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5일 토요일

중국, 中华人民共和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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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中华人民共和国, (People's Republic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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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중국은?
중국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공화제를 따르고 있다. 수도는 베이징이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화폐 단위는 위안(元)이다.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中華人民共和國)이며, 흔히 중국(中国/中國)이라고 통칭해 부른다. 표준중국어 발음은 중궈(Zhongguo).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런민궁훠궈(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라고 발음한다.

'중국' 또는 '중화'라는 나라 이름의 중(中)은 중심, 화(華)는 문화라는 뜻으로 세계의 중심 또는 문화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큰 국토를 갖고 있는 중국은 동쪽으로는 북한,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 남쪽으로는 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과 인접해 있다.

동서길이는 5,250km, 남북길이는 5,500km이며, 국경선은 총길이 2만km이다. 남쪽으로는 베트남·라오스·미얀마, 남서쪽으로는 인도·부탄·네팔·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북쪽으로는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 및 러시아, 몽골과 접해 있으며, 둥베이[東北:옛 이름은 만주] 지역 남쪽으로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황해, 동중국해, 타이완[臺灣] 해협(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약 160km 너비의 해협), 남중국해로 둘러싸인 해안선은 1만 4,000km에 이른다. 1949년이래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를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중국은 중국대로 타이완을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 섬을 중국의 23번째 성(省)으로 보는 데에는 두 정부의 의견이 일치한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전국은 중앙정부에 직속된 31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성이 22개, 소수민족 자치구가 5개(네이멍구[內蒙古]·광시좡족[廣西壯族]·닝샤후이족[寧夏回族]·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시짱[西藏:티베트]), 직할시가 3개(베이징·상하이[上海]·톈진[天津]), 특별행정구가 2개(홍콩, 마카오)이다.

당대(唐代:618~907) 이래 현재와 같은 경계를 유지해온 성은 통일국가의 가장 중요한 면모로 존재했다. 중국의 성 하나가 다른 큰 나라 또는 중간 크기의 나라와 규모 및 인구가 비슷하며, 성은 국가 다음가는 행정단위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다.

중국이라는 단어는 시경에서 맨 처음 등장했다. 이 때 중국이라는 말은 주나라의 수도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중원(中原), 중화(中華)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중심 지역', '가운데 지역'이라는 의미인데, 주변에 비해 발달된 문명을 가졌던 자신들을 주변 '오랑캐'와 구분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왕조 이름이 국명처럼 쓰였고 중국이라는 명칭은 나라 이름보다는 지역 이름에 가까웠고, 중원의 동의어였던 것에서 의미가 넓어져 한족 정통 왕조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중국을 국명으로 최초로 내세운 민족은 만주족들이였는데, 만주족인 청나라가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 스스로를 만주어로 dulimbai gurun(가운데에 있는 나라)으로 칭한 것이 처음이다. 아편전쟁 이후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는 만주어가 아닌 한문으로도 스스로를 中國/中国으로 일컬었다.

중국이라는 명칭이 국명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아편전쟁 이후 근대화의 물결이 중국을 덮치면서 중국인들도 민족주의에 눈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왕조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국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린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中國/中国, 中華/中华와 'republic'의 번역어인 민국(民國/民国)을 조합한 중국 대륙 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中华民国)을 세웠고, 약칭으로 중국(中國/中国)이라 하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세운 오늘날의 중국은 기존의 중화(中華/中华) + 정치 체제를 이르는 '인민공화국'을 추가한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을 정식 국명으로 택하고 약칭을 중국(中國/中国)이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국공내전 이후 대만 섬에 있는 중화민국과 정통성 경쟁을 해왔고, 대만 섬의 중화민국을 정통 중국으로 보는 국가를 중심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중공(中共) 등 다른 명칭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국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통 중국으로 인정되어 대만 섬의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칭한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명목상 중국의 정통 국가임을 주장하는 중화민국(대만)에서는 이 나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중국 대륙(대륙), 중공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대만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현재에는 정치 성향에 따라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그냥 '중국'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에는 새로운 중국을 수립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신중국(新中國/新中国)이라 한 적도 있다. 대비되는 용어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중화민국을 이르는 구중국(舊中國/舊中国).

영어에서는 이 나라를 China(People's Republic of China)라 하고 다른 유럽 언어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명칭을 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진나라의 Chin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이것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 지역을 칭하는 이름인 Cīna가 되었고, 이 단어를 포르투갈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를 거쳐 수입해 전 유럽에 보급했다. 앞의 C가 Ch, C, K, S(파생으로 H 혹은 X) 등으로 오락가락하는 탓에 영어명은 '차이나'이지만 북유럽 언어나 그리스어에서는 '키나', '키나스'라고 하는 등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중국'이 국명으로 확립되지 않았던 근대 시절에는 이를 한자 음역하여 중국을 支那(지나-한국, 시나-일본)라 칭한 적이 있지만 중국인들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를 비하 명칭으로 받아들인다.

특이하게 러시아어에서는 Китай(키타이)라 하는데, 이는 본래 거란족을 의미한다. 근세 이전에야 러시아에서 중국이 워낙 멀다보니 동방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고, "동방에 키타이라고 날리는 애들이 있더라"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 동네를 뭉뚱그려 키타이라 부른 게 그 시작이다. 이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 언어에서도 중국을 키타이 비슷한 이름으로 칭하며, 그 외 다른 언어에서도 Cathay(영어) 등 거란의 이름에서 유래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이 좀 있다.

화교들이 많이 사는 동남아에서는 위의 경우와 달리 그냥 '중국'의 방언식 이름이 현지에서 중국을 이르는 명칭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어에서 중국은 Tiongkok이라고 하는데 중국을 이르는 민남어 발음에서 유래했다.

국기


오성홍기.

중국의 화폐지폐에는 마오쩌둥 주석을 비롯해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연환경지형
중국은 지형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서부지역은 평균고도가 해발 4,060m 이상인 티베트 고원, 동쪽과 남쪽은 벼랑을 이루는 고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서부지역도 대체로 고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광범한 분지가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부지역은 사실상 중국 전체의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곳곳에 고지가 흩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고도가 해발 450m를 넘는 곳이 거의 없다.

동부지역
둥베이 평원은 중국의 북동쪽에 있고 서쪽으로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북동쪽으로 샤오싱안링 산맥[小興安嶺山脈]으로 경계지어지며 총면적은 35만㎢ 가량 된다.
기본 조경은 삼림-스텝, 스텝, 초지-스텝, 경작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의 흑토지대에서는 광범위한 경작이 이루어진다.

둥베이 평원의 남동쪽, 한반도의 북쪽은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장광차이링 산맥[張廣才嶺山脈], 완다 산맥[完達山脈]들이 대산계를 구성하며, 평균고도는 460~900m이다.

굴곡이 심한 경사면은 삼림으로 뒤덮여 있고, 경작지는 곡상(谷床) 평탄면에 한정되어 있다. 화베이 평원[華北平原]은 면적에 있어서 둥베이 평원에 필적할 만하며 대부분의 지역이 고도 45m 이하이고 굴곡이 없이 편평하다. 황허 강[黃河], 화이허 강[淮河]이 황투 고원[黃土高原]에서 운반해온 막대한 양의 침전물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주변 지역보다 높은 지대를 이루며 흐르는 수로들은 그 자체로서 지역간 자연경계를 이루며, 강과 강 사이에 호수와 늪이 있는 저지대를 형성한다.

특히 낮고 편평한 지역에서는 지하수면이 1.5~2m가량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 초지 늪을 형성하며, 어떤 곳에서는 염류토(鹽類土)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했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중국 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경지면적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화베이 평원과 서부 사막지대 사이에서 황토로 뒤덮인 산지와 불모의 산맥들로 이루어진 황투 고원은 중국문명의 요람이다. 표면의 평균고도는 1,200~1,500m이다. 황토가 45~200m의 두께로 평원의 대부분을 덮고 있어서 지표수에 의해 쉽게 침식된다.

산둥[山東]구릉지대와 바다가 접한 면은 절벽과 바위들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이 구릉지대는 자오라이 평원[膠萊平原]에 의해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 지역은 비교적 낮아 평균고도가 450m 이하이며, 다만 몇몇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만 750m까지 올라가고 드물게 900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서쪽 지역은 동쪽보다 약간 높다. 가장 높은 산은 역대 왕조가 중원(中原) 지배의 상징으로 봉선(封禪)을 행했던 타이산[泰山:1,500m]이다. 화북과 화중의 자연경계를 이루는 것이 친링 산맥[秦嶺山脈]이다. 구조적으로는 쿤룬 산맥[崑崙山脈]의 서쪽 끝으로 산시 성[陝西省]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평균고도는 대략 2,600m이다.

이 산맥의 주요분수령은 북쪽에 있다. 산맥의 남쪽 사면은 매우 복잡한 수계(水系)에 의해 깊은 굴곡을 이루며, 이곳을 흐르는 물줄기는 모두 한수이 강[漢水]으로 흘러들어간다. 쓰촨 분지[四川盆地]는 양쯔 강[揚子江]상류를 따라 19만 4,000㎢ 가량 이어지며 북동쪽으로 비교적 평탄하지 않은 양쯔 강 중하류 평원과 접해 있다.

청두 평원[成都平原]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산이 많다. 경작지의 부족으로 구릉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경작할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침식 속도가 느리다.

중국 남동부의 경계지역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해안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바로 뒤 산맥들로 어우러진 배경이 아름답다(남동산맥). 중국 남동부는 일반적으로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뚜렷한 지형학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높은 산은 해발 1,500~2,000m로 솟아 있는 것도 있다. 짧고 흐름이 빠른 강들 때문에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들이 형성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좁게 이어진 평야가 주요거주지이며, 이곳에서 쌀이 생산된다. 후베이 성[湖北省]에서 이창[宜昌] 동쪽으로는 양쯔 강을 따라 너비가 일정하지 않은 평원들이 발견된다(양쯔 평원). 이곳이 바로 양쯔 강 중하류 평원인데, 평원은 삼각주지역과, 주요지류와의 합류점에서 특히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강이 운반해온 침전물들이 쌓여 이루어진 충적평야이다.

평원의 지표면은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계단을 이루는 하안단구를 형성했다. 장쑤 성[江蘇省], 후난 성[湖南省], 광둥 성[廣東省]과 광시좡족 자치구를 가로지르는 난산 산맥[南山山脈]은 여러 산맥들로 이루어졌으며, 주봉은 1,500m가량 된다. 산맥 남쪽 대부분의 지역도 산지이다. 주장 강[珠江]삼각주지역이 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넓은 평원이며, 화남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도,,,

홍콩을 비롯해 여러 보호만(灣)이 있는 해안지역은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남서부지역
윈구이 고원[雲貴高原]은 윈난 성[雲南省] 북부와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협곡 규모의 골짜기들과 깎아지른 듯한 산들이 특징적이다.

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있으며, 그중 뎬창 산[點蒼山]은 높이가 3,700m나 된다. 주요강이 흐르는 계곡에서는 고도가 400~500m 정도로 낮다. 동쪽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여 석회 조경 내에 와지·용식분지·복류가 형성되어 있다. 티베트 고원은 거대한 대산괴로 중국 전국토의 1/4을 차지한다.

