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4일 화요일

꽃 [flower],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flower],
꽃은 속씨식물(Angiospermae)의 생식기관을 말한다. 이에 속씨식물을 꽃식물(현화식물; flowering plant)이라 칭한다. 

꽃은 밑씨(ovules: 배주)가 씨방(ovary, 자방)에 완전히 싸여 있는 암술군(gynoecium)을 갖은 특징으로 겉씨식물(Gymnospermae)의 생식기관과 구별된다. 겉씨식물(나자식물: 송백류 및 은행나무 종류)의 생식기관을 꽃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꽃은 기본적으로 꽃받침꽃잎수술암술로 구성되며, 이들 4개 구성 요소가 하나의 꽃에 다 있으면 갖춘꽃(complete flowers), 4개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갖춘꽃(incomplete flowers)이라고 구별한다. 또한 암술과 수술이 함께 하나의 꽃 안에 있으면 완성화(perfect flower, bisexual flowers; 양성화), 암술 혹은 수술 하나만 있으면 불완성화(imperfect flowers, unisexual flowers; 단성화)라 한다.

화전 찹쌀가루 반죽에 꽃잎을 수놓아 지진 떡이다. 삼월삼짓날 먹는 절식이다.

호박이나 참나무같이 불완성화인 암꽃과 수꽃이 한 개체의 식물에 있으면 암수한그루(monoecious: 자웅동주), 버드나무, 대마 등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식물 개체에 따로 피면 암수딴그루(dioecious; 자웅이주)라 한다.

겉씨식물의 생식기관은 축()의 끝에 작은포자엽과 큰포자엽이 착생하여 이루어진다. 큰포자엽은 기능적으로 속씨식물의 암술을 닮았으나 생식 내용이 다르다. 양치식물의 생식기관인 포자낭이삭은 포자엽과 포자낭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자생식을 한다. 

이처럼 겉씨식물과 양치식물을 제외한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을 좁은 뜻의 꽃이라 하고, 넓은 뜻으로는 소철류·은행나무류·소나무류의 생식기관도 포함한다. 꽃은 꽃자루의 끝에서 피고 모양과 빛깔이 여러 가지이며, 식물의 종류에 따라 각각 특징이 다르다.

갖춘꽃의 구조.  A. 봄까치꽃( Veronica persica : 질경이과); B. 개나리( Forsythia koreana ); C. 수수꽃다리( Syringa oblata   var.   dilatata  ). 개나리와 수수꽃다리는 물푸레나무과(Oleaceae)에 속하며 수수꽃다리(라일락으로 통칭하기도 함)의 수술은 수술대가 꽃잎에 유합하여 꽃잎(화통) 위에 나 있는 것처럼 보임.

 속씨식물은 전 세계적으로 405과 14,559속 35만2천여 종이 분포한다.( http://www.theplantlist.org ) 속씨식물의 분류에서 꽃의 구조적 차이는 중요한 분류학적 형질로 이용하기 때문에 과 및 속이 많다는 것은 꽃의 형태가 아주 다양하게 변형되었다는 의미이다.
일부 아름다운 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원예 산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꽃의 4개 구성 요소인 꽃받침꽃잎암술수술 등은 동일 요소가 합쳐지거나(connation; 동합)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서 합쳐지기도 하고(adnation; 이합), 
일부 요소는 퇴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다. 이 중 꽃잎의 일부 혹은 전체 부위가 합해진 꽃을 통꽃(sympetalous flowers), 꽃잎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갈래꽃(polypetalous flowers)이라 한다.
꽃은 대칭성에 따라 3축 이상 대칭면이 있으면 방사대칭화(actinomorphic flowers: 정제화), 2축 대칭면만 있으면 좌우대칭화(zygomorphic flowers: 부정제화), 대칭면이 없으면 비대칭화(asymmetric flowers)라고 구별한다.
꽃은 꽃가루받이(pollination: 수분이라고도 함)를 하여 종자를 만드는 생식 기능을 담당하는 식물의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이다. 
꽃의 형태적 다양성은 꽃가루받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곤충을 수분매개자로 이용하는 충매화(entomophilous flower, insect pollination flower)의 경우 화려한 꽃잎, 꿀샘 혹은 냄새 발생 등 곤충을 효과적으로 유인하는 방향으로 자연선택압(natural selection pressure)이 작동하면서 보통 아름다운 형태로 발달한 반면, 
바람에 의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풍매화(anemophilous flower, wind pollination flower)의 경우는 다량의 꽃가루를 형성하는 수술과 효율적인 꽃가루 포착이 가능한 암술머리 등이 발달하면서 꽃잎, 꽃받침 등은 퇴화되는 방향으로 자연선택압이 작동하여 보다 단순한 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꽃은 "변형된 유한생장성 슈트(shoot)"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슈트는 식물의 줄기, 생식기관 등 뿌리계(root system)를 제외한 지상부 식물체 기관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꽃은 슈트의 정단분열조직 체계와 동일하게 발생하는데, 다만 엽원기(leaf primordia)가 화원기(floral primodiia)로 변형되면서 포엽(bract)-꽃받침-꽃잎-수술-암술이 차례로 발생한다.
포엽, 꽃잎, 꽃받침은 잎의 변형이고, 수술은 소포자엽(microsporophyll), 암술은 대포자엽(megasporophyll)이 특수하게 변형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식물분자유전학의 발달은 꽃의 발생과 다양화 과정에 대한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꽃의 발생과 관련한 조절유전자(homeotic gene)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으며, 애기장대(Arabidopsis thaliana)와 금어초(Antirrhinum majus)를 대상으로 밝혀진 꽃발생 조절유전자를 기초로 소위 '꽃발생 ABC 모델" 을 제안한 바 있다.


이후 E와 D 유전자군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꽃발생 ABC(D)E 모델'이 제안되었다. 이 모델에 따르면 A 유전자군이 홀로 작동하면 꽃받침, A+B 유전자군이 함께 작동하면 꽃잎, B+C 유전자군이 함께 작동하면 수술, C유전자군이 홀로 작동하면 암술이 만들어진다. A,B.C 유전자군 작동에는 E 유전자군을 필요로 하며, D 유전자군은 단독으로 밑씨(ovules) 발생을 조절한다.
기원과 진화,
중국 및 스페인 등에서 발견되는 현존하는 속씨식물 꽃과 유사한 화석들은 대략 1억 3천만년 전 후 지층에서 출현한다. 고생물학자들은 비록 꽃의 구조가 연약하여 화석으로 보존되기 어려운 특성을 감안하여도 속씨식물의 출현은 1억 5천만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속씨식물이 중생대 말 백악기에 출현하여 아주 빠르게 진화하면서 현재 35만 종 이상으로 지구생태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생물은 점진적으로 진화한다고 믿어왔던 다윈(C. Darwin)은 1879년 당시의 화석 증거에 기초하여 속씨식물의 급속한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고, 그의 친구 후커(J. Hooker)에게 보낸 편지에서 꽃식물의 기원과 빠른 진화에 대하여 "가증스러운 수수께끼(abominable mystery)" 라고 실토한 바 있다.
현재 식물학자들은 다윈이 고민한 "아주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도전하고 있다. 최근 유전체 분석기술의 혁신을 통한 빠른 정보 축적과 계통수 작성 생물정보학의 발달로 백악기 이후 속씨식물의 급격한 방산진화는 염색체 배수화(polyploidy)의 원인인 유전체 중복(whole-genone duplication)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유전체 중복은 속씨식물 기원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유전체 크기 및 유전자 수의 증가를 가져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유전형질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분자계통수에 기초한 배추목(Brassicales)의 경우 2차례의 유전체 중복이 일어났는데, 첫번째 중복을 통해 인돌 글로코시놀(indol glucosinolates)을 새로 만들고, 두번째 유전체 중복을 통해 메트 글로코시놀(met glucosinolates)을 만들어 초식 및 기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되며, 겨자채 등의 톡 쏘는 풍미를 갖게 되었다,
초기 꽃의 형태 추정,
속씨식물의 기원 및 초기 꽃의 형태에 대하여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 중의 하나이다. 최근 유전체에 기초한 진화 계통수의 확립, 꽃 발생에 대한 조절 유전자군의 규명 및 진화 경향성, 그리고 꽃의 4개 구성요소의 진화 계통수 상의 변화 유형을 첨단기술분석법(state-of-the-art analytical methods)을 이용하여 기원 초기의 꽃 형태를 추정하고 있다.

평생도병 / 어사화 평생도 병풍의 부분.

이런 방법으로 추정한 최초의 꽃 형태는 수술과 암술이 함께 있는 양성화이며, 꽃받침과 꽃잎은 구별되지 않는 꽃덮이(perianth) 형태로 최소 10개 이상의 꽃덮이편(tepals)으로 구성되며, 수술은 최소 10개 이상, 암술 단위는 최소 5개 이상으로, 꽃덮이, 수술, 암술 각 기관은 각각의 독립된 윤생열에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3개의 기관 발생 윤생렬은 다시 각각 최소한 4개의 윤생열를 가지고 있고. 꽃덮이는 방사대칭으로 배열하며, 수술의 꽃밥은 암술 방향으로 향하는 내향형(introse anthers)이고, 암술 단위인 5개 심피<nowiki/>carpels)는 자방상위로 나선상으로 돌려나며, 각 기관의 구성 요소는 서로 분리되어 융합하지 않는 꽃 모양으로 추정한다.

개나리꽃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 신이화·영춘화·어리자·어아리 등의 이름도 보이지만 개나리란 말이 가장 널리 불린다. 꽃은 4월경에 피며,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현존하는 속씨식물의 가장 원시형 계열인 암보렐라(Amborella)와 수련목(Nymphaeales) 식물에서 볼 수 있는 꽃은 이러한 초기 꽃 형태의 변형으로 분석된다.
관련 용어,
갈래꽃, 통꽃암꽃수꽃, 양성화, 단성화정제화, 비정제화,

진달래화채 진달래꽃을 녹말가루를 묻혀 데쳐 오미자 국물에 띄워 만든 음료. 궁중 음식의 하나이다. 일명 두견화채라고도 한다. 삼짇날 절식이다.

꽃자루는 긴 것과 짧은 것 또는 짧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꽃자루의 끝을꽃턱또는 꽃받이라 하고, 여기에 꽃받침·꽃잎·수술·암술이 달린다. 꽃잎과 꽃받침은 잎이 변해 생긴 것이며 이를 합하여 화피라고 한다. 튤립 꽃처럼 꽃받침과 꽃잎의 형태가 구별되지 않는 경우에는 꽃받침을 외화피, 꽃잎을 내화피라 한다. 생식에 직접 관계하는 요소는 암술과 수술이며, 화피는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거나 보조하는 구실을 한다.

암술·수술, 화피의 성질, 수()·조합()·배열 등은 종자식물을 분류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꽃에서 화피·수술·암술을 모두 갖추고 있는 꽃을 완전화, 이 중 하나 이상을 갖추지 못한 꽃을 불완전화라 한다. 또 1송이의 꽃에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갖추고 있는 꽃을 양성화(자웅동화)라 하고, 암술과 수술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 있는 꽃을 단성화(자웅이화)라고 한다. 이 경우 암술만 있는 꽃을 암꽃, 수술만 있는 꽃을 수꽃이라 한다.

보통의 식물은 양성을 지니지만 단성화인 것도 상당히 많다. 암꽃과 수꽃이 같은 그루에 피는 것을 암수한그루, 다른 그루에 피는 것을 암수딴그루라고 한다. 풀은 암수딴그루가 적어서 한삼덩굴·수영·호장근·시금치·산쪽풀 등이 있는 정도이다. 나무에는 암수딴그루가 매우 많은데, 은행나무·주목·비자나무 등의 겉씨식물 외에 버드나무과·뽕나무과·녹나무과의 대부분과 초피나무·섬엄나무·옻나무·굴거리나무·감탕나무·서향나무·식나무·물푸레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화피는 있거나 없는데, 화피가 없는 꽃을 무화피화라고 하며 겉씨식물이나 속씨식물의 일부에서 볼 수 있다. 화피가 있는 유화피화는 대부분의 속씨식물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나팔꽃이나 호박꽃처럼 꽃잎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을 통꽃, 벚꽃이나 배추꽃처럼 꽃잎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을 갈래꽃이라고 한다.

하이신스,

꽃의 요소는 위쪽에서 보면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암술·수술·꽃잎·꽃받침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또 내화피 안쪽에 화반()이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꽃턱이 다육질이 되어 솟거나 꿀샘 또는헛수술이 달라붙어 쟁반 모양으로 된 것이다.

각 요소의 배열에는어긋나기돌려나기가 있다. 어긋나기 배열은 겉씨식물과 일부 속씨식물, 돌려나기 배열은 대부분의 속씨식물에서 볼 수 있다. 때로는 암술과 수술은 어긋나기로 배열하고, 화피는 돌려나기로 배열하는 것도 있으며 이를 반돌려나기 배열이라고 한다.

