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8일 수요일

해인사,[海印寺], 1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해인사,[寺], 1

석조여래입상,[ 石造如來立像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여래입상.
유형/ 시대/ 성격/ 건립시기·연도/ 소재지/ 소유자/ 관리자/ 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적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불상
9세기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5 (치인리), 해인사
해인사
해인사
보물 제264호
1963년 01월 21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伽倻山:1,430m)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세웠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해인사에 있는 여래입상의 높이는 2.1m, 재료는 화강석이다. 이 불상은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결실되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髻)가 매우 낮고 갸름한 얼굴은 머리와 함께 긴 타원형이다. 눈, 코, 입은 거의 마멸되었는데 코가 짧고 입은 작은 편이다. 왜소한 불신(佛身)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는 좁은 편이며 두 팔은 몸에 밀착하여 붙였고 몸은 많이 깨어졌는데 굴곡이 드러나지 않아 석주(石柱) 같은 느낌이 든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으로 올린 것 같고 왼손은 그냥 내린 듯하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옷무늬는 특이한데 상체의 양쪽에서 비스듬하게 난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 모양을 이루는 옷주름은 허리부분에서 'U'자 모양으로 바뀌어 양쪽 다리에 물결무늬를 형성하였다.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 본 저작물은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저작물로, 해당 저작물은 문화재청 누리집(홈페이지)(http://www.heritage.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지만, 평판적이고 형식화한 조각 수법 등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보물 제264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불상은 2.1m의 크기이며,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와 대좌가 결실되었고 무릎 아랫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이다. 목도 부러졌으며, 전체적으로 박락이 심한 편으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 조성에 관한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으로, 원래는 상당히 입체감이 있었던 불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불상이 갖추어야 할 종교성은 충분히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은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 나온 부분)와 후덕하게 보이는 양 볼과 턱, 어깨까지 닿아 있는 귀 등에서 원만한 상호(相好 : 얼굴)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의 앞면보다 옆면의 폭이 상대적으로 길어진 조형이다.
머리에 비해 좁아 보이는 어깨, 장방형의 돌을 간략하게 다듬은 듯한 불신(佛身 : 불상의 몸)의 모습, V자 형태의 딱딱한 법의(法衣 : 불상의 옷) 주름 등에서 불상이 형식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인(手印 : 손 자세)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을 옆으로 내려 뜨렸다. 박락이 심하여 법의의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서 V자 문양이 배꼽까지 내려오다가 W자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시대 718년에 조성된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 조성된 후,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했던 것이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불두(佛頭 : 불상의 머리)의 모습과 허리를 강조하는 등 통일신라시대 8세기의 불상 조형을 계승하고 있지만,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어깨, 선각(線刻)화 되어 가는 법의 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간취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상호의 원만한 표정이나 법의의 주름 형식 등을 계승하고 있으나, 머리에 비해 좁아진 어깨, 경직화되고 간략화된 법의 주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수도 경주(慶州)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9세기에 지방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광배와 대좌를 잃은 이 불상은 목이 절단되는 등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계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육계가 낮은 소발의 머리에 갸름한 얼굴로 코가 짧고 입이 작다. 머리에 비해 왜소한 불신은 각진 좁은 어깨, 몸에 밀착된 두 팔, 허리 등의 몸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은 네모진 신체는 마치 석주와도 같다.
여기에 새겨진 넓은 띠주름식의 법의는 V자로 흐르다가 허리 부근에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에 물결무늬를 형성한 점 등은 당시 유행하던 통일신라 말 석불상들에 나타나던 특징을 따른 예라 하겠다. 이처럼 이 불상은 평판적이며 경직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라 말 내지 고려 초의 석불상인 것이다.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입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민머리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많이 닳고 손상되었다. 머리에 비하여 왜소해진 몸은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이 든다. 좁아지고 각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쪽에서 비스듬히 흐른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다가, 허리 부근에서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 앞으로 들었고, 왼손은 내렸는데 두 팔은 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불상을 고부조하고 발 아래 대좌를 마련한 이 불상은 머리 뒤에 원형두광을 얕게 새기고, 나머지 부분을 신광으로 처리한 석주형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얼굴과 두 손을 정교하게 조각한 반면 불신은 마치 석주에 새긴 듯 옷주름 등을 간략하게 처리했다. 육계가 높직한 소발의 머리, 꼬리가 올라간 눈, 융기된 인중이 뚜렷한 비만한 얼굴, 건장하나 평편적인 가슴에 보이는 승각기, 당당한 왼쪽 어깨에 나타난 고리장식 등은 9세기 초로 추정되는 백률사 금동약사불입상(국보 제28호)과 비교되는 당대의 걸작품이라 하겠다.
이 불상은 신체 비례의 불균형, 평면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해인사 석조여래입상 [海印寺石造如來立像] (두산백과)
[한국의 사찰문화재­경상남도Ⅰ』(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 2009)
[국보』(증보 상)(박성래, 예경산업사, 1990)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陜川海印寺石造如來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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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陜川 海印寺 ]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합천 해인사,[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안리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의 창건 유래 전설.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
지정/ 종목/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종류/분류크기/
사적
사적 제504호
2009년 12월 21일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등 지도
사찰
56,469㎡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원래 존재했던 가야산 해인사의 창건 유래는 구전되면서 그 생명력을 잃고, 해인사의 대장경판 조성담이 해인사 창건담으로 대체되어 구전되고 있다.
"신라 합천에 사는 이거인(李居仁)은 성품 좋은 이서(里胥)로 눈이 셋 달린 강아지[三目狗]를 주워 애지중지 키운다. 기른 지 3년째 되던 해 가을 삼목구가 갑자기 죽어 장례를 잘 치러 준다. 다시 2년 후 이거인은 갑자기 병이 들어 죽는다. 이거인은 저승에서 삼목귀왕(三目鬼王)을 만나는데, 삼목귀왕은 자신이 예전에 잘못을 저질러 3년 동안 이승의 축생계로 쫓겨났던 삼목구라고 한다.

