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0일 화요일

역사, [ Geschichte, 歷史, History],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역사, [ Geschichte, 歷史, History],

역사란(History , 歷史 , Geschichte)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 과거 사실의 기록/ 역사 시대와 선사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문자의 사용/ 선사 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은 도구의 사용/ 인간이 진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직립보행/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는 바탕은 유물과 유적/ 역사적 중요도,***
보통으로는 인간 생활의 과거부터의 변천과 지역, 국가, 세계가 지금까지 지나온 과정 속에서 발생한 사건들 그 자체 내지 그것들에 대한 기술()을 말한다. 인류 발생 이래의 생활의 변천ㆍ경과 속에서, 사건이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유사 이전()과 유사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과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변천만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자연도 또한 역사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18세기에 칸트가 태양계의 생성에 대하여 말한 성운설()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자연에도 역사적 경과가 있다는 것은 점차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다윈의 생물의 진화론도 그 중요한 업적이었다.

즉 모든 사물이 시간적 변천을 통해 발생하고 발전하며, 또 소멸하여 가는 것,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하여 변화하며 발전을 수행해 나가는 것 등이 객관적 세계에 있어서의 역사를 형성하고, 또 그것의 인식은 인간에 의해 기록되고 기술되는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전체로서 변증법적인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변화ㆍ발전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이 인간 생활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전망을 통해 인정될 뿐 아니라, 자연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물의 기본적인 맥락이 흐르고 있음은 자연과학의 여러 성과를 통해 명확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세계관으로서 자연ㆍ사회를 관통하는 역사라는 견지를 그 고유한 특징으로 하고, 특히 인간 사회에 관해서는 사적 유물론에 의해, 사회의 성립, 그 구조, 그리고 그 변화ㆍ발전의 법칙을 밝혀 보인다. 이로부터 과학은 좁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학' 또는 '사학'으로 칭하여지며 인간이 지나온 과정을 밝히는 역사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사물의 역사적 인식을 수행하는 측면을 갖는 모든 학문을 포함한다.

동시에 실천에 있어서도, 사물을 정체ㆍ고정된 상태로 보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즉 그 변화와 발전을 기초하여 다루는 것이 요청된다. 예를 들면 사물에 고유한 변증법을 인정하고, 형이상학적 사고 방법에 현혹되지 않아야 만 참된 인식과 올바른 실천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그것과 관련한 ‘역사가의 해석’이 더해지면서 역사가 되는 것이랍니다.  역사는 선사 시대(先史 時代)와 역사 시대(歷史 時代)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문자의 사용’이에요.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 시대, 문자를 사용한 이후의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한답니다.
선사 시대는 사용한 도구에 따라 시대를 구분해요. 돌을 사용한 석기 시대, 구리와 주석을 사용한 청동기 시대, 철을 사용한 철기 시대로 구분할 수 있어요. 석기 시대 또한 뗀석기와 간석기 중 어떤 것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뉘어요. 사실 이런 식의 선사 시대 구분법이 생긴 것은 150년도 채 되지 않았답니다.
인류는 어떻게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되었을까요? 인류의 조상 중에는 ‘곧선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에렉투스가 있어요. 호모 에렉투스는 약 5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는데, 이때부터 인간들은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답니다. 오직 인간만이 두 발을 곧게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걷는 자세인 직립 보행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두 발로 걸으면서 인간들은 많은 변화를 이루었어요. 가장 먼저 손이 자유로워졌겠죠? 손이 자유로워지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두 손으로 열매를 따먹을 수 있고,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또 도구를 만들어 쓰다 보니 점점 머리가 좋아지게 되었어요. 손을 많이 움직이면 두뇌가 발달하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이 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불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요. 불의 사용으로 인간은 추운 곳에서 따뜻하게 지내고, 날 음식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와 더불어 고기를 익혀 먹게 되면서 이의 수가 엄청 줄게 되었어요. 이전에는 질긴 고기를 먹어야 하니까 이가 많이 필요했지만, 불에 익힌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니 이가 예전에 비해 덜 필요하게 된 거지요.
인간은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면서 입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이가 줄어들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입 안에 공간이 생기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혀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인간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드디어 언어를 사용하게 된 거예요. 언어의 사용으로 지식을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덕분에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답니다.
인간은 허리를 펴고 두 다리로 일어선 순간부터부터 많은 변화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수십만 년 동안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동물들과 다른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일반'
2347건
光海君조선 제 15대왕, 이혼, 李琿,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출생/ 사망/ 국적/ 종교/ 본관/ 재위/ 휘/ 능묘/
1575(선조 8)
1641(인조 19)
조선, 한국
유교(성리학)
전주(全州)
1608년~1623년
혼(琿)
광해군묘(光海君墓)
대동법과 호패법을 시행하고 실리적 외교정책을 폈던 조선 제 15대 왕. 선조의 차남이자 서자로 이름은 혼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해 위급한 상황에서 세자가 되었고 환란 중 선조를 대신해 정무를 보았으며 전후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공정한 세금을 물리기 위해 양전와 호패법을 시행하는 등 혁신적인 정치를 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후금이 강성해지자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실리 외교정책을 펼쳤지만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 무리들이 반정을 일으켜 폐위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왕위계승,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패(狂悖)하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을 비롯한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선조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국사권섭(國事權攝:임시로 나랏일을 맡아봄)의 권한을 받았다. 전쟁 동안 강원도·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및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난의 수습에 노력하고, 서울이 수복된 뒤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했다.
1594년 조정에서 명나라에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청했으나, 큰아들인 임해군이 있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의 파쟁이 확대되었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1608년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즉위 후 곧 임해군을 교동(橋洞)에 유폐하고 유영경을 죽이는 한편,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가 아들 백함(白緘), 사위 황보신(皇甫信)과 함께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고 하여, 대북파가 100여 명의 소북파를 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3년 조령(鳥嶺)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이유로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해에 살해했다(→ 계축화옥). 이어 1615년 대북파의 탄핵으로 능창군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을 제거하고, 1617년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건의하자 이듬해 인목대비를 삭호(削號)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전란의 복구,
정권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과는 달리 전란복구 작업에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수취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재정확보 및 신정(新政)의 면모쇄신을 위해 먼저 기존의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했다. 1608년 5월에 호조참판 한백겸(韓百謙)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시행안을 받아들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할 것을 명하고, 이원익으로 하여금 시행사목을 작성케 했다. 이리하여 선혜법(善惠法)으로 명명된 경기도의 새로운 대공수미제도, 즉 대동법(大同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조정의 대신들과 방납(防納)하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반발함에 따라, 경기 주변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저지되었다.
다만 재위 말기에 충청도·전라도 연해읍에 대해 공물(貢物)을 포(布)로 바꾸어 상납케 하는 임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또한 수세(收稅) 및 역(役)의 공평을 위해 호패법(號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했다. 한편 선조말에 시작한 창덕궁(昌德宮)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이어서 경덕궁(慶德宮)·인덕궁(仁德宮)·자수궁(慈壽宮)을 중건하여 파괴된 수도를 복구했다.