돌려나기로 배열하는 꽃을 윤상화()라 하는데, 쌍떡잎식물에서는 5장의 꽃받침과 5장의 꽃잎 각 1조, 10개의 수술 2조, 암술의 심피 1조로 이루어지는 5륜화가 보통이고, 외떡잎식물에서는 6장의 화피조각 2조, 6개의 수술 2조, 암술의 심피 1조로 이루어지는 5륜화가 가장 전형적이다. 이 조합의 수는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다.

꽃자루를 포함하여 꽃의 중심을 평면으로 잘랐을 때 각 요소가 대칭이 되는 것을 대칭면이라 한다. 꽃의 각 요소가 모양이나 크기가 같을 경우에는 대칭면이 2개 이상 생긴다. 이러한 꽃을 정제화라 하며, 대부분의 속씨식물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요소, 특히 꽃받침조각과 꽃잎의 모양이나 크기가 달라 대칭면이 하나만 생기는 것을 부정제화라 하며 콩과·제비꽃과·광대나물과· 현삼과·통발과·난초과 등에서 볼 수 있다.

종자식물의 화피는 무화피화 →유화피화, 갈래꽃 → 통꽃, 어긋나기 배열 → 돌려나기 배열, 방사대칭화 → 좌우대칭화로 진화한 것으로 본다. 화관은 일반적으로 빛깔이 아름다워 곤충 등을 유인하는 구실을 하고 화분이 암술머리에 묻는 수분() 활동을 돕는 등 간접적으로 생식을 돕는다.

수술은 화분이 들어 있는 꽃밥과 꽃실로 이루어진다. 암술은 주머니 모양의 심피가 밑씨를 감싸고 있으며 이를 씨방이라 한다. 심피 가장자리가 합쳐진 부분은 암술머리가 되어 화분을 받아들인다. 씨방과 암술머리 사이를 암술대라 하며 긴 것, 짧은 것 등 다양하다.

참깨의 꽃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참깨과의 한해살이풀. 꽃은 7∼8월에 피고 백색 바탕에 연한 자줏빛이 돌며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꽃을 구성하는 각 요소의 수와 배열을 수식으로 나타낸 것을 화식(), 도식으로 나타낸 것을화식도라 한다. 화식에서는 꽃받침을K,꽃잎을C,수술을A,암술을 P로 표시한다. 예를 들어 꽃받침 5, 꽃잎 5, 수술 여러 개, 암술 1개인 벚꽃의 화식은 K5C5A∞P1로 표시한다. 한편, 꽃은 씨방이 꽃잎이나 꽃받침·수술보다 위에 있느냐, 아래에 있느냐 또는 같은 높이에 있느냐에 따라 씨방상위꽃·씨방하위꽃·씨방중위꽃으로 나누며, 이들의 진화는 씨방상위꽃 → 씨방중위꽃 → 씨방하위꽃의 차례로 일어났다고 본다.

꽃의 형태는 종에 따라 일정한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두 가지 형식의 꽃을 지닌 것도 있다(단성은 제외). 이것을 2형화라 한다. 하나의 꽃이삭 안에 설상화와 관상화가 있고, 꽃이삭의 중심에 있는 꽃과 주위에 있는 꽃의 화관 모양이 다른 것도 있다.

종자식물에서는 매개체에 의해 수술의 화분이 암술머리에 닿아 수정을 함으로써 종자가 생기는데, 화분을 나르는 매개체가 곤충인 것을 충매화, 새인 것을 조매화라 하고 드물게 박쥐와 달팽이가 옮기는 것도 있다. 매개체가 바람인 것을 풍매화, 물인 것을 수매화라 한다.

일반적으로 꽃은 화피가 벌어지면 수분과 수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떤 식물에서는 화피가 벌어지지 않고 봉오리 안에서 수분과 수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꽃을 폐쇄화라 하는데, 제비꽃속·괭이밥속·황새냉이속·별꽃속· 광대수염속 등에서 볼 수 있다.

암술머리에서 수분한 화분에서는 화분관이 나와 씨방에 들어가고 밑씨의 주공을 거쳐 배낭에 이른다. 이때 화분관 안에서 생식핵이 분열하여 2개의 정핵을 만든다. 화분관 끝이 밑씨 속에 들어가면 정핵이 탈출하여 1개는 난세포의 난핵과 결합하여 배를 만들고, 다른 1개는 2개의 극핵과 결합하여 배젖을 만든다. 이처럼 두 정핵의 수정이 따로따로 이루지므로 속씨식물의 수정을 중복수정이라 한다. 수정이 끝나면 이들은 배와 배젖이 되어 종자를 이룬다.

지구상에 있는 식물의 종(種)은 30만 종 내외로 보고 있으며, 꽃으로 취급되는 종은 약 8천여 종이라고 보지만 온실화훼까지 합치면 수만 종에 이른다. 또한, 한 종당 품종 수가 매우 많아 장미 한 종에서 발표된 품종 수만 해도 1만5000여 종류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자생식물은 170과 897속 2,898종 7아종 929변종 301품종 등 4,135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꽃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약 500여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생종 이외에도 많은 외국품종이 도입되었으며, 특히 1982년 화훼류의 수입개방으로 최근에는 한 달 전에 발표된 외국의 신품종이 국내에서 양산될 정도이다.

꽃은 개화시기에 따라서 봄꽃·여름꽃·가을꽃·겨울꽃, 재식시기에 따라서 춘식(春植)·추식(秋植), 이용면에 따라서 꽃꽂이용·화분용·화단용·정원수로 나눈다.

재배장소에 따라서 노지꽃·온실꽃, 원산지에 따라서 열대·한대·온대 등으로 분류하며, 원예학적으로는 재배특성과 이용면을 고려하여 일년초·숙근초(宿根草)·구근류·화목류·관엽식물·식충식물·다육식물·수생식물·고산식물 등으로 분류한다.

나라 꽃은 무궁화이지만 각 지방의 지역적인 향토를 상징하는 꽃도 각 시군마다 제정해 놓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향토 주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으로서 전통·전설·문화·향토 고유의 꽃을 택하여 시나 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정하였다.

화훼의 역사,
우리나라의 꽃 재배에 관한 첫 기록으로 『동사강목』에, 백제 진사왕 때인 390년에 궁실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꽃을 많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4년 경주에 안압지를 만들고 궁정에 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개별 꽃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때 국화, 신라 때에는 모란을 길렀다는 기록이다. 모란은 632년(신라 선덕여왕 1)에 당나라 태종이 모란을 보내왔으며, 신라 말기에는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에 모란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매화는 41년(고구려 대무신왕 24)에 매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있고, 고려에서는 문종 이전에 재배되었으며 충숙왕 때 중국에서 도입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그 당시 많은 꽃을 길렀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화는 백제 때 많이 길렀는데, 일본에도 보낸 기록이 있다. 백국(白菊)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에서 들여온 황국(黃菊)과 더불어 재배되었다.

고려 때는 내원서(內園署)를 두어 궁궐의 꽃을 관리하게 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상림원(上林園)을 두어 궁궐 내의 꽃과 과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그 밖에 백성들이 국화 화분을 궁궐에 진상한 기록도 있다.

월계화(月季花:사계화라고도 하며 봄가을에 걸쳐 꽃이 피는 장미 종류)는 8세기경 발해가 중국에서 수입하여 재배하였고, 고려 예종 때도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하였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 원예종이 중국에서 도입되었으며, 동백은 남해안에 자생하여 동백기름을 짜기도 하고 관상용으로 널리 심어졌는데, 이태백(李太白)이 쓴 시에 신라에 동백이 많았다고 쓰여 있다.

무궁화는 중국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한국에는 많은 무궁화[木槿花]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華草朝生暮死).”고 하였으며, 다른 기록에는 단군이 개국했을 때부터 무궁화가 많이 재배되었다고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도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음을 적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무궁화가 널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 재배된 기록이 『화암수록(花菴隨錄)』·『산림경제』·『물보(物譜)』·『양화소록』 등에 남아 있다. 석류와 치자나무는 10세기 전후인 고려 때 도입, 재배되었다.

15, 16세기경 조선시대에 널리 일반화된 꽃으로 『양화소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배롱나무·개나리·정향나무·철쭉류·단풍나무·복사꽃·살구꽃·옥매화·해당화·벚나무·혜란·봉선화·해바라기·접시꽃·파초·맨드라미·금잔화·장미·종려·소철·옥잠화·석죽 등이다. 그 뒤 18, 19세기에는 중국에서 백목련과 자목련이 도입, 재배되었다.


우리나라 꽃은 자생종과 비슷한 기후에서 자라던 중국의 꽃들이 수입되어 많이 재배되었는데,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궁정 원예를 비롯하여 귀족과 문인들 간의 재배 및 교류가 있었고, 이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말엽 개화기에는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한 도입이 있었고, 경술국치 뒤에는 일본에서 많은 꽃이 들어왔다. 한편 미군정시대에는 미국에서도 도입되었다.

꽃에 얽힌 설화"
모란과 선덕여왕,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선덕여왕의 공주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꽃은 비록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此花絶艶 而圖畫又無蜂蝶 是必無香花).”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본즉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모두가 탄복하였다 한다.

설총의 화왕계
신라 신문왕이 설총(薛聰)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탁하자 화왕계(花王戒)를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봄날 현란하게 꽃핀 화중왕(花中王) 모란이 수많은 꽃 위에 군림하자 천홍만자(千紅萬紫) 꽃들이 화왕의 향궁(香宮)에 입조할 때, 요염한 절세미인 장미가 화왕에게 말하기를 “첩이 일찍 왕의 염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으니 행여 버리지 마옵시고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옵소서.”하고 간하였다.

이때 포의한사(布衣寒士)로 노방(路旁)에 있던 할미꽃도 구부리고 와서 충언직언을 하여 화왕 곁에 있으면서 일하기를 원하며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화왕은 벌써 요염한 장미에게 빠져서 할미꽃의 충언을 알면서도 그것을 듣지 않았다.

이것을 본 할미꽃은 분연히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왕의 총민함이 의리를 깨달으리라 믿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못한즉 요염한 여인과 가까이 함은 패망을 자초하는 길일 것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서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를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주자 왕은 “뜻이 깊은 이야기로서 왕자의 계(戒)가 될 만하니 곧 글로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한다.

철쭉과 수로부인,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철쭉류의 자생지로서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이름을 혼돈하는 사람이 많다. 

진달래는 후조인 두견새가 울 때 핀다고 하여 두견화라고 하며, 한편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참꽃이라 하지만, 철쭉은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는 꽃이라 강원도에서는 개꽃이라 불리고 있다. 산철쭉은 꽃필 때 온 산을 빨갛게 물들인다 하여 영산홍으로 불리기도 한다.

철쭉류 자생국인 우리나라는 이와 관련된 글이 대단히 많다. 『삼국유사』 권2에 소개된 철쭉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수로(水路)라는 미희가 강릉 태수로 가는 남편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강릉으로 갈 때의 이야기였다. 따뜻한 봄날에 일행이 가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가는 것이 어느덧 한낮이 되자 해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 준급한 절벽에 현란하게 핀 철쭉꽃을 보고 수로부인이 따라온 종자에게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오라고 명하였으나, 발을 디딜 곳도 없는 절벽이라서 누구도 엄두를 못 내었다. 마침 한 노인이 암소를 끌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환심을 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올라가 철쭉을 꺾어다 주고 다음과 같은 「헌화가(獻花歌)」를 지어바쳤다 한다.

“자주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려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紫布巖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肸不喩摲肸伊賜等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양주동 해석)

연꽃과 충선왕,
인도 원산인 연꽃은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 불상·불화·불구에 널리 쓰였다. 불교의 신앙으로 연꽃을 너무 신성시하여 고려 때는 연뿌리와 연꽃봉오리까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여 종교적인 일화가 대부분이었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서울 연경에 있을 때 궁궐 안에 있는 아름다운 미녀와 가연을 맺게 되었다. 그 뒤 고려로 돌아오게 되어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하염없는 눈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궐녀에게 정표로 연꽃을 선사하니 그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충선왕에게 바쳤다 한다.

“떠나시던 그날에 꺾어준 연꽃 한송이 처음엔 빨갛더니 얼마 안되어 떨어지고 이제는 시드는 빛이 사람과 같사오이다(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작약과 제국공주,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모란을 화중왕, 작약을 재상이라 하여, 모란과 작약은 왕과 재상으로 비교되어 사랑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약을 함박꽃이라 하는데, 꽃모양이 함지박처럼 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世祖)의 외딸 제국공주(齊國公主)를 왕비로 맞았다.

왕비가 된 공주는 어느 날 수녕궁(壽寧宮) 향각(香閣)의 어원(御園)을 산책하다가 작약이 탐스럽게 피었으므로 시녀에게 명하여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였다. 한 가지를 꺾어들고 한참 귀여워하더니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로부터 병이 들어 얼마 뒤에 죽었다는 슬픈 애화가 있다.

