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3일 월요일

대장경,[ 大藏經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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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大藏經 ] 1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대장경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율()․논()의 삼장()과 중국 및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총합한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에서는 오대산 화장사()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고, 전후소장사리()조에서는 신라말기에 보요(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이칭/ 별칭/ 유형
고려대장경
문헌
부처님의 설법[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論]을 모두 모은 것.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론(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삼장,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대장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껴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의 방법에 의하여 이른바 ‘결집(結集)’이 이루어 진 것이다.
제1차 결집이 라자그리하에서 이루어진 후 4차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3세기에 아쇼카왕 때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소위 ‘팔리어 삼장’이 완비되었다고 한다. 이 팔리어 삼장이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졌다. 그러나 스리랑카로 전해진 팔리어 삼장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암송에 의한 구전의 방법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불교언어로서의 팔리어(pali)를 사용하였지만 문자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서기전 1세기 경에 스리랑카에서 비구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눠 파벌싸움이 계속되면서 정법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스리랑카 문자로 표기함으로써 문자로 된 팔리어 삼장이 정비되었다. 이 전통이 미얀마, 캄보디아, 타이랜드, 라오스 등으로 확산되어 팔리어 삼장이 각국의 문자로 표기되어 소위 남방지역에서는 팔리어 성전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팔리어 삼장은 기원 전후에 형성된 대승경전 등이 포함되지 않은 소위 소승불교의 한 부파의 성전으로 그 양도 한역 대장경의 10분의 1 정도이다.
이 팔리어 삼장은 19세기 초기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82년에는 영국에서 Pa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도 번역하여 남전 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 하였고, 현재 인도에서는 범어를 표기하는 데바나가리로 출판하고 있다.
이 팔리어 삼장과 함께 원본(original text)이라 할 수 있는 범어대장경이 고대 인도에서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된 것이다. 범어 경전은, 그동안 소멸되었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네팔을 비롯하여 티베트, 돈황석굴 등에서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어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범어 경전은 한역의 토대가 되었던 경전이라서 중국에 전래될 법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역이 끝나고 고의로 소멸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범어 성전은 소위 북방불교 권에서 중국어와 티베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몽고어, 만주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서장대장경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로 범어를 직역하였기 때문에 대승불교 이해를 위해 중요시되고 있다. 이 대장경은 특히 8세기 이후부터 번역되어 14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판본이 아니라 사본(寫本)이었다.
최초로 인쇄한 것은 티베트가 아니라 1410년에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져 북경판 또는 영락본으로 불리는 깐규르(경·률)이다. 이 대장경은 한역 대장경에 없는 밀교 경전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어 원전이 소실된 현실에서 범본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전해주는 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장경은 기원 후 1세기부터 범어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이 한역대장경은 중국 각 왕조의 황제들의 후원으로 인도나 서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의 역경 승려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한꺼번에 수입된 것도 아니고, 번역 역시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이 걸려 이루어졌다.
또한 필사(筆寫)의 방법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복이 생기게 되고 체제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번역된 순서대로 적은 목록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 가장 정확하고 내용이 훌륭하여 후대에까지 모범으로 삼았다.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을 중심으로 최초로 간행한 대장경(大藏經)이 북송 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 태조가 발원하여 971에서 983년까지 새긴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으로 개보칙판(開寶勅版)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雕大藏經)·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북송(北宋)의 동선사판(東禪寺版) 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표 참조)
대장경의 종류,
대장경명/ 간행/ 시기/ 권수/ 비고


촉판(蜀版: 北宋官版, 開寶勅版)
북송(971∼983)
5,048
勅版〈開元釋敎錄〉收錄
고려초조판(高麗初雕版)
고려(1011∼?)
5,048
勅版〈〃〉
거란판[契丹版]
거란(1031∼1054)
 