창덕궁(昌德宮) ⓒ Jordan Wooley/wikipedia | CC BY-SA 2.0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전쟁으로 없어진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고,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외교정책,
그의 재위기간중 특히 주목해야 할 업적은 당시 명·청 교체기의 국제적 변동 속에서 명분보다는 실리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를 추진해갔던 점이다.
그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국방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 박엽(朴燁), 만포첨사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한편으로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에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부차(富車) 전투에서 후금에게 투항한 뒤 본의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명분에 치우치지 않은 채 실리를 택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다. 또한 1609년 일본과 을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폐위 및 평가,
그는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킴에 따라 폐위,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중 영창대군 등의 형제를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등 패륜의 임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15년간의 대북정권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정기반의 재건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후금과도 탄력있는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내치와 외교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광해군묘,

역사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보기 위해 한 번 역사???.
"신라 제27대 왕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니,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는 16년 동안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위의 내용은 우리의 역사에 여왕이 다스리던 때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0년 전인 632년에 신라의 선덕왕이 여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일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러니까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과거의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책을 보면 신라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우리의 역사에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보면 역사는 '기록된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보물 525호)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앞날을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백제의 적군이 숨어 들어온 일을 밝혔으며,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선덕여왕이 명민하고 슬기로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보수적인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여왕 자체를 매우 낮추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과 '기록된 사실'이라는 의미이지요. '과거의 사실'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신라에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사실'은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습니다. '기록된 과거의 사실'인 역사책에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역사가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과거의 사실을 전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선택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주관적인 해석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를 우리는 왜 공부할까요. 그것은 과거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의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인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세계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슬기와 노력으로 극복한 조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의 성장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계사에서의 이성.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의 서론에서 역사 고찰의 종류로서 근원적 역사와 반성적 역사 그리고 철학적 역사를 들고, 근원적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처럼 직접, 간접으로 보고 들은 사건, 행위, 상황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는 것으로서 역사가 자신이 사건의 정신에서 살고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 데 반해, 그리고 반성적 역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요한네스 폰 뮐러의 『스위스사』 그리고 니부르의 『로마사』처럼 시간에 구속됨이 없이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를 개관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거나 이것을 비판하거나 하는 데 반해, 역사에 내재하면서도 결코 역사에 매몰되어 수동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런 의미에서 역사를 넘어서면서도 결코 선험적으로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양자의 종합으로서 역사를 꿰뚫는 이념에 입각하여 역사를 인식하는 것을 철학적 역사로서의 자기의 역사철학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헤겔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역사철학』 12. 20]는 것을 아낙사고라스 이래의 철학의 원리라고 하고, 이 원리가 세계사에서도 관철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역사철학의 과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성은 사유하는 이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세계 속에 존재하며, 역사를 관통하여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이성으로서 응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 전체를 질료가 목적으로서의 형상의 실현을 지향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거기서 질료인과 형상인과 목적인과 작용인의 4원인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헤겔이 이성을 역사의 "실체임과 아울러 무한한 힘이며, 그 자신 일체의 자연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의 소재임과 동시에 이 내용들을 움직이는 무한한 형상이다"[같은 책 12. 21]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역사적 세계로 옮겨 되살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신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어졌지만, 헤겔이 세계사에서의 이성의 지배를 증명하고자 할 때 그는 모종의 의미에서 이것을 따르는 것이다. 헤겔 자신도 자기의 역사철학을 "신정론(Theodizee)"[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이성의 지배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식의 문제였다. 헤겔은 역사 발전의 목적과 수단, 그 과정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Ⅱ. 자유의 의식에서의 진보. 그렇다면 역사 발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이다. 세계사의 주역이 정신이라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세계사란 의식에서의 자유의 진보이다"[같은 책 12. 32]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사의 무대가 아시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그리고 민족대이동 후에는 알프스를 넘어 게르만적 세계로 동에서 서로 이동함에 따라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였던 데 불과하지만, 노예제 위에서 폴리스 민주제를 꽃피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소수긴 하지만 복수의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게르만 국민들이 활약하는 근대에 들어서면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이르렀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는 개념으로서 각자의 심정 속에 머물 뿐 아니라 이미 관습과 법률과 도덕 등 공동생활의 기반으로서 객관적으로도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실현된 자유로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자기로 귀환하는 자유로서 참으로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더듬어나감으로써 이러한 자기의 자유 개념 그 자체를 세계정신이 현재에 도달한 높은 곳으로서 그 역사적 필연성에서 증명하고 하는 것이다.