작약은 봄에 줄기가 나와서 5∼6월에 핀다. 제국공주가 향각에서 소요하던 때는 5월이라 모란은 시들고 작약이 만개하였으며 송경(松京)의 궁에는 작약이 많이 심어졌는데, 제국공주도 이 아름답게 핀 작약을 보고 잠재의식 속에 생명의 무상함을 직관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패랭이꽃을 읊은 시인,
고려 때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鄭夢周)의 선조로서 성격이 강직, 고결하여 고려 의종이 매일 방탕과 호사스런 연회를 즐기자 죽음을 무릅쓰고 간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패랭이꽃은 우리나라 자생 꽃으로 산야에 널리 자라고 있는데, 정습명은 외국에서 도입된 모란·작약·봉선화·양귀비꽃과 같은 요염한 꽃보다 산야에 묻혀 꽃피는 평범한 자생화를 비유적으로 예찬한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해서 정원에 많이 재배하고 초야에 저절로 자라는 패랭이꽃은 좋은 꽃떨기가 있어 색채와 향기가 달 아래서나 바람 앞에서나 다 운치가 있어도 공자 왕손 같은 귀부인이 오지 아니하는 유벽(幽僻)한 곳에 피어 있으므로 평범한 농부인 야인이 그 교태를 차지하도다(世愛牡丹紅 栽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花透村塘月 香傳朧樹風 地偏公子小 嬌態屬田翁).”

이는 패랭이꽃 같은 평범한 꽃을 예찬함으로써 민중의 소중함을 일깨운 선조들의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다.

상징성,
꽃은 주로 아름다움·화려함·번영·영화로움 등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아름다운 여자나, 좋은 일, 영화로운 일에 비유되기도 한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머리에 꽂는 어사화는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고, 경사스러운 일은 ‘웃음꽃이 핀다.’, ‘그 집안에 꽃이 폈다.’ 등으로 표현된다.

‘꽃 같은 시절’이라 하여 젊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국화(國花)·교화(校花)·사화(社花) 등 한 집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꽃에도 품계나 등수를 매겼는데, 꽃의 아름다움보다도 꽃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가 결정되었다.

강희안은 뛰어난 운치나 절개를 의미하는 매화·국화·연꽃·대나무를 1등으로,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작약·왜홍(倭紅)·해류(海榴)·파초를 2등으로, 운치가 있는 치자·동백·사계화(四季花)·종려·만년송은 3등으로, 화리(華梨)·소철·서향화(瑞香花)·포도·귤은 4등으로, 석류·도(桃)·해당(海棠)·장미·수양버들은 5등으로, 진달래·살구·백일홍·감·오동은 6등으로, 배·정향·목련·앵도·단풍은 7등으로, 무궁화·석죽·옥잠화·봉선화·두충(杜冲)은 8등으로, 해바라기·전추라(翦秋羅)·금전화(金錢花)·석창포·화양목은 9등으로 분류하였다.

소나무·대나무·연꽃·국화를 1품으로, 모란을 2품으로, 사계화·왜철쭉·영산홍·진송·석류·벽오동을 3품으로, 작약·서향화·노송·단풍·수양버들·동백을 4품으로, 치자·해당화·장미·홍도(紅桃)·벽도(碧桃)·삼색도(三色桃)·백두견(白杜鵑)·파초·전춘라(翦春羅)·금잔화를 5품으로, 백일홍(百日紅)·홍철쭉(紅躑躅)·홍두견(紅杜鵑)·두충(杜冲)을 6품으로, 이화(梨花)·행화(杏花)·보장화(寶薔花)·정향·목련을 7품으로, 촉규화(蜀葵花)·산단화(山丹花)·옥매(玉梅)·출장화(出墻花)·백유화(白萸花)를 8품으로, 옥잠화·불등화(佛燈花)·연교화(蓮翹花)·초국화(草菊花)·석죽화·앵속각(罌粟殼)·계관화(鷄冠花)·무궁화를 9품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양화소록』에서는 대표적인 꽃의 상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매화는 강산의 정신이 깃들여 있으며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였고, 국화는 혼연한 원기(元氣)는 그지없는 조화(造花)라고 하였으며, 연꽃은 깨끗한 병속에 담긴 가을 물, 비 갠 맑은 하늘의 달빛, 봄볕과 함께 부는 바람이라 하고, 모란은 부귀번화(富貴繁華)하다고 표현하였다.

우리생활 속의 꽃,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풍류를 좋아했으며, 산수절경에 싸여 꽃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온대지방에 속해 있는 우리 나라는 춘하추동이 뚜렷하기 때문에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온 백성이 나와 꽃놀이를 하고 가을에도 꽃필 때는 꽃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다.

물이 흐르고 산이 있고 맑은 햇빛이 비치는 곳에 집을 짓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 꽃을 사랑하며 살았다. 국난이 잦았지만 그런 중에도 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시나 시조, 가사 등에서 엿볼 수 있으며 낙천적 성격을 가졌다.

근대에 들어 경제개발에 힘입어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인구가 도시와 공장지대로 집중되면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본능에서 실내원예, 또는 녹지공간에 꽃을 많이 심어 인간의 고독감과 산업사회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국가에서도 국토미화(國土美化)나 국민정서교육을 위해 꽃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의 민속 에는?,,,
봄에 꽃이 피면 사람들은 산과 들로 나가서 진달래꽃으로 화전이나 화채를 만들어 먹으며 꽃놀이를 즐겼다. 젊은이들은 꽃을 뜯어 수효의 많고 적음을 내기하거나, 꽃의 턱을 맞걸어 당겨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는 꽃쌈(또는 꽃씨름)을 하였다. 처녀들은 제비꽃과 토끼풀로 반지를 만들거나 봉선화 꽃잎을 괭이밥잎과 함께 찧어 손톱에 붙여 물을 들였다.

아이들이 긴 꼬챙이에 꽃나무 가지를 묶어가지고 노는 꽃방망이놀이도 있었다. 단옷날에는 꽃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예뻐지고 일년 내내 무병하다는 속설이 있어 머리를 감았으며,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교외로 나가 국화주에 국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단풍이 물든 산과 들의 정경을 즐겼다.

농촌에서는 이팝나무의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꽃이 적게 피거나 시들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있어 꽃이 필 무렵에 나무 밑에서 치성을 올리기도 하였다.

경주 오유리에서는 그곳에서 자라는 등꽃을 말려 금침 속에 넣으면 금슬이 좋아지며,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벌어진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는 말이 전해져서, 신혼부부의 자리 속에 등꽃을 말려 넣는 풍속이 있다.

꽃을 이용한 술, (담금주)
옛 선인들은 민간의학으로 꽃술을 담가 마셨다. 여성의 건강과 미용에 특효한 술로서 모란술·찔레술·잣술을 먹었고, 회춘과 노화 방지에는 국화주·창포주·산수유주를 먹었으며, 소화기능을 돕는 술로는 민들레술·용담주·박하술·물푸레나무술·등꽃술·생강술을 먹었다. 보신과 고혈압에 차술을 먹었고, 특수한 약효를 위해 도라지술·진달래술·산초주·치자주·인동주 등을 먹었다.

꽃의 장식,
꽃이나 나뭇가지·잎 등의 소재들을 꽃그릇에 침봉이나 보습제 또는 그냥 물을 담아 꽂아 장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꽃장식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불교에서는 화만(華鬘:불타를 공양하기 위해 불전의 난간에 생화나 보석 또는 가죽으로 조화를 만들어 달아놓는 것)을 만들 때 꽃장식을 하였다. 이는 인도의 남녀가 몸을 치장하기 위해 향기 있는 꽃을 실로 꿰거나 묶어서 목에 걸거나 몸에 달았던 풍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교 전성기에는 불당에 금·은·보석으로 만든 조화 대신 생화(生花)를 꺾어다가 작은 꽃병에 꽂아 두었다. 이처럼 불가에서 성행하던 꽃꽂이가 점차 꽃장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829년(순조 29)에 세자가 생각해 낸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이라는 춤을 출 때에도 꽃병과 모자에 모란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모란꽃병 밑에는 7각의 화단을 만들어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수파련(水波蓮)이라 하여 음식 위에 종이꽃을 꽂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큰 잔치가 있을 때 연꽃 세 송이를 한 가지에 달리도록 만들어 음식에 꽂는 것이다. 이 행사에서 부인들은 머리에 꽃을 꽂아 장식하였다. 문인들의 그림에는 항아리나 병에 연꽃이나 모란꽃·매화꽃·종이꽃 등을 꽂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궁중음식이나 사대부 집안 잔치, 아전 또는 서민 계층에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종교적인 의미가 컸다. 이러한 장식꽃을 전문으로 만든 장인(匠人)을 조화장(造花匠) 또는 지화장(紙花匠)이라 불렀다. 그리고 항아리에 꽃을 꽂는 항아리 병꽂이가 많이 유행하였다.

그 뒤 민족항일기와 6·25전쟁 때는 꽃장식이 피폐된 생활 때문에 별로 이용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부터 꽃꽂이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꽃꽂이강습으로 일반화되었으며, 꽃소비 증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꽃장식은 개인이나 지방, 나라에 따라 형이 달라지고, 또한 사용하는 꽃의 종류도 달라진다. 동양식 꽃꽂이는 천지인(天地人:眞善美)을 골격으로 한 선을 중심으로 한 꽃꽂이가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매(梅)·난(蘭)·국(菊)·죽(竹) 등 동양화를 주로 이용한다.

서양식 꽃꽂이는 성화법(盛花法)에 의해 미적 표현을 나타내기 때문에 형을 중요시하여, 장미·글라디올러스·카네이션 등 서양 화훼류가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양식 꽃장식뿐만 아니라 서양식 꽃꽂이도 각종 생활에 많이 이용하는데, 대표적인 형은 원형·수직형·방사형·반원형·편삼각형·정삼각형·호가리티안형·도반월형(倒半月形)이 있고, 주로 보습제인 오아시스를 이용한다. 오아시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대량 생산하고 있다.

꽃꽂이는 가정에서 생활에 이용되는 것 외에도 회의식장·결혼의식·장례의식·화환·꽃바구니·코사지·부케(꽃다발)·브라이달(신부 꽃다발)·보토니어(남자용 작은 꽃장식) 등 생활에 이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는 색채학적 원리와 미적 표현원리에 의한 예술창작품으로서 작품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양식 꽃꽂이 중 독특한 한국식 꽃꽂이형이 개발, 보급되고 있다.

꽃의 노래' 
우리나라에는 꽃을 주제로 한 타령들이 많은데, 「꽃타령」은 신민요로 자진모리장단의 빠르고 흥겨운 노래이다. 봄철 아낙네들이 동산에 올라 봄놀이를 하며 부르기도 하고 시집간 딸이 친정어버이의 생신을 맞아 친정에 들러 경축하면서 부르기도 하였다.

「꽃타령」은 “꽃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 꽃바구니 둘러메고 꽃팔러 나왔소. 붉은꽃 푸른꽃 노랗고도 하얀꽃 남색 자색 연분홍꽃 울긋불긋 빛난꽃 아롱다롱 고운꽃” 또는 “흔들흔들 초롱꽃 달랑달랑 방울꽃 목이 잘린 도라지꽃 맵시있다. 아가씨꽃 부얼부얼 함박꽃 절개 있다. 연꽃이냐 이꽃 저꽃 다버리고 참나리꽃 네로구나.”와 같이 여러 이름을 들면서 그 꽃의 빛깔·향기·모양 등을 그리는 내용이 많다.

우리나라의 자생화,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자생식물 4,135종 가운데 약 500종은 관상가치가 높다고 보고 있다(관악수목원보고 제1호, 1976). 우리나라는 위도상으로 남위 33°40′에서 북위 43°2′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된 반도로 남해안의 아열대기후로부터 한대기후까지 널리 걸쳐 있어 월동을 위한 내한성(耐寒性)이 문제가 된다.

난지 식물(暖地 植物) 꽃
기온이 높아 연평균 14℃를 유지하는 제주도와 울릉도 지역에서 자라는 종류로서 상록관엽식물들이 많다. 동백나무·식나무·팔손이나무·감탕나무·먼나무·문주란·아왜나무 등이 있다. 이들은 중부지방에서는 노지월동이 곤란하며 실내식물로 많이 이용된다.

온대식물(溫帶植物) 꽃
북위 35°부터 43° 2′ 사이 자생식물로 소나무와 낙엽활엽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개나리·진달래·철쭉·미선나무·개느삼·앵초·도라지·꽃향유 등이 이에 속한다.

한대식물(寒帶植物) 꽃
1,000m 이상의 설악산과 1,300m 이상의 지리산, 1,500m 이상의 한라산 고산지에서 자라든가, 연평균 5℃ 정도가 되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로서 주목·구상나무·잎깔나무·분비나무 등의 침엽수와 만병초·금강초롱꽃·들쭉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계절꽃과 화신(花信)
같은 꽃이라도 남부·중부·북부 등 지방에 따라 개화기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이 봄철에 꽃이 피며 일부가 가을과 여름에 핀다.

꽃소식을 알리는 꽃들은 3월 개화하는 종류들로서, 긴 겨울 동안 얼어붙은 대지를 녹여주는 화사한 봄날을 알리는 희소식이기도 하다.