비교적 편평한 고원 북쪽 부분은 창탕[羌塘]으로 불린다. 창탕 고원은 해발 4,500m에 동서로 1,300㎢가 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창탕 고원 북쪽 경계는 쿤룬 산맥으로 이어진다. 티베트 고원의 서쪽과 남쪽 경계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은 티베트와 네팔의 경계 부근에 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산이다. 차이다무 분지[柴達木盆地]는 티베트 고원에서 가장 낮고 가장 넓은 분지이다. 분지 북서부지역은 높이가 2,600~3,000m가량 된다.
분지 내에는 자갈·사토·점토사막·준사막·염류가 많은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북서부지역
타림 분지 티베트 고원의 북쪽에 있고 북쪽에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에는 파미르 고원, 남쪽에는 쿤룬 산맥 등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56만㎢의 면적에 이르는 이 분지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황폐한 불모지 가운데 하나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분지는 해발 760~1,400m이다. 타림 분지 북쪽에는 또다른 큰 함몰분지인 준가얼 분지[準噶爾盆地:190~450m]가 있다. 준가얼 분지는 면적 69만㎢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북동쪽으로 알타이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분지의 동쪽과 서쪽은 트여 있다.

주위를 둘러싼 산의 산록에는 오아시스가 이어져 있고, 분지 중앙에 스텝과 사막지대가 있다. 톈산 산맥의 중국 쪽은 평균높이 3,900~4,500m의 평행한 여러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맥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연결되며, 국경선으로부터 동쪽 방향으로 1,600km가량 이어져 있다.

서쪽이 가장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낮아진다. 강수량이 충분한 서쪽 지역에는 32km 이상 이어진 거대한 빙하가 형성되어 있다. 터커쓰 강[特克斯河]과 그 강의 지류들처럼 수량이 풍부한 큰 강들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고산성 목초지가 우세한 이 지역은 중국에서 가장 좋은 목초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천
중국에는 유역면적이 100㎢가 넘는 하천이 5만 개 이상으로, 매년 총 유거수(流去水)의 95%가 바다로 직접 흘러들어가고 약 5%는 대륙 내에서 소실된다.

주요하천으로는 황허 강, 양쯔 강시장 강[西江]등이 있는데, 모두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황허 강은 북쪽 쿤룬 산맥에서 발원하여 산둥 성 북쪽의 보하이 만[渤海灣:즈리 만(直隸灣)이라고도 함]으로 흘러들어간다. 양쯔 강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강이고 유출량이 9번째로 많은 강으로,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화중지방을 가로질러 흐르고 상하이 북쪽의 동중국해로 흘러들어간다.

세 강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시장 강은 윈구이 고원에서 발원하여 광둥 성에서 주장 강 삼각주 지역을 거쳐 남중국해로 흘러들어간다.

3개의 주요분수령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남서부에 있는데 이것은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가는 브라마푸트라 강, 살윈 강, 이라와디 강의 급수원 역할을 한다. 2번째로 큰 분수령인 북서부의 내륙고원은 중국 전체의 30%를 차지하지만 전체 유거수의 5%도 되지 않는다. 로프노르 호[羅布泊:타림 분지 동쪽 부분에 있는 호수]로 흘러드는 타림 강이 유일한 하천이다.

전국 총유거수의 85%가 전국토의 3/5을 지나 흘러들어가는 동쪽의 태평양 분수령은 중국의 수계(水系)를 지배한다. 동부지역은 북쪽의 황허 강과 남쪽의 양쯔 강 사이의 분수선에 의해 2부분으로 나뉜다.
토양

중국에서는 기후·식생, 그리고 바다와 떨어진 정도에 따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토양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부와 남동 해안지대는 습윤·준습윤 기후와 연관하여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고, 북부와 북서부의 내륙지방은 반건조·건조 기후와 연관하여 사막·준사막·스텝 지대를 이룬다. 이 2개의 광대한 토양대 사이에 점이지대로 삼림-스텝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삼림토가 점차로 초원토와 섞여 있다(토양학). 화북 해안을 따라 염류·알칼리 토양의 좁고 긴 지대가 있다.
이러한 토양은 좋지 않은 배수조건과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집약농경이 행해진 곳에서는 토양에 대한 반대작용이 촉진되어 질소와 유기물질이 보편적으로 부족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삼림 벌채, 과도한 목축, 목초지의 파괴로 인해 토양침식이 일어난다. 논에 물을 대고 침식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이곳의 농부들은 계단식 경지를 만들었다(계단경작).

기후
양쯔 강과 황허 강 경계 남동쪽의 기후는 온난하고 습윤하여 다른 지역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 경계는 대체로 0℃ 등온선과 일치하므로 1월평균기온은 양쯔-황허 경계선 부근에서 0℃이고, 남동지역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져 해안 근방에서는 22℃가량 된다. 매년 평균강우량은 남쪽이 762㎜(해안지역은 2,000㎜ 이상) 이상이고, 경계선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줄어들어 북동부와 허베이 평야[河北平野] 전체를 통틀어 254~762㎜ 범위 내의 강우량을 보인다. 무상(無霜) 기간도 경계선의 북쪽과 남쪽이 다르다. 남쪽지역은 240~365일 계속되고, 북쪽지역은 100~240일이며, 티베트 고원에서는 45일에 불과하다.

남동지역과 북서지역의 여름은 무더워 고원과 저지대에서 평균 24~29℃의 기온을 보인다. 북동부는 16~24℃로 따뜻하고, 남동부는 4~10℃로 서늘하다.

식물과 동물
북반구에서 나타나는 자연식생의 모든 유형이 중국에서 발견된다.

남중국해의 해안지역에는 맹그로브 습지가 있고 하이난 섬[海南島]과 윈난 성 남부에는 우림이 있다. 그밖에 열대와 온대 침엽수, 상록활엽수, 낙엽수가 주를 이루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사막·스텝·초지·사바나도 있다.

풍부한 식생과 다양한 지형으로 인해 중국에는 대단히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살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양쯔 강에 서식하는 철갑상어류[Pse-phurus gladius], 동부와 화중지방에 사는 양자강악어, 서부의 자이언트샐러맨더 같은 것들이 있다(프세푸루스 글라디우스). 자이언트팬더가 살고 있는 지역인 티베트와 쓰촨 지역은 가장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취락형태
산지와 구릉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 취락은 상당한 크기의 밀집 촌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큰 촌락들 역시 대부분 도시적인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심지어 수천 명 규모의 인구를 가진 촌락도 마찬가지이다. 화베이 평원에서는 촌락들이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도로나 오솔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화중과 화남의 향촌에는 논이 많다. 화중지방의 촌락들, 특히 양쯔 강 하류의 촌락들은 화북지방의 촌락들보다 규모가 크다(양쯔 강 삼각주). 이 촌락 내에는 약간의 점포들이 있는데 그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용하고 있다.

촌락 내의 교통수단으로는 주로 배가 이용된다.

도시의 모습은 근대 공장제 공업과 교통수단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크게 변했다(도시화). 공업과 광산업 중심지 주변에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다. 비교적 큰 도시들 가운데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 간쑤 성[甘肅省]의 성도인 란저우[蘭州], 네이멍구 자치구에 있는 바오터우[包頭]는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국민
중국은 많은 인종과 어족(語族)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 내의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한족(漢族)은 세계에서 단일민족으로서는 최대 규모(중국 인구의 92%)이다.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쓰는 언어는 크게 시노티베트어족·알타이어족·인도유럽어족·오스트로아시아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로, 가장 중요한 중국어 방언은 베이징 관화(官話)이다.

중국에서 중요한 종교는 불교·도교·이슬람교 및 로마 가톨릭교이며 그리스도교도의 수는 확실하지 않다. 한족 외에 만주족과 후이족도 베이징 관화를 사용하고 한자로 표기한다. 후이족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 이 종교에 귀의한 중국인들의 후손이다. 그들은 중국 내 여러 곳에서 한족과 섞여 살고 있는데 그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닝샤후이족 자치구에서만 후이족으로 구분되고 있다.

만주족은 스스로를 17세기에 중국을 침입한 만주 8기(八旗)의 자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들은 한족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화북과 둥베이 지역에 주로 살고 있지만 인민공사(人民公社) 이상의 단위에서는 전혀 독립된 자치지역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동북지역의 한인(韓人)들은 지린 성[吉林省]동쪽에서 자치현을 이루고 산다.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소수민족들은 남부와 남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좡족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로 구성된 소수민족이며 대부분 광시좡족 자치구에 거주한다. 그들은 주로 벼를 재배하여 생계를 잇고 애니미즘적인 형태의 종교를 신봉한다.

티베트족들은 티베트 고원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가금(家禽)도 사육한다. 티베트족의 종교는 17세기 이래 티베트 불교(라마교)였다. 먀오야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 민족들은 구이저우 성에 모여 있다(마요족). 그들 대부분은 한족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종족 특성들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구분할 수 있다. 알타이어족 계열의 소수민족은 북서부와 북부에 사는 소수민족들로 대표된다.

이슬람교도들인 위구르족은 투르크계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투르크제족). 그들은 주로 관개농업을 하며,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타림 분지와 준가얼 분지에 이어져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 이곳저곳에 분포되어 있다. 같은 이슬람교도인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내에 거주하는 투르크계 소수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 살던 민족의 후예이다.

그들은 목가적인 유목민들이며 아직도 부족의 흔적이 보인다. 몽골족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지만 대체로 네이멍구 자치구에 거주하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목축과 함께 농작물 재배를 하고 있다. 몽골족들은 대부분 티베트 불교도들이다. 중국에 있는 일부 소수민족의 언어는 시노티베트어족이나 알타이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서쪽 끝의 타지크족은 타지키스탄 국민과 관계가 깊고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군에 속한다.


중국의 민족과 언어 분포, 1990년대 중국의 민족과 언어 분포 지도,  Werran / wikipedia | Public Domain,

복잡한 자연환경 때문에 중국의 인구분포는 상당히 불균등하다. 서부와 북서부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중국 동반부와 대조를 이룬다. 2020년 기준 전체 인구는 14억 3,776만 6,636명이며 인구밀도는 148명/km²이다. 2019년 기준 출생률과 사망률은 각각 1,000명당 약 12.3명과 7.8명이었다. 자연증가율은 1000명당 3.6명이고 이민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다. 중국은 산아제한을 위해 한 자녀만 낳는 가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실시하여 한 자녀만 둔 가족에게는 주택·의료, 그밖의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우선권을 주었다.

1949년 이후 내륙지방과 변경지대에 이주를 장려한 중국 정부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인구이동). 이 기간에 이주해간 전체인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1980년까지 이주해간 인구가 네이멍구 자치구,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와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칭하이 성[靑海省]주민의 약 25~3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이주가 끝난 후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한인 비율이 전체의 10%에서 40%로 높아졌다.

대도시의 성장을 억제한 결과 대약진운동의 실패 후 2,000만 명의 도시민이 농촌으로 이주했고, 1968년 이후 10년 동안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1,700만 명의 청년들이 하방(下放)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다음 10년 동안 '하방 청년'들이 도시로 되돌아와 도시의 전체인구가 다시 크게 증가했다.

경제개요
중국은 1970년 후반 이래 소비에트식 경제체제에서 탈피하여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를 도입하여 주로 정부주도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 특히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내경제를 세계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키며 무역대국으로 부상했다. 201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약 11조 3,847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교역규모는 3조 9,586억 달러로 수출이 2조 2,766억 달러, 수입이 1조 6,821억 달러이다. 중국의 산업별 비중은 서비스업 48.4%, 제조업 42.7%, 농업 8.9%로 이루어져 있다.

자원
중국의 금속 자원으로는 무엇보다도 세계 매장량의 약 3.5%를 차지하는 철광석, 약 2%를 차지하는 구리·납·아연, 매장량이 풍부한 안티몬·크롬·코발트·텅스텐 광산을 손꼽을 수 있다. 1980년 중반에 확인된 화석연료 매장량을 보면 석탄 26억 6,000만t(세계총매장량의 3%), 천연 가스 4,240억㎡, 재생탄 990억t으로 모두 합쳐 세계전체매장량의 11% 이다.