Ⅲ. 이성의 간지. 그렇다면 세계에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 헤겔은 "어떠한 위대한 일도 정열 없이 성취되지 않았다"[같은 책 12. 38]고 말하고, 세계정신은 개인의 정열과 관심과 의욕 등 그 자신이 개별적인 활동을 도구와 수단으로 하여 자기 목적을 실현해간다고 말한다. 거기서 "이성의 간지"[같은 책 12. 49]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때때로 역사를 형성하는 주체를 정신이라든가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결정하고, 본래의 주체이어야 할 인간을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체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비판된다.

그러나 헤겔도 근대 휴머니즘의 적자로서 역사를 쌓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 점은 헤겔이 루소 등의 계몽사상에 지도된 프랑스 혁명을, 그것이 공포정치에 빠진 경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처음으로 자기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의 사상 위에 현실을 구축하고자 한 사건으로서 그 세계사적 의의를 생애 내내 승인한 데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동시에 자유를 지향한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에 빠지는 등, 역사가 인간이 쌓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의도대로 쌓아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도 헤겔이 운명이나 소외로서 청년 시절부터 문제로 삼은 인식이었다.

'이성의 간지'란 이러한 헤겔의 중층적인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은 "인간이 전적으로 외면적인 의미에서 이성 목적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성 목적을 충족함과 동시에 또한 이 이성 목적을 기회로 하여 내용상으로는 이성 목적과 다른 자기의 개별적 목적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이성 목적 그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어서, 그 점에서 인간은 자기 목적인 것이다"[같은 책 12. 50]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성의 간지'의 목적론적 구조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수단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한에서 도구의 우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Ⅳ. 세계법정으로서의 세계사. 헤겔에게 있어 인간은 자유를 본질로 하는 개인임과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호주체적 존재라는 것은 직관되는 사실이며, 그의 철학은 이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사회계약론이 전제하는 것과 같은 근대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법의 정신』의 몽테스키외를 관통하는 계보에 서 있었다. 개인주의 입장에서 출발할 때 타자와의 공동성 문제는 당위의 과제로 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공동체는 국가를 넘어서 인류공동체로 된다.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설파하는 데서 보이는 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국가가 자유와 공동성의 통일로 이루어지는 인륜공동체의 최고의 실현태였다. 그런데 최고의 실현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정신에서의 일이며, 절대정신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라고 하더라도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서있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무엇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국가는 그것이 세계정신에게서 맡겨진 세계사적 사명을 짊어지는 한에서 존속하고 발전하지만, 그것을 끝내 완수할 때 몰락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에서 전개되는 국가의 영고성쇠는 일정 기간 어떤 민족에게 머무르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로 무대를 변화시키면서 진행하는 세계정신의 발걸음을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역사는 세계법정이다"[『법철학』 341절]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헤겔의 철학체계에 따르면, 이리하여 세계사의 철학은 법철학 등의 객관적 정신의 철학과 절대정신의 철학을 매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Ⅴ. 역사의 종언. 역사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하여 역사의 전체를 보편성에서 고찰하는 입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근대 역사철학의 개척자인 계몽의 사상가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의 이성과 인간성을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입장에서 역사를 고찰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보고 있었던 견해는 이러한 계몽의 역사 이해의 특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초역사적인 입장에서 재단하는 것이고 또 그런 한에서 계몽의 진보사관이라고 하더라도 구원사관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은 명확할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제를 이성을 역사화하고 역사를 이성의 자기실현의 목적론적 운동으로서 파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성의 운동이 자기의식을 얻어 자기로 귀환하는 장소에 헤겔 스스로 서서 그로부터 세계사를 바라봄으로써, 모든 역사 흐름을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 속으로 지양할 것을 지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 서서 그 흐름을 자기의 장소로 흘러들게 함으로써 차단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 헤겔은 스스로가 살고 있는 현재를 넘어서, 칸트가 세계시민적 질서의 실현을 미래에 맡겼던 것처럼, 미래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내재적 이해를 지향한 헤겔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경험적으로는 역사가 헤겔이 섰던 시점을 넘어서 진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념의 전개라는 의미에서는 완결에 도달해 있다는 헤겔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자기의 자기의식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즉 자기가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현재에 살고 있는 자기를 제쳐놓고 역사를 보는 관점은 아무 곳에도 없으며, 역사철학은 어디까지나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는 헤겔의 역사철학 이해일 것이다. 이와 같이 헤겔이 세계사를 철학 속으로 지양한 것을 이어받아 마르크스가 실천을 통해 철학을 역사 속으로 지양하고자 했다는 것, 또한 헤겔에서의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는 확신이 붕괴될 때 헤겔 이후의 역사주의의 역사철학이 생겨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서서히 복구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경제를 회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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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고문헌,
[역사란 -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 (생방송 한국사 1, 2017.01..,)
[과거와 현재의 대화 - 역사란 무엇인가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주)신원문화사 2009. 2..,)
[역사 [歷史, Geschichte] (헤겔사전, 2009. 1..,)
[역사, History, 歷史, Geschichte] (철학사전, 2009.,)
[첨성대 [瞻星臺]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유산채널
[대한민국 구석구석
[공유마당
[경주 첨성대 [慶州瞻星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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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9일 월요일