남쪽부터 따뜻해지는 기후 탓으로 제주도에서부터 오며, 가장 먼저 꽃피는 것이 풍년화·산수유·매화·개나리·진달래로서 지역에 따라 다른데, 개나리와 진달래의 첫 꽃소식은 3월 20일경에 남쪽으로부터 온다. 한편, 벚나무는 3월 30일경이 되며 5일 후인 4월 5일쯤 강남갔던 제비가 남쪽에서 첫 상륙한다.

식물의 한살이,

화훼산업'
우리꽃의 역사,
조선시대 이전의 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 원예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취미 원예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꽃이 상품생산적 산업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도 시장에는 화원이 있고 상품거래가 있었지만 꽃시장이 개설된 것은 1969년 서울 남대문시장에서였다. 그 뒤 서울 서초동에도 여러 꽃재배농가가 모여 꽃마을단지를 형성하였다.

이때가 1천 달러 정도의 국민소득기로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꽃마을단지 조성에 독농가인 왕원식(王元植)과 여대기(余大基)의 노력이 컸다.

인천 부평 지역에서 글라디올러스 절화생산, 계산동 서곶에서 구근류 등 산업적인 절화생산을 하기 시작하였고, 김해와 부산에서는 카네이션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구근류 등 품목도 다양화하여 국내 절화수요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생산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제주도에서 강봉조 등이 동양란·양란 생산단지를 이루었다. 1980년부터 경기지방에서 꽃을 생산하던 김명호 등이 서귀포지역에 이주하여 본격적인 절화생산을 시작하여 나팔나리·숙근안개초 등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농가들은 우면동으로 이주하여, 2000년 현재 우면동에 큰 화훼농업단지를 이루고 있고,세곡동 헌인릉, 성남, 고양시 등도 최근 늘어나고 있으나 운반이 용이한 것 등 동계생산은 제주도와 남부지방에서, 여름생산은 강원도 고랭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생산 현황,
우리나라 꽃 생산은 꾸준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수요증가가 일어나 1980년대 후반부터 꽃의 문화와 산업화가 현저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최근 WTO체제 출범 후 화훼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성장 작목이며,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전업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화훼생산액은 1975년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1980년에는 3배, 1985년에는 11배, 1990년에는 36배, 1995년에는 76배, 1998년에는 87배의 급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75년을 기준으로 1985년부터 수입이 수출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하여 1975년에는 수입이 수출액(783만 달러)의 44배나 많아 3500만 달러나 수입되었다.

주요 수출품목은 접목선인장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절화 나리류와 절화장미류가 주종을 이루고 잇고, 수입은 란류(동양란, 양란), 구근류, 및 관엽 등의 묘목 등이 대부분이다. 한국경제위기인 IMF를 지나면서 1998년에는 수입이 급감하여 수입과 수출이 거의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수입 꽃의 국산화가 문제이다. 2000년 현재 국내 꽃 산업의 과제는 자생식물의 개발과 적지적작(適地適作), 내수촉진, 생산자 단체 육성, 유통구조개선, 신품종육성 등이다.

국내 꽃 생산은 1998년 현재 절화 비중이 가장 높아 45.6%인 2667억 원이 생산되고 있으며, 장미·국화·카네이션·나리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다음은 분화류로서 36.5%인 2136억 원으로 란류, 관엽류 아잘레아, 포인세치아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관상수(11%)와 화목류(5%)이고, 구근(1.1%)과 종자(0.05%)는 아주 미약하다. 절화의 주산지는 경상남도, 경기도, 제주 지역과 전라남도, 전라북도이고 분화는 경기도와 서울 등 수도권이 대부분이고 일부 제주도 및 남부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화목류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관상수는 충청북도, 경상남도 지역에서, 구근은 강원도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 화훼 산업의 발전은 최근 크게 발전되었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즉 정부에서 수입개방, 농수부의 과수화훼과 신설, 「농산물가격유지법」에 도매시장 거래품목으로 꽃을 추가하고 서울 양재동에 화훼공판장을 만들어 전자경매를 시작하고 정부의 보조금과 융자 등의 정부시책에 그 원인이 있다.

꽃은 다른 어느 농작물보다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과잉생산이 우려되지만, 국민생활수준의 향상과 국제화에 힘입어 앞으로도 꾸준한 신장이 있을 것으로 본다.

세계의 화훼 소비와 생산 현황을 보면, 1995년 현재 1인당 꽃 소비액은 노르웨이가 146달러로 가장 높고 다음이 스위스·독일·덴마크순이고 한국은 14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꽃 소비액은 미국이 가장 많고 다음이 일본·독일·이탈리아순으로 인구가 많고 GNP가 높은 나라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꽃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네델란드로서 약 72억 달러를 생산하고 다음이 일본으로 62억 달러가 생산되었으며, 한국은 약 4억 8000만 달러가 생산되었다. 세계 꽃 교역의 주종을 이루는 절화의 수출을 보면 네델란드가 28억 달러로 가장 많고 다음이 벨기에이고 한국은 700만 달러를 수출하였다.

재배와 관리, (꽃)
우리 조상들은 한 포기의 풀이나 나무가 살아가는 이치를 생각하여 근원까지 파고들어가 깊이 연구하여 습득하면 자연을 초월한 원리를 해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배양토 준비, 개화촉진법, 화분관리법, 화분의 월동법, 꽃을 가꾸는 자세 및 꺾꽂이[揷木] 등에 대하여 당대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양화소록』에 수록된 꽃재배법은 다음과 같다.

가꾸기,
(화분의 흙준비·관수·거름주는 법)
겨울철에 잘 썩은 진흙을 파서 볕에 쪼여 말린 뒤 체로 이물질을 없애고 인분을 앙구어서 띄웠다가 사용한다. 또한, 마른 풀과 흙은 층층으로 깔고 불을 놓아 태워서 간직해 두었다가 음력 정월에 꽃을 심는다.

비료로는 인분의 맑은 것을 떠서 주는데, 꽃씨가 싹이 틀 때는 거름물을 주지 않고 새순이 나와 꽃망울이 생기면 바로 거름물을 주며 꽃핀 뒤에는 거름을 주지 말아야 한다.

열매 맺는 것은 열매가 맺힌 뒤에는 거름과 물을 주지 말 것이며 거름을 주면 열매가 떨어진다. 음력 3월과 4월 사이 늦게 분에 심으면 죽으니 조심하고, 뿌리가 길면 꽃이 생기지만 뿌리가 너무 많으면 꽃이 피지 않는다. 거위똥이나 누에똥 또는 말똥을 물에 담가 액비로 사용한다.

흙을 장만할 때는 적토든 흑색 토양이든 상관없이 차지지 않은 흙을 파서 모래자갈을 쳐내고 맑은 똥물을 뿌려서 띄워말리기를 두서너 차례 하여 사용한다.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말똥을 물에 담갔다가 주면 삼사 일 뒤에 필 것이 다음날에 핀다.

화분 놓는 방법,
그늘과 햇빛이 번갈아 드는 곳에 화분을 놓는 것이 좋은데 키가 큰 것은 뒤에, 작은 것은 앞줄에 놓아 앞에서 보기좋게 놓되 기왓장이나 벽돌 위에 놓아두는 것이 좋다.

석류·치자·산다화·사계화는 건조를 싫어하니 꽃이 진 뒤에는 땅을 파고 지면과 같게 묻어둔다. 화분은 쌍줄로 놓거나 번갈아 놓아도 되고 정자 사이에 두는 것이 원칙이나 세상사람들은 정원에 늘어놓은 일이 많다고 하였다.

겨울철 화분 저장하는 법,
햇빛이 잘 드는 높고 건조한 곳에 흙을 쌓아 토담집을 만들어 남쪽 창문을 관리하기 편하게 넓게 만들고 통기가 잘되게 한다. 지금의 온실이 옛날의 토담집인 것이다.

월동을 위해 화분을 넣는 시기는 서리가 2, 3회 내린 뒤에 들여놓고 따뜻한 날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아주 추울 때는 짚을 두텁게 덮어두는데, 입춘 후에는 늘 덮어두거나 날씨를 보아 다소 열어두고 한식이 지나면 밖에 내놓는다.

꽃을 기를 때 주의점,
담장 가까이 심으면 쓰러지기 쉬우니 이리저리 바꾸어 심고, 거미줄은 해로우니 거미를 잡아주고, 꺾꽂이할 때는 나무꼬챙이로 구멍을 파고 꽂아 흙을 단단하게 다져 그늘에 놓아두는 것이 좋다.

화훼 연구,
1886년(고종 23) 최초로 우리나라에 근대 교육기관이 생기고 농학(農學) 중에 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 현재 원예과가 설치된 학교 수는 고등학교의 142개 학급을 포함한 4년제 대학이 39개 학과가 있다. 꽃 연구는 대부분이 국립원예연구소 초본 및 목본 화훼과와 지방자치단체의 도 농업기술원과 대학연구실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의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은 신품종 육성(국화·나리·장미·선인장·무궁화·철쭉·칼랑코에 등)·재배법 개선(개화기 조절·배양토 양액구명·절화생산·화단묘·용기재배 등)·번식법 개선(관상수·난·카네이션 등)·무병주 생산(나리류·난류·카네이션 등) 등이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대학에서 나오기 시작한 연구논문은 1970년대부터 주로 한국원예학회를 통하여 발표되는데 국내 4년제 39개 대학(국립 19개 대, 사립 20개 대)에서 연구, 2000년 현재 연간 650여 편의 학술연구결과가 발표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 상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려 있는 삼층대수파련. 조선시대의 궁중연회에는 연회 음식 위에 종이꽃을 꽂아 장식하였다.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잔디와 무궁화, 고려대학교에서 실내식물연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철쭉과 관엽식물,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난류, 단국대학교에서 구근류, 원광대학교에서 상사화, 경북대학교와 충북대학교에서 구근류 및 난류,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에서 난과 국화, 영남대학교에서 구근, 제주대학교에서는 자생란 등의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 [flower] (식물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flower]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초등과학 개념사전
[식물계통학(2판). 월드사이언스, 607 (2010)
[식물형태학(3판). 라이프사이언스, 410 (2016)
[백화보』(창조사, 1970)
[화하만필』(삼성미술문화재단, 1972)
[양화소록(養花小錄)』(을유문화사, 1974)
[꽃과 사랑의 전설 신화』(민중서관, 1978)
[겨레얼 무궁화』(나라꽃심기운동추진회, 1978)
[백화송』(송원문화사, 1980)
[한국원예발달사』(한국원예발달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0)
[꽃말 꽃전설 꽃에 얽힌 사연들』(농림출판사, 1982)
[대한식물도감』(향문사, 1982)
[나라꽃 무궁화』(동아출판사, 1983)
[1998화훼재배현황』(농림부, 1999)
[화훼원예학총론』(한국화훼연구회, 문운당, 2000)
[네이버 지식백과]  [flow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Coel ES, Meyerowitz EM (1991) The war of the whorls: genetic interactions controlling flower development. Nature, 353: 31-37 
[Pelaz S, Ditta GS, Baumann E 등 (2000) B and C floral organ identity function require SEPALLATA MADS-box genes. Nature, 405:200–203
[Friis EM, Pedersen KR, Crane PR (2006) Cretaceous angiosperm flowers: innovation and evolution in plant reproduction. Paleogeogr. Paleoclimatol. Paleoecol, 232: 251–293
[Liu Z-J, Wang X (2016) A perfect flower from the Jurassic of China. Hist Biol, 28: 707
[Soltis DE., CD. Bell, S. Kim 등 (2008) Origin and Early Evolution of Angiosperms.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1133: 3-25
[Soltis DE., VA. Albert, J. Leebens-Mack 등 (2009) Polyploidy and angiosperm diversification. American Journal of Botany, 96: 336–348
[Soltis PS, Soltis DE (2016) Ancient WGD events as drivers of key innovations in angiosperms. Curr Opin Plant Biol, 30: 159–165
[Endress, P. K., J. A. Doyle. (2009) Reconstructing the ancestral flower and its initial specializations. Am. J. Bot, 96: 22–66
[Sauquet H, von Balthazar M, Magallón S 등 (2017) The ancestral flower of angiosperms and its early diversifcation. Nat Commun, 8: 16047

잠시 쉬어유^^ 음악으로 밑에 클릭하세요,

다른 영상보기, (지나간 스포츠 역전의 거순간 영상, 동물, 자연,,),

***youtu.be/mxijRqfQh60/
***youtu.be/808W9lbHv1c
***youtu.be/KlNGTrued4c
***youtu.be/2J47TYTWoEg
***youtu.be/rxiJyKqd4A8
***youtu.be/eo2uTjp8iLk-캬바레 경음악 총결산 1집(지루박),2집(디스코),3집(트로트)
***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감사합니다.~-^0^~

