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수용하라.
기뻐하면 기뻐할 일만 생겨난다
힘든 것에는 뜻이 있다.
감사함으로 수용하라.
믿음의 열도를 10배로 늘여라.
100배의 수확이 보장된다
모두를 위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나를 위하는 지름길이다
진리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
길 한번 잘못들면 평생 후회한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운문사 (雲門寺), 1
비구니수행도량,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절이다. 운문댐 남쪽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부속 암자로는 사리암 등이 있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2기는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매년 막걸리를 부어주는 행사가 있는 처진 소나무가 있다.
비구니 수행도량이라 사찰의 절반 정도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대웅보전, 비로전, 명부전, 만세루 정도만 개방된다.
560년(진흥왕 21)에 창건된 것을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였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고,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銅壺),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운문사 인근에는 유원지가 있다. 운문면 소재지에서 운문사로 올라오는 길에는 펜션과 민박이 즐비하고 운문사 입구에는 캠핑장과 인공암벽체험장이 있다. 인근의 운문댐과 연계하여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명산은 사찰을 품고있다. 명산의 자락에 자리한 고찰, 대찰. 등산도 하고 수려한 경관속의 사찰도 둘러보고 문화유적 답사도 할 수 있는 사찰,
대중교통만 이용해서 방문하기에는 많이 빡세다.청도역에서는 운문면이 완전 반대편에 있어서 철도 교통만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본 경내 외에 여러 암자들을 가려면 운문사버스 터미널에서 내린 후 한참 걸어가야 한다.
신라 시대인 560년(진흥왕 21)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였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937년(태조 20)에는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이 때 왕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2016년 12월 12일 통합 동대구터미널 개장과 함께 남부기점 노선들의 대다수가 경산으로 단축되어 대구 방면은 크게 안습이 됐다. 경산행은 1시간에 1대 꼴로 있는 편이지만, 버스 터미널 사용료 등의 문제 때문인지 모든 남부기점 노선들이 동대구터미널로 이전하지 못했다.
가장 편수가 많은 경산행은 자인, 금천면 동곡리, 운문면 방음리, 대천리, 신원리 경유로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중간에 남산면(갈지리, 갈고개)을 경유하는 시간대가 있고, 용성면(곡란리)을 경유하는 시간대가 있으므로 중간 경유지를 확인할 것. 대개 남산면을 거쳐서 간다. 남부정류장이 폐쇄된 2016년 12월 12일 이후에는 언양/울산완행 및 청도 0번을 제외한 나머지 남부착발 노선들이 경산착발로 단축되어 동대구터미널에서는 1일 4회 운행하는 언양 완행의 중간 경유지로만 운문사로 다니며, 운문사에서 출발하는 동대구터미널 방면은 이보다 더 횟수가 적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빼도박도 못하고 대부분은 경산에서 내린 후 시내버스를 이용(혹은 사월역/정평역 환승)해야 한다.
동대구/경산 - 운문사 노선은 모두 경산버스가 운행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철도를 이용할 예정이라면 경산역 하차 후 경산터미널로 이동하여 운문사행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운문사에서 남부정류장을 앞두고 연료를 채우러 만촌2동 대일버스 차고지 옆에 있는 담티주유소에 잠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때 한정으로 비공식적이지만 담티역에서 중간 하차할 수 있었다.[3] 물론 동대구터미널 이전 이후에는 무열대를 앞두고 고모로에 진입해서 운행하므로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다.
소나무,
희귀한 처진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꽤나 거대하고 굵은 이 소나무에게 매년 봄, 비구니들이 막걸리를 주고 있다. 은근 성장에 도움이 되는듯 하다.
"유명한 운문사 솔밭길을 걸으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운문사 금당 앞 석등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운문사는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虎踞山)에 있는데 신라 때인 560년(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뒤 여러 차례 중창하였다
운문사 암자 사리암(邪離庵),
사리암(邪離庵)은 고려 초의 고승 보량(寶樑) 국사가 930년에 창건하였고, 1845년(헌종11)에 정암당(靜庵堂) 효원대사가 중창하였다. 1924년에 다시 증축한 뒤 1935년에 중수하였다.