삼겹살,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삼겹살,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고기 값이 폭락해 축산 농가의 시름이 깊어져도 삼겹살만큼은 여전히 금값을 유지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유통 구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삼겹살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삼겹살의 양은 일정한데 수요는 많으니까 국산 돼지가 아무리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해도 돼지고기를 수입해야 한다. 삼겹살 수요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 삼겹살의 경연장이 됐다.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등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세계 17개국 이상에서 삼겹살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에 가만히 앉아서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키우는 돼지고기의 맛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삼겹살을 즐겨 먹었으며 왜 삼겹살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외식 메뉴 중 하나가 삼겹살이니, 삼겹살은 ‘국민 고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삼겹살을 먹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여러 삼겹살의 굽는시작과 구어노은 다음 쌈 쌀때까지의 사진들,,,(간단요약)
삼겹살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거의 1970년대 무렵이다. 그것도 어쩌다 쓰였을 뿐 널리 퍼진 것은 1980년대다. 국어사전에 삼겹살이 오른 것도 1994년이라고 하니까 1980~1990년대에 유행하면서 국민 음식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삼겹살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있었다. 1939년의 《조선요리제법》의 증보 9판에 ‘세겹살’이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그 이전 판이나 이후 판에는 세겹살에 관한 내용이 없다. 그러니 삼겹살이 일반적인 용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전에는 삼겹살이 없었을까? 지금과 같은 삼겹살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우리는 원래 삼겹살은 물론이고 돼지고기조차 잘 먹지 않았다. “여름에 먹는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선입견마저 있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조리하는 요리법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물론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주로 돼지고기를 삶아서 새우젓과 함께 김치에 싸 먹거나 비계나 고기를 찌개에 넣어 끓여 먹었다. 
돼지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는데, 서민들의 주점인 대폿집에서 발전한 돼지갈비 음식점들이 서울 마포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돼지갈비구이가 유행했다. 
돼지갈빗집은 이후 마포 도심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서울 태릉을 비롯해 서울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돼지갈비구이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부터 대체 음식으로 삼겹살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삼겹살은 어떻게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일까? 삼겹살이 인기를 끈 배경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기술적으로 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상하기 쉬운 돼지고기를 저장할 수 있게 돼 돼지고기 보급이 늘었다. 연탄불 중심에서 가스 사용으로 인한 조리법과 도구의 변화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적인 변화가 돼지고기와 관련한 음식 문화를 바꾸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1970,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추진된 산업화 시대의 경제 발전으로 육류 소비가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쇠고기는 여전히 비쌌으니 대신 서민층을 중심으로 돼지고기 수요가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의 양돈 장려 정책으로 돼지고기의 공급도 확대되면서 그 결과로 1960, 1970년대에는 돼지갈비가 유행했고 1980, 1990년대에는 삼겹살이 유행했다.
1980년대부터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야외 활동과 외식 문화가 크게 발달한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IMF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인의 식생활 변화로 고기에 대한 수요는 크게 늘었는데 IMF로 인해 주머니 사정이 얇아지자 값싼 삼겹살을 많이 찾게 되면서 삼겹살 열풍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삼겹살은 한국 경제를 대변하는 고기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경제 발전 과정과 함께 한국인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고, 우리가 경제 위기를 겪고 그 위기를 극복할 때 서민들을 위로해준 음식 역시 삼겹살이다. 새삼 삼겹살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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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5부제 첫날 혼선…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마스크 5부제 첫날 혼선…
미입고·날짜착오·서류 미비 헛걸음, 2020 03 09

배송 늦고 재포장하느라 판매지연…배당된 150장 30분만에 동나, 요일 헷갈려 헛걸음…전산 입력전 다른 약국서 구매 '얌체족'도

공적 마스크를 배분하는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전국의 약국 곳곳에서는 마스크를 구매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마스크 5부제에 따라 월요일인 이날은 1·6년생(19X1년, 19X6년, 2001년, 2006년, 2011년, 2016년생)이 약국에서 마스크를 2장 살 수 있었으나, 약국마다 마스크 입고 시간이 달라 시민들이 여러 약국을 전전하는 사례가 나오는 등 현장에서는 적잖은 혼선이 빚어졌다.

