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1일 월요일

팔공산, 사찰, 산행,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팔공산, 사찰, 산행,

경북 경산 와촌, 관봉 갓바위, 약사암, 용주암
경산에서 관봉 석조여래좌상(갓바위)이 있는 곳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좌측으로 산이 내려간 곳에 약사암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탑과 석등이 인상적인 용주암이 보인다.

언제나 우물쭈물 망설이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약사암을 거쳐 갓바위, 용주암을 둘러보기로 했다. 불굴사와 홍주암에 들러 독성각에 예배하고, 찻물 뜨고, 갓바위로 향했다. 고시원이 밀집된 곳을 조금 지나서 좌측으로 약사암 가는 길이 보인다. 지금은 도로 확장 공사중이라 길이 울퉁불퉁하다.

관봉 방향을 길을 바라보니 법우(法雨)가 생각나는 건 나만의 착각이라고, 다만 그 황홀감을 글로 전할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약사암 입구에 절의 의미와 예배에 대한 글이 실려있다. 아 뜨끔하다. 불굴사와 홍주암에서 건성 건성 예배하고 나왔는데 이토록 강렬한 후림이라니. 요즘 오만과 자만으로 들떠있음을 이렇게 견책해서 바로 세워주려 하니 은혜로움에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또한 감사하다.

팔공산, 사찰 산행, (갓바위~노적봉~중암암~약사암)

☞ 산행일자 : 2018. 5. 22.(맑음) ☞ 산행경로 : 갓바위주차장~갓바위~노적봉~은해봉~중암암~묘봉암~약사암~갓바위주차장 ☞ 산행거리 : 약 14.28km ☞ 산행시간 : 약 7시20분ㅡ 갓바위주차장..주차비로 1,000원을 받는다..  다른 곳에 비하면 싼 편이다..
보은사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우측에 보은사..

갓바위로 오르는 넓은 길을 우회등산로를 이용하기 위해 우측 산길로 들어선다..
관음사 극락전,
관음사 극락전,
관음사,
관음사를 바라보며 산길로 go go..,

용주암
길을 따라 용주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터벅터벅 가는 길, 이 산중에 밤을 구워 파는 아저씨가 맛보라며 밤을 하나 주신다.갈림길이어서 등산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은 도움이 되나 보다. 용주암이 보인다. 두 갈래의 길이 있어서 우선 정문 방향인 아랫길을 택했다. 우리가 흔히 보던 탑의 양식이 아닌 석탑과 사천왕상, 108개의 석등이 가지런히 맞아준다.

제석천과 수미산을 묘사한 탑과 불보살 조각들이 가득한 언덕은 우리가 흔히 접해오던 여타의 것과는 다르다.

약사암과 비교하면 좋은 예와 나쁜 예 이렇게 설명될 정도로 많지만 단순하며 또한 공덕이 느껴진다. 너무나 많은 나한상, 오죽했으면 성모마리아 상도 있다고 했겠는가.

용주암은 대한불교 일련종(일본의 일련대성인이 주창)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절복(折伏) 상대를 강하게 눌러 꿇어 엎드리게 만드는 모습의 절이 강조되었지만, 행(行) 자체가 자신의 참회와 죄장소멸 의식이 선행된 뒤에 타인을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관음전, 미근전과 용왕단, 산영각, 극락전(극락보전과 지장전)이 있다. 관음전은 편안하다. 고요와 평화가 있다.

미근전과 용왕단은 한번도 못보았던 형식이다. 안에 물을 떠서 먹게 되어 있으며 그 수조 안쪽에 용왕상이 모셔져 있다. 그 뒤편으로 여러 보살들이 그림형태로 있다.

산영각은 말 그대로 산신을 모시는 곳인데 기운도 독특하고 산왕(호랑이) 목각으로 두 마리 있어서 귀엽다.

극락보전에 만다라 탱화를 봉안했으며, 우측엔 수 많은 지장보살이 있다. 여기 법당 안 벽에 나한 그림들이 많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여타의 나한전에서 보았던 것과는 좀 다르다.

위에는 다른 범종루나 종각과는 다른 명칭을 썼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거대한 목탁과, 법륜거, 북이 있다.