이곳은 특히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읍니다,
나반존자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우고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았다고 한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딸린 작은 암자인 사리암이다. 사리암은 운문사에서 남쪽으로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계곡에서 1 km 정도 떨어진 해발 500 m 정도의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경사가 심한 바위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전각으로는 관음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다. 특히 천태각 아래 사리굴은 운문사 4굴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기도처이다.
신라 진흥왕 때 운문사를 비롯하여 5곳에 절이 세워졌는데 그때 남쪽에 세워졌던 천문갑사는 아니지만 그 역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리암은 고려초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구한말 1845년에 승려 효원이 중창하였다. 이후 나반존사상을 봉안하면서 나반존자의 기도처로 알려졌다. 나반존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일컫는 말로 독성이라고도 부른다.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운문사에서의 울컥거림과 공양준비하는 모습들의 잔상이 강했던지라...서리암에서는 그냥 평이한 느낌뿐이었다. 다음 기회에는 사리암에서의 108배를,,,
운문사 주차장에서 사리암 주차장 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정도.. 다시 사리암 주차장에서 사리암까지는 빡센 등산로 길로 약 40분 정도...왕복 걷는 시간이 약4시간 정도는 잡아야 합니다.
운문사야 아름다운 절집으로 널리 알려지 있는 사찰이라 더 이상 미사여구가 필요 없는 곳이고 이곳에서 한참이나 올라가야 만나는 사리암은 이번에 처음 들렸는데 많이 놀랐습니다.운문사에 10명의 관광객이 찾아 둘러보고 있다면 이곳 사리암에는 100명의 기도객이 찾아서 붐비는 곳이네요. 대구 팔공산 갓바위가 기도처로 뮤명하여 밤낮 사람들로 붐비는데 이곳 사리암도 만만찮습니다.
사리암(邪離庵)이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버린다는 뜻의 이름으로 이곳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처로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 사후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공백기에 이 세상의 구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사리암이 나반존자의 기도처로서 가장 유명하다고 합니다.
운문사와 사리암은 목적, 마음, 훌훌 비우고 한가하게 거니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실상을 반눈으로 잠그고 물소리와 새소리를 벗하여 참으로 여유 마음껏 느끼고 하는것도!!!
운문사, 사찰내 소나무 방향 한컷,
사리암주차장에서 사리암까지는 먼저 경사길을 조금 걸어가면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이런 계단 1008개를 올라가서야 사리암에 도달합니다.
1008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내게는 힘들었지만 늦가을에 또 가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 입구주차장 ∼ 운문사 ∼ 사리암주차장 ∼ 사리암 : 왕복 10.5km(소요시간 4시간 40분)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운문사(雲門寺)
불교유적,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광대사가 중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560년(진흥왕 21)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였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귀산(貴山)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937년(태조 20)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으며, 이 때 왕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105년(숙종 10)에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 송나라에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0년(숙종 16)에 설송(雪松)이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현재 대웅보전·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명부전·강원·요사채 등의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이다. 이 중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93호로 지정된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하여 보물 제316호로 지정된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보물 제208호로 지정된 동호(銅壺) 등이 있으며, 오백나한전 안의 나한상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2기의 3층석탑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만세루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건물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있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이 있다. 이 절은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도 유명하다.
호거산 정상의 운문사스님들,
나말려초의 운문사[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5갑사를 건립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근현대의 운문사해방이후 제 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 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 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는 흥륜강사스님이 소임을 사셨으며, 15대는 2010년까지 진성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2014년까지 일진강사스님, 2018년까지 진광강사스님이 소임을 살았으며 현재는 운산강사스님이 주지 소임을 살고 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1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 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았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니, 법삭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처음에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와의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마침 태조가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땅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견성(犬城: 우뚝한 산봉우리가 물가에 있는데 오늘날 세인들이 그 이름을 좋지 않게 여겨서 견성으로 고쳤다고 함)에 모여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서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기를, “대저 개라는 동물은 밤에는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쪽은 지키지만 뒤쪽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았다.