이 제도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탓에 단순히 구매 요일을 헷갈리거나 관련 서류를 구비하지 않아 허탕을 친 시민도 많았다.

"마스크 안 들어왔어요"…약국마다 물량 사정 '제각각'
이날 오전 10시 광주광역시의 한 약국을 찾은 A 씨는 벌써 6번째 빈손으로 약국 문을 나섰다.
공공 마스크 미입고 안내문,

약국 관계자는 "마스크가 들어왔지만,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2매씩 개별 포장해야 해 오후 2시께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라며 "문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몰리고 문의 전화도 많아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의 약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전 10시부터 대기 줄이 생긴 완산구의 한 약국에서는 "포장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니 나중에 다시 와달라"고 손님들에게 말했지만, 대기 행렬은 시간이 갈수록 길어졌다.

이 약국의 마스크 판매는 오전 11시가 다 돼서야 이뤄졌다. 규모가 제법 큰 약국임에도 처방전을 든 환자와 마스크를 사려는 시민들이 한데 몰리면서 약국은 금새 북새통을 이뤘다.
마스크 5부제 '허탕'…마스크 미입고문,
"분산될 줄 알았는데"…약국 앞 장사진 여전,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한 대형 약국은 오전 10시부터 공영 마스크 150장을 판매했다. 지난주보다 대기 줄은 줄었지만, 이날도 약국 건물을 둘러싸고 수십명이 15m가량 줄을 섰다.

이 약국 관계자는 "5부제 시행전인 지난주에 비해 오늘은 대기 줄이 줄긴 한 것 같다"며 "다만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을 하고, 전산 입력을 해야 해 조금 지체되는 편"이라고 전했다.
마스크 150장은 약 30분 만에 매진됐다.

수원 장안구의 약국은 마스크를 사려는 대기 행렬이 인도를 점령했다.

줄을 섰던 시민 박모 씨는 "마스크를 사려고 1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결국엔 빈손이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의 한 약국 앞에도 약국 셔터가 올라가기 전부터 5명이 줄을 섰다.
이들은 약국 문이 열리자마자 신분증을 내밀고 마스크를 사 갔으며, 한 여성은 약사에게 마스크 몇장 더 살 수 없냐고 물었지만, 약사는 1인당 2장이 원칙이라고 답했다.
대전 시내 약국에는 '마스크 품절'이라는 안내문이 내걸렸으나, 마스크 재고량을 묻는 시민 발걸음이 오후까지 이어졌다.

한 약사는 "마스크를 포장하고 판매하다 보니 다른 업무 볼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마스크를 사지 못한 손님 원망 소리만 온종일 듣다 보면 힘이 빠질 때도 있다"고 전했다.

"주민번호 끝자리인 줄"…날짜 착오·서류 미비 사례도,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마스크 구매가 가능하도록 정한 날짜를 착오하거나 구매에 필요한 서류를 미비해 헛걸음하는 시민도 많았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약국에서 한 중년 여성은 마스크를 구매하려고 운전면허증을 내밀었지만, 약사는 구매 가능한 요일이 아니라며 마스크 5부제를 설명했다.

이 여성은 약사에게 "아, 출생연도 끝자리였어요? 주민등록번호 제일 끝자리인 줄 알았죠"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서대문구에 있는 또 다른 약국 관계자는 "오늘 오전 8시부터 마스크를 판매해 매진됐는데, 손님 중 10∼20%는 오늘 해당하는 날이 아닌데 찾아와서 돌려보냈다.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수원 아주대병원 앞 약국에서는 날짜를 착각한 시민이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약사의 말에 KF94 보건용 마스크 대신 아쉬운 대로 면 마스크를 샀다.

이 약국 주인은 "판매한 지 1시간여 동안 30명 정도가 마스크를 사 갔다"며 "구매 요일을 착각한 사람에게는 약국 내 매대에 진열된 면 마스크를 구매하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의 한악국앞, 마스크 사려는시민들이 줄을서있다,
부산 연제구의 한 약국에서는 마스크 판매가 이뤄지는 와중에 7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약사와 약간의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이 남성은 "내 것 외에 손자 녀석 마스크를 사고 싶다"고 했으나 약사는 구비서류를 들고 와야 한다고 거절했다.

식약처는 마스크 5부제 대리 구매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조건이 까다로운 편이다.
10세 이하 어린이와 80세 이상 고령층은 대리 구매가 가능하지만, 이들과 함께 산다는 주민등록등본 등 구비서류를 제시해야 하며 해당 어린이나 고령층 역시 태어난 연도가 마스크 5부제 요일과 맞아야 한다.