중국의 수력발전 잠재력은 세계 최고로 평가된다. 수력발전 용량의 대부분은 남서부에 치중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석탄 공급이 빈약하지만 에너지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첫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북동지역의 잠재력은 매우 적다. 겨울 동안은 유량이 줄어 많은 발전소가 정규 용량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가동되는 반면 여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전력 생산이 자주 중단된다. 이와 같이 수력발전이 남서부와 북동지역에 치중되어 있어 중부지역에는 전력이 부족하다. 중부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발전이 정체된 중부 및 서부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93년부터 싼샤[三峽]댐 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에 완공했다. 다목적 댐으로 건설된 싼샤 댐은 전 세계 수력발전소 중 발전량이 제1위이다.

농업
중국 전체면적의 10%만 경작이 가능하다. 이 가운데에서도 절반을 조금 넘는 지역에는 관개시설이 되어 있지 않고, 나머지는 대체로 논과 관개답으로 나뉜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약 80%의 인구가 농촌에 살았으며, 그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으나, 2000년대 들어 농촌 인구는 68%로 줄었다. 공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도시에서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게 되자 중국 정부는 노동력이 공업 부문으로 이동하도록 정책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그 결과 매년 이농 인구가 6,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주요 쌀 생산국의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수확량이 많은 것은 쌀이다. 다른 주요 작물로는 밀·고구마·옥수수·감자·사탕수수·콩 등이 있다. 수수·사탕무·종자면·양배추·기장·토마토·평지·땅콩·보리 등도 상당량 재배되고 있다. 목초지는 중국 전체면적의 약 30%에 달한다. 또한 중국은 돼지·닭·달걀의 주요 생산국이며, 상당량의 양·소도 길러 소가죽·양모·비단이 많이 생산된다.

중국은 해양과 민물에서 오랜 어로(漁撈)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획량의 65%는 태평양에서, 나머지는 내륙 하천에서 잡은 것이다. 중국은 상당량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고, 1970년 초에 비해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는데도 여전히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매년 삼림 벌채량의 1/3가량이 산업용으로 사용되지만 나머지는 연료로 사용되고 있어 목재의 일부는 수입된다. 삼림의 무차별적 파괴를 우려하여 재조림 정책이 정력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여전히 삼림자원은 빈약한 실정이다. 중국에서 사용되는 목재는 대부분 헤이룽장 성, 지린 성, 쓰촨 성, 윈난 성에서 생산된다.

공업
중국의 전반적인 공업 생산은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측면에서 공업은 다른 모든 분야를 능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금속공업과 기계설비 부문은 가장 중점적으로 육성되고 있다. 철강회사는 2000년 현재 바오산철강이 1,700만t을 생산하여 세계 9위인 것을 비롯해 25위 안에 모두 3개의 중국 회사가 포함될 정도로 발전해 있다. 주요 제조업 분야로는 비료·농약·섬유·정유·선철·식물성기름·원당·플라스틱·전자제품 등이 있다. 또한 정부 당국이 화학산업에 주력하여 화학비료·플라스틱류·합성섬유의 생산이 크게 신장되었는데, 화학산업이 성장한 결과 중국은 질소비료의 세계 주요 생산국이 되었다.

소비재 부문에서는 직물과 의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의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고 있다. 화학섬유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어 직물 분야는 전체 공업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컴퓨터·정보통신 분야의 첨단기술을 보유한 외국기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산업구조도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자본·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너지 생산은 급속히 신장되고 있으나 여전히 수요에는 못 미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에너지 가격을 낮게 책정한 정책 때문인데 이 정책으로 인해 산업시설의 보존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석탄은 중국 에너지 소비의 약 70%를 충족시키고 있다. 인적이 닿지 않는 북동지역과 앞으로 중요하게 될 해안 석유층에는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다. 그러나 아직은 석유생산의 약 절반가량이 북동지역의 대유전인 다칭[大慶]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상하이와 광저우[廣州] 지역에는 핵 발전소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탄화수소가 풍부한 셰일층에서 추출하고 생산하는 천연가스인 셰일가스 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셰일가스의 세계 최대 매장지역 중의 하나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쳐 내륙지방의 공업을 육성하려 했으나 여전히 공업시설의 상당부분은 중국 동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 한 곳에서 중국 전체공업생산량의 10%가 생산되고 동해안 지대에서 전국 공업생산의 60%가량이 생산된다. 이러한 개발의 지역편중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낙후된 서부지역을 개발하려는 대단위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금융
금융기구는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주요한 재정 및 금융 통제기구는 국무원이 통제하는 중국 런민은행[人民銀行]과 재정부이다. 서구의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이 담당하는 여러 기능들을 맡고 있는 런민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통화를 조절하며 예산집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런민은행은 대외무역과 기타 해외업무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지만 이러한 기능들을 실제로 담당하고 있는 곳은 많은 해외지사들을 가지고 있는 중궈은행[中國銀行]이다.

중국의 경제개혁은 은행의 경제적 역할을 크게 증대시켰다. 기금을 늘리고 이것을 기업과 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여 건설을 촉진시키고 경제발전을 유도했다. 해외에서 자본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게 되었다. 중국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연합(UN)의 몇몇 프로그램에서 차관을 도입했으며, 홍콩을 해외자본의 공급원이자 자본 유입의 주요한 통로로 이용해왔다. 그러나 국영기업의 부실에 따른 금융기관의 동반부실 문제와 WTO가입에 따라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될 외국 금융기관과의 경쟁 등 중국 금융기관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기구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주도하여 출범시키고 위안화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역
1980년대까지 중국의 대(對)공산권 무역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았다(국제무역). 70% 이상이 비공산권 선진국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비공산권 개발도상국과 행한 무역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들어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가 몰락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으로의 귀속 이전까지 주요 무역 파트너였던 홍콩은 국내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식량수급 부문에서 본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타이완[臺灣]도 중국의 주요 무역대상국의 하나이다. 주요 수입품은 산업설비와 자본재, 특히 기계류와 자동차 등이며, 주로 미국·일본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수입의 거의 절반, 수출의 약1/4 정도가 동·동남아시아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수출품의 경우는 약 70%가 공산품들이며 그 중 섬유·의류 제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밖의 수출품으로는 농산품·화학제품 및 콜타르·석유를 포함한 추출성 제품 등이 있다. 2001년 WTO가입과 함께 중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2001년 WTO가입과 함께 중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경제운용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며, 1953년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시작으로 5년마다 경제발전계획을 발표하고 있다(경제계획). 이는 중국 경제정책의 최상위 강령으로 전체적인 방향성과 중점사업을 제시한다.

2016년 3월 발표된 제13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서비스업 비중 확대, 도시화율 상승, 고부가 제조업 육성을 위한 기초여건 강화를 통한 성장전략을 제시했다.

1980년대에 몇몇 중요한 개혁조치들이 취해져서 중앙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고 사기업에 주도권이 주어지고 시장 전략이 채택되었다. 도시 경제개혁의 기본 추진방향은 중국이 국제경제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하는 것, 기업들이 손익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 국가가 자원의 분배를 지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감독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 투자대상을 야금업이나 기계설비업에서 경공업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개인의 노력에 대한 물질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 경쟁적 사기업 부문의 발전을 허용하는 것 등이다. 1980년대 농촌개혁은 토지를 재임대하여 토지 집중을 합법화하는 것, 농업에서 국가가 할당한 생산 책임량을 계획에 따라 수매하는 체계를 없애는 것, 농민들에게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사적 고용기회를 찾아보도록 권장하는 것 등이다.

이 모든 개혁에서 공통되는 점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거대한 정부 관료기구에 의해 경제를 운용해나가는 것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1989년말 무렵부터 잠시 동안 중앙집중적인 계획과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기업에 중점을 두기도 했으나,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장경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개혁조처에는 국영기업의 부실과 이에 따른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한몫을 했다. 그 동안 국가의 보호를 받아온 국영기업은 경쟁력이 떨어져 매출이 줄고 부실화되었다.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경쟁 원리를 도입했다. 2001년 장쩌민 주석이 개인 기업가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에서도 보여지듯이, 중국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기업가를 우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향진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향진기업이란 농촌의 발전을 위해 농촌지역에 세워진 기업을 뜻한다. 향진기업은 초기에는 국영기업의 하청업체 역할을 수행했으나 개혁·개방 이후 자율성을 바탕으로 국영기업과 경쟁하며 이윤을 창출하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1992년 현재 향진기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은 중국 전체 노동력의 17.9%, 농촌 노동력의 23.8%를 차지하고 있고, 향진기업의 생산량은 중국 전체 생산량의 31.6%, 농촌지역 생산량의 69.6%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정부 통제하에 있는 전중국노동조합연맹은 40만 개 이상의 노동조합을 포괄하고 있고,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서구식 노동조합처럼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관해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당을 보조하고 생산을 촉진시키는 의무를 지고 있다.

운송
주로 증기기관을 사용하고 있는 철도는 화물수송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수송능력이 아직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특히 석탄 선적에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모든 철도는 철도부와 지역행정기관을 통해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둥베이 지역의 주요 철도망과 만리장성(萬里長城) 안쪽의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전에는 교통이 불편했던 일부 농촌지역에 새로 철도를 놓았다. 예를 들어 간쑤 성 란저우에서 서쪽으로 차이다무 분지의 유전까지 철도가 놓였다. 또한 고속철도망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 300여개 주요도시를 통과하는 32개 지선을 건설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톈진 노선의 개통과 함께 고속철 시대에 돌입했다.

간선도로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을 갖는 국가·성·구 도로, 현이나 공사(公司)에서 운영하며 2차적 중요성을 가진 지방도로, 공장·광산·국영농장·산림관리기구·군대에서 운영하는 특수 목적의 도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10만km가 넘는 내륙수로는 수상운송에 이용되는데 그 대부분이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 편중되어 있다. 지류까지 합하면 양쯔 강이 전국 수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수송화물량으로는 하천에 의한 총수송량의 1/3을 차지한다. 여름에 양쯔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 하구에서 충칭[重慶]까지 최대 5,000t가량의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중국에서 2번째로 중요한 강인 시장 강에는 1,000t가량의 배가 우저우[梧州]까지 들어간다. 헤이룽 강[黑龍江], 쑹화 강[松花江], 우수리 강은 지류를 합쳐 총연장 2만km의 수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 유일의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수로인 대운하는 하이허 강[海河], 황허 강, 화이허 강, 양쯔 강 및 첸탕 강[錢唐江] 분지들을 지나 베이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총 1,760km의 길이로 이어져 있다. 대운하는 오랫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이용되지 못하다가 다시 수상 운송에 이용되게 된 것인데, 지금은 석탄과 식량 등을 남북으로 대량 수송할 때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해항운은 크게 북부 해역과 남부 해역의 두 항해구역으로 나뉜다. 북부 해역은 상하이[上海]를 운항 중심지로 하면서 샤먼[廈門]에서 북쪽으로 북한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남부 해역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샤먼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19세기초부터 주요 항구로서 자리잡아온 상하이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상징이 된 도시로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중국 민간 항공은 주로 항로를 확대하는 것,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들 및 먼 변경지대, 내륙지방 등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 경제 부문의 필요성에 비추어 특수 목적의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 대규모 수송기의 수를 늘리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이전에 이미 개설된 중국과 러시아·북한·몽골·베트남·미얀마를 연결하는 국제항로 외에 중국의 주변국들과 미국·서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에도 항공 수송로가 잇달아 개설되고 있다.

1949년 직후에는 전신·전화 등의 통신시설이 유선이었으나, 1970년대에는 무선통신의 사용이 증가되었다. 극초단파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송신도 이제는 흔히 사용된다. 대도시들에는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무선 텔레타이프라이터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에 와서 중국의 통신서비스는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홍콩의 첨단 통신 시스템에 힘입어 더욱 향상되었다. 1990년대 들어 시장 개방이 가속화되고 사업상의 통신 수요가 급증하면서 통신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014년 기준 중국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6억 4,200만 명(모바일 이용자 수는 5억 5,7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이며, 전자상거래는 매년 GDP 성장률의 2~3배에 이르는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 규모는 2015년 기준 6,720억 달러의 규모로 전년대비 42.1를 특히 중국의 전자상거래는%의 성장을 보였다.