이에 태조가 그 신모(神謀)를 가상하게 여기고 해마다 가까운 현의 조세 50석을 주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기 때문에, 절에 태조와 보양 두 성인의 진용을 안치하여 봉성사라고 이름하였다. 후에 법사가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창건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다. 속전에 말하기를, “석굴사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사(毗虛師)로도 되어 있음]와 형제가 되고, 봉성사,석굴사,운문사 세 절이 봉우리를 맞대고 나란히 있어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세 사람이 신라의 <수이전>을 개작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법사전에 기록하고 견성에 관계된 것을 비허전에 실은 것은 잘못이다. 또 <해동승전>을 지은 자가 그것을 따라 윤문함으로써 보양의 전이 없게 하여 후세 사람이 의혹을 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가.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청도군에 속해 있으나 교통 편의상 대구와 생활권이 밀접해 있다. 서기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한 신승(神僧)에 의해 창건되어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등에 의한 제8차 중창과 비구니 대학장인 명성스님의 제9차 중창불사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가지산(1,241m), 운문산(1,188m), 천황산(재약산:1,18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고헌산(1,034m), 간월산(1,069m) 등 7개 산군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전체 종주에는 2박 3일 정도 걸리며, 등억온천, 사자평, 밀양 남명리의 얼음골, 대곡리암각화, 밀양 농암대, 통도사, 석남사, 운문사, 표충사 등의 명소와 사찰 들도 곁들여 갈 수 있다. 신불산과 취서산 사이의 신불평원 60여만 평과 간월산 밑 간월재의 10만여 평, 고헌산 정상 부근의 20만여 평에 억새군락지가 있다.
등산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석남사 뒤로 올라 배내골 울산대학교 연수원에서 서쪽으로 갈 수도 있고,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사 매표소 뒤로 올라갈 수도 있다.
신불산과 취서산, 간월산은 경부고속도로 통도사인터체인지에서 삼성전관 뒤쪽 등산로를 따라 산행할 수 있는데, 종주까지 3∼4시간이 걸린다. 그 중 취서산에서 신불산을 거쳐 간월산 능선을 타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취서산을 오르려면 신평에서 통도사, 극락암, 백운암, 산림초소를 거쳐 능선을 탄다.
백두산에서부터 뻗어 내린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맥의 구봉산에서 방향을 바꿔 지리산으로 달리고, 여기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내달아 부산의 몰운대로 도달하는 산줄기를 낙동정맥(落東正脈)이라고 한다. 남쪽으로 달리는 낙동정맥 가운데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이 만나는 가지산(迦智山)을 중심으로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즐비하게 모여서 만들어 내는 절경을 영남알프스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불리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인들이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한편 부산의 산악인들이 1970년 초반 일본의 북알프스를 등반한 뒤 영남 지역을 산행하면서 그 아름다움이 일본의 북알프스에 버금간다는 뜻으로 이곳을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한국의 알프스’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적당하지 않아서 점차 ‘영남알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남알프스의 절경을 유럽의 알프스, 그리고 해발 3,000m 이상의 고봉(高峰)이 어우러져 형성된 일본의 알프스와 버금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찾는 이의 입을 타고 구전되면서 이제는 고유 명사로 정착하였다.
영남알프스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다 풀어서 말하기에는 끝이 없다. 사시사철 철 따라 변화의 옷을 갈아입는 영남알프스의 아름다움은 글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높은 산들을 중심으로 볼거리들을 짚어 보자.
사철 아름다운 비경 으로 변신하는 가지산
해발 1,241m의 가지산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비경을 뽐내는 영남알프스의 주봉(主峰)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이 모이는 삼각 포인트이다. 1979년 11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국 도립공원 중 범위가 가장 넓다. 바위봉과 억새밭이 가지산 곳곳에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등산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가지산을 중심으로 운문산(雲門山)·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북알프스, 배내고개를 기준으로 간월산·신불산(神佛山)·영축산(靈鷲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동알프스, 천황산(天皇山)·재약산·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남알프스라 부른다.