삼목귀왕은 이거인에게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인간 세상에서 대장경을 조성하려 했지만 목숨이 다하여 이루지 못했다고 하라 한다. 이거인이 그 말을 따름으로써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와 보니, 실은 한바탕 꿈이었다. 꿈을 깬 이거인은 삼목귀왕이 시킨 대로 공덕문을 짓고 관인(官印)을 받아 기다렸다. 이듬해 신라의 공주 자매가 마마에 걸렸는데, 대장경 화주가 와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임금의 명령에 따라 입궁한 이거인은 대단월(大壇越)로 대장경을 조성하여 그것을 해인사로 옮겼고, 공주들의 몸에 들었던 삼목귀왕이 떠나자 공주들의 병도 나았다. 이후 이거인 부부는 극락왕생했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합천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 경남 합천군 해인사 법보전에 있는 조선의 불상. 높이 125cm. 보물  제1777호.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경남 합천 해인사 전경(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불가에서는 부처님[], 경전[], 스님[]을 세 가지 보물[]이라 하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사찰, 고려조 16대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 그리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 부른다. 그러나 원래부터 해인사에 팔만대장경판이 모셔진 것은 아니었다. 대장경판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새기고, 강화도에 옮겨져 선원사()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조선 태조 7년(1398)에 해인사로 옮겨왔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말사(末寺)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해인사의 창건 연기()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900)로 중국에서 석덕[]을 사사한 순응()과 이정()이 해인사를 세웠다고 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설화 창작으로 이어진다. 『가야산해인사고적()』(943)에는 순응과 이정이 양나라 보지공()의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와 해인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왕후가 등창이 나 두 스님이 준 오색실로 병을 낫게 하는 모티프가 있는데, 이는 위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런데 1662년(현종 3)과 1874년(고종 11)에 쓰인 『가야산해인사고적』이나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동국승니록()』에는 이거인을 주인공으로 한 해인사 장경 연기를 더욱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린 <해인사의 유래>라는 설화는 염라왕의 ‘해인()’이라는 도장을 받아온 이 진사가 용의 득천을 돕고 해인사를 세운 것으로 변이되었다. 대장경이 판각된 인연을 담은 문헌 설화가 구전되면서 해인사 연기설화로 변이된 결과라 하겠다.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는 가야산은 신라시대부터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악으로 정견모주(正見母主)를 산신(山神)으로 모셨고, 신라 말의 염세적 천재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 산으로 들어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해인사 진입부에 국사단(國師壇)이라는 건물이 서 있는데, 가람을 수호하는 토지신을 모신 곳이다. 이는 가야산이 산악신앙, 지신신앙, 풍류도 등 토착신앙의 성지임을 알려주는 흔적들이다. 반면 가야산의 이름은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이룬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대에 들어온 불교가 토착신앙들을 아울렀던 역사적 궤적을 보여준다.

해인사는 802년 의상의 증손뻘 제자인 순응(順應)에 의해 창건되어, 의상계 화엄종의 중요 사찰인 화엄십찰이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 편에 섰던 '북악파'의 핵심으로, 930년 왕건의 복전(福田)이었던 희랑(希朗)대사가 크게 중창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조선 초 팔만대장경을 옮겨온 후 1488년 대적광전과 장경판전, 종루, 불이문(不二門)과 26동의 요사(寮舍)채 등을 중건함으로써 현재와 유사한 모습을 갖추었다.

가람 전체는 크게 3단으로 나뉘는데, 아랫단은 일주문(一柱門)-봉황문(鳳凰門)-불이문이 연달아 배열된 진입부이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경사진 한 줄기 길의 양 옆에 의도적으로 심은 키 큰 소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벽을 이루고 그 끝에는 봉황문이 위치한다. 봉황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국사단이 있고, 그 왼쪽 위로 불이문(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중첩된다. 3개의 문과 그 사이 공간들은 매우 흡인력 있게 구성되어 최고의 진입공간을 이룬다.