이 조그만 암자가 매년 산사음악회를 개최하고, 태국이나 캄보디아 등과의 문화교류에도 힘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암자의 규모로 봐서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한국불교와의 융화문제일까?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은 아무래도 티베트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편견없이 마음 편하게 쉬고, 수행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구도의 공간이 되기를,,,
용주암 입구,
용주암 입구 능선에 오르니 예 전만 못하다, 너무 힘들어 이곳에서 한동안 쉬어가기로.... 

갓바위 오름길..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내려다본 용주암,
갓바위로 올라가면서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내려다본 용주암.. 멀리 환성산도 보인다..
용주암
용주암을 한컷하고...

관봉 약사 여래좌상, (일명 갓바위부처님)
경상북도경산시와촌면갓바위로81길 176-64(대한리 산 44)에 있는 불상. 1965년에보물제431호로 지정되었다.

팔공산관봉 정상에 자리하여 문화재청은 정식 명칭을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라고 하였으나 일반인들은 주로 갓바위라고 부른다. 높이는 4 m, 재질은화강암인데 관봉 정상에 넘쳐나는 화강암을 이용한 듯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다.불상머리 위에 넓적한바위처럼 얹은 모습이 특징적이라 갓바위라고 부른다.통일신라시대, 좀 더 정확히는 9세기 초반에 불상의 몸체를 만들었으나 후대에, 아마도고려시대에 갓을 따로 만들어 올린 듯하다. 지금이야 이 돌 갓의 모습이 넓적한 판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그 위에 다른 석재가 더 있어서 정말로 갓처럼 보였을 것이다. 관봉(冠峰)이라는 지명도 갓바위를 한자로 관암(冠巖)이라고 쓴 데에서 유래하였다.
갓바위부처님,
불상 머리 위에 얹은 갓은 본디 팔각형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지역주민들이 불을 지르거나 장난 삼아 훼손하는 바람에 지금 모양이 되었다.
팔공산 관봉 갓바위,
오늘 역시 갓바위에는 많은 불공을 드리시는 신자분들로 인산인해..,,