정상에 올라서면 운문산, 간월산, 고헌산(高獻山) 등 영남알프스의 산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능선은 바위가 많고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기가 좋아 새해 첫날 수많은 사람들이 산정에 올라 일출을 기다린다. 사실 한반도 남부 지방 일출 1번지라 할 수 있다. 또한 밀양강의 지류인 산내천과 무적천의 발원지이며, 학심이계곡·심심이계곡·오심계곡·쇠점골·용수골·석남사골 등 이름난 계곡과 학소대폭포·비룡폭포·쌍폭포·오심폭포·구룡폭포·호박소 등이 유명하다. 특히 학심이계곡의 학소대(鶴素臺) 폭포는 영남알프스 가운데 북알프스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다.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 서북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25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도 장엄하다. 폭포의 깊이는 4m, 넓이는 대략 40㎡ 정도이며, 둘레가 50m 가량인데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만큼 물이 차갑다. 학소대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탓에 천혜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 폭포를 중심으로 많은 학들이 날아와 새끼를 치며 살았다고 하는 신비로운 곳이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에 하나인 운문산
해발 1,188m의 운문산은 영남알프스의 산군 중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위치상으로는 울산에서 벗어나 밀양과 청도가 맞닿아 있는 곳에 있다. 구름이 피어오른다는 운문산은 영남알프스의 주봉인 가지산이 남서진하면서 운문지맥을 이룬다. 운문지맥의 능선상에 운문산[1,188m], 범봉[962m], 억산[944m], 구만산[785m], 육화산[674m] 등 이름난 산들이 모여 있다.
운문산을 ‘호거산(虎居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청도 방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밀양 방면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바위 절벽으로 되어 있어 ‘한바위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바위 절벽과 깊은 협곡은 명산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운문사를 비롯한 대비사, 석골사, 영남알프스의 봉정암으로 불리는 상운암(上雲庵)을 비롯한 부속 암자가 있고, 선녀폭포, 비룡폭포, 무지개폭포, 운곡폭포, 석골폭포, 못골폭포도 운문산 산자락에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허준(許浚)이 번위(反胃)에 걸린 스승의 시신을 해부한 곳이 운문산 얼음굴이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이기도 하다. 특히 가을철 상운암계곡은 내장산의 단풍과 버금갈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불처럼 타오르는 단풍을 보기 위해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 곳이다. 1983년 12월 22일 운문산군립공원[16.2㎢]으로 지정되었다.
천황산 ^ 재약산
사자평 억새밭의 천황산과 거대한 암벽의 재약산,
해발 1,189m의 천황산과 1,119m의 재약산의 산봉우리는 직선거리로 1.6㎞ 거리를 두고 나란하게 솟아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과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산내면이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 줄기와 이어진다. 천황산 북쪽의 밀양 시례빙곡은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곳으로 ‘얼음골’이라 부른다. 천황산과 재약산 서쪽은 경사가 심하고 골이 깊어 층층폭포, 흑룡폭포, 학암폭포와 계곡에 흐르는 물줄기가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구슬이 굴러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산을 온통 뒤덮기 시작하는 재약산의 억새는 고사리분교 옛터에서 시작해 재약산 서쪽 사자평과 천황산 동쪽 사면 4.13㎢에 이르는 광활한 분지를 가득 메운다. 이곳의 억새밭은 면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억새 평원이다. 가을철 사자평 억새의 풍광을 광평추파(廣坪秋波)[광활한 평원의 가을 파도]라고도 하며 재약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재약팔경은 필봉비우(筆峰秘雨), 금강동천(金剛洞天), 사자폭포(獅子瀑布), 천황욱일(天皇旭日), 화계용추(花溪龍秋), 층층단풍(層層丹楓), 광평추파(廣坪秋波), 세우연죽(細雨煙竹)이다. 새삼 뜻을 찾아 음미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해발 850m 부근에 너르게 자리 잡은 사자평에는 오래 전 화전을 일구며 살던 20여 호의 민가와 화전민 자녀들을 위한 배움터인 고사리분교가 있었다. 당시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던 화전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사자평은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승병을 훈련시킨 장소였고, 여순반란 이후에 빨치산 병력이 집결하기도 한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그리고 또 영남알프스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700m에 있는 밀양 남명리 얼음골이다. 밀양 남명리 얼음골은 3월 중순~7월 하순에 얼음이 얼고 8월 초순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곳으로 1970년 4월 27일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한여름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맑은 물에 손을 담그면 손이 시릴 정도이다.
