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역사, [ Geschichte, 歷史, History],
역사란(History , 歷史 , Geschichte)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 과거 사실의 기록/ 역사 시대와 선사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문자의 사용/ 선사 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은 도구의 사용/ 인간이 진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직립보행/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는 바탕은 유물과 유적/ 역사적 중요도,***
보통으로는 인간 생활의 과거부터의 변천과 지역, 국가, 세계가 지금까지 지나온 과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 그 자체 내지 그것들에 대한 기술(記述)을 말한다. 인류 발생 이래의 생활의 변천ㆍ경과 속에서, 사건이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유사 이전(有史以前)과 유사 이후(有史以後)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과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변천만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자연도 또한 역사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18세기에 칸트가 태양계의 생성에 대하여 말한 성운설(星雲說)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자연에도 역사적 경과가 있다는 것은 점차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다윈의 생물의 진화론도 그 중요한 업적이었다.
즉 모든 사물이 시간적 변천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하며, 또 소멸하여 가는 것,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하여 변화하며 발전을 수행해 나가는 것 등이 객관적 세계에 있어서의 역사를 형성하고, 또 그것의 인식은 인간에 의해 기록되고 기술되는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전체로서 변증법적인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변화ㆍ발전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이 인간 생활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전망을 통해 인정될 뿐 아니라, 자연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물의 기본적인 맥락이 흐르고 있음은 자연과학의 여러 성과를 통해 명확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세계관으로서 자연ㆍ사회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견지를 그 고유한 특징으로 하고, 특히 인간 사회에 관해서는 사적 유물론에 의해, 사회의 성립, 그 구조, 그리고 그 변화ㆍ발전의 법칙을 밝혀 보인다. 이로부터 과학은 좁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학' 또는 '사학'으로 칭하여지며 인간이 지나온 과정을 밝히는 역사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사물의 역사적 인식을 수행하는 측면을 갖는 모든 학문을 포함한다.
동시에 실천에 있어서도, 사물을 정체ㆍ고정된 상태로 보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즉 그 변화와 발전을 기초하여 다루는 것이 요청된다. 예를 들면 사물에 고유한 변증법을 인정하고, 형이상학적 사고 방법에 현혹되지 않아야 만 참된 인식과 올바른 실천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이 시간적 변천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하며, 또 소멸하여 가는 것,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하여 변화하며 발전을 수행해 나가는 것 등이 객관적 세계에 있어서의 역사를 형성하고, 또 그것의 인식은 인간에 의해 기록되고 기술되는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전체로서 변증법적인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변화ㆍ발전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이 인간 생활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전망을 통해 인정될 뿐 아니라, 자연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물의 기본적인 맥락이 흐르고 있음은 자연과학의 여러 성과를 통해 명확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세계관으로서 자연ㆍ사회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견지를 그 고유한 특징으로 하고, 특히 인간 사회에 관해서는 사적 유물론에 의해, 사회의 성립, 그 구조, 그리고 그 변화ㆍ발전의 법칙을 밝혀 보인다. 이로부터 과학은 좁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학' 또는 '사학'으로 칭하여지며 인간이 지나온 과정을 밝히는 역사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사물의 역사적 인식을 수행하는 측면을 갖는 모든 학문을 포함한다.
동시에 실천에 있어서도, 사물을 정체ㆍ고정된 상태로 보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즉 그 변화와 발전을 기초하여 다루는 것이 요청된다. 예를 들면 사물에 고유한 변증법을 인정하고, 형이상학적 사고 방법에 현혹되지 않아야 만 참된 인식과 올바른 실천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그것과 관련한 ‘역사가의 해석’이 더해지면서 역사가 되는 것이랍니다. 역사는 선사 시대(先史 時代)와 역사 시대(歷史 時代)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문자의 사용’이에요.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 시대, 문자를 사용한 이후의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한답니다.
