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수용하라.
기뻐하면 기뻐할 일만 생겨난다
힘든 것에는 뜻이 있다.
감사함으로 수용하라.
믿음의 열도를 10배로 늘여라.
100배의 수확이 보장된다
모두를 위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나를 위하는 지름길이다
진리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
길 한번 잘못들면 평생 후회한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곰탕, [ Gom tang , 精熬牛肉汤 ],
모방할 수 없는 신비한 국물,
가마솥에서 푹 끓여낸 곰탕은 뼈와 살이 시간과 함께 녹아 내려 뽀얀 국물로 재창조된 맛이다. 곰탕은 설렁탕과 함께 한식 중 국물 요리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쇠뼈의 시원한 맛과 한우 고기의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동시에 지닌 곰탕은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해 기력을 돋우는 데 최고로 꼽힌다.
고기를 진하게 푹 고아서 끓인 국물은 영양성분이 국물에 우러나 훌륭한 영양식일뿐만 아니라 노화방지와 피로회복, 빈혈예방에도 좋은 음식이다.
곰탕은 여러 부위의 고기를 한데 모아서 끓일수록 맛이 있다. 각각의 부위마다 달라지는 미묘한 맛의 특징이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쇠고기의 부위를 세분화하여 먹는 능력에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앞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 부위별 살을 아프리카 보디 족은 40부위, 영국인은 25부위 정도로 구분하는 반면 우리는 125부위 정도로 세밀히 구분할 만큼 탁월한 미각을 가지고 있다.
걸랑, 고거리, 고들개, 곤자소니, 꾸리, 다대, 달기살, 대접살, 도래목정, 둥덩이, 떡심, 만하바탕, 만화, 멱미레, 발채, 새창, 서대, 서푼목정, 설낏, 설밑, 수구레, 홀떼기, 이보구니 등이 소의 대표적인 부위별 살 이름. 이보구니는 소 잇몸살, 수구레는 쇠가죽안에 붙어있는 아교질을 일컫는다.
사골을 푹 고아서,,
곰탕이란 고기를 맹물에 넣고 끓인 국이라는 의미의 공탕(空湯)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고기를 푹 곤 국이라는 의미의 곰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시의전서』에는 '고음(膏飮)은 소의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떼기, 꼬리, 양, 곤지소니, 전복, 해삼을 큰 그릇에 물을 많이 붓고 약한 불로 푹 고아 맛이 진하고 국물이 뽀얗다'라고 오늘날의 곰탕을 설명하고 있다.
곰탕의 '곰'은 원래 고기나 생선을 천천히 푹 삶은 국을 뜻하는데 '고다'의 '고'는 기름지다는 뜻이라고 한다. '고음'은 기름진 음식이고 그 말이 줄어서 '곰'인데 여기에 국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곰국, 탕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곰탕이 되는 것이다.
주문진 mulgomtang (주문진 물곰탕)의 지역 주문진 . 제에서 곰치 , 김치 와 봄 양파
장국밥, 설렁탕, 곰탕,
우리나라의 밥상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으로 구성되는데 밥과 국 한 가지는 기본적으로 갖춘다. 국에는 콩나물국, 뭇국, 미역국, 시금치·아욱·배추·시래기 등을 넣은 된장국 그리고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이 있고, 쇠고기의 양지머리나 사태를 넣고 끓인 고깃국이나 곰탕, 설렁탕, 육개장 등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급식 이었던 장국밥.
우리나라 사람은 탕민족이라고 불릴 만큼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국에다 밥을 만 음식을 탕반(湯飯) 또는 장국밥이라 하며, 특별히 다른 찬을 갖추지 않아도 깍두기나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장국밥의 탕은 대개 고기로 끓인 설렁탕, 가리탕, 곰탕, 육개장 등이다.