수채화 속 억새 평원 신불산과 산상 음악회가 정겨운 간월산,
해발 1,159m의 신불산과 해발 1,069m의 간월산은 봉우리간 1.87㎞ 거리를 두고 솟아 있다. 신불산은 가지산에서 이어져 오는 낙동정맥이 능동산에서 허리를 틀어 배내고개를 지나 간월산을 거쳐 신불산에서 다시 솟구쳤다가 신불재를 지나 영축산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공룡능선, 삼봉능선, 아리랑릿지, 쓰리랑릿지, 에베로릿지와 같이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바위 능선과 홍류폭포, 금강폭포를 품고 있다. 서쪽으로는 배내골의 근간을 이루는 왕봉골과 청수골, 파래소폭포와 같은 비경을 담고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영축산과 인접하며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4㎞의 능선에 펼쳐진 약 1.98㎢의 억새 평원은 가을이면 한 편의 수채화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답다. 신불산은 산신령이 불도를 닦은 산이라 하여 심신이 괴로울 때 기도를 올리면 도와주는 산이기도 하다.
신불산과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산정에는 축조 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폭이 3m, 둘레가 12㎞에 이르는 단조성(丹鳥城)이 있다. ‘단조(丹鳥)’란 머리가 붉은 학을 말하는데, 산성의 모습이 마치 목을 길게 뽑아 세운 학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성 안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12개나 있었다.
파래소폭포는 신불산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폭포이다. 높이가 15m, 소(沼)의 둘레가 100m 정도로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일어나는 하얀 물보라를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나오다. 폭포의 중심이 몹시 깊어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며 명주실을 세 타래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깊고 푸르다.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이 가뭄이 들면 찾아와 비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던 곳이다. 비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여 처음에는 폭포의 이름이 ‘바래소’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소망을 비는 많은 사람들이 파래소폭포를 찾아오기도 한다.
간월산의 정상 간월재에서는 10월이 되면 억새 축제가 열린다. 2016년까지는 ‘울주 오디세이’, 2017년에는 ‘아날로그 인 알프스(Analogue in Alps)’라는 제목으로 산상 음악회가 열렸다. 광활한 억새밭을 배경 삼아 국내 유명 가수들의 열창이 간월산을 가득 채운다. 간월산은 매년 열리는 산상 음악회를 보기 위해 부산, 경남 등지에서 모여든 산악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간월산에서 간월재를 거처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억새 군락지는 해발 900m 일원에 조성되어 있다. 10월에 열리는 산상 음악회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억새 물결과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 하늘과 가까워졌음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곳에서는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딩 동호회원들의 시원스러운 고공비행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괴석과 노송의 영축산,
해발 1,081m의 영축산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과 경상남도 양산시 화북면을 경계로 하는 곳에 위치한다. 영축산은 낙동정맥이 서서히 남하하면서 간월산과 신불산을 지나 영축산에서 솟구쳤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어진다. 영축산은 신령 영(靈) 자, 독수리 취(鷲) 자를 합친 산 이름인데, 영취(靈鷲)의 불교식 발음이 영축(靈鷲)이다. 즉, 신령스러운 독수리가 살고 있는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축산을 기점으로 한 갈래는 낙동정맥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 갈래는 영축지맥을 형성한다. 영축지맥에 속하는 산은 영축산[1081m], 시살등[980,9m], 오룡산[951m], 염수봉[816.1m], 금오산[765m], 구천산[630m], 만어산[669,6m], 매봉산[283m]으로 영축지맥의 길이는 45.8㎞이다. 또한 산자락에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불보사찰인 통도사(通度寺)가 자리 잡고 있으며, 통도골, 금강골, 청수 좌골·우골 등을 품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기우제를 지내던 고헌산,
해발 1,034m의 고헌산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상북면·두서면,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이 접한 곳이다. 고헌산은 두루뭉술한 산세에 비해 골짜기가 많다. 대통골, 곰지골, 연구골, 홈도골, 도장골, 큰골 등 깊은 계곡이 있다. 고헌산은 높은 봉우리라는 뜻도 있지만, 언양현의 진산(鎭山)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볼 때 단지 산의 높이만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 고숭(高崇)의 의미가 담긴 높은 산봉우리로 볼 수도 있다. 예로부터 높은 산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산, 숭산 등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어 온 듯하다. 지금도 고헌산 자락에 사는 나이 많은 노인들은 고헌산 산신령에게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영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양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고헌산의 용샘[龍泉]에서 소망을 빌고 기우제도 지냈다.