선사 시대는 사용한 도구에 따라 시대를 구분해요. 돌을 사용한 석기 시대, 구리와 주석을 사용한 청동기 시대, 철을 사용한 철기 시대로 구분할 수 있어요. 석기 시대 또한 뗀석기와 간석기 중 어떤 것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뉘어요. 사실 이런 식의 선사 시대 구분법이 생긴 것은 150년도 채 되지 않았답니다.
인류는 어떻게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되었을까요? 인류의 조상 중에는 ‘곧선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에렉투스가 있어요. 호모 에렉투스는 약 5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는데, 이때부터 인간들은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답니다. 오직 인간만이 두 발을 곧게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걷는 자세인 직립 보행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두 발로 걸으면서 인간들은 많은 변화를 이루었어요. 가장 먼저 손이 자유로워졌겠죠? 손이 자유로워지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두 손으로 열매를 따먹을 수 있고,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또 도구를 만들어 쓰다 보니 점점 머리가 좋아지게 되었어요. 손을 많이 움직이면 두뇌가 발달하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이 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불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불의 사용으로 인간은 추운 곳에서 따뜻하게 지내고, 날 음식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와 더불어 고기를 익혀 먹게 되면서 이의 수가 엄청 줄게 되었어요. 이전에는 질긴 고기를 먹어야 하니까 이가 많이 필요했지만, 불에 익힌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니 이가 예전에 비해 덜 필요하게 된 거지요.
인간은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면서 입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이가 줄어들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입 안에 공간이 생기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혀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인간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드디어 언어를 사용하게 된 거예요. 언어의 사용으로 지식을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덕분에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답니다.
인간은 허리를 펴고 두 다리로 일어선 순간부터부터 많은 변화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수십만 년 동안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동물들과 다른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한국사/ 세계사/ 선사시대/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고대/ 중세/ 근세/근대/ 현대/
-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 삼한시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칭호/ 관직/ 역사 일반
'역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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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海君조선 제 15대왕, 이혼, 李琿,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출생/ 사망/ 국적/ 종교/ 본관/ 재위/ 휘/ 능묘/
1575(선조 8) |
1641(인조 19) |
조선, 한국 |
유교(성리학) |
전주(全州) |
1608년~1623년 |
혼(琿) |
광해군묘(光海君墓) |
대동법과 호패법을 시행하고 실리적 외교정책을 폈던 조선 제 15대 왕. 선조의 차남이자 서자로 이름은 혼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해 위급한 상황에서 세자가 되었고 환란 중 선조를 대신해 정무를 보았으며 전후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공정한 세금을 물리기 위해 양전와 호패법을 시행하는 등 혁신적인 정치를 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후금이 강성해지자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실리 외교정책을 펼쳤지만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 무리들이 반정을 일으켜 폐위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왕위계승,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선조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국사권섭(國事權攝: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봄)의 권한을 받았다. 전쟁 동안 강원도·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및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난의 수습에 노력하고, 서울이 수복된 뒤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했다.
1594년 조정에서 명나라에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청했으나, 큰아들인 임해군이 있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의 파쟁이 확대되었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1608년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즉위 후 곧 임해군을 교동(橋洞)에 유폐하고 유영경을 죽이는 한편,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가 아들 백함(白緘), 사위 황보신(皇甫信)과 함께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고 하여, 대북파가 100여 명의 소북파를 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3년 조령(鳥嶺)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이유로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해에 살해했다(→ 계축화옥). 이어 1615년 대북파의 탄핵으로 능창군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을 제거하고, 1617년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건의하자 이듬해 인목대비를 삭호(削號)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전란의 복구,
정권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과는 달리 전란복구 작업에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수취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재정확보 및 신정(新政)의 면모쇄신을 위해 먼저 기존의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했다. 1608년 5월에 호조참판 한백겸(韓百謙)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시행안을 받아들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할 것을 명하고, 이원익으로 하여금 시행사목을 작성케 했다. 이리하여 선혜법(善惠法)으로 명명된 경기도의 새로운 대공수미제도, 즉 대동법(大同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조정의 대신들과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반발함에 따라, 경기 주변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저지되었다.