장국밥은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와 『규곤요람』에 나오며, 궁중 의궤에 잔치나 행사 때 군인이나 악공, 여령들이 먹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규곤요람』의 장국밥은 “국수 대신 밥을 만 것으로,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려서 그 장물을 밥 위에 붓는다”고 하였다. 장국밥은 그 유용함으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있었으나 너무 일반적인 음식이라 굳이 음식책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도 자연히 외식이나 단체 급식용 또는 손쉬운 일품요리가 필요해졌다. 전통 음식점으로 상밥집(床食家(상식가))이 있기는 하였으나 보다 간단한 장국밥집이 많이 생겨났다. 조선조 풍속화 중 주막이나 장터에서는 으레 주모가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떠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국밥은 예부터 전쟁터나 노역장, 행사 때에 많은 사람에게 간편하게 급식할 수 있는 식단이었다.
탕반가(湯飯家)의 출입구에는 둥근 종이통에 하얀 종이 술을 붙여서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아 음식점임을 알렸다고 한다. ‘무교탕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헌종(1834~1849년)도 사복을 입고 먹으러 다녔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장 고급 대중음식점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양반들이 종에게 사방등(四方燈)을 들려서 이 탕반집에 드나들었다. 사방등을 들린 대감이 오면 뒤채로 따로 모시거나 일반 손님과 합석하게 될 때는 상민은 먹다 말고 자리를 피했다가 대감이 가고 나면 다시 들어와서 먹었다고도 한다.
문인 박종화는 ‘무교탕반’에 대하여 “양보국밥집이 있었는데 양보는 갑오경장 전후의 사람이었다. 이 집의 장국밥은 양지머리만을 삶아 맛이 좋은데 젖퉁이고기를 넣어 주고, 갖가지 양념으로 고명한 산적을 뜨끈뜨끈하게 구워서 넣어 주어 유통과 산적이 잘 어울려서 천하진미였다”고 칭찬하였다. ‘무교탕반’ 외에 수표다리 건너편의 ‘수교탕반집’과 ‘백목탕반집’도 유명하였다. 이 두 탕반집에 드나드는 손님은 계층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수교탕반집’은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가 많고, ‘백목탕반집’은 돈 많은 상인이나 오입쟁이가 단골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국집이 거의 없어지고 곰탕이나 설렁탕이 탕반의 주류를 이룬다. 장국밥 중에 특이한 향토 음식이 하나 있는데 함경도의 가리국이 그것으로 본고장 사람들도 가루국이라 부르기도 하는 더운 장국밥이다. 함경도 하면 회냉면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냉면집보다 가리국을 전문으로 파는 집이 훨씬 먼저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1970년경 향토 음식을 조사할 무렵 ‘명동칼국수’ 뒷골목에 함경도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가리국밥을 팔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가리국 만드는 법을 보면, 소의 사골과 석기살을 삶아서 푹 끓이면서 위에 뜨는 기름을 말끔히 걷어 낸다. 커다란 사기 대접에 밥을 담고 위에 삶은 고기를 결대로 찢어 얹고, 삶은 선지도 큼직하게 썰어 얹고, 두부 한 모를 통째로 장국에 넣어 따끈하게 데운 것과 연한 쇠볼깃살로 만든 육회를 얹고 뜨거운 장국을 부어 낸다. 제대로 먹으려면 먼저 국물을 죽 들이마시고 매운 다대기를 넣어 비빔밥처럼 비벼서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다시 그릇에 더운 장국을 부어 마신다. 선지를 삶을 때 끓는 물에 넣으면 구멍이 숭숭 나므로 낮은 불에서 서서히 삶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쓴다. 가리는 갈비를 말하지만 갈비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원래는 갈비를 넣고 끓였는데 차차 쇠갈비만이 아니라 사골과 갈비 밑에 붙은 석기살을 쓰게 되었다고도 한다.
조리법,
특별히 다른 찬을 갖추지 않아도 깍두기나 김치 한 가지만으로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탕반(湯飯).
