무늬가 흩어져 있음
농토 근처의 풀밭 또는 습하고 잡초가 엉성하게 난 빈터나 풀밭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몸길이 31∼40mm(날개 끝까지)이다. 몸은 적갈색 바탕에 점무늬가 흩어져 있다. 겹눈에는 가는 세로줄무늬가 있다. 정수리돌기는 편평하고 그 끝은 둥글며 밑은 좁아진다. 옆가두리는 약간 넓고 뒷가두리에 테두리가 있다. 얼굴의 솟아오른 부분은 앞쪽으로 구부러졌고 작은 점이 드문드문 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앞가슴은 짙은 갈색이고 가운데는 넓다. 앞가두리는 약간 둥글며, 뒷가두리는 둔하게 모가 났다. 중앙의 융기선은 가늘며 옆가두리선은 노란색으로 굵고 모두가 3개의 가로홈으로 잘려져 있다. 이 3개의 가로홈은 중앙 바로 뒤에 있다. 이 노란색의 옆가두리선이 있어 다른 종과 쉽게 구분된다. 앞가슴의 배돌기는 굵고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며 앞뒤가 넓적하다.

수컷의 버금생식판은 짧은 원뿔 모양이고 암컷의 산란관에는 치열이 없다. 앞날개는 뒷무릎보다 약간 길고 연한 갈색 또는 황갈색인데 흑갈색 무늬가 드문드문 있다. 뒷다리 넓적다리마디의 등쪽과 바깥쪽에 짙은색의 비스듬한 띠가 3줄 있고 아랫면과 안쪽은 뒷다리 종아리마디와 같이 홍색이나 후자는 밑이 노란색이며 3개의 흑갈색 고리가 있다.

농토 근처의 풀밭 또는 습하고 잡초가 엉성하게 난 빈터나 풀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콩과식물을 주로 먹는다. 성충은 여름에 나타나 늦가을까지 볼 수 있다. 연 1회 발생하고, 알로 겨울을 지낸다. 한국·일본·중국·동남아시아·인도 등지에 분포한다.


다소 습하고 잡초가 엉성하게 난 빈터나 풀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충은 8~10월에 출현한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메뚜기 #가시모메뚜기 #갈색여치 #강변메뚜기 #메뚜기 #메뚜기떼 #벼메뚜기 #해충 #등검은메뚜기 #긴날개밑들이메뚜기 #절지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