정치와 사회
중국은 공산주의 공화국이다. 중국공산당은 주요 정치·경제·문화 기구를 장악하고 중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의사결정권은 6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있다. 상임위원 6명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210명의 위원과 138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에서 선출된다. 주요 당 간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 고위직을 점하고 있다. 1982년 중국 헌법에 따르면 최고 정부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중국의 헌법상 최고 국가권력기관. ⓒ Thomas.fanghaenel / wikipedia | CC BY-SA 3.0

2,900명 이상의 대표로 구성되는 이 입법기구는 성·자치구·직할시·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며, 5년 임기가 법률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전인대에서는 상임위원회를 선출하여 상설기구로 하고 의전상 중국을 대표할 주석을 선출한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전인대는 국무원 총리를 임명하며, 국무원 총리는 다시 전인대가 중국의 집행기관인 국무원의 위원들을 지명하는 일에 조언한다. 국무원에는 총리, 12명 이상의 부총리, 50명 이상의 각부 장관과 각 위원회 주임들이 포함된다. 정부 행정은 모두 중국공산당이 표방하는 정책에 부합되어야 한다.

1970년대 후반이래 온건 실용주의파가 주도하는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확대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중국의 국가주석은 5년이 임기이며 연임이 가능한데, 1대 주석인 마오쩌둥(毛澤東) 이후 류사오치(劉少奇), 리셴녠(李先念), 양상쿤(楊尚昆),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로 이어져 왔으며, 7대 주석은 2013년부터 임기를 시작한 시진핑(習近平)이다. 2018년 3월 11일 5차 개헌안에서 국가주석의 연임 조항이 삭제되면서, 시진핑 주석은 2022년으로 예정되었던 두번째 임기를 넘어 장기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0년대 내내 중국은 러시아에서 만들거나 설계한 낡은 장비들을 중국에서 설계하고 서구의 기술로 만든 장비들로 교체함으로써 군대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핵무기를 갖추었다. 거의 300만 명의 병력을 가진 인민해방군은 중국 육·해·공군을 모두 포함한 단일한 조직체이다. 전국의 군대는 7군구(軍區)와 20개 이상의 성군구(省軍區)에 배치되어 있다. 문화대혁명(1966~76) 이전에 존재하던 사법기관이 현재 부활되었다. 사법부는 다시 국무원의 관할을 받게 되었고, 대행 기관들과 각급 법원이 재건되었다.

다양한 법과 법전들을 채택함으로써 이러한 체계의 법적인 틀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고 정치지도자들의 의도가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이 사법기구들의 실제 기능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다.

정부는 농촌에 의료시설을 제공하고 공중위생을 정비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특별히 강조 해왔다. 도시의 의사들에게 농촌으로 내려가 그곳의 인민들에게 봉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농촌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보건과 위생에 대해 강조한 결과 콜레라·페스트·장티푸스·성홍열 같은 질병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에는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혈압·암과 같은 병들이 건강상의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중국인의 평균수명은 1970년대의 60세에서 1997년 70세로 늘어났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데올로기와 정치훈련에 역점을 두었던 중국의 교육체계는 이제 과학과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취학연령의 약 95%가 6년제 초등 의무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곳을 졸업한 학생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중등교육을 받는다.

교육의 중요성이 최근 다시 강조되고 있지만 2013년 기준 문맹률은 약 39% 수준이다. 1985년에 정부는 1990년까지 의무교육을 3년 연장하고, 장학금을 수여하며, 다른 나라와 학문적인 교류를 증진시키는 내용을 포함한 개혁안을 발표했다. 2006년에는 의무교육 무상화정책을 농촌지역부터 시행하기 시작하여 2008년에 도시지역까지 전면 확대했다.

베이징에 있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직접 운영하는 6개의 대학교는 중국 고등교육체계에서도 최고의 교육기관이다(고등교육). 그중에는 비(非)기술계로는 최고인 베이징대학교·푸단대학교[復旦大學校]·칭화대학교[靑華大學校]가 있다. 이밖에 모든 성에는 성립대학교(省立大學校)를 비롯해 여러 기술·종합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그리고 홍콩에는 역내(域內)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홍콩대학교가 있다. 중국의 초등학교를 나온 학생 가운데 0.2%도 안 되는 인원이 정규대학에 들어간다. 1977년 이후 전국적인 시험을 치러 입학을 결정하고 있으며, 학비는 대개 국가에서 지급하고 있다.


베이징대학교(Peiching University)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국립 종합대학 ⓒ Asadal / wikipedia | CC BY-SA 3.0

문화
중국에는 다양한 인종의 문화가 섞여 있어 생생한 민속유산을 남기고 있다.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전에 한족 마을에서는 종교 의례가 많이 행해졌으며, 특히 단오절·음력설 같은 명절의 행사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 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례들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몽골족들은 봄에 환생을 의미하는 '사강사르'라는 명절을 지키며, 음력 12월 23일에는 불의 신에게 대희생제를 올린다. 후이족은 라마단 1개월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의 단식을 철저히 지킨다. 티베트족들은 티베트력 마지막 달 29일에 악령을 쫓아내는 '구톨'(dgugtor)이라는 축제를 벌인다.

중국의 문화유산 중 중요한 것으로는 문자·음악·무용·연극 등이 있다. 음악 및 그에 관련된 의례는 봉건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위계에서 지배자의 궁전 내 활동의 구조를 제공한다. 옛날 종교무용에서 기원한 연극은 악령을 쫓아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을 환기시키고 수확·사냥·전쟁 등을 하러 나가는 준비로서 행해졌다. 현재 상연되는 월극과 경극은 역사적·현실적 주제들을 기교 어린 노래와 춤으로 구성한 원대(元代)의 가극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중국의 중요한 공예는 도자기·보석세공·금속세공(금은 상감과 칠보세공을 포함)·직물·칠기 등이며, 모두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에 바르는 유약은 중국에서 BC 2000년말 이전에 발전했고, 도자기는 6세기 이래로 발전했다. 명대 도자기는 흰 바탕에 청색무늬를 그린 '청화백자'가 특징적인데, 꽃이나 추상적 무늬에서 회화적 무늬로 점차 변했다. 청동주물은 중동지역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BC 1000년경에는 이미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기술은 고대 서구의 기술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청동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회화와 서예는 전통적으로 엘리트들의 영역이었다.

6세기 이래 여러 미술가들의 이름이 역사기록과 거듭되는 모사품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 산수화가 활발하게 그려지던 시기는 송대(宋代:960~1279)부터 명대(明代:1368~1644)까지이다. 1949년 이후 중국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농촌과 공장의 모습들을 그렸다. 조소와 조각이 시작된 것은 주대(周代:BC 1111경~255) 또는 그 이전부터이다(조각술).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특히 조소는 한대(漢代)에 불교가 도입되고 육조시대(六朝時代:220~589)와 당대에 널리 확산되면서 크게 진작되었다.

부처와 보살의 상(像)과 벽면 부조가 수천 개씩 만들어져 간쑤 성 둔황[敦煌]과 같은 특출한 유적지의 동굴벽화들과 함께 중국 종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중국미술).

중국문학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학문적인 유산이다. 이것은 문화접촉을 통해 한국·일본·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문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서체가 전해져 후에 이들 나라의 문자로 변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필가들이 한자를 사용해 많은 글을 짓기도 했다.

BC 500년경에 만들어진 시선집인 〈시경〉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로서 305개의 구전가요와 의례용 시가들을 싣고 있다. 당대는 한시의 황금기라고 하며, 이때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 배출되었다. 후대에 중요한 산문작가로는 나관중(羅貫中)·포송령(蒲松齡)·오경재(吳敬梓) 등이 있다. 특출한 20세기 작가로는 여성 문제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과 평론들을 지은 딩링[丁玲]과 현실주의 소설가 마오둔[茅盾]이 있다(→ 중국문학).

역사


베이징 원인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927년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서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시기가 3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중국문명의 요람은 황허 강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최초의 중국문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물들이 허난[河南]·산둥·산시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최초의 왕조는 (殷:또는 商, BC 18~12세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기반 위에 선 왕조로, 서쪽으로는 산시[山西], 남쪽으로는 양쯔 강, 북쪽으로는 허베이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대에 들어와 달력이 사용되었고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청동기 제조술이 발달했다. 그 기원이 불분명한 는 BC 1111년에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주는 그뒤 여러 차례의 군사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정복에 의해 획득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봉건제).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지웠다.

의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가 이어져 민심이 불안정해진데다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주 왕실은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날과 같은 위세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동주는 약 500년간 존속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또한 상공업도 발달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상과 문화가 꽃피었다. 공자(BC 551~479)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그후 중국문명의 규범이 된 사회적인 개념을 제정했다.

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秦)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했다.
시황제(始皇帝)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군현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고, BC 214년에는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대에 설정된 중국 국경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신성한 국경으로 여겨졌다.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國運)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등의 연합세력에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BC 206). 항우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한 유방(즉 高祖)은 BC 202년 (漢)을 세웠다.

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한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BC 141~87)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관학으로 정해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그후 2,000년간 중국 각 왕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대에는 종이와 지진계의 발명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AD 220년 한이 붕괴하자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뒤따랐는데, 이 시기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또는 육조시대라고 일컫는다. 군벌들이 들끓었고 화북지역은 다수의 비한족(非漢族) 침입자들에게 유린당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남부와 북부에 전파되었다.

수(隋:581~617)에 의해 중국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수는 중요한 행정개혁을 이루었으나 무모한 군사적 원정을 계속하여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났다. 618년 수를 이어 이 들어섰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 투르판, 철륵(鐵勒),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보기드문 위세를 과시했다.

후기에 들어 환관의 전횡 등으로 국력이 쇠하고, 크고 작은 병란·민란 들이 일어났다.

이 붕괴되자 또다른 분열기(907~960)가 시작되어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0년 마침내 이 70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국초 이래의 문치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쯔 강 이남에 자리잡은 남송은 국토가 북송때보다 반으로 줄었으나 경제력면에서는 북송시대를 능가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당했다.

은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의 4한국(四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고 또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황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으나, 중국의 문명·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원은 계속해서 한족을 차별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98년 만에 타도되었다(1368).

도 원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전제적인 명대에 들어와 반외세 감정이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상 중국은 세계 각지의 세력들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의 길을 걸었다. 사적인 해외무역과 해외여행은 엄금되었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은 만주와 중국의 문명을 함께 섞어가면서 그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는 중국에게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정부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의 반외세·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 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국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1920년대에는 장제스[蔣介石]의 노력하에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곧 공산당 세력과 갈라섰고 이들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 성에서 북부 산시 성에 이르는 9,700km의 대장정(1934~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을 대신하는 협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와 연합국 군대와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은 세력을 재조직하여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그결과 1946~49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국공내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혁명의 열기를 부추기고자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결과 혼란과 폭력만이 뒤따라 과격파들은 조락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장칭[江靑]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으며, 4인방은 1981년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온건한 지도노선 아래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급진주의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다.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비극적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당시 총리이던 자오쯔양[趙紫陽]을 퇴진시키고 장쩌민[江澤民]을 등용했다. 장쩌민은 1989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3년 국가주석직에 차례로 오르는 등 덩샤오핑의 후원 아래 국가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당국은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하는 한편, 그 해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해 대외 이미지 재고에 힘썼다.