봉황문에서 해탈문으로 향하는 길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국사단이다. [출처 : 관조스님]

중간단은 구광루(九光樓)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승방들이 배치된 구역이다. 강당인 구광루는 정면 7칸의 긴 건물로, 예전에는 아래층의 동쪽 두 번째 칸을 통해 중심 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중심 마당에는 육중한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탑은 마당의 정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구광루 밑을 통과하면 마당의 동쪽 모서리에 서게 되는데, 이때 동쪽으로 치우친 석탑이 오히려 대적광전의 중앙에 놓인 듯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 중창불사 때 구광루의 누하 출입을 막아버렸고, 구광루의 기단과 건물의 격식이 변화되어 이처럼 치밀한 공간 계획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화엄종 최고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주불전을 대적광전이라고 부른다. 해인사 대적광전은 원래 2층 전각이었으나 1917년 단층으로 재건하였다. 때문에 내부에 모신 거대한 불상에 비해 천장이 낮아 공간이 답답해 보인다. 대적광전 서쪽으로는 나한전 등 보살전들이 산재하여 예불공간을 이룬다.

대적광전

가장 뒤편의 높은 단은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영역이다. 정면 15칸의 긴 건물들이 남쪽과 북쪽에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의 동쪽과 서쪽에 정면 2칸의 작은 건물들이 세워져 일곽을 이룬다. 남쪽 창고를 수다라장이라고 하고, 북쪽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부르는데 이 두 건물에는 팔만대장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동서쪽 작은 창고에는 해인사에서 자체 제작한 판본들을 보관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 2동, 맞배 지붕, 1488년경, 국보 제52호.

4개의 건물이 이루는 동서로 긴 마당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선 외부공간으로, 해인사 진입로의 좁고 긴 공간을 90도 틀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1488년 창건된 건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 초의 창고 건물이다.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각 165평 규모이며, 날카로운 초각을 가진 초익공(初翼工)계 구조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이며, 내부 환기를 위해 기둥 사이 각 칸 위아래에 살창을 설치하였다. 이 살창은 크기와 위아래 조합 배열이 두 건물의 앞뒷면 모두 다르게 짜여져 있다.

장경판전인 법보전

경판전은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이기 때문에 통풍과 환기가 가장 중요하다. 환기창의 모양과 크기를 각 면마다 달리한 까닭도 내부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고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부 바닥은 흙바닥 아래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섞어 다져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동·서 판고 건물은 아예 벽면 전체를 살창으로 처리하였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이다. 중정을 사이로 둔 장방형의 두 건물은 장경판전이며, 사이에 보이는 전면 2칸의 작은 건물은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한 사간판전이다.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장경판전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건물 2동(사간판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 1488년경, 국보 제52호.

이러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경판들을 오랜 세월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실제 실내 환경을 측정한 결과, 내부 온도는 외부에 비해 0.5∼2도 정도 낮게 유지되며, 습도 역시 5~10% 정도 낮게 유지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경판전은 경판들을 보관하는 내부 판가들을 건물 구조체와 일체화하는 방법을 취해 구조적 안전도 꾀하고 있다.

장경판전 내부

해인사 연기설화(緣起說話)는 사찰 창건과 고려대장경 판각이라는 두 가지 설화가 문헌과 구비를 넘나들며 전해진 것이다. 이 가운데 해인사의 대장경이 판각된 이야기 관련 설화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삼목구와 ‘이거인’이라는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우면서 명부와 인간계 어디나 팔만대장경이 담은 불법의 가없는 법력이 미친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해인사 연기설화는 엄격하게 따진다면 해인사 장경 연기설화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리고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실린 작품은 명부와 이승을 오가는 환상적, 전기적 성격의 서사 전개와 불교적 의미화를 적절하게 수행하면서 소설적 면모까지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합천 해인사 중정. 중앙의 삼층석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요사, 우측에는 구광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9세기 초창, 석탑과 석등을 제외한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중창.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전경:
1) 합천 해인사 중정. 중앙의 삼층석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요사, 우측에는 구광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9세기 초창, 석탑과 석등을 제외한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중창.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3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

2)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대적광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3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가야산에 있는 절. 해인사의 산내암자로서 창건연대 및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보물 제1300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 보물 제1300호. 해인사의 산내암자로서 창건연대 및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나,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홍제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와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의 서편 200m 지점에 위치,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홍제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와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의 서편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입적하자, 광해군이 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탑. 보물 제1301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탑. 보물 제1301호.

홍류동 해인사 입구 농산정 가야산 맑은 물이 홍류동 계곡에 구비쳐 흐르고, 세월의 풍상에 씻긴 바위들의 부드러운 곡선이 유월 햇살에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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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陜川 海印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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