"현금만 받아요" 빈축…"한장이라도 더" 얌체족 등장
수원 팔달구의 한 약국은 신용카드 결제를 거부하고 현금만 받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시민 남모 씨는 "해당 약국은 2장에 3천원인 KF94 마스크를 팔면 남는 게 없다는 이유로 신용카드를 받지 않아 황당했다"며 "현금이 없다고 말하니 계좌이체를 하라며 계좌번호를 알려줬다"고 말했다.

약국 측은 "마스크가 워낙 비싸게 들어오는 탓에 마진이 100∼200원밖에 남지 않아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유아용 마스크를 살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시민도 있었다.

안산 단원구에서 마스크를 산 시민 염모 씨는 "2016년생인 자녀의 마스크를 사려고 1시간이나 줄을 서 약국에 들어갔지만, '유아용은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며 "성인용 마스크라도 달라고 했지만, '2016년생에게 성인용을 내줄 수는 없다'고 해 어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마스크를 하나라도 더 구매하려는 '얌체족'들도 보였다.

서대문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이모(64) 씨는 "혼자 약국을 운영해 손이 부족해 손님이 오면 일단 장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두고, 나중에 일괄적으로 전산에 입력하는데, 전산 입력 전에 다른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또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월요일 오전 부산 연제구의 한 약국앞에는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이 확인됐다. 이날 구입이 가능한 시민은 주민등록번호 끝자리가 1, 6으로 끝나는 주민에 한한다.

부산의 한악국앞, 마스크 사려는시민들이 줄을서있다,
한편 정부는 마스크 5부제로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약국에 몰렸던 때보다는 구매 경쟁률이 다소 낮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약국에서는 월요일은 태어난 해 뒷자리가 1년과 6년, 화요일은 2년과 7년, 수요일 3년과 8년, 목요일 4년과 9년, 금요일 5년과 0년으로 출생 연도가 끝나는 사람들이 마스크 2매를 살 수 있다.

구매시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을 지참해야하며 만 10세 이하 어린이와 만 80세 이상 노인은 대리구매가 가능하나 본인 신분증과 본인 및 대리구매자가 함께 등재된 주민등록등본을 제시해야 한다.

장기요양급여 수급자도 장기요양인증서를 제시하면 대리수령 가능하다. 장애인은 장애인등록증을 대리구매자가 제시하면 구매할 수 있다. 5부제 해당 날짜에 구매하지 못하더라도 토요일과 일요일 출생연도에 관계 없이 2매까지 구매가능하다.

약국마다 공적 마스크 공급 시간과 다르므로 판매 가능 시간은 모두 다를 수 있으며, 해당 주에 구매하지 못하더라도 구매 수량은 이월되지 않는다.

마스크 5부제에 따라 월요일은 1·6년, 화요일 2·7년, 수요일 3·8년, 목요일 4·9년, 금요일 5·0년으로 출생연도가 끝나는 이들이 약국에서 마스크를 2매 살 수 있다.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여권 중 하나를 지참해야 한다.약국이 중복구매 확인시스템에 구매 
이력을 입력하면, 구매자는 이번 주에는 더는 못 산다.

[속보] 코로나19 오늘 96명 추가 확진…총 7천478명

#마스크 #미입고 #판매 #약국 #구매 #구매자 #확인시스템 #첫날 #출생년도 #5부재 #2매 #코르나19 #확진#중복 구매 #확인시스템
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468[살맛 나는세상]

2020년 3월 8일 일요일

석유, [Oil crude]?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석유, [Oil crude]?
인류가 석유의 다양한 용도를 알아내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석유산업은 1850년대 미국에서 비셀, 실리먼 2세, 드레이크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1859년에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석유가 처음 시추된 후 록펠러가 주도한 스탠다드 오일은 거대한 석유 제국을 형성했다. 19세기 말에는 석유가 조명용 연료를 넘어 자동차용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들이 잇달아 개발되었고, 2006년을 전후해서는 석유정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탄화수소(hydrocarbon) 자원은 일반적으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일컫는다. 이중 액체상 탄화수소인 석유(oil, crude, 또는 crude oil)는 지하와 지표에서 모두 액체로 존재하며, 아스팔트(asphalt)와 같은 유동성이 있는 고체상 탄화수소, 석탄이나 케로진(kerogen)과 같은 고체상 탄화수소, 얼음의 결정구조 속에 메탄이나 다른 가스가 갇혀 있는 가스수화물(gas hydrate)과 구별된다.