勅版
숭녕판(崇寧版: 福州東禪寺版)
북송(1075∼1103)
5,700
仕版
비로판(毘盧版: 福州開元寺版)
남송(1112∼1151)
6,117
私版
思溪版(圓覺寺版)
남송(1126∼1132)
5,480
私版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版: 再雕大藏經)
고려(1233∼1248)
6,561
勅版
홍법사판(弘法寺版: 金藏)
남송(1149∼1294)

私版
사계판(思溪版: 資福寺版)
원(1239∼?)
5,740
圓覺寺版의 追 補刻
항주판(杭州版: 普寧寺版)
원(1277∼1290)

思溪版의 重刻
고사판(告
砂版: 延聖寺版)
원(1231∼1305)
6,00
私版, 1287년 追刻
명판남장(明版南藏: 報恩寺版)
명(1373∼1403)
6,331
金陵(南京) 開版
명판북장(明版北藏: 北京版)
명(1410∼1440)
6,361
北京서 開版
뇌력판(牢
曆版: 嘉興

嚴寺版)
명(1589∼1676)
7,334
方冊本 北藏 增補
종존판(宗存版)
일본(1614∼1624)
284
高麗大藏經版 底本
천해판(天海版: 寬永寺版)
일본(1637∼1648)
6,323
木活字
황벽판(黃檗版: 鐵眼版)
일본(1669∼1681)
6,958
方冊本 萬曆版 底本
용판(龍藏: 淸版)
청(1735∼1736)
7,838
明北藏版 底本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 縮藏)
일본(1880∼1885)
8,534
高麗大藏經版 底本
일본교정대장경(日本校訂大藏經: 卍正藏)
일본(1902∼1912)
7,148
麗明對校錄 底本
상해빈가정사판(上海頻伽精舍版)
청(1891)
8,534
縮刷藏 底本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일본(1922∼1934)
9,041
高麗大藏經版 底本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
중국(1979)

頻伽精舍版 底本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
중국(1983∼?)