용샘은 고헌산 동봉[1,034m] 산불감시초소의 동쪽 사면 해발 980m부근에 있다. 언양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용샘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높은 곳에서 부정을 피하고 하늘과 산신과 비를 다스리는 용신에게 정성껏 비를 빌었다. 용샘은 사철 물이 마르지 않았고, 태화강(太和江)의 상징적 발원지이기도 하다.
영남알프스의 또하나 문복산,
해발 1,015m의 문복산은 울산에서 벗어난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다. 문복산은 영남알프스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막내격인 산이다. 영남알프스의 막내 봉(峰)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영남알프스의 산군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문복산에 이른 지맥은 다시 허리를 숙여 북쪽으로 이어 가다가 도수골 만댕이[서담골봉]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두 갈래 중 한 갈래는 서북쪽으로 뻗어 내려 심원고개를 거처 옹강산과 옹강릿지로 이어지고, 다른 한 갈래는 북쪽으로 이어져 조래봉[대부산]을 거쳐 범곡천에서 맥을 다한다. 문복산의 서쪽 기슭 삼계리에는 세속 오계의 발상지이고 신라 화랑들과 밀접한 가슬갑사(嘉瑟岬寺)가 있다. 가슬갑사는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신라의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 오계(世俗五戒)[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를 내려 준 장소로 기도 도량이자 화랑의 군사 훈련장이었다.
영축산 '靈鷲山,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靈鷲山'과 '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표기는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표기되고 있어 통도사를 찾는 분들의 혼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은 한자 '鷲'자에 대한 한글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예를 들어, 탱화(幀畵)라고 할 때 '탱(幀)'자는 옥편에 '정'자로 찾아야 나오고,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菩提)는 한자 사전식으로 '보제'라고 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鷲'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 이름 혼동의 원인은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자를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 '취'로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축산이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계기가 통도사의 창건에서 비롯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산을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동일한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영축산이라 이름지었고, 이곳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최근 양산시에서는 영축산에 대한 그 동안의 혼동을 바로잡고 고유의 산 이름 찾기 위하여 지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명의 유래와 단일화를 위한 자료조사와 의견수렴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1월 9일 양산시지명위원회를 개최하여 영축산이 타당하다는 최종 결론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따라서, 영축총림 영축산 통도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영축산 지명
양산시는 그동안 ‘영축산’과 ‘영취산’, ‘취서산(鷲棲山)’과 ‘축서산’ 등 4가지로 쓰여 혼선을 빚어왔던 통도사 뒷산의 명칭을 2001년 1월 양산시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통일하기로 하여 영축산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지도에는 취서산으로 표기돼 있고 종교학대사전 등에는 영취산으로 올라있으며 법화경 언해본과 불교학 대사전, 통토사의 내력 등에는 영축산으로 기록돼 있다.
양산시는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법화경을 설파했던 곳이 ‘영축산’이며, 신라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때도 이 이름을 본딴 것으로 전해지므로 영축산이라는 명칭이 적합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영축산은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가 있는 산이다. 일명 영취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신령스런 독수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며, 통도사 일주문에도 영취산 통도사로 쓰여져 있다. 영축산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괴석과 고사목, 노송이 우거져 있다.
가지산도립공원 구역 안에 있는 영축산은 정상에서부터 신불산 정상에 이르는 드넓은 억새능선으로, 취서산 정상에서 신불산,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산행도 해볼만 하다.