그리고 1992년에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단순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고 이듬해에는 이 사건을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및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으며, 그 해 7월 1일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는 홍콩이 1842년 난징[南京] 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1898년 조차된 지 99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초대 행정장관에 퉁치화[董建華]를 임명했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마카오가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유럽 국가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1년 WTO 가입과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 유치를 이루어냄으로써 강대국으로 급속히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사).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역사적 변천고대
중국은 고조선을 포함하여 그 나라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전국시대(BC 475~221)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BC 194년 한의 제후국인 연(燕)의 위만(衛滿)이 조선에서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 나라는 그후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무제는 그곳에 4군을 설치했으며, 그중 낙랑군만이 4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중국에서 후한 이후 삼국·남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발전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세력을 견제했으며, 북방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다졌다.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수와 제휴했다. 백제는 왜(倭)와 교류하면서 수와는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삼국은 중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수·당의 침략을 받았다. 수 문제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멸망했다. 당 태종은 645년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으나, 고구려는 안시성(安市城)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후 고종은 663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 후 당이 고구려 옛 땅에 대한 야심을 보이자, 신라는 676년 당의 군사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삼국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중국 등지에 파견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신라의 교류가 매우 성하여 중국 산둥 반도 등의 지역에 신라인 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겼으며, 그밖에 신라소(新羅所)·신라원(新羅院)·신라관(新羅館) 등이 세워졌다.

고려시대
중국이 5대(五代)의 혼란을 거쳐 송·원으로 발전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흥기했다. 중국이 5대10국의 혼란을 겪을 당시에 세워진 고려는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중국식 관제와 교육제도를 확립했다. 또한 문화의 유입 등을 목적으로 5대의 나라들과 교류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그 이후의 송과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는 북방에 있는 거란·여진 등의 민족과도 지속적인 교섭을 가졌다. 13세기초에 들어서자 몽골족이 점차 강성해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족은 1231년 1차 침략을 시작으로 1258년 양국이 강화를 맺을 때까지 수차례의 공격을 감행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변발 등의 풍속이 성행했다. 원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했다. 문화적으로는 원으로부터 주자학·화약제조법·인쇄술·목화씨 등이 전래되었다.

조선시대
중국의 명·청대는 조선시대에 해당된다. 조선 초기에 원만하지 못했던 명과의 관계는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대주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조선에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이 지원병을 보내면서 숭명사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1616년 여진족인 누르하치[奴兒哈赤]는 후금을 세웠다.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을 통해 서양의 학술과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가 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청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개항 이후
19세기말 일본은 운요 호[雲揚號]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청은 조선에게 조미수호조약을 맺게 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청은 그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뒤 청일전쟁(1894~95)에서 청이 패배하여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 되었다.

결국 청에 이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행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본토 및 만주 등지에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독립운동은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 관계 인물들의 지지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조선의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쑨원이 죽은 뒤 광둥 정부는 국민정부로 바뀌었다. 국민정부는 그후 좌·우파로 분열되었는데, 조선의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았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45) 등에서 중국의 반일감정이 조선의 독립운동과 맞물려 중국은 조선의 독립지원을 공개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김구는 난징[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 단체들은 중일전쟁 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 3당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요구하여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연안파[延安派]는 따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을 배경으로 항일전에서 활동하여 그 세력을 넓혔다. 종전 후 한국 광복군은 해산되어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각기 개인적으로 귀국하여 건국 이후 국군으로 개편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정부수립 이후
중국은 1949년 10월 정권을 수립한 이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대국가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러므로 한국과의 외교는 단절되었으며, 북한 위주로 한반도 정책을 결정했다. 1973년 한국은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원칙으로 하는 6·23선언을 발표하여 중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을 체결하는 등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되자 중국의 대외정책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979년 1월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우호관계조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한 그해 7월 구체적으로 한국과 체육 교류의 용의가 있음을 나타냈다. 1980년 4월 대한민국 올림픽 위원회(KOC)에 대해 언급했다. 1982년 8월에는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식량위원회(WFP) 세미나에 한국이 참가했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초의 접촉은 1983년 5월 중국의 민항기가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하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중국 당국 관계자를 파견하여 사태수습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이는 국제민항기구 또는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을 무시한 것으로, 중국측은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중국과 한국의 교류는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의 접촉은 주로 체육·관광·친척방문 등의 교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4년 2월 중국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를 위해 한국 선수가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1984년 3월 자오쯔양 총리는 친척상호교류를 허용했다. 그후 두 나라 이산가족들의 초청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84년 4월 중국 농구선수단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같은 해 10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후 두 나라는 체육교류를 통해 상호 접촉을 확대시켰다. 중국은 1986년 9월 20일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으며, 1988년 9월 17일에는 서울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은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다. 경제교류도 활발히 전개되어 1985년 한국은행은 대중국 투자를 허가했으며, 1988년 10월 중국 광저우 교역회는 한국기업을 초청했다. 1989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해 7월에는 베이징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1988년 10월 한국은 중국 관광금지를 해제했으며, 1989년 6월 한중 해운 정기 직항로가 개통되었다. 같은 해 8월 중국은 한국의 상하이 취항을 허가했으며, 1990년 중국행 우편 직송이 개시되었다.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중국은 한국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 설치를 허가했고, 1990년 10월 20일 한중 무역대표부 상호설치합의서에 조인했다. 1991년에 들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한층 발전했다. 그해 1월부터 중국은 한국 기자에게 비자를 발급해주었으며, 1월 30일 KOTRA는 베이징에 대표부를 개설했다.

그해 4월 2일 중국 류화추[劉華秋]외교부 부부장이 이상옥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해 10월 최초로 한중 외무장관회담을 가졌으며, 11월 제2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1992년 2월 민간차원의 한중 무역협정이 발효되었으며, 4월 제3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그동안 간접교역과 여러 방면에 걸친 교류의 확대는 양국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적·정치적인 관계 수립에 있어서는 제약이 많았으며, 중국과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한이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주요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중 수교 공동성명
①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 국민의 이익과 염원에 부응하여 1992년 8월 24일자로 상호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한다.
② UN 헌장의 원칙들과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평등·호혜·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선린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에 합의한다.
③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④ 양국간의 수교가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
⑥ 1961년의 외교관계에 관한 비협약에 따라 각자의 수도에 상대방의 대사관 개설과 공무수행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대사를 상호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한국과 중국 양국이 공동 서명해 발효시킨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대동성명'은 반세기에 걸친 양국간 반목의 역사를 끝맺는 역사적인 문서로 평가받았다. 실제적으로 한중 수교는 양국간 경제협력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확대·발전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해 교역·투자·산업협력 등 전 분야에 걸쳐 큰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국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수교 3일 후인 8월 27일 주중 한국대사관과 주한 중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고, 그해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방문해 양상쿤[楊尙昆]국가주석과 제1차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해 10월 30일 정부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2월 4일에 투자보장협정이 이루어졌다.

1993년 6월 26일 해상운송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19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참석을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 간의 제2차 한중 정상회담이 시애틀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공식 방중으로 제3차 한중 정상회담과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열렸으며, 그해 6월 6일에 한중 산업협력위원회 설치협정이 체결되었다. 11월 14일에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양국 정상간의 회담이 자카르타에서 열려 북한 핵문제 등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5년 11월 13일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한으로 한반도 내 긴장완화 및 경제협력 방안 등에 관한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1996년 11월 16일 세계식량정상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한 이수성 총리와 리펑 총리 간 한중 총리회담이 있었다. 그해 11월 24일과 이듬해 11월 24일에는 APEC 참석을 계기로 한 한중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와 밴쿠버에서 각각 열렸다.
이후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으로는 1998년 11월에 김대중 대통령 국빈 방중, 2003년 7월에  노무현 대통령 국빈 방중, 2009년 8월에 이명박 대통령 국빈 방중, 2013년 6월에 박근혜 대통령 국빈 방중, 2014년 7월에 시진핑(習近平) 주석 국빈 방한, 2017년 12월에 문재인 대통령 국빈 방중 등이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한국은 2019년 1월 기준 중국의 수입 1위, 수출 3위, 교역대상국 3위(홍콩 제외)이다. 1997년 12월 말 기준 중국 내 한국 상사 수는 총 1,349개이며 2017년 누계 기준 중국에 진출한 한국 상사 수는 26,846개에 이른다. 1996년 기준 대한수입액은 113억 7,706만 8,000달러이고 대한국 수출액은 85억 3,856만 8,000달러를 기록했는데 2018년 기준 대중수출액은
1621.2억 달러, 대중수입액은 1064.9억 달러로 한국의 최대 수출·수입 교역대상국이다.

한국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이고, 수입품은 반도체, 컴퓨터이다. 경제·기술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대(對)중국 무상원조는 1994년과 1995년에 각각 220만 달러와 394만 달러를 기록했다. 1968년부터 2018년 9월까지 한국의 대중국 투자 규모는 누계금액 829억 달러였으며, 중국의 대한국 투자 규모는 2011년부터 2017년까지 109.7억 달러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나광저우, 베이징, 선양, 우양, 청두, 난징, 상하이, 선전, 정저우, 충칭, 톈진, 다롄, 시안, 창사, 칭다오, 항저우에 무역관을 설치했다. 2012년 5월에 협상 개시된 한국과 중국의 자유무역협정은 총 14차례의 협상을 거쳐 2015년 12월에 정식 발효되었다.

이밖에도 과학·기술 협력 협정(1992), 무역협정(1992), 경제·무역 및 기술 협력공동위 설립 협정(1992), 투자보장협정(1992), 해상운송협정(1993), 우편·전기통신 분야 협정(1993), 환경협력협정(1993), 문화협정(1994), 산업협력위원회설치협정(1994), 한국기상청·중국기상국간 서울·북경 간 기상통신회선설치 협정(1994), 이중과세방지협정(1994), 항공협정(1994), 원자력협정(1995), 세관협력협정(1995) 등이 체결되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양국 간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부 차원으로는 1993년에 베이징, 2007년에 상하이, 2018년에 홍콩에 한국문화원이 개원해 중국 현지에서 한국문화를 알리고 양국 예술인의 인적교류를 활성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는 서울, 대구, 광주에 중국문화원이 개원되어 있어 중국의 문화·예술 홍보 및 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중국에는 2,548,030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207,777명의 중국 및 345,318명의 한국계 중국인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에 한글학교 68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의 한글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인적 교류 또한 활발하여 2017년 현재 방한 중국인 416.9만 명, 방중 한국인 386.4만 명에 이르며, 2018년 4월 기준 한국 내 중국 유학생 68,537명, 중국 내 한국 유학생 63,827명에 이른다.



중국과 북한의 국기 ⓒ Marques/Shutterstock.com |

1949년 북한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50년 10월 중국은 6·25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비밀군사협정을 통해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후 1950, 1960년대에 상호관계는 때로 멀어지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관계의 틀은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반소(反蘇) 노선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전략적인 지위가 점차 중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북한의 대남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지원을 활발히 전개하여 1971년 8월 무상군사원조협약 등을 체결했다.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 및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1975년 4월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8년 화궈펑과 덩샤오핑이 각각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의 대외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한국에 대한 기존의 인식변화로 과거에 쌓아온 북한과의 관계가 변화되었다. 중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입장과 상반된 것이었다.