장국밥
재료(6인분) 양지머리 400g, 무 200g, 밥 6공기, 물 20컵(4리터), 고사리 200g, 도라지 200g, 콩나물 200g, 후춧가루·깨소금·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각 적량 (가) 소금 1작은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1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 (나) 간장(진간장) 1큰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다) 소금 1작은술,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2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만드는 법 1. 양지머리를 덩어리째 찬물에 씻어서 펄펄 끓는 물에 무와 함께 끓인다. 2. 무가 무르게 익으면 먼저 꺼내서 나박썰기로 하고, 고기는 더 무르게 고아서 건져 얇게 저며 썰어 (가)의 양념으로 무친다. 3. 고사리는 (나)의 양념장으로 무쳐서 볶고, 도라지는 소금으로 주물러서 (다)의 양념 반 분량으로 무쳐서 볶고, 콩나물은 소금을 넣고 삶아서 (다)의 남은 양념으로 무친다. 4.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으로 장국 간을 맞추고 양념한 고기와 무를 다시 넣어 한소끔 끓인 다음 뚝배기에 더운 밥을 담고 더운 장국을 붓고 나물을 고루 얹는다. 기호에 따라 파, 깨소금, 고춧가루 등을 넣는다.
곰탕과 설렁탕,
요즘에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고기 부위와 간을 맞추는 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설렁탕은 사골과 도가니, 양지머리 또는 사태를 넣고, 우설(牛舌), 허파, 지라 등과 잡육을 뼈째 모두 한 솥에 넣고 끓인다. 이에 비하여 곰탕은 소의 내장 중 곱창, 양, 곤자소니 등을 많이 넣고 끓인다. 설렁탕에 허파나 창자를 넣기도 하나 곰탕보다 뼈가 많이 들어가서 국물이 한결 뽀얗다. 곤자소니는 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 많은 부분이고, 도가니는 무릎도가니와 소의 볼깃살 두 가지인데 보통 무릎도가니를 말한다. 곰탕은 다시마나 무를 넣어 끓이며, 국물이 진하고 기름지다. 또 설렁탕은 먹는 사람이 소금과 파를 넣고 간을 맞추어 먹지만, 곰탕은 국을 끓일 때 간장(진간장)으로 간을 맞추어서 낸다. 하지만 요즘은 설렁탕이든 곰탕이든 대부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먹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을 모시는 제사로 선농제, 중농제, 후농제를 지냈으나 조선조 말에는 선농제만 남게 되었다. 지금도 서울의 동대문 밖 종암동에 선농단(先農壇)이란 곳이 남아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매년 경칩 후 첫 번째 해(亥)일 축(丑)시에,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신농에 제사를 지내거나 친히 논밭을 갈아 농사의 대본을 보이는 행사인 적전지례(籍田之禮)를 행하였으며, 가끔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농경제는 국가 규모로 지내는 큰 제사로 왕부터 정승, 판서, 문무백관 그리고 상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소를 제물로 올렸다.
『성종실록』에 보면 성종 6년에 원산대군과 재상 신숙주 등을 대동하고 선농단에 제사 지낸 뒤, 백성을 위로하여 함께 음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신하가 임금께 바친 헌시(獻詩) 중에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하여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퍼져······”라는 시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선농단에서 탕을 끓여 함께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제사는 1908년 일본의 입김으로 중단되었는데 마침 그 해에 몹시 가물었다. 그래서 순종은 신농이 제사를 받지 못하여 노여워했기 때문이라 여겨 따로 대궐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설렁탕을 끓였다는 기록을 남긴 임금으로는 태조, 태종, 세종 등이 있다. 『조선요리학』(1940년)에서는 “세종대왕이 친경할 때 갑자기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까지 견딜 수 없게 되자 친경 때 쓰던 농우(農牛)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는데 이것이 설농탕(設農湯)이 되었다”고 하였다.