高麗大藏經版 底本
한역 대장경 가운데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기 67년경에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에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의 입장록에 수록된 1076종 5048권의 경전을 중심으로 싣고 이외에 서기 1054년∼1064년 사이에 일칭(日稱)이 한역한 『부자합집경』과 1090년경에 희린(希麟)이 편찬한 『속일체경음의』 등 11세기에 한역된 경전까지 1496종의 경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후에 편찬되는 대장경은 수록되는 경전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이나 대장경에 싣는 것이 아니다. 대장경은 사찰이 주관하여 편찬한 사찬(私撰)도 있지만 대체로 역경 및 저술의 위작을 막기 위해 황제의 흠정(欽定)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간행된 대장경이 모두 고스란히 전래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북송관판 대장경도 전체 5,048권 가운데 9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조대장경은 현재 2,000여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로 간행된 거란판 대장경은 그동안 전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4년 7월에 산서성응현불궁사(山西省應縣佛宮寺)의 석가탑(목탑) 4층에 봉안된 주존 불상의 복장에서 12권이 발견되어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북송의 동선사판(東禪寺版)이나 개원사판(開元寺版)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해인사에 있는 고려 대장경판은 그 판본이 상당 수 전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목판까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표]에 나타나 있듯이 만력판(萬曆版) 이전에 간행된 중국의 대장경보다 그 수록 경전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 등에 의해서 대교가 철저히 이루어져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당시 대장경을 간행하면서 국내본과 송본·거란본을 대교하여 선본을 실었으며, 그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남겨 놓고 있어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 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다.
다른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은 조선조 초기에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간행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게 되었고, 이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대장경 간행을 시도한 것이 종존판(宗存版) 대장경이나 간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대장경은 천태종(天台宗)의 종존(宗存)이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보고 1613년에 대장 목록을 간행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간 인쇄 기술자에 의해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대장경은 간기(刊記) 표시를 “갑인세 대일본국대장도감봉칙주조(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고려’ 대신에 ‘일본’으로 바꿔 사용하는 등 판식(板式)이 고려 대장경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장경은 당시 천황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황이 죽자 간기에 ‘봉칙조조’란 글자가 지워지고, 1624년 종존이 입적하자 이 사업은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637년에서 1648년까지 동경 관영사(寬永寺)에서 일본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이 되는데, 왜장(倭藏)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해판(天海版)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덕천가광(德川家光)의 후원으로 천해승정(天海僧正)이 관영사에서 남송의 사계 자복사판(思溪 資福寺版)을 저본으로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후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황벽산 만복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장경이 있다.
이 대장경은 황벽산 개산조인 은원(隱元)의 제자인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1668년에서 1678년까지 서민의 시주를 얻어 스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을 중심으로 번각한 것이다. 이 황벽판은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종의 승려 인징(忍徵)이 황벽판 대장경에 오류가 많음을 알고 1706년부터 경도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 대장경과 내용 대교를 시작하여 1710년에 모두 마치고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완성하였다. 그 후 진종 대곡파 정승사 순예(眞宗大谷派 淨勝寺 順藝)라는 승려가 명장(明藏)에는 없고 고려 대장경에 있는 500권을 건인사 본으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판 대장경보다 월등히 뛰어난 대장경으로 여겨졌음을 확실하게 밝혀 준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역시 일본에서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원·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으로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과 「만자속(卍字續)」이다.
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또한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남송 사계판(思溪版), 원 대보녕사판(大普寧寺版), 명 만력판(萬曆版), 그리고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의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을 대교하여 지방 사찰이나 대학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 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은 거의 고려 대장경을 정본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를 받아들여 간행하였고, 특히 신활자본 대장경은 일본과 중국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大藏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대장경 [大藏經] #고려대장경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가 역시 일본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 원 