다만 재위 말기에 충청도·전라도 연해읍에 대해 공물(貢物)을 포(布)로 바꾸어 상납케 하는 임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또한 수세(收稅) 및 역(役)의 공평을 위해 호패법(號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했다. 한편 선조말에 시작한 창덕궁(昌德宮)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이어서 경덕궁(慶德宮)·인덕궁(仁德宮)·자수궁(慈壽宮)을 중건하여 파괴된 수도를 복구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전쟁으로 없어진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고,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외교정책,
그의 재위기간중 특히 주목해야 할 업적은 당시 명·청 교체기의 국제적 변동 속에서 명분보다는 실리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해갔던 점이다.
그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국방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 박엽(朴燁), 만포첨사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한편으로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에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부차(富車) 전투에서 후금에게 투항한 뒤 본의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명분에 치우치지 않은 채 실리를 택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다. 또한 1609년 일본과 을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폐위 및 평가,
그는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킴에 따라 폐위,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중 영창대군 등의 형제를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패륜의 임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15년간의 대북정권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정기반의 재건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후금과도 탄력있는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내치와 외교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역사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보기 위해 한 번 역사???.
"신라 제27대 왕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니,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는 16년 동안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위의 내용은 우리의 역사에 여왕이 다스리던 때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0년 전인 632년에 신라의 선덕왕이 여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일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니까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과거의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책을 보면 신라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우리의 역사에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보면 역사는 '기록된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앞날을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백제의 적군이 숨어 들어온 일을 밝혔으며,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선덕여왕이 명민하고 슬기로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보수적인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여왕 자체를 매우 낮추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과 '기록된 사실'이라는 의미이지요. '과거의 사실'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신라에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사실'은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습니다. '기록된 과거의 사실'인 역사책에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역사가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과거의 사실을 전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선택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주관적인 해석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를 우리는 왜 공부할까요. 그것은 과거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의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인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세계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슬기와 노력으로 극복한 조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의 성장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계사에서의 이성.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의 서론에서 역사 고찰의 종류로서 근원적 역사와 반성적 역사 그리고 철학적 역사를 들고, 근원적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처럼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 행위, 상황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으로서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 데 반해, 그리고 반성적 역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요한네스 폰 뮐러의 『스위스사』 그리고 니부르의 『로마사』처럼 시간에 구속됨이 없이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를 개관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거나 이것을 비판하거나 하는 데 반해, 역사에 내재하면서도 결코 역사에 매몰되어 수동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런 의미에서 역사를 넘어서면서도 결코 선험적으로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양자의 종합으로서 역사를 꿰뚫는 이념에 입각하여 역사를 인식하는 것을 철학적 역사로서의 자기의 역사철학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헤겔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역사철학』 12. 20]는 것을 아낙사고라스 이래의 철학의 원리라고 하고, 이 원리가 세계사에서도 관철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역사철학의 과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성은 사유하는 이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세계 속에 존재하며, 역사를 관통하여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이성으로서 응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 전체를 질료가 목적으로서의 형상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거기서 질료인과 형상인과 목적인과 작용인의 4원인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헤겔이 이성을 역사의 "실체임과 아울러 무한한 힘이며, 그 자신 일체의 자연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의 소재임과 동시에 이 내용들을 움직이는 무한한 형상이다"[같은 책 12. 21]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역사적 세계로 옮겨 되살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신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어졌지만, 헤겔이 세계사에서의 이성의 지배를 증명하고자 할 때 그는 모종의 의미에서 이것을 따르는 것이다. 헤겔 자신도 자기의 역사철학을 "신정론(Theodizee)"[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이성의 지배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식의 문제였다. 헤겔은 역사 발전의 목적과 수단, 그 과정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Ⅱ. 자유의 의식에서의 진보. 그렇다면 역사 발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이다. 세계사의 주역이 정신이라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세계사란 의식에서의 자유의 진보이다"[같은 책 12. 32]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사의 무대가 아시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그리고 민족대이동 후에는 알프스를 넘어 게르만적 세계로 동에서 서로 이동함에 따라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였던 데 불과하지만, 노예제 위에서 폴리스 민주제를 꽃피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소수긴 하지만 복수의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게르만 국민들이 활약하는 근대에 들어서면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이르렀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는 개념으로서 각자의 심정 속에 머물 뿐 아니라 이미 관습과 법률과 도덕 등 공동생활의 기반으로서 객관적으로도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실현된 자유로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자기로 귀환하는 자유로서 참으로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더듬어나감으로써 이러한 자기의 자유 개념 그 자체를 세계정신이 현재에 도달한 높은 곳으로서 그 역사적 필연성에서 증명하고 하는 것이다.