경산시대구시가 서로 자기네 불상이라고 우기지만, 시 경계에서 100 m 떨어져 있고행정구역상으로는경산시소재가 맞다.하지만 대구나 경산이나 생활권이 같아서 거기서 거기다.
갓바위 부처님,
부처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갓바위는경산 갓바위2로 이어집니다,
갓바위 아래 암자에서 바라본 농바위와 노적봉,
갓바위 아래 암자에서 바라본 농바위와 노적봉 한컷,..
동봉 갓바위 애자모 지장보살,
애자모지장보살수자(水子)는 다른 말로 치자(稚子)라고도 한다. 이 말의 뜻은 출산 직후의 아기, 또는 태아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수(水), 즉 "미즈"라는 고어로 사산아, 유산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산아나, 유산아를 수자로 칭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옛날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는데, 출산 직후 사망한 영아들은 바다나 강물에 떠내려 보냈기 때문에 수자라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 뱃속의 양수를 따서 수자라고도 하였고, 일본에서는 "화찬"(추운 강가 모래밭의 지장가요)이란 구전가요의 내용상으로는 '부모나세상을 볼 수 없는 아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추운 강가 모래밭의 지장가요
어린 영혼들이나, 영아 영가들이 추운 강가의 모래밭에 모여서 아버지가 그립다, 어머니가 그립다. 그리움에 울고 있는 영혼들의 슬픔이 뼈를 깎는 듯하다. 영아 영가들은 모래밭의 돌을 모아서 회향 탑을 쌓는데 한 층은 아버지를 위해, 또 한 층은 어머니를 위해, 또 한 층은 형제들을 위해서 회향 탑을 쌓으며 부모형제를 한없이 기다리지만 밤이되면 어느 덧 지옥의 귀신이 찾아와서 밤새도록 쌓아 올린 탑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무너뜨린 탑을 보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영가들에게 지장보살님이 나타나시어 "너희들은 부모로 인해 단명해서 죽은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아주 다른 세계여서 너희 부모를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이 명부세계의 지장보살님을 부모로 생각하고 의지하여라" 하시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장보살님의 법의를 펼쳐 어린 영가들은 포근히 감싸 삼도천을 건너 주신다. 
선본재.
 선본재..
아래쪽으로 조그마케 선본사,
선본재를 지나 능선 바위에 올라서니 아래쪽으로 조그마케 선본사가 보이고..
노적봉.
노적봉..
노적봉에 잠시 오르면서 이런데도 한컷..
북지장사 갈림길을 지나고 곧 이어지는 노적봉에 잠시 오르면서 이런데도 한컷..
북방아덤,
북 방아덤..
관봉과 아래쪽 선본사 갓바위,
 관봉과 아래쪽 선본사 갓바위 관리동과,,? 우측에 약간의 기와집은 갓바위 산신각,..
우측의 노적봉과 좌측의 관봉.
우측의 노적봉과 좌측의 관봉..
절묘한 바위,
팔공 CC
팔공 CC도 내려다 보이고..
멀리 팔공산 주봉인 비로봉,
멀리 팔공산 주봉인 비로봉을 당겨본다.. 
암봉위에서 본 능성재(은해봉)
암봉위에서 본 능성재(은해봉)..
멀리 신령봉,
멀리 신령봉에서 이어지는 코끼리 바위도 보이고..
돌아본 노적봉, 관봉 능선,
돌아본 노적봉, 관봉 능선..
관봉 능선, 암릉
은해봉(능성재)
은해봉(능성재)..여기는 탑이 있었는지 상부만 제거하고 기초는그대로 입니다, 
은해봉 이정표,
은해봉 이정표..은해봉에서부터는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은해봉에서 중암암으로 가면서 본 코끼리바위,
은해봉에서 중암암으로 가면서 본 코끼리바위..
선본사 갈림길.
선본사 갈림길..
약 십분후 또 다른 선본사 갈림길이 다시 나타나고..
추모비가 있고 옆엔 오랜 시간과 풍파를 이겨낸 고목,
등산로 옆에 추모비가 있고 옆엔 오랜 시간과 풍파를 이겨낸 고목도 한컷..
암릉이 이어진다.. 생명은 바위틈으로??? 나무도 삶을 이겨냅니다.. 
헬기장을 지나 지금 까지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암릉이 이어진다.. 모진 생명은 어이거리?? 바위틈으로 나무도 살아 갑니다,
분위기가 다른 암릉
중암암 윗쪽 ..
주변이 온통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릉 앞에서 좌측으로 가면 만년송이 있는 곳..

중암암은 우측으로 내려가야 된다..
주변이 온통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릉입니다,
만년송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 200m쯤 가면 뿌리는 하늘을 향해 바위틈에 모진 생명력을 이어가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만년송이란 소나무,
만년송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 200m쯤 가면 뿌리는 하늘을 향해 주변이 온통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릉 (바위들)틈에 모진 생명력을 이어가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만년송이란 소나무가 있는데 이 산천의 경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모습은 가히 일품이다. 
좌측 소나무가 만년송..  우측의  주변이 온통 암릉
좌측 소나무가 만년송..  우측의 주변이 온통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릉 (바위)도 이채롭다.
거대한 바위 사이길,
거대한 바위 사이길을 지나가고.., 몸이좀 커신 분들은 지나 갈수가 없으며 둘러 가야합니다, 
삼인암..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전설이귓던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것이 삼인암(三印巖)이다.
"삼인암..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것이 삼인암(三印巖)이다.