제물로 생쌀과 생기장, 소와 돼지를 희생하여 통째로 놓고 차례를 올리는데, 행사가 끝나면 미리 준비한 큰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갈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서 썰어 놓고 친경 때 소를 몰던 노농(老農)과 예순 살 이상 노인에게 우선 먹이는데 그릇은 근방 농가에서 빌려 온 뚝배기를 쓰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파로 양념하였다. 임금 근처에는 원래 일반 백성이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이 때만은 임금이 쟁기를 세 번 민 다음 정승 이하도 쟁기를 밀어 농사 짓는 시범을 보이는 모습을 근방의 농부들이 구경하도록 하락했다고 한다.
설렁탕은 집에서 만든 것보다 전문점 것이 훨씬 맛있다. 곰탕이나 설렁탕은 집에서 적은 양을 끓여서는 제맛이 안 난다. 구색 맞추어 고기 부위를 고르기도 어렵고, 큰 솥에 많은 양을 푹 끓여야 제맛이 나기 때문이다. 개화기에는 설렁탕 전문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하며, 이들 설렁탕집은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 옆에 피 묻은 쇠머리를 놓아 간판으로 삼았다. 설렁탕집에서는 소 한 마리를 우피와 오물만 빼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 한 시까지 끓였다. 자정 무렵이면 푹 고아져 진국이 되므로 그 때쯤 단골 손님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때 이름난 설렁탕집이 여러 곳 있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화신 뒤의 이문 설렁탕집이다. 손님이 오면 바로 앞에서 찬밥을 담은 뚝배기에 국물을 부어 토렴하여 데우고 그 위에 국수 한 사리와 얇게 썬 편육 조각을 손으로 집어 얹고 다시 끓는 국물을 부어 말아 준다. 손님은 상 위에 놓인 소금과 고춧가루, 후춧가루, 파를 적당히 넣어 먹는다. 입이 짧은 서울 손님들은 기호에 따라 혀밑, 지라, 만하, 우랑, 우신, 혹살 등 원하는 고기 부위를 따로 찾기도 했다고 한다. 반찬으로는, 새우젓국을 넣지 않고 소금으로 간을 한 깍두기를 함께 낸다. 남은 국은 모아서 돼지먹이로 썼는데 돼지와 새우젓이 상극이라 일부러 새우젓을 넣지 않고 담갔다고 한다.
이처럼 맹물에 고기만 넣어 끓이는 아주 간단한 음식인 설렁탕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 같지는 않고, 훨씬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 말 몽골의 영향으로 육식을 즐기게 되었는데, 몽골에서는 고기를 맹물에 끓여서 만드는 음식이 가장 보편적이었으므로 그 무렵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끓여 선농탕이라 하다가 나중에 음운이 바뀌어 설렁탕이 되었다고도 하며, 설농탕(雪農湯)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국물 색깔이 눈처럼 흰색이라 나중에 붙여진 듯하다. 설렁탕이라는 음식 이름이 처음 나온 문헌은 『조선요리학』(1940년)이고,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옛날 책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곰탕은 곰국이라고도 하는데,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고음국(膏飮(고음))’은 “큰 솥에 물을 많이 붓고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넣고 은근한 불로 푹 고아야 국물이 진하고 뽀얗다”고 하였다. 이후의 음식책에도 모두 ‘곰국’으로 나오며 일반 가정에서도 곰탕보다는 곰국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곰국’은 “고기를 데친 쇠족, 꼬리털, 무를 통으로 넣어 곤 후 꺼내어 네모지게 썰어 진장 간을 하고, 고기는 육개장같이 썰어 장, 기름, 후춧가루, 깨소금을 쳐서 한참 주무른 후에 먹을 때 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하였다.
1. 쇠고기는 통 사태를 구매한다. 2. 신선한 도가니를 구매한다. 3. 손질된 곱창을 신선한 것으로 구매한다.
기초손질
1. 쇠고기 사태와 도가니를 냉수에 담아 1시간 간격으로 물을 3회 갈아주며 핏기와 불순물을 제거해 놓는다. 2. 곱창은 볼에 담고 밀가루와 굵은 소금을 뿌려 세차게 주무른 후 물에 씻어 다듬어 둔다. 3. 겨자가루에 40℃의 60ml의 물을 넣고 섞어 김이 오른 냄비 위에 엎어 10분 정도 발효시켜 발효겨자를 만든다.