Ⅲ. 이성의 간지. 그렇다면 세계에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 헤겔은 "어떠한 위대한 일도 정열 없이 성취되지 않았다"[같은 책 12. 38]고 말하고, 세계정신은 개인의 정열과 관심과 의욕 등 그 자신이 개별적인 활동을 도구와 수단으로 하여 자기 목적을 실현해간다고 말한다. 거기서 "이성의 간지"[같은 책 12. 49]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때때로 역사를 형성하는 주체를 정신이라든가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결정하고, 본래의 주체이어야 할 인간을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체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비판된다.
그러나 헤겔도 근대 휴머니즘의 적자로서 역사를 쌓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 점은 헤겔이 루소 등의 계몽사상에 지도된 프랑스 혁명을, 그것이 공포정치에 빠진 경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처음으로 자기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의 사상 위에 현실을 구축하고자 한 사건으로서 그 세계사적 의의를 생애 내내 승인한 데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동시에 자유를 지향한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에 빠지는 등, 역사가 인간이 쌓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의도대로 쌓아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도 헤겔이 운명이나 소외로서 청년 시절부터 문제로 삼은 인식이었다.
'이성의 간지'란 이러한 헤겔의 중층적인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은 "인간이 전적으로 외면적인 의미에서 이성 목적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성 목적을 충족함과 동시에 또한 이 이성 목적을 기회로 하여 내용상으로는 이성 목적과 다른 자기의 개별적 목적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이성 목적 그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어서, 그 점에서 인간은 자기 목적인 것이다"[같은 책 12. 50]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성의 간지'의 목적론적 구조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수단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한에서 도구의 우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Ⅳ. 세계법정으로서의 세계사. 헤겔에게 있어 인간은 자유를 본질로 하는 개인임과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호주체적 존재라는 것은 직관되는 사실이며, 그의 철학은 이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사회계약론이 전제하는 것과 같은 근대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법의 정신』의 몽테스키외를 관통하는 계보에 서 있었다. 개인주의 입장에서 출발할 때 타자와의 공동성 문제는 당위의 과제로 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공동체는 국가를 넘어서 인류공동체로 된다.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설파하는 데서 보이는 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국가가 자유와 공동성의 통일로 이루어지는 인륜공동체의 최고의 실현태였다. 그런데 최고의 실현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정신에서의 일이며, 절대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라고 하더라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서있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무엇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국가는 그것이 세계정신에게서 맡겨진 세계사적 사명을 짊어지는 한에서 존속하고 발전하지만, 그것을 끝내 완수할 때 몰락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에서 전개되는 국가의 영고성쇠는 일정 기간 어떤 민족에게 머무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로 무대를 변화시키면서 진행하는 세계정신의 발걸음을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역사는 세계법정이다"[『법철학』 341절]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헤겔의 철학체계에 따르면, 이리하여 세계사의 철학은 법철학 등의 객관적 정신의 철학과 절대정신의 철학을 매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Ⅴ. 역사의 종언. 