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자속(卍字續)」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남송 사계판(思溪版) #원 대보녕사판(大普寧寺版) #명 만력판(萬曆版)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 #지방 사찰 #대학도서관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한 것이다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 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으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 #고려 대장경을 정본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를 받아들여 간행 특히 #신활자본 대장경 #일본과 중국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서기 67년경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 #『42장경』 #『개원석교록』  #입장록에 수록된 1076종 5048권의 경전을 중심으로 싣고 이외에 #서기 1054년∼1064년 사이 #일칭(日稱)이 한역#『부자합집경』 #1090년경에 희린(希麟)이 편찬한 『속일체경음의』 #11세기에 한역된 경전까지 1496종의 경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 후에 편찬되는 대장경은 수록되는 경전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내용이나 대장경에 싣는 것이 아니다 #대장경은 사찰이 주관하여 편찬한 사찬(私撰)도 있지만 대체로 역경 및 저술의 위작을 막기 위해 황제의 흠정(欽定)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역사적으로 간행된 대장경이 모두 고스란히 전래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북송관판 대장경도 전체 5,048권 가운데 9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조대장경은 현재 2000여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로 간행된 거란판 대장경은 그동안 전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4년 7월에 산서성응현불궁사(山西省應縣佛宮寺)의 석가탑(목탑) 4층에 봉안된 주존 불상의 복장에서 12권이 발견되어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북송의 동선사판(東禪寺版)이나 개원사판(開元寺版)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인사에 있는 고려 대장경판은 그 판본이 상당 수 전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목판까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력판(萬曆版) 이전에 간행된 중국의 대장경보다 그 수록 경전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 등에 의해서 대교가 철저히 이루어져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대장경을 간행하면서 국내본과 송본·거란본을 대교하여 선본을 실었으며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남겨 놓고 있어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 관판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다 #다른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은 조선조 초기에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20세기에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간행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게 되었다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대장경 간행을 시도한 것이 종존판(宗存版) 대장경이나 간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대장경은 천태종(天台宗)의 종존(宗存)이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보고 1613년에 대장 목록을 간행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간 인쇄 기술자에 의해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대장경은 간기(刊記) 표시를 “갑인세 대일본국대장도감봉칙주조(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고려’ 대신에 ‘일본’으로 바꿔 사용하는 등 판식(板式)이 고려 대장경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장경은 당시 천황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황이 죽자 간기에 ‘봉칙조조’란 글자가 지워지고 #1624년 종존이 입적하자 이 사업은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637년에서 1648년까지 동경 관영사(寬永寺)에서 일본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이 되는데, 왜장(倭藏)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해판(天海版) 대장경이다 #대장경은 덕천가광(德川家光)의 후원으로 천해승정(天海僧正)이 관영사에서 남송의 사계 자복사판(思溪 資福寺版)을 저본으로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황벽산 만복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장경이 있다 #대장경은 황벽산 개산조인 은원(隱元)의 제자인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1668년에서 1678년까지 서민의 시주를 얻어 스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을 중심으로 번각한 것이다 #황벽판은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정토종의 승려 인징(忍徵)이 황벽판 대장경에 오류가 많음을 알고 1706년부터 경도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 대장경과 내용 대교를 시작하여 1710년에 모두 마치고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완성하였다 #그 후 진종 대곡파 정승사 순예(眞宗大谷派 淨勝寺 順藝)라는 승려가 명장(明藏)에는 없고 고려 대장경에 있는 500권을 건인사 본으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판 대장경보다 월등히 뛰어난 대장경으로 여겨졌음을 확실하게 밝혀 준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가 역시 일본에서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원·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으로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과 「만자속(卍字續)」이다 #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다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의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을 대교하여 지방 사찰이나 대학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은 거의 고려 대장경을 정본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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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0일 금요일