1992년 8월 한국과의 수교로 중국은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한중 수교로 북한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지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계속적인 영향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조율해 나갔다. 한중 수교 이후에도 북한·중국 간 교역은 꾸준하게 유지되었으며,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한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제재 움직임이 거세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중국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등 북한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중국의 인구
현재 중국의 인구는 13억 4천만 명 정도로(2012년 현재), 6년 9개월이면 1억의 인구가 늘어나는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구는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한 자녀 갖기 정책'을 시행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도시에서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한 자녀밖에 가질 수 없고, 노동력이 필요한 농촌에서만 첫째가 딸일 경우 둘째까지 낳을 수 있다. 만약 법을 어기고 둘째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를 호적에 올릴 수 없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못한 아이를 흑해자(黑孩子), 우리말로 '검은 아이'라고 한다. 반면, 도시에서 외동으로 과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을 소황제(小皇帝)라 부르는데, 이들은 사회 적응력이 떨어져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의 자랑, 진시황릉
중국의 넓은 땅을 최초로 통일해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의 진시황릉은 개인의 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이 있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만리장성,

진시황릉의 병마용갱(俑坑 : 인형이 묻힌 땅굴)은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왕이 죽으면 사람을 같이 묻는 풍습 대신, 군사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을 묻어 시황제를 호위하게 한 것이다.

8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고 그 생김새가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발굴은 진행 중이며, 전문가들은 완전 발굴까지 1백여 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거대한 크기의 병마용갱은 섬세하고 사실적인 모습의 진용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청동 마차: 사진의 청동 마차는 귀인이 탄 것으로 추정되며, 금·은으로 장식된 섬세한 마구가 특징이다.

국명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 : PRC)

수도
베이징(北京) (인구 2,172만 명)

면적
약 960만km2 (한반도의 44배)
남북길이 : 남사군도(南沙郡島)(23̊N)~흑룡강(黑龍江)(53̊ 32́ N), 5,500km
동서길이 : 파미르 고원(高原)(73̊E)~우수리강(江)(135̊E), 5,200km

국경선 총길이
22,800km
한국, 러시아, 몽골, 중앙아 3국,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 14개 국가와 육지 접경
강 길이 : 장강(양자강)[長江(揚子江)] 6,300km, 황하(黃河) 5,464km

인구
약 13억 8,271만 명(대만, 홍콩, 마카오 제외) (중국국가통계국 2016)
연평균 인구증가율 약 0.56%
농촌인구 : 약 5.89억 명, 도시인구 : 약 7.93억 명

민족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1억 1,379만 명, 총(總)인구의 8.5%)으로 구성(’10 인구조사)
조선족(朝鮮族) : 약 183만여 명으로 소수민족의 1.6%

언어
한어(漢語, 중국어) 사용(단, 방언(方言) 및 소수민족언어 존재)

중국의 정치
정체
노농(勞農)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 (’82년 개정헌법 제1조 규정)

권력형태
실질적 공산당 일당독재(一黨獨裁)(형식상 8개 정당 존재)

주요지도자
당(黨)총서기 겸 국가주석 : 시진핑(習近平, Xi Jinping)
당(黨)중앙 및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시진핑(習近平, Xi Jinping)
국무원(國務院) 총리 : 리커창(李克强, Li Keqiang)
국가부주석* : 리위안차오(李源潮, Li Yuanchao)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상무위원회 위원장* : 장더장(張德江, Zhang Dejiang)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회 주석* : 위정성(俞正聲, Yu Zhengsheng)
외교부장 : 왕이(王毅, Wang Yi)
* 2018.3월 경 퇴임 예정이었다, 2020년 4월 현재 재임중

건국일
1949.10.1

유엔가입일
1971.10월(안보리 상임이사국)

중국의 군사
2017년 국방예산
약 1,503억 불

군사력(정규군) (’15년)
총 230만 명
ㆍ 육군(陸軍) : 156.7만, 해군(海軍) : 23.5만, 공군(空軍) : 39.8만, 로켓군 : 10만, 전략지원부대 : 미상
※ 무장경찰 : 약 66만 명 별도

중국의 경제(’16년)
국내총생산(GDP)
약 11조 1,991억 불(World Bank)(’16년)

경제성장률
6.7%

소비자물가 상승률
2.0%

대외무역액
3조 6,855억 불
ㆍ 수출 2조 2,766억 불, 수입 1조 5,879억 불(흑자 5,097억 불)

외환보유액
3조 105억 불

외국인 직접투자
1,260억 불(외국인 투자건수 27,900건)

재정규모
재정수입 159,552억 위안, 재정지출 187,841억 위안(28,289억 위안 적자)(중국국가통계국)

성 급(省級)(총 33개)
ㆍ 
4개 직할시(直轄市)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충칭(重慶)
ㆍ 5개 자치구(自治區) 내몽고(內蒙古), 신장웨이우얼족(新疆維吾爾族), 서장(西藏), 광서장족(廣西壯族), 영하회족(寧夏回族)

22개 성(省)화북구(華北區) : 하북성(河北省), 산서성(山西省)
  서북구(西北區) :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동북구(東北區) : 요령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화동구(華東區) :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 강서성(江西省), 복건성(福建省), 산동성(山東省)
  중남구(中南區) : 하남성(河南省),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광동성(廣東省), 해남성(海南省)
  서남구(西南區) : 사천성(四川省), 운남성(雲南省), 귀주성(貴州省)
  ※ 중국(中國)은 대만(臺灣)을 23번째 성(省)으로 간주
ㆍ 2개 특별행정구 : 홍콩, 마카오

주 급(州 級)(총 334개)
7지구(地區), 30자치주(自治州), 3맹(盟)(내몽고 內蒙古), 294시(市)
※ 자치주(自治州) · 맹(盟) · 시(市)는 독립행정구이나, 지구(地區)는 독립행정구가 아니며, 다만 현급(縣級) 행정구들을 관할

현 급(縣 級)(총 2,876개)
985시할구(市轄區), 364현급시(縣級市), 1,356현(縣), 117자치현(自治縣), 49기(旗), 3자치기(自治旗), 1특구(特區), 1임구(林區)

※ 縣(현)은 한국의 군(郡)에 상당
향(鄕), 진(鎭)(총 39,862개) ※ 향(鄕)은 한국의 면(面)에 해당, 진(鎭)은 읍(邑) 또는 시(市)의 구(區)에 해당

유의사항
  • 본 내용은 2017년 11월 기준으로 작성된 중국 개황 외교간행물 정보입니다.
    2017년 11월​ 이후 수정 된 내용 중 반영되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 있으며,
    마지막 수정 정보는 마지막 수정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최근 중국 개황 정보는 외교부 자료실 "외교간행물"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 참고문헌,
[중국 - 아시아의 심장 (중국에서 보물찾기, 2004., 곰돌이 co.,)
[게티이미지 (Getty Images)
[중국 개관 [中國, China] (중국 개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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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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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 #청동 마차 #금·은으로 장식 #섬세한 마구가 특징 #중국의 자랑 #진시황릉 #중국의 넓은 땅을 최초로 통일해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의 진시황릉 #개인의 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 #중국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공화제를 따르고 있다. 수도는 베이징이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화폐 단위는 위안(元)이다 #중국' 또는 '중화'라는 나라 이름의 중(中)은 중심 #화(華)는 문화라는 뜻 #세계의 중심 #문화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큰 국토를 갖고 있는 중국 #동쪽으로는 북한 #북쪽으로는 몽골 러시아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네팔 #남쪽으로는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과 인접해 있다

2020년 4월 23일 목요일

하동군 북천면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 매년 열리는행사,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하동군 북천면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 (매년 열리는행사),

군은 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를 앞두고 16일 오전 현장 간부회의를 축제장 현장에서 개최하고 축제 준비사항과 꽃 포장 등에 대한 현장점검을 벌였다고 밝혔다.

이날 현장점검은 유례없는 가을 장마로 많은 비가 내리고 제13호 태풍 ‘링링’의 상륙에 따른 작물의 생육상황과 축제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개선·보완하고자 실시됐다.

간부회의에는 군수를 비롯한 전 과 소장과 북천면장, 옥종농협 북천지점장, 하동군 이장협의회장, 하동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영농조합법인 관계자 등이 함께 참석하여 성공적인 축제 개최를 다짐했다.


군수는 회의를 마치고 축제장 포장을 둘러보면서 꽃의 개화시점, 이색작물 관리, 둑방길 쉼터 조성, 꽃탑 등의 시설물 보완, 탐방로 황토포장, 주차장 정비, 직전 소류지 주변 정비 등 축제 준비 전반에 대해 꼼꼼히 점검했다.

코스모스 단지,

군수는 여러 가지 시설 설치도 중요하지만 기본이 되는 꽃밭 관리에 중점을 두고 작물 및 포장 관리 등으로 남은 기간 전체 포장에 대해 관리를 철저히 하고 편의시설도 빠짐없이 준비할 것을 당부했다.


‘느끼세요 가을향기, 즐기세요 꽃천지’를 슬로건으로 개최되는 이번 축제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17일간 북천면 직전리 일원 42만㎡의 들판에서 개최된다.


이번 축제에서는 백일홍, 천일홍, 국화 등의 이색 꽃밭 단지 및 핑크뮬리 등의 볼거리 작물 단지를 확대 조성하고, 왕고들빼기, 고구마, 옥수수, 해바라기를 심어 수확과 함께 김치 담그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가을꽃 잔치 ‘하동 북천 코스모스·메밀꽃축제’가 가을이 깊어가는 내달 하순 화려한 막을 올린다.

하동군은 '느끼세요 가을향기, 즐기세요 꽃천지'를 슬로건으로 한 올해 코스모스·메밀꽃축제는 내달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17일간 북천면 직전리 들판에서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42만㎡(약 12만 6000평)의 드넓은 들판을 수놓을  북천 코스모스·메밀꽃축제는 북천 들판에 경관작물 코스모스·메밀을 심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도농 교류 활성화를 통한 농가소득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2007년 처음 시작했다. 

코스모스·메밀꽃 축제는 2019년 경남도 문화관광 우수축제로 선정되면서 다른 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축제는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축제는 행사기간 태풍 '콩레이'의 영향에도 국내·외에서 67만명의 관광객이 찾아 직접 판매 23억원을 포함해 지역경제에 미친 직·간접 파급효과가 163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코스모스단지,

군은 이번 축제에 40여개의 무대공연·전시·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를 마련해 관광객을 맞는다.

우선 다양한 재배방법을 시도하는 600m의 희귀박 터널은 조롱박, 뱀오이, 도깨비 방망이 등 20여종의 희귀박과 호박을 심어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올해는 이색작물인 핑크뮬리와 백일홍, 천일홍, 해바라기, 체험용 작물단지를 새로 조성해 볼거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탐방로엔 톱밥을 깔고, 울타리와 안전펜스에는 애기별꽃을 심어 자연친화적인 축제장으로 만든다.

주무대에서는 특이한 장기를 가진 관광객 초청 공연을 비롯해 국악공연, 초청가수 공연, 노래교실 공연, 동아리 공연, 색소폰 연주, 관광객 노래자랑 등 매일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져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송소희님의 명품국악공연까지!!

매밀단지,

하동북천 코스모스메밀꽃영농조합법인 대표는 “남은 기간 꽃밭 관리를 철저를 기해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꽃 축제를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옛 경전선 철길의 레일바이크는 철로변에 가을 고향역의 정서를 간직할 수 있도록 코스모스를 심어 기차와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간이역의 추억과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수세식 화장실·원두막 등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행사장 내 10여 곳에 2700대의 주차공간을 마련한다. 

축제장 인근 이병주문학관에서는 9월 27∼29일 3일간 국내·외 유명작가와 문인·평론가 등이 대거 참석하는 국제문학제가 열린다. 주무대 인근 주차장에서는 행사기간 호박 관련 음식과 경연대회 등 단위행사를 개최하는 호박축제도 열려 볼거리가 한층 많아진다.

주무대에서는 특이한 장기를 가진 관광객 초청 공연을 비롯해 국악공연, 초청가수 공연, 노래교실 공연, 동아리 공연, 색소폰 연주, 관광객 노래자랑 등 매일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져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대부분 재능기부 형식으로 공연하고 각종 동호회의 공연발표 장소로도 활용되며, 어린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출연진도 다양하다.