#꽃 [flower] #식물 #꽃에 얽힌 사연 #화훼 #원예 #한국원예학회 #꽃의 국산화가 문제 #2000년 현재 국내 꽃 #산업의 과제 #자생식물의 개발 #적지적작() #내수촉진 #생산자 단체 육성 #유통구조개선 #신품종육성 #WTO체제 출범 #화훼 수출량 #성장 작목 #고부가가치산업 #전업농가 #관상화 #화분# 꽃꽂이# 꽃받침# 꽃시계# 드라이플라워 #무판화 #화하만필 #양화소록(養花小錄) #백화보 #실내식물 #철쭉과 #관엽식물 #상사화 #구근류 #난류 #국화 #자생란 #한국화훼 #나라꽃 #심기운동 #관상화 #화분 #꽃꽂이 #내원서(內園署)를 두어 궁궐의 꽃을 관리 #조선시대 #상림원(上林園) #궁궐 내의 꽃과 과일 #백성들이 국화 화분을 궁궐에 진상한 기록 #월계화(月季花 #사계화 #봄가을에 걸쳐 꽃이 피는 장미 종류) #8세기경 발해가 중국에서 수입하여 재배 #고려 예종 때도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하였다 #작약 #고려 충렬왕 #원예종 #중국에서 도입되었으며 #동백은 남해안에 자생 #동백기름을 짜기도 하고 #관상용으로 널리 심어 #이태백(李太白)이 쓴 시 #신라에 동백이 많았다 #중국지리서 #산해경(山海經)』 #한국에 많은 무궁화[木槿花 ]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 #君子之國 有薰華草朝生暮死) #기록에는 단군이 개국 #무궁화가 많이 재배 #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 #우리나라에 무궁화꽃 #유전체 #분석기술의 혁신 #빠른 정보 축적 #계통수 작성 #생물정보학의 발달 #백악기 이후 #속씨식물 #방산진화 #염색체 배수화(polyploidy) #유전체 중복(whole-genone duplication)


2020년 4월 13일 월요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 목판.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1237~1248) 때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 후기, 1237~1248년 사이, 8,1258매,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국보 제32호. 해인사 소장. (ⓒ문화재청) 
유형/ 시대/ 성격/ 소장처/ 제작시기·일시/ 수량/ 재질/ 크기/ (높이, 길이, 두께, 너비)소유자/ 관리자/ 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물
고려
세계기록유산,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치인리), 해인사
고려시대, 고종24~35년, 1237~1248년
81,258매
산벗나무, 돌배나무, 단풍나무
크기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무게 3kg
해인사
해인사
국보 제32호
1962년 12월 20일
고려 고종(1237~1248)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판각(板刻)한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이 대장경 판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리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이 중심이 되어 대장경을 다시 목판에 새긴 것이다.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해인사에 있고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판이라 하여 ‘해인사고려대장경판(海印寺高麗大藏經板)’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기 때문에 ‘고려대장도감판(高麗大藏都監板)’이라고도 한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교정을 맡아 북송 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바로 잡아 판각하였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위 그림)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이미 담당관사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1237년에는 판각을 시작하여 첫해에 판각된 것이 2종 115권이었고, 1248년(고종 35)에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음이 간행기록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대장경판은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남해에서 1,496종의 경전을 6,561권 7만 8,500여 장의 목판에 새긴 것으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 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경(經)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인 내함(柰函)까지 60개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함께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함별 편성을 보면 첫 번째 대반야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5번째 『신집장경음의수함록』은 6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 함의 순서[函順]로 160번)의 경우 한 개 함에 경전 29개를 수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底本)은 천함(天函: 경전 순서[經順]로 1번)에서 영함(英函: 경전 순서[經順]로 1087번)은 『개원석교목록(開元釋敎目錄)』에 수록된 경인데, 거란본에서 편입시킨 것 등 11개의 경전이 더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함(社函: 經順 1088) 이후는 부분적으로 「속개원석교록」, 「속정원석교록」 등의 목록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특정의 목록에 따라 편성한 것이 아니라, 간행 당시 수기 대사 등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내용을 추가하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의 재질은 산벗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돌배나무, 단풍나무 등 조각에 용이한 나무들이 사용되었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이고, 무게는 3㎏ 정도이다. 각 판의 상하(上下)에는 대부분 계선이 있는데 단변(單邊)으로 되어 있고, 경판의 가운데에는 판심이 없는 무판심(無版心)으로 두루마리 형식의 권자본(卷子本)의 판식(版式)을 지녔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 목판.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1237~1248) 때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 후기, 1237~1248년 사이, 8,1258매,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국보 제32호. 해인사 소장. (ⓒ문화재청)

경판은 양면 모두 경판의 보존을 위해 옻칠이 되어 있고, 경판의 양쪽에 마구리를 하고 있는데 경판과 잇는 네 귀퉁이에 금속판을 부착하였다. 양쪽 면에는 모두 경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지만, 경순(經順) 1255, 1403, 1496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6은 행자수가 18행(소자는 36행)이며,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7은 22행 13∼15자(소자는 44행 17자)이고, 1258은 21행 13∼14자(소자는 42행 16자)이며, 1259는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0은 25행 16자이다.
경순 1255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일반 경전들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각 권말에는 간행 기록(刊記)이 새겨져 있는데, 예외 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대장경의 판각 연도를 분석해보면, 연도별 판각 양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장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히 경순이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한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순 별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작성에서부터 초벌새김·재벌새김·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권 이상으로 구성된 경은 경별(經別)로 차례로 판각된 것이 아니라, 권별로 판각되었는데, 권별의 간기에 나타난 그 해에 판각된 것이다.
대장경 판각은 실제로 12년 동안 모두 마쳤지만, 『고려사』에 나오는 16년이라는 기간은 판각기간이 아니라,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을 합친 기간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전담하도록 하였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총괄한 것은 대장도감이고,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진을 빼고 판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고 판하본 작성 등과 실제로 현장에서 판각한 것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1248년(고종 35)은 실제의 정장 판각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장목록』 1종만을 판각한 해이고, 대장경판을 판각하고 난 뒤의 뒷마무리 작업은 권별 판각을 완료한 뒤 바로 뒤따라 처리하여 판가(板架)에 순서대로 진열하였을 것이므로, 간기에 나타난 1248년을 대장경판 판각작업의 완료 연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판각완료 연도인 1248년을 하한연도로 볼 수 있으며, 일의 시작은 적어도 1233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대장경판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은 모두 72종 504권에 이르고 있다. 판각연도는 1243년(계묘)에서 1247년(정미)까지 5년간 판각한 것이다.
이 분사대장도감이 무슨 목적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직접 판각을 시작한 연도는 1243년(고종 30)이며, 또한 504권의 분사판(分司板) 가운데 473권의 경은 1243∼1244년의 2년 동안 판각되어, 결국 분사도감에서의 판각이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판각량으로 분사대장도감이 판각기능 면에서만 설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통나무를 잘라 각수가 판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판(鍊板) 작업 및 판하본(板下本) 작업까지의 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사대장도감에서 판하본 작업과 연판 작업 등 판각을 위한 준비기능을 가지고 대장도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면, 적어도 1242년(고종 29)까지 이들 준비작업을 완료하고, 1243년부터 판각기능으로 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가 보이는 경들도 모두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만이 아니라, 권별로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과 섞여 있는 점에서 보면,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72종의 경판 가운데 전체가 분사판인 것은 43종이고, 나머지 간기가 없는 경우 8종을 제외한 21종은 대장도감과 섞여 판각된 것이었다. 여기서 보면 대장도감이나 분사대장도감은 멀리 떨어진 장소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전을 그것도 서로 권수를 섞어가면서 판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경전의 경판에 새겨진 각수를 통해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분사대장도감이나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임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남해군으로 파악되었다.
그동안 대장도감은 강화 선원사에 설치되었고,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願刹)로 1245년(고종 32)에 완공되었는데, 이때 대장경판은 이미 90%이상 판각을 완료하였으므로 대장경판각과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태조 7년 5월 병진의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이라는 기사)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류였다. 『고려사』[지(志)권 제32, 식화(食貨)1, 후원년 3월조(後元年 3月條)]에도 ‘백미 삼백석을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나누어 주라’는 기록이 있어 대장도감이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대장경 판각은 이를 인출(印出)하여 널리 유포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으므로 판각을 완료하고 난 뒤 인출(印出) 사업이 바로 잇달아 있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판을 새기고 난 뒤 처음으로 전질(全帙)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말의 명신인 이색(李穡)이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아 1381년에 인출하여 신륵사에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 왕명으로 인경(印經)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하였고, 1458년(세조 4)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1500년(연산군 6)에도 인출되었다.
1865년(고종 2) 2부를 인출하여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에 각각 한 부씩 봉안하였고, 1898년에도 인출하였으며, 1899년 상궁 최씨(崔氏)의 발원으로 4부를 인출하여 해인사·통도사·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 부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부는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러한 인출은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 자원이 적지 않으므로 국가의 힘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밖에도 해인사대장경은 승려들의 불교연구를 위하여, 또 경전신앙[經信仰]의 차원에서, 그리고 일본에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도 상당수가 인출되었다.
조선 초기의 일본과의 교류는 고려대장경 교류라 할 정도로 일본은 끊임없이 요구하여 가져갔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왜구의 창궐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왜구에 잡혀갔던 포로와 대장경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인출한 대장경의 고판본(古版本)은 거의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15년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경도(京都) 센유지(泉涌寺)에 봉안하고자 인출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동경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인출된 또 한 부는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935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만주국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 부를 인출하였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 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하여 1953년에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 국의 유명도서관에 보냈다.
평가,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는 데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의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하였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후박나무 등의 목재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c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UNESCO 지정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기록유산 명
기록연도
1
1997.10
2
1997.10
3
2001.09
4
2001.09
5
2007.06
6
2007.06
7
2009.07
8
2011.05
9
2011.05
10
2013.06
11
2013.06
12
2015.10
13
2015.10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한국서지학 연구』(삼성출판사, 1991)
  • [고려대장경해제』(동국대학교, 1978)
  • [한국고인쇄기술사』(탐구당, 1973)
  • [고려대장경판의 연구』(『백성욱박사송수기념불교학논문집』, 1959)
  •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한국사』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 [대장도감의 판각성격과 선원사 문제」(『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총』, 1992)
  • [해인사대장경판에 대한 재고찰」(『한국학보』33, 일지사, 198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두산백과)

잠시 쉬어유^^ 음악으로 밑에 클릭하세요,

다른 영상보기, (지나간 스포츠 역전의 거순간 영상, 동물, 자연,,),

***youtu.be/mxijRqfQh60/
***youtu.be/808W9lbHv1c
***youtu.be/KlNGTrued4c
***youtu.be/2J47TYTWoEg
***youtu.be/rxiJyKqd4A8
***youtu.be/eo2uTjp8iLk-캬바레 경음악 총결산 1집(지루박),2집(디스코),3집(트로트)
***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감사합니다.~-^0^~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고려대장경판 #대장도감 #판각성격 #고려대장경 #합천 해인사 #해인사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고려목판 #가야면 #국보 #합천군의 교통관광 #고려대장경연구소 #팔만대장경축제 #세계기록유산 #초조대장경 #지역 #아시아 #한국 #경상남도 #문화유적 #국보 #연판(鍊板) 작업 #판하본(板下本) 작업까지의 업무 #판하본 작업 #연판 작업 #판각을 위한 준비기능을 가지고 대장도감의 일익을 담당 #1242년(고종 29)까지 이들 준비작업을 완료 #1243년부터 판각기능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 #권별로 대장도감에서 판각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 #분사대장도감 #판각된 72종의 경판 #분사판인 것은 43종 #간기가 없는 경우 8종 #21종 #대장도감 #분사대장도감은 멀리 떨어진 장소 #동일한 경전 #권수 #판각 #경전의 경판 #장소는 남해군 #불조직지심체요절 #한국의 유교책판 #제경판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는 데 그 가치가 높게 평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 #법문이 실려 있다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 #경판의 크기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후박나무사용 #목재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 #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c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제경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 #강화 선원사에 설치되었고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願刹)로 1245년(고종 32)에 완공 #대장경판은 이미 90%이상 판각을 완료하였으므로 대장경판각과 관계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태조 7년 5월 병진의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이라는 기사)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류였다 #『고려사』[지(志)권 제32, 식화(食貨)1, 후원년 3월조(後元年 3月條)]에도 #백미 삼백석을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나누어 주라’는 기록이 있어 대장도감이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한 것이 분명하다 #대장경 판각은 이를 인출(印出)하여 널리 유포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으므로 판각을 완료하고 난 뒤 인출(印出) 사업이 바로 잇달아 있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판을 새기고 난 뒤 처음으로 전질(全帙)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말의 명신인 이색(李穡)이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아 #1381년에 인출하여 신륵사에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 왕명으로 인경(印經)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하였고 #1458년(세조 4) 왕이 신미(信眉) 대사 등에게 명하여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1500년(연산군 6)에도 인출되었다 #1865년(고종 2) 2부를 인출하여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에 각각 한 부씩 봉안하였고 #1898년에도 인출하였으며 #1899년 상궁 최씨(崔氏)의 발원으로 4부를 인출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삼보사찰에 한 부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부는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인출은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 자원 #국가의 힘 #해인사대장경은 승려들의 불교연구를 위하여 #경전신앙[經信仰]의 차원에서 #일본에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도 상당수가 인출되었다 #조선 초기의 일본과의 교류는 고려대장경 교류라 할 정도로 일본은 끊임없이 요구하여 가져갔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왜구의 창궐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왜구에 잡혀갔던 포로와 대장경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현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인출한 대장경의 고판본(古版本)은 거의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1915년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경도(京都) 센유지(泉涌寺)에 봉안하고자 인출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동경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인출된 또 한 부는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5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다 #만주국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 부를 인출하였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해인사 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하여 #1953년에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 #세계 각 국의 유명도서관

대장경,[ 大藏經 ] 2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대장경,[ 大藏經 ] 2
불교의 경장․율장․논장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것
대장경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과 중국 및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총합한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서는 오대산 화장사(華藏寺)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고,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서는 신라말기에 보요(普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오대산 화장사(華藏寺)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주요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에 들어가 각각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보천은 입적할 때에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마다 국가를 위해 기도할 방법을 기록하였는데, 동대에는 원통사(圓通社), 남대에는 금강사(金剛社), 서대에는 수정사(水精社), 북대에는 백련사(白蓮社), 중대에는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보천암을 화장사로 이름을 고치고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삼아 그곳에 비로자나 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두고 5명의 승려로 하여금 낮에는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도록 하였다.