대장경,[ 大藏經 ]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대장경,[  ]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대장경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율()․논()의 삼장()과 중국 및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총합한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에서는 오대산 화장사()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고, 전후소장사리()조에서는 신라말기에 보요(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이칭/ 별칭/ 유형
고려대장경
문헌
부처님의 설법[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論]을 모두 모은 것.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론(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삼장,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대장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껴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의 방법에 의하여 이른바 ‘결집(結集)’이 이루어 진 것이다.
제1차 결집이 라자그리하에서 이루어진 후 4차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3세기에 아쇼카왕 때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소위 ‘팔리어 삼장’이 완비되었다고 한다. 이 팔리어 삼장이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졌다. 그러나 스리랑카로 전해진 팔리어 삼장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암송에 의한 구전의 방법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불교언어로서의 팔리어(pali)를 사용하였지만 문자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서기전 1세기 경에 스리랑카에서 비구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눠 파벌싸움이 계속되면서 정법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스리랑카 문자로 표기함으로써 문자로 된 팔리어 삼장이 정비되었다. 이 전통이 미얀마, 캄보디아, 타이랜드, 라오스 등으로 확산되어 팔리어 삼장이 각국의 문자로 표기되어 소위 남방지역에서는 팔리어 성전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팔리어 삼장은 기원 전후에 형성된 대승경전 등이 포함되지 않은 소위 소승불교의 한 부파의 성전으로 그 양도 한역 대장경의 10분의 1 정도이다.
이 팔리어 삼장은 19세기 초기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82년에는 영국에서 Pa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도 번역하여 남전 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 하였고, 현재 인도에서는 범어를 표기하는 데바나가리로 출판하고 있다.
이 팔리어 삼장과 함께 원본(original text)이라 할 수 있는 범어대장경이 고대 인도에서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된 것이다. 범어 경전은, 그동안 소멸되었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네팔을 비롯하여 티베트, 돈황석굴 등에서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어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범어 경전은 한역의 토대가 되었던 경전이라서 중국에 전래될 법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역이 끝나고 고의로 소멸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범어 성전은 소위 북방불교 권에서 중국어와 티베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몽고어, 만주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서장대장경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로 범어를 직역하였기 때문에 대승불교 이해를 위해 중요시되고 있다. 이 대장경은 특히 8세기 이후부터 번역되어 14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판본이 아니라 사본(寫本)이었다.
최초로 인쇄한 것은 티베트가 아니라 1410년에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져 북경판 또는 영락본으로 불리는 깐규르(경·률)이다. 이 대장경은 한역 대장경에 없는 밀교 경전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어 원전이 소실된 현실에서 범본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전해주는 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장경은 기원 후 1세기부터 범어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이 한역대장경은 중국 각 왕조의 황제들의 후원으로 인도나 서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의 역경 승려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한꺼번에 수입된 것도 아니고, 번역 역시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이 걸려 이루어졌다. 또한 필사(筆寫)의 방법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복이 생기게 되고 체제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번역된 순서대로 적은 목록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지승(智昇)의 『(開元釋敎錄)』이 가장 정확하고 내용이 훌륭하여 후대에까지 모범으로 삼았다.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을 중심으로 최초로 간행한 대장경(大藏經)이 북송 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 태조가 발원하여 971에서 983년까지 새긴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으로 개보칙판(開寶勅版)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雕大藏經)·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북송(北宋)의 동선사판(東禪寺版) 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표 참조)
대장경의 종류,
대장경명/ 간행/ 시기/ 권수/ 비고