재료 만들기
1. 냄비에 데쳐낼 재료인 소고기, 도가니, 곱창의 10배 양의 물을 준비하고 끓기 시작하면 재료를 넣어 약 5분 정도 데쳐낸다. 2. 깊이가 있는 냄비에 물 15L와 도가니를 넣고 센 불로 시작하여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낮추어 2시간 정도 은근하게 끓인다. 중간 중간 떠오르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3. 사태와 곱창을 도가니가 끓고 있는 냄비에 무, 마늘과 함께 넣고 1시간 더 끓인다. 4.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면 곱창과 소고기, 무를 꺼내 가로 3cm, 세로 3cm 크기로 각각 썰어 상온에 보관한다. 5. 국수를 끓는 물에 삶아서 1인분에 50g 정도 크기로 분리하여 물기를 빼서 마르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덮어 둔다. 6. 연겨자 소스 재료를 모두 섞어 소스를 만든다.
만들기
1. 곰탕을 끓일 때 고기의 잡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월계수잎, 올스파이스, 정향을 넣어 끓인다. 2. 곰탕 육수를 서빙 수에 맞추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3. 뜨거운 곰탕기를 준비하여 국수를 담고 그 위에 썬 소고기, 도가니, 곱창을 얹는다. 4. 곰탕 육수를 한번 끓인 후 곰탕기에 담고 마지막으로 썬 파를 올려 서빙한다. 5. 고수, 소금과 후추는 따로 서빙한다.
만드는 법 1.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를 토막 낸 것으로 준비해서 찬물에 1시간 정도 담가 핏물을 빼서 건진다. 사태나 양지머리 등 국거리 고기는 덩어리째 씻어서 건진다. 2. 큰 솥에 분량의 물을 붓고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를 넣어 끓인다. 끓어오르면 불을 약하게 하고, 위에 떠오르는 기름과 거품을 걷어내고 끓이는 도중에 파와 생강, 마늘을 크게 썰어 넣는다. 3. 고기가 반 정도 물러지고 국물이 우러나면 양지머리와 사태를 덩어리째 넣어 약한 불에서 푹 끓여 건지는 건지고 국물은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낸다. 4. 뼈에 붙어 있는 고기는 발라내어 작게 썰고, 양지머리와 사태 고기는 건져서 얇게 편육처럼 썬다. 5. 따뜻하게 데운 대접에 편육을 담고, 국물은 간을 맞추지 않고 다시 데워서 붓는다. 잘게 썬 파와 소금, 후춧가루, 고춧가루를 따로 낸다.
곰탕
흔히 ‘곰국’이라고도 하며 은근한 불로 고아 국물 맛이 진하고 기름지다.
재료(10인분) 쇠갈비(탕거리)·양지머리·양·곱창·곤자소니 각 500g, 물 10리터, 무(소) 2개, 파 4뿌리, 마늘 5쪽,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소금 적량 (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2큰술, 소금 2작은술, 다진 파 4큰술, 다진 마늘 2큰술, 참기름 2큰술, 후춧가루 1작은술
만드는 법 1. 양, 곱창, 곤자소니는 소금을 뿌리고 주물러서 깨끗이 씻는다. 양은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검은 막을 칼로 깨끗이 긁고 안쪽의 막과 기름 덩어리를 떼어 낸다. 2. 쇠갈비와 양지머리는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건진다. 펄펄 끓는 물에 국거리용 고기를 모두 넣고 센불에서 끓인다. 3. 국이 다시 끓어오르면 불을 줄이고 3~4시간 서서히 끓이고 도중에 무를 반으로 갈라서 넣고, 파와 마늘을 크게 썰어 넣는다. 위에 뜨는 기름과 거품은 말끔히 걷어낸다. 4. 고기와 무가 무르게 익으면 건져 내어 납작납작하게 썰어 (가)의 양념으로 고루 무친다. 5. 국물을 다시 불에 올려 펄펄 끓이다가 양념한 고기와 무를 넣고 끓여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이나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꼬리곰탕
쇠꼬리를 은근한 불에 푹 고아 낸 곰탕이다.