대장경과 같은 불교경전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그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흥왕 26년(565)에 진(陳)나라(557-589) 사신 유사(劉思)가 승려 명관(明觀)과 함께 불교 경전과 논서 1천 7백여 권을 가지고 왔고,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법사가 삼장(三藏) 4백여 함을 싣고 왔다. 신라말기에 보요(普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908-978)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경순왕 2년(928)에 묵(默)화상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 고려 선종 3년(1086)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로부터 천태종의 많은 책을 가지고 왔고, 고려 예종(1105-1122) 때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요본(遼本) 대장경 3부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의 기록 가운데 대장경 혹은 삼장이라고 명시한 기사는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 대장경을 수입한 것과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거란의 요나라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들여온 것이다. 자장법사가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도 보인다. 자장정률조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하였으므로 당나라 황제에게 대장경 1부와 불구(佛具) 등을 요청하여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묵화상이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고려사』 권1 태조 11년(928)조에 보이는데, 『고려사』에서는 승려 홍경(洪慶)이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자 왕이 친히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묵화상과 홍경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 경판은 국보 제32호이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설법과 규칙, 논술을 모두 모은 것을 말하며, 경판은 현재 81,258매가 남아 있다.

대장경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인도에서는 삼장(三藏) 체계의 불교 경전이 성립되었을 뿐 대장경이라는 말은 없었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經藏)과 교단의 계율을 해설한 율장(律藏)과 후대의 학자들이 경전을 해석한 논장(論藏)을 말하는데, 이 삼장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후에 인도로부터 온 전법사(傳法師)가 불교를 중국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중국의 구도승(求道僧)들이 인도에 유학하여 직접 경전을 수입하였다. 이에 삼장의 여러 경전들이 전법사와 구도승에 의해 개별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중국에 전래되었다.(大藏會, 1989)

중국에 유입된 불교 경전이 점차 늘어나면서 경전의 성격을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인도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경전을 수입했기 때문에 중국에 수입되어 번역된 경전들이 대승의 경전인지, 아니면 소승의 경전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진(東晉)의 도안(道安, 312-385)이 처음으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만들어 당시에 유통되던 경전의 목록을 만들고 그 경전들을 간략히 소개하였다.(미즈노 고겐, 1996) 그 후 불교교단이 발전하면서 경전을 전체적으로 수집하여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양나라 무제(武帝, 재위 502-549)의 명령으로 경전을 수집하여 『화림원불교중경목록(華林園佛敎衆經目錄)』을 만들었다. 이때 수집된 경전들을 “대장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大藏會, 1989) 그리고 대장경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수나라에 이르러서부터라고 한다.(李富華 외, 2003)

대장경이 처음 나무에 새겨진 것은 송나라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개보칙판인성대장경(開寶勅版印成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나라 태조(太祖, 재위 960-976) 개보(開寶) 연간(968-976)에 황제의 칙명(勅命)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것이다. 이 당시 목판 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 덕분이었다. 8세기 이전에는 목판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대부분 필사한 사경(寫經)이었다. 수천 권이나 되는 대장경을 모두 필사하여 보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목판술의 발달로 경전들을 나무에 새겨 인쇄하게 되었고, 송나라 태조 때에 비로소 수천 권의 대장경 전체를 목판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때 만든 대장경은 730년에 지승(智昇)이 경전 목록을 정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의거한 것으로 총 5,048권이었다.(李富華 외, 2003)

중국에서 처음 완성된 대장경은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고려와 거란에서도 대장경을 나무에 판각하였다. 먼저 판각을 시작한 것은 고려였다. 고려는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을 받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을 서원하였고, 거란이 물러가자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대장경은 현종 2년(1011)에 판각을 시작하여 현종 20년(1029)에 1차 작업이 완수되었다. 그 후 판각이 중단되었는데 그 사이 거란에서 대장경을 만들어 보내옴에 따라 그에 자극받아 문종 17년(1063)에 추가 판각을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완성하였다. 그것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부른다. 『초조대장경』의 목판은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고종 19년(1232)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버렸다.(천혜봉, 2003)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 23년(1236)에 착수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이것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혹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부른다. 이 대장경의 목판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박상국, 2003)

대장경 판각 사업은 중국 역대왕조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북송대(960-1126)에 『개보칙판인성대장경』을 비롯하여 『숭녕만수대장(崇寧萬壽大藏)』 『비로장(毘盧藏)』이 간행되고, 남송대(1127∼1279)에 『원각장(圓覺藏)』, 『자복장(資福藏)』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시대(1271-1368)에 『적사장(磧砂藏)』, 『보녕장(普寧藏)』, 명나라 시대(1368-1644)에 『남장(南藏)』, 『북장(北藏)』, 『가흥장(嘉興藏)』, 청나라 시대(1636∼1912)에 『용장(龍藏)』이 간행되었다. 근대에는 『빈가장(頻伽藏)』이 간행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천해장(天海藏)』, 『황벽장(黃檗藏)』, 근대에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속장경(卍續藏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 간행되었다.(李富華 외, 2003)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983년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 대장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산오만진신조에 언급된 대장경과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요본(遼本) 대장경을 들여왔다고 한 것은 목판본 『거란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前後所將舍利,
國史云 眞興王太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太和塔 一分竝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上級之中 安石蓋如覆鑊 諺云 昔在本朝 相次有二廉使禮壇 擧石鑊而敬之 前感脩蟒在函中 後見巨蟾蹲石腹 自此不敢擧之 近有上將軍金公利生庾侍郞碩 以高廟朝受旨 指揮江東 仗節到寺 擬欲擧石瞻禮 寺僧以往事難之 二公令軍士固擧之 內有小石函 函襲之中 貯以瑠璃筒 筒中舍利只四粒 傳示瞻敬 筒有小傷裂處 於是庾公適蓄一水精函子 遂奉施兼藏焉 識之以記 移御江都四年乙未歲也 古記稱百枚分藏三處 今唯四爾 旣隱現隨人多小 不足怪也 又諺云 其皇龍寺塔災之日 石鑊之東面始有大斑 至今猶然 卽大遼應曆三年癸丑歲也 本朝光廟五載也 塔之第三災也 曹溪無衣子留詩云 聞噵皇龍災塔日 連燒一面示無間 是也 自至元甲子已來 大朝使佐本國皇華 爭來瞻禮 四方雲水 輻湊來參 或擧不擧 眞身四枚外 變身舍利 碎如砂礫 現於鑊外 而異香郁烈 彌日不歇者 比比有之 此末季一方之奇事也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後唐同光元年癸未 本朝太祖卽位六年 入朝使尹質所將五百羅漢像 今在北崇山神光寺 大宋宣和元年己&lt;亥&gt;[睿廟十五年] 入貢使鄭克永李之美等所將佛牙 今內殿置奉者是也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天廚送食 一日律師請湘公齋 湘至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得入 於是 律師知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帝所敬 嘗聞帝釋宮有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輩 請下人間 爲福如何 律師後與天使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湘公 致敬訖 邀安大內 後至大宋徽宗朝 崇奉左道 時國人傳圖讖曰 金人敗國 黃巾之徒 諷日官奏曰 金人者 佛敎之謂也 將不利於國家 議將破滅釋氏 坑諸沙門 焚燒經典 而別造小舡 載佛牙泛於大海 任隨緣流泊 于時 適有本朝使者 至宋聞其事 以天花茸五十領紵布三百疋 行賂於押舡內史 密授佛牙 但流空舡 使臣等旣得佛牙來奏 於是睿宗大喜 奉安于十員殿左掖小殿 常鑰匙殿門 施香燈于外 每親幸日 開殿瞻敬 至壬辰歲移御次 內官悤遽中忘不收檢 至丙申四月 御願堂神孝寺釋蘊光 請致敬佛牙 聞于上 勑令內臣遍檢宮中 無得也 時 栢臺侍御史崔冲命薛伸 急徵于諸謁者房 皆未知所措 內臣金承老奏曰 壬辰年移御時紫門日記推看 從之 記云 入內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函云 召李詰之 對曰請歸家更尋私記 到家檢看 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函准受記 來呈 召問瑞龍 無辭以對 又以金承老所奏云 壬辰至今丙申五年間 御佛堂及景靈殿上守等 囚禁問當 依違未決 隔三日 夜中瑞龍家園墻裏 有投擲物聲 以火檢看 乃佛牙函也 函本內一重沈香合 次重純金合 次外重白銀函 次外重瑠璃函 次外重螺鈿函 各幅子如之 今但瑠璃函爾 喜得之 入達于內 有司議 金瑞龍及兩殿上守皆誅 晉陽府奏云 因佛事 不合多傷人 皆免之 更勑十員殿 中庭特造佛牙殿安之 令將士守之 擇吉日 請神孝寺上房蘊光 領徒三十人 入內設齋敬之 其日入直承宣崔弘上將軍崔公衍 李令長 內侍茶房等 侍立于殿庭 依次頂戴敬之 佛牙區穴間 舍利不知數 晉陽府以白銀合貯而安之 時 主上謂臣下曰 朕自亡佛牙已來 自生四疑 一疑 天宮七日限滿而上天矣 二疑 國亂如此 牙旣神物 且移有緣無事之邦矣 三疑 貪財小人 盜取函幅 棄之溝壑矣 四疑 盜取珍利 而無計自露 匿藏家中矣 今第四疑當之矣 乃放聲大哭 滿庭皆洒涕獻壽 至有煉頂燒臂者 不可勝計 得此實錄於當時內殿焚修前祗林寺大禪師覺猷 言親所眼見 使予錄之 又至庚午出都之亂 顚沛之甚 過於壬辰 十員殿監主禪師心鑑 亡身佩持 獲免於賊難 達於大內 大賞其功 移授名刹 今住氷山寺 是亦親聞於彼 眞興王代天嘉六年乙酉 陳使劉思與釋明觀 載送佛經論一千七百餘卷 貞觀十七年 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函來 安于通度寺 興德王代太和元年丁未 入學僧高麗釋丘德 齎佛經若干函來 王與諸寺僧徒出迎于興輪寺前路 大中五年 入朝使元弘 齎佛經若干軸來 羅末普耀禪師再至吳越 載大藏經來 卽海龍王寺開山祖也 大宋元祐甲戌 有人眞讚云 偉哉初祖 巍乎眞容 再至吳越 大藏成功 賜御普耀 鳳詔四封 若問其德 白月淸風 又大定中 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 水雲蘭若住空王 况是神龍穩一場 畢竟名藍誰得似 初傳像敎自南方 有跋云 昔普耀禪師始求大藏於南越 洎旋返次 海風忽起 扁舟出沒於波間 師卽言曰 意者 神龍欲留經耶 遂呪願乃誠 兼奉龍歸焉 於是風靜波息 旣得還國 遍賞山川 求可以安邀處 至此山 忽見瑞雲起於山上 乃與高&lt;弟&gt;弘慶經營蓮社 然則 像敎之東漸 實始乎此 漢南管記彭祖逖題 寺有龍王堂 頗多靈異 乃當時隨經而來止者也 至今猶存 又天成三年戊子 默和尙入唐 亦載大藏經來 本朝睿廟時 慧照國師奉詔西學 市遼本大藏三部而來 一本今在定惠寺[海印寺有一本 許參政宅有一本] 大安二年 本朝宣宗代 祐世僧統義天入宋 多將天台敎觀而來 此外方冊所不載 高僧信士往來所齎 不可詳記 大敎東漸 洋洋乎慶矣哉 讚曰 華月夷風尙隔烟 鹿園鶴樹二千年 流傳海外 眞堪賀 東震西乾共一天 按此錄義湘傳云 永徽初 入唐謁智儼 然據浮石本碑 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高麗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 總章元年 儼遷化 咸&lt;亨&gt;二年 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 則疑與儼公齋於宣律師處 請天宮佛牙 在辛酉至戊辰七八年間也 本朝高廟入江都壬辰年 疑天宮七日限滿者 誤矣 忉利天一日夜當人間一百歲 且從湘公初入唐辛酉 計至高廟壬辰 六百九十三歲也 至庚子年 始滿七百年而七日限已滿矣 至出都至元七年庚午 則七百三十年 若如天言而七日後還天宮 則禪師心鑑出都時 佩持出獻者 恐非眞佛牙也 於是年春出都前 於大內集諸宗名德 乞佛牙舍利 精勤雖切 而不得一枚 則七日限滿上天者 幾矣 二十一年甲申 修補國淸寺金塔 國主與莊穆王后 幸妙覺寺 集衆慶讚訖 右佛牙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 君臣與大衆 皆瞻奉頂戴 後幷納金塔內 予亦預斯會 而親見所謂佛牙者 長三寸許 而無舍利焉 無極記