촉판(蜀版: 北宋官版, 開寶勅版)
북송(971∼983)
5,048
勅版〈開元釋敎錄〉收錄
고려초조판(高麗初雕版)
고려(1011∼?)
5,048
勅版〈〃〉
거란판[契丹版]
거란(1031∼1054)
 
勅版
숭녕판(崇寧版: 福州東禪寺版)
북송(1075∼1103)
5,700
仕版
비로판(毘盧版: 福州開元寺版)
남송(1112∼1151)
6,117
私版
思溪版(圓覺寺版)
남송(1126∼1132)
5,480
私版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版: 再雕大藏經)
고려(1233∼1248)
6,561
勅版
홍법사판(弘法寺版: 金藏)
남송(1149∼1294)

私版
사계판(思溪版: 資福寺版)
원(1239∼?)
5,740
圓覺寺版의 追 補刻
항주판(杭州版: 普寧寺版)
원(1277∼1290)

思溪版의 重刻
고사판(告
砂版: 延聖寺版)
원(1231∼1305)
6,00
私版, 1287년 追刻
명판남장(明版南藏: 報恩寺版)
명(1373∼1403)
6,331
金陵(南京) 開版
명판북장(明版北藏: 北京版)
명(1410∼1440)
6,361
北京서 開版
뇌력판(牢
曆版: 嘉興

嚴寺版)
명(1589∼1676)
7,334
方冊本 北藏 增補
종존판(宗存版)
일본(1614∼1624)
284
高麗大藏經版 底本
천해판(天海版: 寬永寺版)
일본(1637∼1648)
6,323
木活字
황벽판(黃檗版: 鐵眼版)
일본(1669∼1681)
6,958
方冊本 萬曆版 底本
용판(龍藏: 淸版)
청(1735∼1736)
7,838
明北藏版 底本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 縮藏)
일본(1880∼1885)
8,534
高麗大藏經版 底本
일본교정대장경(日本校訂大藏經: 卍正藏)
일본(1902∼1912)
7,148
麗明對校錄 底本
상해빈가정사판(上海頻伽精舍版)
청(1891)
8,534
縮刷藏 底本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일본(1922∼1934)
9,041
高麗大藏經版 底本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
중국(1979)

頻伽精舍版 底本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
중국(1983∼?)