삼인암은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효험이 있는 약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으나 대를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사정을 듣고 정성을 드리라고 하면서 현재 있는 삼인암의 장소를 알려주었다. 부인은 여기에서 정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어느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리고 힘써 정진하여 모두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전설도 있다.  
극락굴 입구,
 중암암으로 들어서는 길.. 중암암에 앞서 먼서 극락굴이 반긴다..
극락굴,
극락굴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화엄경론을 집필 할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이 굴에서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다 화강삼매에 들어 불빛을 발산하였는데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그 소리에 의문이 풀리어 화엄론을 완성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그 후 조선 말기 영파스님(은해사 비석에 약력이 있음)이 화엄 강백으로 유명했는데 이 굴에서 어느 여름날 정진하다가 삼매에 들어가는 바람에 학인들 강의시간도 놓치고 밤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 않아 큰 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와보니 스님이 이 굴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도인 큰 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스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함. 
근세에 와서 이 도량에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청정히 계를 지키고 기도하면 잘 이루어진다고 하여 전국 각지에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이 극락굴은 몸이 아무리 굵다고해서 통과를 못하는 사람이 없다하며 세 번을 돌아야 소원을 이루어진다고 한다." 
극락굴을 지나가 본다.. 세번을 돌아야 소원을 이룬다고 하는데 한 번 밖에 돌지 못했다..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인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3m이고, 하층기단 갑석의 폭은 1.46m이다.

더듬질한 긴돌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이층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강화되었고,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는 등의 특징을 보아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벽 아래 터를 조성하고 남북선상으로 나직한 축대를 쌓아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고 서쪽에는 법당, 동쪽은 석탑을 배치하였으며, 법당지에서는 법당 창건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어골문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석탑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는중암암(돌구멍절)을 비롯하여 극락굴, 삼인암,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등이 있다.  
바위 사이를 통과하면 중암암,
바위 사이를 통과하면 중암암이 바로 앞인데..

이 바위 구멍으로 인해 중암암을 돌구멍절이라고도 부른다..
중암암: 앞에 글에 있듯이 그길로 통과 해야 정문으로 올수가있다, ..
중암암..
중암암의 역사"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을 찾아가는 길은, 먼저 은해사에서 2km 거리에 있는 백흥암에 오른 다음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중암(中巖)이라 부르는 기암절벽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암자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연바위를 거쳐야 한다. 이 바위 덕분에 '돌구멍 절'이란 이름도 붙었다. 

절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년)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심지왕사는 같은 팔공산 내의 동화사를 창건한 분으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이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 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고 합니다.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이지만 팔공산의 절경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속인의 눈에야 그저 경관의 빼어남이 보이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수행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건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23년) 태여대사가 중수하였고, 1834년 우일과 유엽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하였다.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또한 2011년에 소운당을 새로이 개축을 하였다.
이 바위 아래를 지나면 바로 중암암,
이 바위 아래를 지나면 바로 중암암의 해우소가 나오고.. 이곳 해우소에도 설화가 있다고 합니다,
중암암, 깊이를 알수 없다고 하는 해우소,
해우소..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에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돌구멍절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던 세 분의 도반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절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통도사에 계시는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1말 3되나 떨어진다."고 하며 은근히 절의 규모를 법당문 크기에 빗대어 자랑을 하셨다. 
 
이어 해인사에서 오신 스님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 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워야 저을 수 있다."고 하며 절의 규모와 큰 솥이 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두 스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돌구멍절 스님은 절의 규모 등으로 자랑할 게 없자,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암암 스님이 제일 큰 허풍으로 도반스님들의 절 자랑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벼랑의 바위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설화이다. 
중암암 요사채 용마루엔 정말로 용머리
중암암 요사채 용마루엔 정말로 용머리가 있다..
중암암 소운당,
중암암 소운당..
감로정(甘露亭)  
감로정(甘露亭) 
길을 걷는 나그네들이여! 여기 눈과 마음을 씻어주는 감로수가 있나니...행여 세상에 대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번뇌가 있다면 종교를 초월한 대자연인이 되어 세상의 온갖 시름을 이곳에다 내려놓고 가소서..

보는 이에 따라 성스러울 수도 혹은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돌 아기 부처님이지만 한 쪽자의 물로써 정성을 다하여 관욕시켜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내 마음과 내 육신을 씻는 진솔한 행위가 될 것이외다. 