축제의 자립기반 조성을 위해 재배 농가와 하동북천코스모스·메밀꽃축제 영농조합법인이 파종에서부터 꽃 단지 관리, 행사 추진에 관련한 사항까지,

하동의 특산물 재첩·녹차 체험, 황금 코스모스를 찾아라, 코스모스 요정 선발대회, 코스모스 엽서 보내기, 농산물 경매, 메밀묵 빨리 먹기, 꽃물들이기 등 체험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준비된다.

군은 "축제의 자립기반 조성을 위해 재배 농가와 하동북천코스모스·메밀꽃축제 영농조합법인이 파종에서부터 꽃 단지 관리, 행사 추진에 관련한 사항까지 도맡아 이번 꽃잔치도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동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가 17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6일 폐막됐지만 꽃밭은 12일까지 계속 개방할 계획이다./하동군/

‘느끼세요 가을향기, 즐기세요 꽃천지’를 슬로건으로 한 제13회 하동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가 17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6일 폐막했다.

이번 축제는 9월 가을장마와 세 차례의 태풍 등 악조건 속에서도 꽃 단지 조성에서부터 파종, 꽃밭 관리에 이르기까지 행정과 영농조합법인, 지역주민들의 긴밀한 협력으로 신속하게 복구해 관람객을 맞았다.

특히 올해는 축제 시작 전인 9월 초 유례없는 가을장마로 인한 많은 비와 제13호 태풍 ‘링링’의 상륙으로 코스모스·메밀꽃 단지의 쓰러짐과 낙화 피해가 컸다.

그리고 축제 개막과 함께 상륙한 제17호 태풍 ‘타파’와 행사 1주일을 남기고 상륙한 제18호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회복돼 가던 작물의 추가 쓰러짐과 낙화, 행사장의 각종 설치물이 훼손되는 피해를 봤다.

축제 후반에 들어서면서 쓰러진 코스모스의 지속적인 추가 개화로 한때 방문객이 예년 수준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방문객은 쓰러진 코스모스와 메밀꽃을 보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보였다.

주행사장 인근에서 열린 호박축제는 슈퍼호박 경진대회 입상작 전시와 함께 다양한 캐릭터 조형물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호박식혜 등 호박관련 먹거리를 선보여 방문객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축제를 주최·주관한 문면근 북천코스모스·메밀꽃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올해는 기상 여건 악화로 정상적인 축제가 진행되지 못해 아쉽다”며 “내년에는 더욱 알찬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가 개화가 이뤄지는 9일까지 농특산물 판매 부스를 철거하지 않고 운영하고 12일까지 꽃밭을 개방한다”며 “축제장을 미처 찾지 못한 관광객은 관람을 바란다”고 덧붙였다.

 2019 하동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 제13회 하동북천코스모스메밀꽃축제 

하동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영농조합법인은 지역농민들이 땀흘려 소중히 가꾼 코스모스 메밀꽃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체험거리, 전시행사로 꾸며진 제13회 하동북천코스모스 메밀꽃축제는 더욱 알찬 볼거리와 다양한 즐길거리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느끼세요 가을향기, 즐기세요 꽃천지!"라는 슬로건으로 준비된 축제에 찾아주시는 관광객 여러분을 북천지역 농민들은 시골의 순수한 인심으로 맞이하겠습니다. 

기간
2019년 9월 20일~10월 6일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1길 7

문의
010-8456-8987

이용요금
무료
* 희귀박터널 2,000원

홈페이지

제13회 하동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

제13회 
www.cosmosfestival.co.kr

진작 올린다고하다가 느졌지만 지금 올려봅니다, 즐겨 봐주시면 좋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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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유^^ 음악으로 밑에 클릭하세요,

다른 영상보기, (지나간 스포츠 역전의 거순간 영상, 동물, 자연,,),

***youtu.be/mxijRqfQh60/
***youtu.be/808W9lbHv1c
***youtu.be/KlNGTrued4c
***youtu.be/2J47TYTWo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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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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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 [Africa] 독립한 지 수십 년 !~ ,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아프리카 , [Africa]
독립한 지 수십 년 !~ , 
아프리카는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이다. 동반구(東半球)의 남서부에 있으며 남북 양반구에 걸친 세계 제2의 대륙.

면적 약 3,036만㎢, 인구 약 6억 8천 명(1994), 인구밀도 22.5인/㎢이다. 동쪽으로 인도양, 서쪽으로 대서양, 북쪽으로 지중해에 면한다. 대륙으로서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16·17세기 네덜란드의 항해자들이 이곳이 독립된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이다. 아프리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리비아라고 부른 지중해 남안(南岸)에서 원주민이 사용한 지명에서 비롯된다.

포에니전쟁 무렵의 로마인들은 지중해 대안(對岸)에 있었던 카르타고의 시민을 아프리라고 부르고 카르타고 정복 후에 이 지방을 아프리카주(州)라고 하였다. 아랍인들이 진출한 뒤부터 아랍어로 ‘이프리키아’ 라는 지명은 보다 넓은 지역(지금의 북서 아프리카)을 가리켰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로 불리는 지역은 역사와 함께 확대되어 왔다.

대륙 한가운데 적도가 지나고 있어서 무더운 지역이 많아.아프리카에는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 있는데,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부 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로 나뉘어.북부 아프리카는 백인종이 대부분이고, 이슬람교를 주로 믿어. 반면 중남부 아프리카는 흑인종이 대부분이고, 민족과 언어, 종교와 문화가 다양해.아프리카는 자원은 풍부하지만 산업 발달은 더딘 편.

독립의 시대가 시작되고 50년이 지났지만 아프리카는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한 상황이다. 오랜 전부터 빈곤 순위 1위로 꼽혀온 아프리카는 현재 다른 지역보다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의(932) 평균 1인당 소득은 세계 빈곤 순위 2위인 남부 아시아의 1인당 소득의 3분의 1 수준이다. 현재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의 1인당 소득은 1980년 당시보다 낮고, 일부 국가의 경우 1960년 당시보다 낮아진 상황이다.

아프리카의 총인구 8억 8,000명 가운데 절반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아프리카 경제의 총생산은 4,200억 달러로 세계 총생산의 1.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멕시코보다 낮은 규모다.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겨우 1.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 미만이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1970년대 이후로 1인당 투자 및 저축이 줄어들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취학률이 계속 하락하고 문맹이 여전히 일반화되어 있는 지역이다.
아프리카 위치, 
아프리카가 지닌 경제 발전의 잠재력은 사욕을 추구하는 지배 엘리트 계층의 약탈적인 정치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조장하는 이들의 행동으로 번번이 침식당해 왔다. 나이지리아 학자 클로드 아케는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와 발전》이라는 저서에서 “경제 발전에 실패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경제 발전이 정부 현안에서 최우선 순위에 놓인 적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다”라고 밝혔다.

수십 년에 걸친 실정과 부패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이 국가들에는 공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 아프리카 정부들과 이를 이끌고 있는 흡혈귀 같은 정치인들은 국민을 후원(942)하고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국민들 사이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가난한 살림살이에 추가로 얹어진 무거운 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아시아나 남미에서는 성인 8명 중 1명이 문맹인 데 비해 아프리카에서는 5명 중 2명(여성은 2명 중 1명)이 문맹이다. 또한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대 수명이 낮아지고 있는 지역이다. 국제연합 개발계획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개발지수 하위 25개국이 모두 아프리카 국가다. 또한 아프리카는 세계화를 주도하는 다국적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과 기간시설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화 과정으로 인해 계속 피해를 입고 있다.

에이즈의 재앙 또한 아프리카의 위기를 더욱 힘겹게 만들고 있다. 세계 인구의 10퍼센트가 거주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세계 에이즈 감염 인구의 70퍼센트가 몰려 있다. 높은 유아 감염률을 보이고 있으며, 2004년까지 약 2,000만 명이 에이즈로 사망했다. 바이러스 감염자는 3,000만 명에 이르며 연간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추가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는 에이즈의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다. 보츠와나는 에이즈 감염률이 세계 최고로, 총인구 160만 명(933) 가운데 37퍼센트 이상이 바이러스 감염자이며, 15세에서 49세까지 연령 집단의 감염률은 무려 40퍼센트다.

2010년이 되면 보츠와나의 기대 수명은 27세로 떨어지고 아동 인구의 절반이 에이즈 고아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남부 아프리카에 속하는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 모잠비크, 스와질란드도 비슷한 상황이다. 에이즈는 가족 구조를 해체할 뿐 아니라 정부의 공공서비스까지 무너뜨린다. 예컨대 교사들의 사망률이 충원 교사가 양성되는 속도를 앞지르는 식이다.

*사막이 자꾸 커지고 있어/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왜 반듯반듯할까?/ 아프리카의 종족들/ 인종 차별의 아픔을 딛고!

① 이집트
공식 명칭 : 이집트 아랍 공화국
수도 : 카이로
면적 : 100만㎢
언어 : 아랍 어
종교 : 이슬람교
② 나이지리아
공식 명칭 :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
수도 : 아부자
면적 : 92만㎢
언어 : 영어, 하우사 어, 요르바 어
종교 : 이슬람교, 크리스트교
③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 : 프리토리아
면적 : 122만㎢
언어 : 영어, 아프리칸스 어
종교 : 크리스트교,기타
④ 케냐
공식 명칭 : 케냐 공화국
수도 : 나이로비
면적 : 58만㎢
언어 : 스와힐 어, 영어
종교 :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사막이 자꾸 커지고 있다,
사헬은 아랍 어로 ‘가장자리’라는 뜻으로, 사하라 사막의 남쪽 주변 지역을 일컬어. 사헬 지역은 원래 사막과 초원의 중간 지대였어. 하지만 최근 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농경과 가축 사육이 늘면서 초원이 파괴되어 사막이 되고 있어. 그래서 사헬에 위치한 모리타니, 말리, 니제르, 차드, 수단 등의 나라에서는 물과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왜?
식민지는 강대국이 차지하여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곳을 말해. 아프리카 국가들 대부분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이 있어. 당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나눠 가지면서 아프리카의 민족과 언어, 문화와 종교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역을 직선의 경계로 나누었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특히 1960년대에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했어. 하지만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르완다처럼 다른 민족이 하나의 나라로 묶여 있는 경우, 민족 간 갈등이 심각하게 발생했어.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지도,
아프리카의 종족?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종족은 아프리카의 피그미 족이야. 피그미 족 남자의 평균 키는 겨우 144cm 정도에 불과하지. 또 동부 아프리카에는 용맹한 전사들로 유명한 마사이 족도 있어. 피그미 족과 마사이 족 외에도 사하라 사막 아래쪽의 중남부 아프리카에는 약 900여의 다양한 종족이 살아. 이들은 각자 고유어를 사용하고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