재료(10인분) 쇠꼬리 2kg(물 10리터, 파 3뿌리, 마늘 5쪽), 소금·후춧가루·파 적량 (가) 청장(재래식 간장(국간장)) 1큰술, 소금 2작은술, 다진 파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참기름 1큰술, 후춧가루 약간
만드는 법 1. 쇠꼬리는 4~5cm 폭으로 토막 내거나 덩어리일 때는 마디와 마디 사이의 연골 부분에 칼을 넣어서 끊어 쥔 겉의 질긴 막은 벗겨 내어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서 건진다. 2. 끓는 물에 쇠꼬리를 넣고 센불에서 끓이다가 불을 줄이고 3시간 정도 서서히 끓인다. 도중에 파와 마늘을 크게 썰어 넣고, 위에 뜨는 기름과 거품은 걷어낸다. 3. 살이 뼈에서 쉽게 떨어질 정도로 무르게 익으면 건져서 (가)의 양념으로 무치고, 국물은 식혀서 기름을 걷어낸다. 4. 국물을 다시 불에 올려 양념한 꼬리를 다시 넣고 끓여서 대접에 담고 소금, 후춧가루와 잘게 썬 파를 따로 담아 낸다.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소교목.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 또는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잎은 타원형 또는 도란형이고, 꽃은 7∼9월에 피며 홍색 또는 백색이다. 개화기가 길고 꽃이 아름다워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한자어로는 자미화(紫薇花)라 하며,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백일홍은 국화과 식물에도 있으므로 구별하기 위하여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수피를 긁으면 잎이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명은 Lagerstroemia indica L. 이다.
높이는 8m 내외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다. 수피가 미끄러울 정도로 매끈하고 새로 벗겨진 자리는 색깔이 연하기 때문에 수피가 알록달록하다. 소지(小枝)는 사각형이며 털이 없다. 잎은 마주나고 타원형 또는 도란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윤기가 있고 털이 없다.
꽃은 7∼9월에 피고 홍색 또는 백색이며 양성으로서 원추화서에 달린다. 꽃받침은 6개로 갈라지고 꽃잎도 6개로서 주름이 많다. 수술은 30∼40개이지만 가장자리의 6개가 가장 길고 1개의 암술은 길게 밖으로 나왔다.
열매는 넓은 타원형이고 10월에 성숙하며 6실 또는 7, 8실로 갈라져 있다. 개화기가 길고 꽃이 아름다워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양화소록(養花小錄)』에도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예전부터 정원수로 식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연못가에 많이 심었다.
꽃에는 활혈(活血)·지혈·소종(消腫)의 효능이 있어 혈붕(血崩)·월경과다·적백대하(赤白帶下)·외상출혈·장염·설사 등에 치료제로 쓰인다.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즈름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높이 약 5m이다. 나무껍질은 연한 붉은 갈색이며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무늬가 생긴다. 작은가지는 네모지고 털이 없다. 새가지는 4개의 능선이 있고 잎이 마주난다. 잎은 타원형이거나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며 길이 2.5∼7cm, 나비 2∼3cm이다. 겉면에 윤이 나고 뒷면에는 잎맥에 털이 나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양성화로서 7∼9월에 붉은색으로 피고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로 달린다. 꽃차례는 길이 10∼20cm, 지름 3∼4cm이다. 꽃잎은 꽃받침과 더불어 6개로 갈라지고 주름이 많다. 수술은 30∼40개로서 가장자리의 6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蒴果)로서 타원형이며 10월에 익는다. 보통 6실이지만 7∼8실인 것도 있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배롱나무(for. alba)라고 하는데, 인천광역시에서 자란다. 중국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꽃은 지혈·소종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 월경과다·장염·설사 등에 약으로 쓴다.