高麗大藏經版 底本
한역 대장경 가운데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기 67년경에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에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의 입장록에 수록된 1076종 5048권의 경전을 중심으로 싣고 이외에 서기 1054년∼1064년 사이에 일칭(日稱)이 한역한 『부자합집경』과 1090년경에 희린(希麟)이 편찬한 『속일체경음의』 등 11세기에 한역된 경전까지 1496종의 경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후에 편찬되는 대장경은 수록되는 경전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이나 대장경에 싣는 것이 아니다. 대장경은 사찰이 주관하여 편찬한 사찬(私撰)도 있지만 대체로 역경 및 저술의 위작을 막기 위해 황제의 흠정(欽定)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간행된 대장경이 모두 고스란히 전래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북송관판 대장경도 전체 5,048권 가운데 9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조대장경은 현재 2,000여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로 간행된 거란판 대장경은 그동안 전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4년 7월에 산서성응현불궁사(山西省應縣佛宮寺)의 석가탑(목탑) 4층에 봉안된 주존 불상의 복장에서 12권이 발견되어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북송의 동선사판(東禪寺版)이나 개원사판(開元寺版)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해인사에 있는 고려 대장경판은 그 판본이 상당 수 전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목판까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표]에 나타나 있듯이 만력판(萬曆版) 이전에 간행된 중국의 대장경보다 그 수록 경전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 등에 의해서 대교가 철저히 이루어져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당시 대장경을 간행하면서 국내본과 송본·거란본을 대교하여 선본을 실었으며, 그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남겨 놓고 있어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 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다.
다른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은 조선조 초기에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간행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게 되었고, 이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대장경 간행을 시도한 것이 종존판(宗存版) 대장경이나 간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대장경은 천태종(天台宗)의 종존(宗存)이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보고 1613년에 대장 목록을 간행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간 인쇄 기술자에 의해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대장경은 간기(刊記) 표시를 “갑인세 대일본국대장도감봉칙주조(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고려’ 대신에 ‘일본’으로 바꿔 사용하는 등 판식(板式)이 고려 대장경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장경은 당시 천황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황이 죽자 간기에 ‘봉칙조조’란 글자가 지워지고, 1624년 종존이 입적하자 이 사업은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637년에서 1648년까지 동경 관영사(寬永寺)에서 일본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이 되는데, 왜장(倭藏)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해판(天海版)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덕천가광(德川家光)의 후원으로 천해승정(天海僧正)이 관영사에서 남송의 사계 자복사판(思溪 資福寺版)을 저본으로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후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황벽산 만복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장경이 있다.
이 대장경은 황벽산 개산조인 은원(隱元)의 제자인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1668년에서 1678년까지 서민의 시주를 얻어 스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을 중심으로 번각한 것이다. 이 황벽판은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종의 승려 인징(忍徵)이 황벽판 대장경에 오류가 많음을 알고 1706년부터 경도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 대장경과 내용 대교를 시작하여 1710년에 모두 마치고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완성하였다. 그 후 진종 대곡파 정승사 순예(眞宗大谷派 淨勝寺 順藝)라는 승려가 명장(明藏)에는 없고 고려 대장경에 있는 500권을 건인사 본으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판 대장경보다 월등히 뛰어난 대장경으로 여겨졌음을 확실하게 밝혀 준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역시 일본에서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원·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으로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과 「만자속(卍字續)」이다.
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또한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남송 사계판(思溪版), 원 대보녕사판(大普寧寺版), 명 만력판(萬曆版), 그리고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의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을 대교하여 지방 사찰이나 대학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 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은 거의 고려 대장경을 정본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를 받아들여 간행하였고, 특히 신활자본 대장경은 일본과 중국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大藏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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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2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해인사, 2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각판),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있는 조선전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건물. 경판고. 국보. 해인사는 법보의 사찰이라고 불린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은 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목판 보관용 건축물이다. 주불전 뒤 언덕 위에 세워진 단층 목조건물로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부터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지어졌고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장경 자체도 인류의 중요한 기록유산이지만 판전 또한 매우 아름답고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장경판전은 두 개의 긴 중심 건물 사이에 작은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장식적 의장이 적어 간결, 소박하며 조선 초기의 목구조 형식을 보여 준다.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제52호.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고려대장경의 판전으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건물 자체도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해인사 경내에는 많은 법당이 있으나 대부분 근세에 건립된 것이고 이 장경판고만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당(瓦當) 또는 평와(平瓦)에 나타나 있는 ‘弘治元年(홍치원년)’이라는 각명(刻名)으로 건립연대를 1488년(성종 19)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를 간단한 방식으로 가구하였고 세부 역시 간결하여 판고에 요구되는 기능을 충족시킬 목적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적인 의장을 가하지 않았다. 즉 각종 형태의 평초석(平礎石) 위에 배흘림이 큰 원주(圓柱)를 세워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올리고, 그 위에 대들보 끝을 얹어 그것이 직접 주심도리를 받치며 그 밑에 간단한 초공(草工: 도리가 좌우로 구르지 않게 고정하는 부재)이 있다.
마룻보 끝은 대들보 위에 놓인 동자주(童子柱: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 위에 놓여 있고, 마룻보 중앙에도 역시 같은 양식의 동자주가 있어 마룻도리를 받친다. 이 동자주들은 모두 하부에는 간단한 초공을 거꾸로 한 것 같은 받침을 가지며, 신부(身部)는 짧은 방주(方柱)로 두부에는 포작(包作)을 가졌다. 이 포작의 첨차(檐遮)는 보 밑을 받치는 쪽은 초공모양으로 되었고, 도리 밑 장여[長舌]를 받치고 있는 쪽은 다포집 양식의 첨차와 소로[小累] 같은 모양으로 되었다.
국가/ 위치/ 좌표/ 등재연도/ 등재기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
N35 47 60, E128 5 60
1995년
(1), (2)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판전에는 현재 8만여 개의 고려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건물 원형과 기능이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건물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지관리 차원의 부분적 수리였다. 건물의 전반적인 배치에서 건축적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변형이나 파손 없이 창건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인사 전체가 유산의 경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인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어 삼보사찰(三寶寺刹) 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린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목판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해 부처에게 기원하는 뜻으로 새겨진 것이다. 세계의 불교 연구가들은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들의 뛰어난 정확성과 우수한 문화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중국의 불교 연구가들은 중국 불경을 연구하는 데 팔만대장경을 참고하기도 했다. 섬세하게 새겨진 한자들 역시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더해 주는데, 글자를 새긴 방식이 일관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작업한 결과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뛰어난 역사성과 함께 사상, 종교, 역사적 사건, 개인적 경험들이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 된다. 한국의 역사적인 불교 사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우수한 세 곳을 삼보사찰이라 하는데, 한국 최대 규모의 사찰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보고(寶庫)라는 점 때문에 법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법보’는 불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부처의 가르침들을 뜻하는 용어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이 보관된 해인사는 한국의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불교 신자와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순례지다. 해인사에는 현재 500여 명의 승려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면서 수행 생활을 하고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목판을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 2동, 맞배 지붕, 1488년경, 국보 제52호.