인종 차별의 아픔을 딛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최초로 2010년 제19회 월드컵을 유치한 나라야. 하지만 백인들의 흑인 인종 차별로 아픔이 큰 나라이기도 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세기 중반 인종 차별을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로 제도화했어. 이 때문에 흑인은 백인과 같은 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고, 다른 인종끼리는 결혼할 수 없었어. 그러다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고, 1994년에 만델라가 흑인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됐어. 하지만 여전히 흑인들은 과거 인종 차별의 영향으로 문맹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은 문화상 사하라 사막을 경계로서 주민의 대부분이 비흑인계인 북아프리카와 흑인계인 사하라 이남의 블랙 아프리카(흑인 아프리카)로 나눌 수 있다. 흑인 아프리카의 문화에는 북아프리카와 비교해서 보면 여러 가지 점에서 일양성(一樣性)이 보이는데, 흑인 아프리카 내부에서의 다양성도 현저하다. 이 일양성과 다양성은 자연환경, 인종, 언어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본고에서는 곡물재배를 주로 하는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농경민, 소의 사육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프리카의 목축민 및 근경재배와 수렵채집이 중요한 적도 아프리카의 삼림주민을 예로 들어서 주로 세계관이나 종교에 대해서 개관했다.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농경민의 세계관과 종교,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농경민의 신앙이나 세계관에서는 선조와 들의 정령 신앙과 제사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복점, 기원 등은 선조나 토지의 정령에 대해서 행하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배경에 만물의 힘의 근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신앙이 있는데 혈연집단마다 죽이거나 먹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는 동물의 종류가 있는 사회는 많지만, 토테미즘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체계는 이 지대에는 발달하지 않았다. 또한 제사의식 등에서 음악이나 춤의 반복적 행동으로 황홀상태가 되는 경우는 많지만, 특정한 자가 인위적으로 빙의상태가 되어서 탁선 등을 행하는 샤머니즘적 요소는 이 지대의 사회에는 미약하다. 또한 제사와 관련해서 목조 가면이 많은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마리의 반바라족이나 도곤족, 브룩나파소의 보보족이나 크룬바족, 코토지보알의 세누포족 등의 가면은 미술품으로서도 세계의 애호자들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체계화된 외래 종교 중 이슬람교는 앞에서 언급한 장거리 교역의 상인ㅡ그들 자신이 포교한 경우도 있으며, 이슬람 상인의 교역 중개지의 이동에 따라서 도사나 예배의 장이 초대되어서 이주한 경우도 있다ㅡ을 매개로서 먼저 확산되었는데, 19세기 초, 푸르베족 출신인 샤이프 아하마드 로보나 우스만 단 포디오 등의 군사력을 수반하는 열광적인 이슬람 순화운동의 추진자에 의해서 니젤강 만곡부나 나이지리아 북부에 일련의 푸르베 제국이 구축되어 이슬람의 신권정치적 지배체제가 생겨났다. 

그리스도교의 포교는 유럽과 15세기 이후 교섭이 있었던 세네갈의 해안부를 제외하면 내륙 사바나 지대에서는 20세기가 된 후에 조직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특히 이슬람의 침투가 비교적 약했던 블룩나파소에서는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단이 포교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압도적인 이슬람 세력과 이슬람이 희박한 지역에서의 가톨릭의 성공으로 방해받아서 프로테스탄트의 침투는 내륙 사바나 사회에서는 미약하였다. 또한 19세기 이후의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의한 식민지화 이후에 유럽적 가치관에 대한 반발의 의미로서 역시 외래이기는 하지만 <유럽 이전>에 보다 아프리카에 융합한 이슬람교를 구하게 되어, 이것이 대중 레벨로 현저하게 보급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동아프리카 목축민의 소를 중심으로,,,
동아프리카에는 여러 가지 색, 모양의 가축이 있다.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면 다양한 색, 모양의 변이가 생긴다고 알려져 있는데, 동아프리카에서는 이들 변이를 그들의 문화와 관련지어서 오늘날까지 의도적으로 온존했다고 생각된다. 황색의 소가 있는가 하면, 청색 소, 자색을 띤 소, 여러 가지 색이 섞인 소도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색, 모양, 성별, 생육단계, 뿔의 색 등에 의거해서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붙여서 개체 식별을 한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소의 이름에서 따서 붙이는 목축민이 적지 않다. 바디도 소의 색과 모양에서 딴 이름을 붙인다. 어린이는 태어나면 즉시 모친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지는데, 그 이름은 이웃사람에게만 알려질 뿐이며 1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사회적인 이름이 주어진다. 그 이름이 소의 색, 모양에서 딴 것으로, 이름을 붙여준 부모가 담당한 색, 모양을 계승하는 것이다.

1세 이상의 바디 사람들은 모두 각각 자신이 담당하는 색,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딴 장식을 몸에 지니고 있다. 3, 4세가 되어서 어린이끼리 놀게 되면 작은 돌을 모으는데 열심이다. 여러가지 색과 모양의 돌을 분류하고, 특히 자신이 담당하는 색, 모양의 돌에 집착한다. 이런 놀이 과정에서 어린이는 특정한 색, 모양에 자기 동일화를 도모하게 된다. 마침내 14, 15세가 되면 젊은이들은 그 색,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소를 입수해 거세하여 소중히 키운다.

그들의 정춘의 보람은 이 특정한 거세소를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냐는 것에 집약된다. 그 소를 하루에 몇 번이고 쓰다듬어주며, 소를 위해서 시를 만들어 읊는다. 이런 소는 자연사에 직면하기 전에 수장의 집에 데리고 가서, 의식하에 죽인다. 그런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를 잃은 젊은이는 친한 친구 2, 3명과 함께 다른 부족의 1명을 죽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따라서 바디의 남성은 모두 과거에 사람을 죽인 경험을 가지게 된다. 바디 사회에서는 소의 교환에 의한 부족 내부의 관계 강화와 함께, 이런 특정한 소의 죽음에 의한 타 부족에 대한 배타성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들을 둘러싼 우주, 삼라만상의 하나하나에 색, 모양이 있다. 가령 하늘, 비, 물의 색은 흑이며, 태양, 달은 흰색이며, 대지는 회색, 갈색이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동식물에도 각각의 색, 모양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우주는 이 색, 모양을 매체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것은 각종 의례에서 구현화되어 있다. 가령 기우제 때에는 비와 같은 흑에 상당하는 소를 희생해서 비를 기다린다. 또한 씨를 뿌리는 의례 때에는 대지와 같은 색인 회색, 갈색의 소를 죽여서 풍작을 기원한다. 이와 같이 초자연, 자연을 포함한 우주와 그들의 현실생활을 연결짓는 것은 즉물적(卽物的)으로는 가축의 젖, 피, 고기이지만, 관념적으로는 각각에 대응한 가축의 색, 모양이다.

동아프리카의 목축민은 일반적으로 색, 모양의 인지가 구체적이며, 매우 민감하다. 동일 언어 그룹이지만 가축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는 농경민은 근린의 목축민처럼 색, 모양을 식별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색, 모양의 변이에 풍부한 가축을 배경으로 태어난 이런 문화만이 동아프리카에서의 목축문화의 큰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도 아프리카의 삼림 주민의 의례와 세계관,

아프리카 대륙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적도 아프리카의 삼림지역에는 옛날부터의 문화전통이 전해지고, 그에 따라서 사람은 일생을 보낸다. 모계사회에서 태어난 어린이는 만약 부계쪽의 집에서 태어나도 모계쪽의 혈연집단의 일원으로 인생을 보내게 된다. 재산이나 가계는 모계쪽의 삼촌으로부터 전해진다. 탄생에는 많은 의례나 금기가 있다. 임산부는 출산 직전까지 밭일을 하지만 출산은 대개 가볍다. 어린이는 성장함에 따라서 사회의 행의작법을 배우고, 농경 기술을 배운다. 수렵민도 유년기부터 사냥흉내를 내는 놀이를 한다.

남녀 모두 어느 연령에 이르면 성인의례가 있다. 대부분은 집락에서 격리된 작은 집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고 장로로부터 교육을 받고, 하례 등 신체에 상처를 내는 의례를 통과한다. 이로써 어린이로부터 일단 죽은 후에 재생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 집락에 돌아오는 젊은이들을 환영해서 사람들은 큰 향연을 베푼다. 이와 같은 기회에 무용, 음악이 세련된다. 또한 가면 등도 조령을 상징하는 것이 많다.

성인의례를 끝낸 남녀는 사회의 완전한 성원으로서 행동한다. 자신의 집과 밭을 가지는 것이 농경민에게는 아내를 맞이하는 전제이며, 결혼해서 비로소 진정한 한 사람의 성인이 된다. 결혼식도 또한 중요한 집락, 혈연집단의 축제이다. 성인은 각각의 연령, 성으로 구별된 결사에 소속하거나, 특정 개인끼리 <피의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집락단위로 분쟁의 해결이나 조정이 도모되는데 수장이나 왕이 있는 부족에서는 최종적인 법질서는 그 손에 위임된다. 노인은 보통 사회의 경험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병은 대부분 사술(邪術)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보아서 주의(呪醫)에 의한 대항주술에 의해서 치료된다. 장례도 혈연ㆍ지연관계를 강화하는 기회가 되며, 조령이 초대되어 무용, 음악이 행하여진다. 일반적으로 사자는 매장되며, 사자의 나라에 간다고 믿어서 무서워하는 존재가 된다.

삼림의 전통적 생활에는 조령신앙, 산천초목의 정령을 믿는 자연신앙이 나타나며, 지고신(신)에 의한 천지창조 신화가 전승되며 개인도 집단도 보유하는 생명력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또한 초 자연력을 구사하는 주술사가 존재하며, 주의(呪醫)가 개인이나 집단의 불행의 원인제거에 임하는 한편, 동일한 초자연력을 악용하는 사술사(邪術師)의 존재도 믿어서 병이나 죽음의 원인은 사술에서 구해진다. 이런 종교성이 가면, 주구(呪具), 음악, 무용 등의 예술적인 세련을 촉진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 또한 구승전승에서는 신화, 민화도 풍부하게 전개된다. 오늘날, 자이르의 킨샤사 등 근대적 도시도 있는데, 그 생활전통은 농경민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차적으로 되어있는 수렵민에게도 숲을 베어서 밭을 일구는 농경민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는 거대한 자연의 은혜를 그대로 향수한 가치관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영화,
얼굴’(1999)에 이은 신승수 연출작. 하성란 원작의 『여름방학』과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토대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여고생 넷이서 돈도 없이 총만 들고 다니며 여행한 일화가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놨다. 거침없고 노련한 그들의 범죄 행각이 CCTV에 잡혀 보도되자 마피아도 경악한 수법”(「스크린 장악한 여성영화」 경향 01. 10. 12)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소재를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제목 ‘아프리카’는 ‘AFRICA’가 아닌, ‘A.F.R.I.K.A’다. 바로 “Adoring Four Revolutionary Idols with Korean Association : 네 명의 혁명적인 우상을 지지하는 모임”의 약자로 이들의 행각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네티즌이 조직한 팬클럽의 이름이다. 권총 두 자루가 제공한 ‘권력과 자유’를 발판삼아 일상에서 꿈꾸지 못했던 ‘신비의 대륙’에 가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펑키 코믹 액션쇼’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N세대 관객들을 공략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줄거리
아르바이트에서 잘린 지원(이요원)과 배우지망생 소현(김민선)은 강릉 여행을 위해 빌린 승용차 안에서 권총 두 자루를 발견한다. 바로 강력계 형사 김 반장(성지루)과 조직의 중간 보스 날치(이제락)가 도박판에서 판돈 대신 잃은 문제의 권총이다. 장난감 권총인 줄 알고 방아쇠를 당겼다가 차 유리창이 박살나는 등 권총 때문에 그들은 계속 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 와중에서 시골 다방 종업원이던 영미(조은지)와 과거 자신을 농락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꾸는 진아(이영진)도 여기에 합류한다. 권총에 매혹된 이들이 뭉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총을 이용해 강도 행각까지 벌이자 차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추앙받게 된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이들을 추종하는 아이들이 인터넷에 팬클럽 ‘아프리카’를 만들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

참조항목,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블랙아프리카제국, 아프리카헌장, 중앙아프리카제국, 서아프리카, 아프리카연합

역참조항목,
감비아강, 그리콸랜드, 기니만, 기니해류, 대륙, 리스본지진, 마그레브

카테고리,
  • 지리학 > 자연지리 > 자연지리일반
  • 지역 > 아프리카 > 아프리카일반
출처 ^참고문헌,
[아프리카 - 자원은 풍부하지만 발전이 더딘 곳 (초등사회 개념사전, 2010..,)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 아프리카 [Africa] (두산백과)

[아프리카 [A.f.r.i.k.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2011...)



[아프리카 (종교학대사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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