수고 5~6m 정도로 구불구불 굽어지며 자란다. 수피는 옅은 갈색으로 매끄러우며 얇게 벗겨지면서 흰색의 무늬가 생긴다. 타원형의 잎은 마주나고 둔두 또는 예두이고 원저이다. 표면에 광채를 띄며 털이 없고 뒷면 맥 위에 털이 듬성듬성 난다.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잎자루는 거의 없다. 가지 끝에 달리는 원추화서의 꽃은 홍자색으로 피며 늦가을까지 꽃이 달려있다. 꽃받침은 6개로 갈라지고 꽃잎도 6개이다. 수술은 30~40개, 암술대는 1개로 밖으로 나와 있다. 삭과인 열매는 타원형으로 10월에 익는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배롱나무라 한다.
중국이 원산지인 낙엽활엽소교목이다. 주로 관상용으로 심어 기르며 추위에 약하다.
학명/ 생물학적/ 분류/ 크기/ 용도/ 수확시기/ 원산지/ 꽃말/
Lagerstroemia indica
계 : 식물계(Plantae) 문 : 현화식물문(Anthophyta) 강 : 쌍떡잎식물강(Dicotyledoneae) 목 : 도금양목(Myrtales) 과 : 부처꽃과(Lythraceae) 속 : Lagerstroemia
5~6m
관상용
10월
중국
부귀
배롱나무의 꽃차례: 부처꽃과의 낙엽 소교목.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즈름나무라고도 한다. 꽃은 7∼9월에 붉은색으로 핀다.
천연기념물 제168호. 면적 6,612㎡. 동쪽의 배롱나무는 높이 8.3m로서 6그루가 한곳에 모여 자라고 있으며, 각각의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고사), 0.8m, 0.6m, 1.25m, 0.6m, 0.65m이다.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에 있는 배롱나무의 전경이다. 동래 정씨 시조 정문도 묘 양옆에 1그루씩 있으며, 동쪽 나무는 4그루가 모여 있는 모습이고, 서쪽에는 3그루가 모여 자라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釜山 楊亭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쪽의 그루도 수세가 아주 약해졌으며 살아 있는 가지는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40㎝의 것뿐이고 1.2m, 1.3m, 1.7m의 것은 모두 고사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약 800년 전 고려 중엽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문도(鄭文道)의 묘소 앞 양쪽에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2그루는 오래 자랐지만 속이 썩어 껍데기부분만 남았다가 갈라져서 몇 그루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백일홍이라 할 만큼 7∼9월의 100일에 가까운 화기(花期 : 꽃이 피어 있는 기간)를 가진다.
잎은 타원형 또는 도란형(倒卵形 :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며 길이 2.5∼7㎝로서 표면에 윤채가 있다. 원추화서는 가지 끝에 달리고 길이 10∼20㎝, 꽃은 양성(兩性)이고, 꽃받침과 꽃잎은 모두 6개인데, 꽃잎에 주름살이 많고 홍자색이다.