역사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여 역사의 전체를 보편성에서 고찰하는 입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근대 역사철학의 개척자인 계몽의 사상가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의 이성과 인간성을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입장에서 역사를 고찰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고 있었던 견해는 이러한 계몽의 역사 이해의 특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초역사적인 입장에서 재단하는 것이고 또 그런 한에서 계몽의 진보사관이라고 하더라도 구원사관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은 명확할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제를 이성을 역사화하고 역사를 이성의 자기실현의 목적론적 운동으로서 파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성의 운동이 자기의식을 얻어 자기로 귀환하는 장소에 헤겔 스스로 서서 그로부터 세계사를 바라봄으로써, 모든 역사 흐름을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 속으로 지양할 것을 지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 서서 그 흐름을 자기의 장소로 흘러들게 함으로써 차단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 헤겔은 스스로가 살고 있는 현재를 넘어서,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미래에 맡겼던 것처럼, 미래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내재적 이해를 지향한 헤겔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경험적으로는 역사가 헤겔이 섰던 시점을 넘어서 진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념의 전개라는 의미에서는 완결에 도달해 있다는 헤겔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자기의 자기의식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즉 자기가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현재에 살고 있는 자기를 제쳐놓고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아무 곳에도 없으며, 역사철학은 어디까지나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는 헤겔의 역사철학 이해일 것이다. 이와 같이 헤겔이 세계사를 철학 속으로 지양한 것을 이어받아 마르크스가 실천을 통해 철학을 역사 속으로 지양하고자 했다는 것, 또한 헤겔에서의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는 확신이 붕괴될 때 헤겔 이후의 역사주의의 역사철학이 생겨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 전체를 질료가 목적으로서의 형상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거기서 질료인과 형상인과 목적인과 작용인의 4원인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헤겔이 이성을 역사의 "실체임과 아울러 무한한 힘이며, 그 자신 일체의 자연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의 소재임과 동시에 이 내용들을 움직이는 무한한 형상이다"[같은 책 12. 21]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역사적 세계로 옮겨 되살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신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어졌지만, 헤겔이 세계사에서의 이성의 지배를 증명하고자 할 때 그는 모종의 의미에서 이것을 따르는 것이다. 헤겔 자신도 자기의 역사철학을 "신정론(Theodizee)"[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이성의 지배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식의 문제였다. 헤겔은 역사 발전의 목적과 수단, 그 과정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Ⅱ. 자유의 의식에서의 진보. 그렇다면 역사 발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이다. 세계사의 주역이 정신이라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세계사란 의식에서의 자유의 진보이다"[같은 책 12. 32]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사의 무대가 아시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그리고 민족대이동 후에는 알프스를 넘어 게르만적 세계로 동에서 서로 이동함에 따라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였던 데 불과하지만, 노예제 위에서 폴리스 민주제를 꽃피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소수긴 하지만 복수의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게르만 국민들이 활약하는 근대에 들어서면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이르렀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는 개념으로서 각자의 심정 속에 머물 뿐 아니라 이미 관습과 법률과 도덕 등 공동생활의 기반으로서 객관적으로도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실현된 자유로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자기로 귀환하는 자유로서 참으로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더듬어나감으로써 이러한 자기의 자유 개념 그 자체를 세계정신이 현재에 도달한 높은 곳으로서 그 역사적 필연성에서 증명하고 하는 것이다.
Ⅲ. 이성의 간지. 그렇다면 세계에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 헤겔은 "어떠한 위대한 일도 정열 없이 성취되지 않았다"[같은 책 12. 38]고 말하고, 세계정신은 개인의 정열과 관심과 의욕 등 그 자신이 개별적인 활동을 도구와 수단으로 하여 자기 목적을 실현해간다고 말한다. 거기서 "이성의 간지"[같은 책 12. 49]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때때로 역사를 형성하는 주체를 정신이라든가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결정하고, 본래의 주체이어야 할 인간을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체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비판된다.