석유의 화학적 성분,
탄화수소는 탄소(C)와 수소(H)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 화합물들의 혼합체이다. 석유는 탄소 85%, 수소 13%, 기타 황(S) 0.1~7.0%, 질소(N) 0.01~0.9%, 산소(O) 0.06~0.4% 등의 평균 중량비율로 이루어진다. 특히 황 성분을 포함한 석유는 석유의 탐사, 개발, 생산에 사용되는 기반 시설과 정유 시설을 부식시키며, 연소시 발생하는 황 성분은 산성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황 함량이 적은 석유가 선호되었다. 이 때 황을 최대 7% 함유하는 석유를 신원유(sour oil 또는 sulphurous oil)라 하며, 황 성분이 거의 없는 석유를 단원유(sweet crude 또는 sweet oil)라 한다. 그 외에도 석유에는 특수강의 제조 등에 사용되는 미량 금속인 니켈(Ni)이 평균 18 ppm, 최대 약 150 ppm, 그리고 바나듐(V)이 평균 63 ppm, 최대 약 1200 ppm 함유되어 있다. 
석유의 분별증류에 대한 개념도
석유의 비중에 의한 분류,
석유의 색과 점도는 매우 다양하며, 석유의 비중(specific gravity)은 미국석유협회(American Petroleum Institute)가 정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시한다.

API gravity = (141.5 / ρ) – 131.5, ρ = 15.5°C 에서 석유의 비중, 물의 비중(ρ = 1.0)으로 계산된 값은 10°API이며 비중이 높은 석유일수록 API° 값이 작다. 일반적으로 석유의 API°는 5°에서 60°사이로, 석유의 점도와 API°는 반비례한다. API° 값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석유의 종류를 나눈다. API° 값이 30° 또는 31° 이상인 경우 이를 경질유(輕質油; light oil)라 하며, 비중 0.83 미만의 40~45°API의 석유가 통상 가장 고가로 거래된다. API 값이 22~30°인 석유를 중질유(中質油; medium oil 또는 intermediate oil), 22° 이하인 석유를 중질유(重質油; heavy oil)라 한다. 또한 물보다 밀도와 비중이 큰 10°API 미만의 석유는 초중질유(超重質油; extra heavy oil)라 하며, 이러한 초중질유는 경질유나 중질유와 달리 물 위로 뜨지 않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석유의 탄화수소 계열,
석유는 파라핀, 나프틴, 방향족의 세 가지 탄화수소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파라핀(Paraffins) 계열의 탄화수소는 알케인(alkanes)이라고도 불리우며, CnH2n+2으로 표현되는 직선형 사슬의 탄화수소를 포함한다. 이 중 n이 5 미만인 경우는 각각 상온에서 기체상으로 존재하는 천연가스를 형성하며, n이 5~15인 경우 액체상의 석유를 이루고, n이 15 이상인 경우 점도가 높은 액체 또는 왁스와 같은 고체를 형성한다.

나프틴(Naphthenes) 계열의 탄화수소는 씨클로 알케인(cycloalkanes)이라고도 하며, CnH2n으로 표현되는 고리 모양의 액체상 탄화수소이다. 이 중 n이 5 인 경우 시끌로 펜탄(cyclopentane), n이 6인 경우 씨클로 헥산(cyclohexane)이라고 한다. 나프틴 계열의 탄화수소는 경질유(輕質油)와 중질유(重質油)의 약 40%를 차지한다.

방향족(Aromatics) 계열의 탄화수소는 경질유(輕質油)의 약 10% 정도와 중질유(重質油)의 약 30%이상을 이루며, 기본적으로 6개의 탄소로 이루어진 벤젠(benzene; C6H6) 구조와, 벤젠 구조의 수소를 알케인(alkane)이 치환한 CnH2n+2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방향족 계열의 석유에 가장 흔한 분자 구조로는 톨루엔(toluene; C6H5CH3)이 있다.

석유를 옛날에는 어디에 사용?
옛날 사람들은 설사를 일으키거나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석유를 사용했다. 석유를 방화용 기름으로 화살촉에 발랐다는 일화도 있고, 노아의 방주에 방수용으로 아스팔트를 활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동양의 경우에는 먹을 만드는 데 석유 연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천연 상태의 석유는 지표로 스며 나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석유를 석탄층의 기름방울이 지표면이나 바위틈을 통해 흘러나온 것으로 보았다. 석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페트롤리엄(petroleum)인데, 그것은 돌을 뜻하는 페트라(petra)와 기름을 뜻하는 올리엄(oleum)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글자 그대로 석유(石油)는 돌에서 얻은 기름인 셈이다.

서양 사람들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석유를 설사를 일으키거나 피부병을 치료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당시의 의료 행위가 상당히 주술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석유는 꽤나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기원전 400년경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네를 공격하면서 석유를 방화용 기름으로 화살촉에 발랐다고 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걸쳐 있는 사해(dead sea)에서 나오는 천연 아스팔트
≪구약성서≫에는 노아의 방주에 방수용으로 아스팔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지를 함유한 목재로 방주를 하나 만들어라. … 그리고 그 방주의 안팎을 역청(pitch)으로 칠하라.”