전후소장사리
『국사(國史)』에 이르길,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인 태청(太淸, 547-549)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가 심호(沈湖)를 시켜 불사리(佛舍利) 몇 낱을 보내왔고,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貞觀, 627-649)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두골(頭骨), 어금니, 사리 백 낱과 부처님이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있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통도사) 계단에는 단이 두층으로 되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을 안치하였다. 속설(俗說)에는 옛날 본조(本朝, 고려)에서 연달아 두 안렴사[廉使]가 계단에 예(禮)를 하고 돌뚜껑을 들어 경배하였다. 앞의 안렴사는 긴 구렁이가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뒤의 안렴사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감히 그 돌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근래에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高宗, 재위 1213-1259)때 왕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였을 때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절의 승려가 그 전의 일로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굳이 들게 하였더니 그 안에 작은 석함이 있고 석함 속에 유리통이 들어 있는데, 통 속에 사리가 다만 네 낱이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하여 금이 간 곳이 있었다. 마침 유공(庾公)이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주하여 그곳에 안치해 두게 하였다.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 해는) 강도(江都, 강화도)로 서울을 옮긴지 4년째인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사리 백 낱을 세 곳에 나누어 안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네 낱뿐이라고 하였다. 이미 (사리가) 사라지고 나타남이 사람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저기도 하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다. 또 민간에서는 황룡사의 탑이 불에 타던 날에 돌뚜껑 동쪽 면에 처음 큰 반점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때는) 곧 대요(大遼)의 응력(應曆, 951-969)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5년이니, 탑이 세 번째 화재를 당하던 때였다. 조계(曹溪, 조계산) 무의자(無衣子)가 남긴 시에 이르길, “듣건대 황룡사의 탑이 불타던 날에, 연이어 (통도사 돌뚜껑의) 일면도 탔으니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이다. 지원(至元, 1264-1294) 갑자(甲子, 1264) 이래로 대조(大朝, 원)의 사신과 본국의 사신이 다투어 와서 예배하고 사방의 운수(雲水, 행각승)들도 몰려와서 참배하였는데, 혹은 (그 석함을)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眞身) 사리 네 낱 이외에 변신(變身) 사리는 모래와 같이 부서져 돌뚜껑 밖에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는 말세에 한 가지 기이한 일이었다. 당(唐) 대중(大中, 847-859) 5년 신미(辛未, 851)에 입조사(入朝使) 원홍(元弘)이 가지고 온 부처님의 어금니[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923-926)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즉위 6년에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5백 나한상(羅漢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고, 대송(大宋) 선화(宣和, 1119-1125) 원년 기해(己亥, 1119)[예종(睿宗, 재위 1105-1122) 15년]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모셔둔 것이 그것이다. 전하는 말에 이르길,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이르니, 이웃에 선율사(宣律師, 도선율사)가 있어 항상 하늘로부터 공양을 받고, 재(齋)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청하여, 의상이 와서 자리 잡고 앉은 지 오래되었으나 하늘의 공양은 시간이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릿대로 돌아가자 천사(天使)가 그제야 왔다. 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도(道)가 자기보다 뛰어남에 탄복하여 그 공양물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 두 법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사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40개 치아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리들을 위해 청하여 인간에 내려 보내어 복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율사가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上帝)에게 전달하니, 상제가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이) 예경을 마친 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그 후 대송(大宋) 휘종(徽宗, 재위 1100-1125) 때에 이르러 좌도(左道, 도교)를 받드니 그때 나라 사람들이 도참(圖讖)을 전파하여 말하기를, “금인(金人)이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하였다. 황건(黃巾, 도교)의 무리가 일관(日官)을 움직여 아뢰기를, “금인(金人)은 불교를 이름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논하여 장차 불교를 없애기 위해, 모든 승려를 묻어 죽이고, 경전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마한 배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를 실어 바다에 띄워 어디든지 인연을 따라 흘러가게 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본조(고려)의 사신이 송(宋)에 가 있다가 그 사실을 듣고 천화용(天花茸) 50벌과 저포(苧布) 300필로써 배를 호송하는 관원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부처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띄우게 하였다. 사신들이 부처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예종(睿宗)이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전각문을 자물쇠로 채워두고 밖에는 향을 피우고 등불을 밝혔다. 매번 친히 행차하는 날에는 전각문을 열고 예배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옮길 때에 내관이 바쁘고 당황하여 (부처님 어금니를) 잊고 챙기지 못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236) 4월에 이르러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의 승려 온광(蘊光)이 부처님 어금니에 예배하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때 백대(栢臺, 어사대) 시어사(侍御史) 최충(崔冲)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방(謁者房)을 불러 찾아보았으나 모두 어디 두었는지 몰랐다. 내신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1232)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 궁중일기)를 찾아보십시오.”라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일기에는 입내시(入內侍) 대부경(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백전을 불러 문책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집으로 돌아가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와서 살펴보고 좌번(左番) 알자(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가져다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대로 임진년(1232)으로부터 지금 병신년(1236)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상수(上守, 지키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렇다 할 결말이 나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슨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나서 불을 켜서 살펴보니 곧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이었다. 함은 본래 안쪽 한 겹은 침향합(沈香合)이고, 다음 바깥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白銀函), 그 다음 바깥 겹은 유리함(瑠璃函), 또 그 다음 바깥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써 각 폭은 서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유사(有司)가 의논하여 김서룡과 양전(兩殿)의 상수들을 모두 죽이고자 하니 진양부(晉陽府)가 아뢰기를,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모두 놓아 주었다. 다시 명하여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만들어 봉안하고 장사(將士)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 길일을 택하여 신효사(神孝寺) 상방(上房)의 온광(蘊光)을 청하여 무리 30명을 거느리고 궐 내로 들어와 재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게 하였다. 그날 입직(入直)한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 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 다방(茶房) 등이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사리를 머리에 이고 예를 올렸는데,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의 틈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나, 진양부가 백은합에 담아 모셨다. 그때 임금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처님의 어금니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다.
첫 번째는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두 번째는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어금니는 신령스런 물건이므로 잠깐 인연이 있는 평온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세 번째는 재물를 탐내는 소인이 그 함만 훔치고 어금니는 구렁에 버렸을까 의심하였고, 네 번째는 도적이 사리를 훔쳐갔으나 밖에 드러내놓을 수 없어서 집 안에 감추어 둔 것이 아닐까 하였더니 이제 네 번째의 의심이 맞았다.”고 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온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만수를 빌며 연정소비(煉頂燒臂, 촛불로 이마와 팔을 태우는 불교 기도 의식)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 분수승이었던 전 기림사(祇林寺)의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인데, (그때) 친히 본 바라 하여 나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의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낭패가 심함이 임진년(1232)보다도 더하였는데, 십원전의 감주(監主)였던 선사 심감(心鑑)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가지고 와 도적의 환란에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대궐에 알려져 그 공을 크게 포상하여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으니 지금 빙산사(氷山寺)에 주석하고 있다. 이 역시 그에게 친히 들은 바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560-566)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교 경론(經論) 1천 7백여 권을 실어왔다.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함을 실어 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하였다.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때인 태화(太和, 827-835)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입학승(入學僧)인 고구려의 승려 구덕(丘德)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서 맞이하였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입조사(入朝使) 원홍이 불경 몇 축을 가지고 왔으며, 신라 말기에는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오니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였다. 대송(大宋) 원우(元祐, 1086-1094) 갑술(甲戌,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의) 진영을 찬(讚)하길, 위대하셔라 시조스님. 빼어나셨구나 그 모습. 두 번이나 오월에서 대장경을 가져오셨네. 보요란 작호 주시고, 조서를 내려 네 번이나 책봉했구나. 만일 그의 덕을 말하라면 명월과 청풍이라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漢南)의 관기(管記) 팽조적(彭祖逖)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수운(水雲)의 고요한 절간은 부처님 계신 곳, 더욱이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명찰을 뉘라서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방에서 왔도다.
발문(跋文)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 남월(南越)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올 때 해풍이 갑자기 일어 작은 배가 물결 사이에 출몰하였다. 보요선사가 말하기를, ‘아마 신룡이 대장경을 머물게 하려는 것인가.’하고 드디어 주문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을 두루 살펴보며 안치할 만한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남을 보고 이에 수제자 홍경(弘慶)과 함께 절을 세우니, 불교의 동방전래는 실로 이때 시작되었다.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제(題)한다.”이 절(해룡왕사)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꽤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으니 그때 대장경을 따라와 머물렀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천성(天成, 926-930)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唐)에 건너가 역시 대장경을 싣고 왔으며, 본조(고려) 예종 때(1105-1122)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서역으로 유학가서 요나라 판본인 대장경 3부를 사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大安, 1085-1094) 2년(1086) 본조(고려)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때에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에 들어가 천태 교관(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밖에 서책에 실리지 않은 고승 신사(信士)들이 왕래하여 가지고 온 것은 자세히 적을 수 없다.
불교의 동방전래는 한 없이 넓었으니 경사롭다. 찬한다.“중국과 동방이 아득히 떨어져 있고, 녹원(鹿園)과 학수(鶴樹)로부터 2천 년이나 되었네. 해외로 전파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동국[東辰]과 서방[西乾]이 한 세상이 되었구나.”이 기록의 의상전을 살펴보면, 영휘(永徽, 650-655) 초년에 당(唐)에 들어가 지엄법사를 찾아보았다고 하나, 부석사의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618-626) 8년(625)에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출가하고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唐)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이르렀다가 어려움이 있으므로 돌아왔다. 용삭(龍朔, 661-663)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唐)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가아 배웠다.
총장(總章, 668-670)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함형(咸亨, 670-674) 2년(671)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서 장안(長安, 701-705) 2년 임인(壬寅, 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라고 하였다. 그러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도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부처님 어금니를 청하던 것은 신유(661)에서 무진(戊辰, 668)에 이르는 7,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고려)의 고종이 강화로 들어가던 임진년(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忉利天)의 하루 밤낮은 인간의 100년에 해당하는데, 의상이 처음 당(唐)에 들어가던 신유(661)로부터 고종 임진(1232)까지 계산하면 693년이고, 경자(1240)에 이르러야 비로소 700년이 되며 7일 기한이 찬다.
강화도로부터 나오던 지원(至元) 7년 경오(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선사 심감(心鑑)이 강화도로부터 나올 때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은 아마 부처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이 해 봄 강화도로부터 나오기 전에 (왕은) 대궐에서 모든 종파의 고승을 모아 부처님 어금니와 사리를 정성껏 빌었지만 한 낱도 얻지 못하였으니,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도 그럴 듯하다. 지원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 금탑(金塔)을 보수하였다. 왕(충렬왕, 재위 1275-1309)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같이 묘각사(妙覺寺)에 행차하여 대중을 모아 경찬법회를 하였다. 그런 뒤 앞서 이야기한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사의 수정염주, 여의주를 군신과 대중이 모두 떠받들어 경배한 후 함께 금탑 안에 넣어 두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례하여 이른바 부처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그 길이가 3촌(寸)쯤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이 기록한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lt;按&gt;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入唐 初至中國太和池邊 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lt;裟&gt;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何以無聊 師答 以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爲辭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