그러나 헤겔도 근대 휴머니즘의 적자로서 역사를 쌓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 점은 헤겔이 루소 등의 계몽사상에 지도된 프랑스 혁명을, 그것이 공포정치에 빠진 경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처음으로 자기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의 사상 위에 현실을 구축하고자 한 사건으로서 그 세계사적 의의를 생애 내내 승인한 데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동시에 자유를 지향한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에 빠지는 등, 역사가 인간이 쌓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의도대로 쌓아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도 헤겔이 운명이나 소외로서 청년 시절부터 문제로 삼은 인식이었다.
'이성의 간지'란 이러한 헤겔의 중층적인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은 "인간이 전적으로 외면적인 의미에서 이성 목적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성 목적을 충족함과 동시에 또한 이 이성 목적을 기회로 하여 내용상으로는 이성 목적과 다른 자기의 개별적 목적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이성 목적 그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어서, 그 점에서 인간은 자기 목적인 것이다"[같은 책 12. 50]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성의 간지'의 목적론적 구조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수단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한에서 도구의 우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Ⅳ. 세계법정으로서의 세계사. 헤겔에게 있어 인간은 자유를 본질로 하는 개인임과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호주체적 존재라는 것은 직관되는 사실이며, 그의 철학은 이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사회계약론이 전제하는 것과 같은 근대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법의 정신』의 몽테스키외를 관통하는 계보에 서 있었다. 개인주의 입장에서 출발할 때 타자와의 공동성 문제는 당위의 과제로 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공동체는 국가를 넘어서 인류공동체로 된다.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설파하는 데서 보이는 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국가가 자유와 공동성의 통일로 이루어지는 인륜공동체의 최고의 실현태였다. 그런데 최고의 실현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정신에서의 일이며, 절대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라고 하더라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서있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무엇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국가는 그것이 세계정신에게서 맡겨진 세계사적 사명을 짊어지는 한에서 존속하고 발전하지만, 그것을 끝내 완수할 때 몰락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에서 전개되는 국가의 영고성쇠는 일정 기간 어떤 민족에게 머무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로 무대를 변화시키면서 진행하는 세계정신의 발걸음을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역사는 세계법정이다"[『법철학』 341절]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헤겔의 철학체계에 따르면, 이리하여 세계사의 철학은 법철학 등의 객관적 정신의 철학과 절대정신의 철학을 매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Ⅴ. 역사의 종언. 역사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여 역사의 전체를 보편성에서 고찰하는 입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근대 역사철학의 개척자인 계몽의 사상가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의 이성과 인간성을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입장에서 역사를 고찰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고 있었던 견해는 이러한 계몽의 역사 이해의 특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초역사적인 입장에서 재단하는 것이고 또 그런 한에서 계몽의 진보사관이라고 하더라도 구원사관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은 명확할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제를 이성을 역사화하고 역사를 이성의 자기실현의 목적론적 운동으로서 파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성의 운동이 자기의식을 얻어 자기로 귀환하는 장소에 헤겔 스스로 서서 그로부터 세계사를 바라봄으로써, 모든 역사 흐름을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 속으로 지양할 것을 지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 서서 그 흐름을 자기의 장소로 흘러들게 함으로써 차단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 헤겔은 스스로가 살고 있는 현재를 넘어서,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미래에 맡겼던 것처럼, 미래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내재적 이해를 지향한 헤겔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경험적으로는 역사가 헤겔이 섰던 시점을 넘어서 진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념의 전개라는 의미에서는 완결에 도달해 있다는 헤겔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자기의 자기의식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즉 자기가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현재에 살고 있는 자기를 제쳐놓고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아무 곳에도 없으며, 역사철학은 어디까지나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는 헤겔의 역사철학 이해일 것이다. 이와 같이 헤겔이 세계사를 철학 속으로 지양한 것을 이어받아 마르크스가 실천을 통해 철학을 역사 속으로 지양하고자 했다는 것, 또한 헤겔에서의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는 확신이 붕괴될 때 헤겔 이후의 역사주의의 역사철학이 생겨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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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歷史, Geschichte] (헤겔사전, 2009. 1..,)
[역사, History, 歷史, Geschichte] (철학사전, 2009.,)
[첨성대 [瞻星臺]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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