중암암에서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가면 우측으로 묘봉암으로 가는 길이 있다.. 계곡을 건너 비탈길을 따라 올랐다가 잠시 내려서는 곳에 묘봉암이 자리하고..,
커다란 바위가 묘봉암 원통전 벽을 뚫고 들어가 있다,
묘봉암..
커다란 바위가 묘봉암 원통전 벽을 뚫고 들어가 있다..
묘봉암 원통전..
묘봉암 원통전..
커다란 바위 한 쪽이 벽을 뚫고 들어와 있는 원통전 내부,
커다란 바위 한 쪽이 벽을 뚫고 들어와 있는 원통전 내부..
묘봉암에서 다시 776봉 능선,,,
 묘봉암에서 다시 776봉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바위들이 무너져 내린듯한 길
우회길도 있지만 바위들이 무너져 내린듯한 길로 오른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본 경산방면의 갓바위주차장,
전망대에서 본 경산방면의 갓바위주차장..
갓바위능선이 한눈에,,,
우측으로 눈을 돌리니 갓바위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로프를 타고 오르는길
가족끼리 산행 온 듯.. 꼬마도 로프를 타고 씩씩하게 오른다..
건너편 중암암을 바라보고,
암봉위에서 건너편 중암암을 바라보고..
중암암에서는 보이지 않던 위쪽의 삼인암도 뚜렷이 보인다,
당겨보니 중암암에서는 보이지 않던 위쪽의 삼인암도 뚜렷이 보인다..
저멀리 비로봉이,,,
저멀리 비로봉이가마득 하게...

776봉 암봉에서 다시 묘봉암 갈림길로 되돌아와 퍽정마을로 내려선다..
소나무 군락,
멋진 소나무 군락도 지나야 하고..
왜 이곳에 인봉 2.8km 이정표가???
왜 이곳에 인봉 2.8km 이정표가 있는 지 의아스럽다..
차있는 우측으로 주차장,
퍽정마을로 내려서고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주차장까지 올라간다..
3주차장에서 좌측에 있는 화장실 뒤편으로 계곡을 건너고..
노송들! 소나무군락,,,
 오래된 노송들! 소나무군락,,,
약사암.., 본존불 관음보살상, 관음도량
약사암..,관음도량,
약사암은 어느 독실한 신자이신 할머님의 현몽에 산신령이 나타나셔서 팔공산의 영기가 흐르는 곳을 가르쳐주셔서 세운 곳이라 한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갓바위를 기준해서 좌측 산등성이 바위 쪽으로 흐른 기운으로 약사암이 혜택을 받고 있고,
우측 용주암은 탑과 사찰 전체로 그 기운을 직접 받고 있다.

보견샘 말로는 몇 년 전엔 기도처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으나 자식들의 재산 다툼으로 지금은 하락세(효험)를 그리고 있는 형편이라 한다.

경내에 들어서니 기분이 좋아진다. 약사여래불과 그 옆의 와불, 사찰 곳곳에 있는 부처와 보살, 천녀와 현모 등 볼거리도 많고, 산신각도 괜찮다. 다만 정리가 필요하다. 난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고란골 토굴암도 기도처로 상당히 좋은 곳이었는데, 정리 정돈과 함께 단순히 하면 더 좋아지는 곳이다.

약사암도 그러하다. 물질에 치중해서인가 그때 그때 대충 세운 듯한 건물이 어지럽다. 그러나 법우는 어디에나 내리는 것이니, 그 조화는 새삼 놀라게 한다.
약사암 삼천불전,
약사암 삼천불전
관세음 보살님은 현신 세계에서 괴로움을 겪는 인간의 음성을 듣는 절대자이며 인간의 간절한 기원과 요구에 의해 현실로 직접 나타나는 구세 대비자이다.  

약사암 삼천불전은 저마다의 인연과 소원에 따라 모셔진 성전이다. 삼천불전에 수시로 친견하고 자기 부처님께 기도하는 일은 불자님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다.  

삼천불 한 분 한 분에 공덕을 들인 불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그들의 기원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삼천불전에 이름을 새겨 모시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 병고자는 건강회복, 학업자는 학업성취, 사업자는 사업번창, 조상영가는 왕생극락을 할 수 있으며, 업장소멸은 물론이고 커다란 복덕을 얻을 수 있다. 
약사암 가는 길, 위로 갈 수록 쌓인 눈,
삼천불전의 내부..
절을하는 의미의 7가지의 예배
초심자들은 절에가서 절을 할 때 왜 하는지 조차 모르고, 그냥 좋다하니까 한 번쯤 절을하고 나오곤 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 의미가 7가지의 예배를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 절을 하는 의미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침착해져서, 주의력이 생기고, 정진력이 생기며, 지혜를 열리게 해 줍니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성급한 사람, 성내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도 절을 계속하게 되면 그 공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증진이 된답니다. 