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


盧舍那 云卽見盧舍那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迦尊之道具也 汝善護持 又曰 汝本國艮方溟州界有五臺山 一萬文殊常住在彼 汝往見之 言已不現 遍尋靈迹 將欲東還 太和池龍現身請齋 供養七日 乃告云 昔之傳偈老僧 是眞文殊也 亦有叮囑創寺立塔之事 具載別傳 師以貞觀十七年 來到此山 欲覩眞身 三日晦陰 不果而還 復住元寧寺乃見 文殊云 至葛蟠處 今淨嵓寺是[亦載別傳] 後有頭陁信義 乃梵日之門人也 來尋藏師憩息之地 創庵而居 信義旣卒 庵亦久廢 有水多寺長老有緣 重創而居 今月精寺是也 藏師之返 新羅 淨神大王太子 寶川孝明二昆弟[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然此記下文云 神龍元年開土立寺 則神龍乃聖德王卽位四年乙巳也 王名興光 本名隆基 神文之第二子也 聖德之兄孝照名理恭 一作洪 亦神文之子 神文政明字日照 則淨神恐政明神文之訛也 孝明乃孝照一作昭之訛也 記云 孝明卽位 而神龍年開土立寺云者 亦不細詳言之爾 神龍年立寺者乃聖德王也] 到河西府[亦今溟州及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 世獻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 各領千徒 到省烏坪 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 密約方外之志 不令人知 逃隱入五臺山[古記云 太和元年戊申八月初 王隱山中 恐此文大誤 &lt;按&gt;孝照一作昭 以天授三年壬辰卽位 時年十六 長安二年壬寅崩 壽二十六 聖德以是年卽位 年二十二 若曰太和元年戊申 則先於孝照卽位&lt;壬&gt;辰 已過四十五歲 乃太宗文武王之世也 以此知此文爲誤 故不取之] 侍衛不知所歸 於是還國 二太子到山中 靑蓮忽開地上 兄太子結庵而止住 是&lt;曰&gt;寶川庵 向東北行六百餘步 北臺南麓亦有靑蓮開處 弟太子孝明又結庵而止 各懃修業 一日同上五峰瞻禮次 東臺滿月山 有一萬觀音眞身現在 南臺麒麟山 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 西臺長嶺山 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北臺象王山 釋迦如來爲首五百大阿羅漢 中臺風盧山亦名地盧山 毗盧遮那爲首一萬文殊 如是五萬眞身一一瞻禮 每日寅朝 文殊大聖到眞如院 今上院 變現三十六種形 或時現佛面形 或作寶珠形 或作佛眼形 或作佛手形 或作寶塔形 或萬佛頭形 或作萬燈形 或作金&lt;橋&gt;形 或作金鼓形 或作金鐘形 或作神通形 或作金樓形 或作金輪形 或作金剛&lt;杵&gt;形 或作金甕形 或作金鈿形 或五色光明形 或五色圓光形 或吉祥草形 或靑蓮花形 或作金田形 或作銀田形 或作佛足形 或作雷電形 或(如)來湧出形 或地神湧出形 或作金鳳形 或作金烏形 或馬産師子形 或雞産鳳形 或作靑龍形 或作白象形 或作鵲鳥形 或牛産師子形 或作遊猪形 或作靑蛇形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各庵修道 淨神王之弟與王爭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歲 時有五色雲 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 排列鹵簿 將邀兩太子而歸 寶川哭泣以辭 乃奉孝明歸卽位 理國有年[記云 在位二十餘年 盖崩年壽二十六之訛也 在位但十年爾 又神文之弟爭位事國史無文 未詳] 以神龍元年[乃唐中宗復位之年 聖德王卽位四年也]乙巳三月初四日始改創眞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 營搆殿堂 幷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以知識靈卞等五員 長轉華嚴經 仍結爲華嚴社 長年供費 每歲春秋 各給近山州縣倉租一百石 淨油一石 以爲恒規 自院西行六千步 至牟尼岾古伊峴外 柴地十五結 栗枝六結 坐位二結 創置莊舍焉 寶川常汲服其靈洞之水 故晩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珍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眞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寶川驚異 留二十日乃還五臺山神聖窟 又修眞五十年 忉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騰空十尺 常時護衛 所持錫杖 一日三時作聲 遶房三匝 用此爲鐘磬 隨時修業 文殊或灌水寶川頂 爲授成道記莂 川將圓寂之日 留記後來山中所行輔益邦家之事云 此山乃白頭山之大脈 各臺眞身常住之地 靑在東臺北角下 北臺南麓之末 宜置觀音房 安圓像觀音 及靑地畫一萬觀音像 福田五員 晝讀八卷金經仁王般若千手呪 夜念觀音禮懺 稱名圓通社 赤任南臺南面 置地藏房 安圓像地藏 及赤地畫八大菩薩爲首一萬地藏像 福田五員 晝讀地藏經金剛般若 夜(占)察禮懺 稱金剛社 &lt;白&gt;方西臺南面 置彌陁房 安圓像無量壽 &lt;及&gt;白地畫無量壽如來爲首一萬大勢至 福田五員 晝讀八卷法華 夜念彌陁禮懺 稱水精社 黑地北臺南面 置羅漢堂 安圓像釋迦 及黑地畫釋迦如來爲首五百羅漢 福田五員 晝讀佛報恩經涅槃經 夜念涅槃禮懺 稱白蓮社 黃處中臺&lt;眞&gt;(如)院中 安泥像文殊不動 後壁安黃地畫毗盧遮那爲首三十六化形 福田五員 晝讀華嚴經六百般若 夜念文殊禮懺 稱華嚴社 寶川庵改創華藏寺 安圓像毗盧遮那三尊及大藏經 福田五員 長&lt;閱&gt;藏經 夜念華嚴神衆 每年設華嚴會一百日 稱名法輪社 以此華藏寺爲五臺社之本寺 堅固護持 命淨行福田 鎭長香火 則國王千秋 人民安泰 文&lt;武&gt;和平 百穀豊穰矣 又加排下院文殊岬寺爲社之都會 福田七員 晝夜常行華嚴神衆禮懺 上件三十七員齋料衣費 以河西府道內八州之稅 充爲四事之資 代代君王 不忘遵行幸矣

오대산의 5만 진신(眞身)
산 중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다운 성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 진신(眞身)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638)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를 따른다.] 당(唐)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더니, 꿈에서 홀연히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게(偈)를 주었다. 꿈을 깨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라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한 승려가 붉은 비단에 금점(金點)이 찍힌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와서는 어찌하여 근심하는지를 물었다. 법사가 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偈)가 범어라 이해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것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


哆佉嘢)’는 자성(自性)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낭가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達


盧舍那)’는 곧 노사나불을 뵌다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지고 온 가사 등을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이것들은 본사(本師)이신 석가세존의 도구인데,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본국(本國) 동북방 명주(溟州) 내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거기에 머무르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한 유적들을 두루 찾아본 뒤 신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게(偈)를 풀이해 준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別傳,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가리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뵈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역시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후에 두타(頭陁) 신의(信義)는 범일(梵日)의 문인이었는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水多寺)의 장로인 유연(有緣)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형제가[『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보천․효명 세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다음 글에서는 신룡(神龍)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신룡은 곧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즉위한지 4년(705)인 을사(乙巳)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基)이며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왕(孝照王, 재위 692-702)의 이름은 이공(理恭), 또는 이홍(理洪)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政明)의 자(字)는 일조(日照)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신문왕 “정명”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은 곧 “효조” 또는 “효소(孝昭)”의 와전이다. 기록에서 효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또한 자세한 말이 아니니,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었다.] 하서부(河西府)[또한 지금의 명주(溟州)에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대령(大嶺)를 지나 각각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들어갈 것을 몰래 약속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고,[고기(古記,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는 “태화(太和) 원년(647) 무신 8월 초에 왕이 산속으로 숨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이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데, 효조왕 또는 효소왕은 천수(天授) 3년 임진(692)에 즉위하였는데, 그 해 나이가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702)에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성덕왕은 이 해에 즉위하였으니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고 말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년보다 빠른 것이니 이미 45년이나 지난 것으로, 곧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세였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취하지 않는다.] 시위(侍衛)하던 자들은 따를 곳을 알지 못하여 이에 서울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푸른 연꽃이 땅 위에 피어나니, 형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이를 보천암(寶川菴)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으로 600여 보 가니 북대(北臺) 남쪽 기슭에도 역시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각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南臺)인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
서대(西臺)인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大阿羅漢),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 진신(眞身) 등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의 진신(眞身)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寅時, 3시 30분-4시30분)에 문수보살이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上院, 상원사)에 이르러서는 36가지의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났는데,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寶珠)의 형태, 혹은 부처의 눈 형태, 혹은 부처의 손 형태, 혹은 보탑(寶塔)의 형태, 혹은 만불(萬佛)의 머리 형태, 혹은 만등(萬燈)의 형태, 혹은 금교(金橋)의 형태, 혹은 금고(金鼓)의 형태, 혹은 금종(金鐘)의 형태, 혹은 신통(神通) 형태, 혹은 금루(金樓)의 형태, 혹은 금륜(金輪)의 형태, 혹은 금강저(金剛杵)의 형태, 혹은 금옹(金甕)의 형태, 혹은 금비녀의 형태, 혹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의 형태, 혹은 오색원광(五色圓光)의 형태, 혹은 길상초(吉祥草)의 형태, 혹은 푸른 연꽃의 형태, 혹은 금전(金田)의 형태, 혹은 은전(銀田)의 형태, 혹은 부처의 발 형태, 혹은 뇌전(雷電)의 형태,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는 형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는 형태, 혹은 금봉황의 형태, 혹은 금까마귀 형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형태, 혹은 푸른 용의 형태, 혹은 흰 코끼리의 형태, 혹은 까치의 형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노는 멧돼지의 형태, 혹은 푸른 뱀의 형태 등이었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자 국인(國人)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넷을 산으로 보내 두 태자를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이때 오색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었다. 국인들은 구름을 좇아 모두 이르러서는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장차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천은 소리내 울면서 사양하므로 이내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기록에서 재위 20여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었을 때 나이인 스물여섯이 와전되어서일 것이다. 재위는 단 10년 뿐이었다. 또한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되는 해이다.]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였다. 대왕께서 친히 백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만들어 열고, 아울러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매일 읽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은 매 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의 창(倉)에서 조(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하도록 하여 항상 규칙으로 삼았고,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牟尼岾)과 고이현(古伊縣)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나무 숲 6결, 좌위(座位, 전답) 2결로써 장사(莊舍)를 세우도록 하였다.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서 멈췄다.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외기를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神)이 몸을 드러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菩薩戒)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지니,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난 뒤, 이내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을 들었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하였으며,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하였다. 지니고 있던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이것으로 종(鐘)과 경(磬)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하였고, 때로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成道)의 기별(記莂, 약속)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장차 입적하려고 하던 날, 뒷날 산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에는 (불보살들의) 진신(眞身)이 항상 거주하는 땅이다.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고,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인왕경(仁王經)』․『반야경(般若經)』․『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케 하며, 이름은 원통사(圓通社)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적색의 방위인 남대(南臺)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금강사(金剛社)라 칭하게 하여라.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臺)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수정사(水精社)라 칭하게 하여라.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인 북대(北臺)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고,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백련사(白蓮社)라 칭하게 하여라.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中臺)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文殊不動)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화엄경(華嚴經)』․『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게 하며, 화엄사(華嚴社)라 칭하여라.
보천암은 화장사(華藏寺)로 개창하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항상 『대장경』을 열람하게 하고, 밤으로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고,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라 칭하여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社)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들에게 명하여 오래토록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결사의 도회(都會)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을 행하게 하여라. 이상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河西府)의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으로써 네 가지 일에 드는 비용으로 충당하여라. 대대로 군왕들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처 ^ 참고문헌,
[大藏會, 1989, 『大藏經-成立と變遷』, 百華苑.
[경전의 성립과 전개』, 시공사.1996,
[李富華・何梅, 2003, 『漢文佛敎大藏經硏究』, 宗敎文化出版社.
[대장경의 조판」,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2003,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2003,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불교 # #본 #낭가사가낭() #오대산의 5만 진신() #대장경 [大藏經] #고려대장경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가 역시 일본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 원 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자속(卍字續)」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당시 유통이 되고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일본 국내 #필사본 대장경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국사(國史)』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唐) 중종(中宗)이 복위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였다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 #지식(知識) #영변(靈卞) #『화엄경(華嚴經)』을 매일 읽도록 하고 #화엄사(華嚴社)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 #매 해 봄 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 현의 창(倉)에서 조(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석씩을 공급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牟尼岾) #고이현(古伊縣) #좌위(座位, 전답) #2결로써 장사(莊舍)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 외기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 #수구다라니 #참 도리 #보살계(菩薩戒) 받기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 #오대산 #신성굴(神聖窟)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忉利天)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 #석장(錫杖)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종(鐘)과 경(磬)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 #문수보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成道) #기별(記莂, 약속) #보천 #입적 #산중에서 행하는 것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 #기록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 #불보살들 #진신(眞身)이 항상 거주하는 땅 #청색의 방위인 동대(東臺)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北臺) 남쪽 기슭 끝 #관음방(觀音房) #원상(圓像)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 #『금광명경(金光明經)』 #『인왕경(仁王經)』 #『반야경(般若經)』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밤으로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 #이름은 원통사(圓通社) #적색의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 #팔대보살(八大菩薩)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 #금강사(金剛社)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臺)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彌陀房) #원상의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그려 봉안 #복전승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法華經)』 #밤으로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염송 #수정사(水精社)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 #북대(北臺)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五百羅漢)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 #『열반경(涅槃經)』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 #백련사(白蓮社)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中臺)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文殊不動)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 #복전승 5명에게 #『화엄경(華嚴經)』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 #밤으로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 #화엄사(華嚴社) #보천암은 화장사(華藏寺)로 개창 #비로자나 삼존불 #대장경(大藏經)을 봉안 #복전승 5명 #대장경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고 #법륜사(法輪社) #화장사 #오대사(五臺社) #본사(本社)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 #복전승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하원(下院) #문수갑사(文殊岬寺)를 열어 결사 #도회(都會)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화엄신중예참(華嚴神衆禮懺) #37명의 재(齋)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 #하서부(河西府) #도(道)에 속한 여덟 주(州)의 세금 #대산오만진신조 #대장경과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이었음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요본() #대장경을 들여왔다고 한 것은 목판본 #『거란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