해인사 장경판전은 중요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 예술, 과학, 산업 등의 발전을 보여주는 특색 있는 문화유산이다. 장경판전은 조선 초기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배치, 규모, 목판 보존을 위한 기능성 면에서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경판전은 자연 환기가 되고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게끔 각별하게 설계되어 기후 조건에 잘 적응한다. 귀중한 목판들은 500여 년 동안이나 설치류, 벌레 등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역사,
해인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의 중 하나인 가야산(1,430m)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02년에 지어진 후 수차례 복구와 확장을 겪었다. 그러나 그 거친 산세 덕분에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겪어 왔던 숱한 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고(藏經板庫)는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8만 개의 목판들을 보관하는 네 군데의 보관소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의 성종이 통치하던 1481년에 왕비가 복구를 명했고, 1488년에 복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보관소들 중의 하나인 수다라장(修多羅藏)은 1622년에 복구되었고, 또 다른 주 보관소인 법보전은 1624년(1964년 복구 작업 중에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알려짐)에 복구되었다. 보관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남아 원래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간판전, 합천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 2동, 맞배 지붕, 1488년경, 국보 제52호.

해인사 장경판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불교 경전의 집성인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현종 재위(1010~1031) 당시에 새겨진 최초의 팔만대장경(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목판을 교체하기 위해 새겨졌으며, 몽골과 거란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첫 목판들은 몽골이 침략한 1232년에 만들어졌다. 기나긴 항전이 시작된 그해에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옮아가, 1237년에 2종 113권으로 시작된 작업은 12년 후에 완료되어 목차만 3권에 달하는 1,496종 6,568권의 대장경이 탄생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한자로 새겨진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대장경 제작을 담당했던 수기대사(守其大師)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들을 철저히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교정하고 누락된 한자들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정 작업은 30권에 달하는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북송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경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보관소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해인사 장경판전" 중요한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해인사 전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경상남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보존 ^ 관리,
해인사 장경판과 장경판전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각각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해인사 전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보호법과 경상남도 문화재보호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당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설 행위는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한편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자연공원법에 따라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장경판전과 대장경판 보존을 위한 예산을 배분하고 보수와 유지 관리 및 주변 지역 현상 변경과 관련해 심의와 허가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이다. 경상남도는 해인사 보존을 위한 예산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보존 관리 및 정비 사업은 합천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합천군은 해인사의 보존 관리에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현장에서는 해인사가 대장경판의 보존 관리를 책임지며, 홈페이지를 통해 대장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산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함께 3, 4년 주기로 전문가의 정밀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산의 보존은 물리적 환경에 대한 보존 관리와 함께 기록유산으로서의 장경판의 가치에 주목해 이루어지며,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로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담당한다. 해인사 장경판전과 대장경판의 보존에 있어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물과 경판의 화재 위험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장경판전 감시인을 배치해 24시간 동안 판전 등 사찰 경내를 경비하고, 낙뢰 방지를 위한 피뢰침을 설치하는 한편 화재가 일어났을 때 사찰의 자체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형 소방 펌프차를 배치하였다. 현재 판전 내부는 적정한 온도 및 습도 유지를 위해 관람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보안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보안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경판고.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 국보 제52호.
등재,
기준 (1) :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하는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함으로써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었다. 건물 안에 있는 판가 역시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도록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그 효과가 입증된다.

기준 (2) : 고려 시대의 국가사업으로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그 내용의 완전성과 정확성, 판각 기술의 예술성과 기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 세계 불교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는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해 이해해야 하며 건축적, 과학적 측면에서 목판의 장기적 보존을 위해 15세기에 고안된 탁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이곳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서쪽에도 작은 규모의 동·서 판전이 있다. 건물은 큼직한 부재를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 세조 4년(1458) 확장·재건한 후 성종 19년(1488)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당하지 않아 옛모습을 남기고 있는데,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을 중수하고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1964년 해체수리시 상량문과 광해군 어의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전 전경,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전 전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경판고.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장경판전은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 건물이다. 중정을 사이로 둔 장방형의 두 건물은 장경판전이며, 사이에 보이는 전면 2칸의 작은 건물은 해인사에서 간행한 서적의 목판을 보관한 사간판전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에 보수를 시작하여 7년 뒤인 1488년에 마쳤다고 하는데 지금의 대장경판전의 모습은 그때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국보 제52호.
고려대장경의 판전으로서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고 한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조선 전기 1488년(추정), 장경판전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건물 2동(사간판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 1488년경, 국보 제52호).]
종목/ 소재지/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큰스님의 문집 및 불교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목판이다. 이 고려각판은 현재 해인사 동·서 사간판고에 봉안되어 있는 경판 가운데 모두 54종 2,835매에 이르고 있는데, 이중 28종 2,725매가 국보 제206호로, 26종 110매가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국보 제206호의 고려각판은 고려 숙종 3년(1098)의 간기가 있는 화엄경을 비롯하여 충정왕 원년(1349)에 간행된 화엄경약신중까지 고려시대의 목판들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과 시왕경의 변상도 등 한국 전통 판화 자료와 원효, 의상, 대각국사의 문집 등 한국 고승들의 저술은 한국 불교 역사 및 사상의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 전반에 걸쳐 귀중한 자료로 부각되어 있는 목판으로 해인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평가,
이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이라는 고려인의 호국염원이 담긴 신앙심의 결정체를 보관하고 있어, 풍수지리를 활용해 습도와 풍향 등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과학적 건축물로서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해인사 고려각판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陜川海印寺藏經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게티이미지 코리아
[해인사 장경판전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문화유산채널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국보 사원건축(예경산업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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