골담초는 중국이 원산으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서 자란다. 크기는 1~2m 정도이며, 줄기에는 가시가 있고, 잎은 넓은 타원형이다. 꽃은 노란색으로 길이는 3~3.5㎝이고, 뒷부분은 약간 붉은색이 많으며, 시간이 지나면 노란색 꽃이 붉게 변한다. 열매는 8~10월경에 달린다. 주로 많이 보이는 곳은 농촌인근이며 약용식물로 사용하기 위해 주변에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줄기에는 뾰족하고 긴 가시가 많이 나 있기 때문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관상용이나 울타리용으로 쓰이며, 뿌리는 약용으로도 쓰인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나무 이름을 지을 때 쓰임새나 모양 같은 것을 많이 생각해서 이름을 붙여 왔다. 골담초(骨擔草)가 그렇다. 약재로 쓰여지는데 뼈와 관계되는 약을 처방한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골담초의 다른 이름으로 금작목, 금작화, 금계인 등이 있는데, 이렇게 이름이 많은 것은 다재다능한 사람이 별명이 많듯이 다양한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골담초는 아주 옛날 중국에서 들어온 꽃나무다. 키가 2.5~3.0m밖에 안 되는 관목류이지만 5월에 피는 아름다운 꽃과 특이하게 생긴 잎이 약재로 널리 쓰이기 때문에 가정집 뜰이나 오래된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나비를 닮은 노란색 꽃이 사람들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잎은 우상복엽인데 좌우 두 개씩의 귀엽고 작은 잎이 모여서 큰 잎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노랑 꽃이 예쁘고 잎이 재미있게 생겼다고 함부로 가까이하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골담초 꽃을 따서 쌀가루와 섞어서 시루떡을 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그렇지만 골담초는 뭐니 뭐니 해도 두루 쓰이는 한약재로서 가치다. 주로 순환계나 신경계 질환 치료에 효험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뿌리껍질을 골담근 또는 금작근이라 하여 신경통, 관절통, 진통, 강심, 이뇨 작용을 촉진할 수 있는 약재로 쓰고 있다.
뿌리를 캐서 말린 것 130g을 소주 1.8ℓ에 담가 5~6개월 숙성시켜 먹으면 신경통 치료에 큰 효험이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은 골담초 뿌리에 약간의 독성이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골담초는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는 콩과식물로, 선비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의미를 간직한 나무라고 생각된다. 양지바른 돌담가나 척박한 땅에서도 가리지 않고 잘 자라지만 9월경에 콩 꼬투리 모양의 열매가 가끔 달리는데 종자가 완벽하게 형성되지 않아 이것으로 번식시킬 수는 없고 근맹아나 새로 자란 가지를 삽목하면 발근이 잘 된다.
골담초 꽃 (근경)
잎과 꽃이 특이하고 아름다우며 크게 자라지도 않으니 좁은 공간에서도 키울 수 있고 약재로 두루 쓰이는 골담초야말로 소중한 우리의 약용자원이다.
골담초의 꽃,
골담초의 꽃
학명/ 계, 문, 강, 목, 분포지역/ 서식/ 장소/자생지/ 크기
Caragana sinica
식물
속씨식물
쌍떡잎식물
장미목
한국(경기·경북·강원·황해)·중국
산지
높이 약 2m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 약 2m이다. 위쪽을 향한 가지는 사방으로 퍼진다. 줄기는 회갈색으로 가시가 뭉쳐나고 5개의 능선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홀수 1회깃꼴겹잎이며 작은잎은 4개로 타원형이다.
꽃은 5월에 1개씩 총상 꽃차례로 피며 길이 2.5∼3cm이고 나비 모양이다. 꽃받침은 종 모양으로 위쪽 절반은 황적색이고 아래쪽 절반은 연한 노란색이다. 꽃자루는 길이 약 1cm이다. 열매는 협과로 원기둥 모양이고 털이 없으며 9월에 익는다. 길이 3∼3.5cm이다.
관상용으로 정원에 흔히 심는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말린 것을 골담근(骨擔根)이라 하는데 진통·통맥(痛脈)의 효능이 있어 해수·대하·고혈압·타박상·신경통 등에 처방한다. 한국(경상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비슷한 종으로 작은잎의 길이가 8∼17mm인 것을 반용골담초(var. megalantha), 작은잎이 12∼18개인 것을 좀골담초(C. microphylla)라고 한다.
번식법 : 8~10월경에 열리는 종자를 가을에 화단에 바로 뿌린다. 4월경에 새로 나오는 가지를 이용하여 가을에 모래를 이용하거나 시중에 판매하는 오염되지 않고 거름기가 없는 흙에 삽목하면 된다.
관리법 : 햇볕이 많이 드는 화단에 심는 것이 좋다. 잎이 작고 많기 때문에 수분증발량이 많다. 이른 봄에는 수분공급을 2~3일 간격으로 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