동양에서도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석유를 사용했다고 한다.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기록을 보면, 석유가 노인들의 이를 다시 나게 해주며 모든 병을 치료한다고 적혀 있다. 11세기 송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석유의 또 다른 용도에 대해 보고한 바 있다. “석유는 얼핏 보면 옻나무의 진과 다름없이 보이며, 태우면 짙은 연기를 내고 센 불길을 낸다. 그 연기로 먹을 만들 수 있는데, 이렇게 만든 먹으로 쓴 글은 옻칠을 한 것처럼 검고 윤기가 돈다. 그 글씨의 아름다움은 소나무 검정으로 만든 먹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옛 미국의 석유산업' 3인방,
오늘날과 같은 석유산업은 1850년대 미국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비셀(George Bissell), 실리먼 2세(Benjamin Silliman, Jr.), 드레이크(Edwin Drake)의 역할이 컸다.
비셀, 비셀은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던 사람으로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휴양을 갔다가 석유의 가치에 주목한인물,
실리먼 2세, 석유의 잠재력을 알아챈 실리먼은 비셀에게 동업 조건을 내걸었고, 비셀은 이를 수용했다. 1855년 4월 16일에 실리먼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나는 귀하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 단순한 처리로 매우 귀중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원료를 손에 넣었다고 확신,
드레이크.전직대령출신1859년 8월 27일에 드레이크는 역사상 최초로 수직 굴착기로 석유를 시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날은 미국의 석유산업이 탄생한 날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의 석유산업을 개척한 3인방. 왼쪽으로부터 비셀, 실리먼 2세, 드레이크.
비셀은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던 사람으로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휴양을 갔다가 석유의 가치에 주목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은 불을 켜는 데 석유를 사용하고 있었고, 비셀은 석유가 훌륭한 조명용 연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명용 연료로 사용되는 석유의 성분은 등유(燈油, kerosene)인데, 등유는 '등불을 밝히는 기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비셀은 뉴욕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석유를 조명용 연료로 사용하려면 유전을 확보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이 요구되었다.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현실성이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비셀은 원유 샘플을 가지고 예일 대학의 화학과 교수이던 실리먼을 찾아가 원유의 성분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석유의 잠재력을 알아챈 실리먼은 비셀에게 동업 조건을 내걸었고, 비셀은 이를 수용했다. 1855년 4월 16일에 실리먼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나는 귀하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 단순한 처리로 매우 귀중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원료를 손에 넣었다고 확신합니다. … 이런 결론은 나의 실험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비셀은 어렵지 않게 투자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비셀은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의 인근 하천이 기름 냇물의 뜻을 가진 ‘오일 크리크(oil creek)’로 불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1856년에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를 설립한 후 석유 탐사작업을 담당할 책임자로 철도원 출신의 드레이크를 채용했다. 당시에 비셀은 채굴 기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드레이크를 육군 대령 출신으로 치켜세웠다. 졸지에 전직 대령이 된 드레이크는 1년 반 동안 타이터스빌의 곳곳을 뒤졌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드디어 1859년 8월 27일에 드레이크는 역사상 최초로 수직 굴착기로 석유를 시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날은 미국의 석유산업이 탄생한 날로 기록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석유가 시추된 타이터스빌 유전의 광경(1865년),
석유의 지질학적 분류,
석유는 연령, 생산 심도, 근원암의 종류, 그리고 변질 정도에 따라 그 성질이 매우 다르다. 지금까지 다양한 석유의 분류법이 제안되었는데, 흔히 화공 분야에서는 석유의 정유 과정에서 비등점에 따른 화학적 성분에 따라 석유를 분류하였다. 이에 반하여 석유의 지질학적 분류는 석유의 근원, 성숙도, 기타 다른 지질학적 요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티쏘(Tissot)와 웰트(Welte)가 1978년에 제안한 석유의 분류법은 석유의 3대 탄화수소 계열인 파라핀, 나프틴, 방향족을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 다이어그램을 이용하여 석유를 분류하며, 이 경우 방향족의 꼭지 쪽으로 놓이는 석유는 일반적으로 중질유(重質油) 또는 변질이 심한 석유이며, 삼각형의 중앙부 근처에 놓이는 석유는 중질유(中質油)에 해당한다.

비더만(Biederman)이 1965년에 제안한 분류법은 석유의 연령과 심도에 기반하여 석유를 다음과 같은 4 종류로 분류하였다.
1). 600 m 이내 심도의 중생대층과 신생대층에서 생산된 석유는 황을 함유하며, 주로 방향족으로 이루어진다.
2). 지하 600 m 보다 깊이 매몰된 고생대층에서 생산된 석유는 황을 적게 함유하고 API°가 높으며 파라핀 계열을 더 함유한다.
3). 600 m 이내 심도의 고생대층에서 생산된 석유는 황을 더 함유하는 편이며,
4). 지하 3000 m 하부의 고생대층에서 생산된 석유는 밀도, 점도, 황의 함량이 가장 낮다.

###석유는 탄소 85%, 수소 13%, 기타 황(S) 0.1~7.0%, 질소(N) 0.01~0.9%, 산소(O) 0.06~0.4% 등의 평균 중량비율로 이루어진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석유 [Oil] (지질학백과)
[지질학백과  
[대한지질학회 
[Selley, R.C. and Sonnenberg, S.A. 2015. Elements of Petroleum Geology (3rd Edition). Academic Press, London, 507 pp.
[융합석유지질학. 구미서관, 404 pp.
[석유에너지 지질학. 시그마프레스, 384 pp. 
[석유 - 현대 문명의 검은 피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생각의힘) 
[네이버 지식백과] 석유 - 현대 문명의 검은 피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송성수,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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