영축산 남쪽 산록에는 대찰 통도사가 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로 신라 선덕여왕15년 (646년) 자장율사가 개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전부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된 것이나 대웅전은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34호인 은사입향로, 보물 74호인 국장생석표등의 문화재가 있다.
산행 길잡이,
산행기점은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30분 정도 가면 통도사이다.
통도사를 지나 소나무가 빽빽한 포장도로를 따라 40분쯤 걸으면 극락암. 극락암 오른쪽으로 큰길을 따라 올라 비로암을 거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 오르면 백운암이다.
백운암 오른편 암벽사이로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시야가 탁 트인 능선길이다. 이 능선길은 신불산, 간월산을 거쳐 천황산 까지 이어진다. 능선 가득히 초원지대이다. 능선을 따라 암릉을 타고 40분쯤 오르내리면 1,059봉이다. 표지석에는 정상이라 쓰여 있지만 조금 더가야 1,092봉이다. 이 봉우리에 서면 영남 알프스 산군인 신불산, 간월산, 재약산, 천황산의 봉우리가 겹쳐 시야에 들어 온다.
이 영축산 정상에서 하산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유명한 억새평원이 신불산 까지 1시간 정도 거리로 이어진다. 가을 억새꽃이 필 때면 신불산 까지 억새평원을 즐기며 오른 후 하산한다.
영축산은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을 연결하여 3개의 산을 단체 산악회 등에서는 많이 오른다. 배내재에서 시작하여 이 3개의 산을 종주하는데 단체일 경우 7-8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중교통,
부산이나 양산으로 가서 버스를 갈아탄다.
ㅇ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 - 통도사(10분간격, 40분 소요)
ㅇ양산 시외버스 안내 [양산시]
ㅇ통도사 방면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노포동 지하철역,경남버스)에서 신평(통도사)행
(시간:06:30~20:40 / 매 20분 간격)->통도사 하차
영남알프스는 지리산의 절반 정도인 250㎢의 면적에 펼쳐져 있다. 예로부터 많은 전설과 설화가 깃들어 있고, 애환과 역사, 그리고 천주교와 관련된 순교자의 넋이 서린 곳이다. 산자락에는 불보사찰인 통도사를 비롯하여, 운문사, 표충사, 석남사와 함께 수많은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을이 시작되면 전국에서 가장 걷고 싶어 하는 억새바람길[4.5㎞]을 비롯하여 단조성길[6.6㎞], 사자평억새길[6.8㎞], 단풍사색길[7㎞], 달오름길[4.8㎞]이 연계 산행이 가능하도록 열려 있다. 가을에는 주말만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영남알프스를 찾는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쌀바위, 천질바위, 문바위, 깨진바위, 드린바위 등 암릉이 즐비하게 솟아 있어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바위 맛을 느낄 수 있다. 쇠점골, 용수골, 학심이골, 심신이골, 저승골, 배내골, 왕봉골 등은 길이만도 8㎞[20리]에 이르러 여름 계곡 산행지로 탁월한 곳이다. 이뿐만 아니라 후백제 견훤(甄萱)의 전설이 깃든 지룡산, 천년 묵은 용(龍)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몸이 무거워 꼬리를 자르고 그 꼬리가 폭포로 변한 용미폭포(龍尾瀑布), 이무기의 한이 서린 억산(臆算),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화엄경(華嚴經)을 설파해서 1,000명의 성인을 득도시킨 천성산 화엄벌 등 영남알프스와 인접한 산봉우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또한 국내 유일의 산악 영화제인 울주세계산악영화제를 비롯한 영남알프스억새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최근에 문을 연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 515-4번지]는 영화관을 비롯한 인공 암장, 산악 구조 센터, 산악 레포츠 센터 등 산악인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산악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인근에는 작전청 별빛야영장과 국보 제147호인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川前里刻石)과 국보 제285호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岩刻畫)가 인접해 있고, 정자바다와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울산 십리대숲 등이 1시간 거리에 있어 1박 혹은 2~3일 일정의 여정으로 영남알프스를 찾는다면 울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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