7가지의 예배 
1)아만례 : 몸은 절을 하지만 마음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서 아만심이 깃들어 있는 예배
2)구명례 : 입으로는 부처님을 부르고 공경을 나타내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예배
3)신심 공경례 : 입으로는 부처님을 부르고 마음으로도 부처님 상을 경례하는 공경 공양하는 예배
4)발지 청정례 : 슬기로운 마음이 밝아서 부처님의 경계를 통달하며 내외가 청정하고 걸림이 없어,  
   한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것이 일체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것이고 일체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것이  
   한 부처님에게 경배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곳 부처를 떠난 것이 아닌 경계의 예배 
5)변입법계례 : 자기 몸과 마음이 근본을 따지면 법계를 떠난것이 아니어서 성품과 현상이 평등하여  
   본래 더하고 줄 것이 없는 경계 
6)정관수성례 : 마음이 바른 생각으로 스스로 예불하지만 자신의 불신에 예불하는 것이 된다.
   결국은 부처님에게 절하는 것이 자신의 부처님을 깨닫게 된다.
7)실상평등례 : 올바르게 관(觀)하는 법에 본체와 현상적 작용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예불하는 속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어서 예불하는 나와 예불 받는 부처님의 성품이 한가지로 통하며 공적하니 실상평등이라 한다. 
산신각, 삼신할머니와 삼신할아버지, 동자상,
약사암을 뒤로 하고 관봉 갓바위로 올라가자니 계단이 예사롭지 않다. 몸이 무거워지니 발걸음도 무게가 실린다. 마음이라도 가벼우면 좋으련만 교만심에 대한 반성으로 그조차도 무겁다.

한 발 한 발 떼어 겨우 약사 여래부처님을 뵙게 된다. 오늘도 저리 찌푸린 얼굴을 보니 안쓰럽다. 헐~ 거기에 좌측으로 살짝 기울어진 듯도 하다.

모던 신도분들이 전부 ~하게 주세요, ~해 주세요,

감사하고 고맙다 인사하는 분이 몇분이나 되려나??,,,.

마음 수행하시는 분들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음 씀씀이가 이쁘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탑돌이를 수렴으로 오른쪽으로 돌고 있으니, 옆에 보살님이 왼쪽으로 도는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다. 이런 관심과 배려를 가진 분들이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용덕사.
용덕사..
용주암, 천연약수
용주암 입구 갈림길에 돌아오고..내려서면서 갓바위 주차장에 도착해 원점회귀 산행을 마친다.. 
산행도
#팔공산 #갓바위 #사찰 #중암암 #약사암 #돌구멍절 #용주암 #용덕사 #천년약수 #깊이를알수없는해우소 #7가지의 예배 #절을하는 의미 #경산시 와 대구시가 서로 자기네 불상 #관봉

2020년 5월 10일 일요일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흥보가, [ 興甫歌 ]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칭/ 별칭/ 유형/ 성격/
흥부가, 박타령
작품
판소리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박타령’이라고도 한다. 가난하고 착한 아우 흥보는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보물들이 나와 부자가 되고, 넉넉하고 모진 형 놀보는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괴물들이 나와 망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엮은 것이다.

사설이 우화적이기 때문에 우스운 대목이 많아 소리 또한 가벼운 재담소리가 많다. 사설의 길이는 짧은 편이며 한 마당 모두 부르는 데 대개 3시간 가량 걸린다. 조선 중기에 이미 불렸으며 송만재(宋萬載)의 ≪관우희 觀優戱≫,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 觀劇八令≫과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 처음 보인다.

정조 때의 명창 권삼득(權三得)이 <흥보가>를 잘하였고,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고 한다.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문석준(文錫準)도 <흥보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는 ‘박통 속에서 돈과 쌀을 정신없이 퍼내는 휘모리 대목’을 더늠으로 전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한송학(韓松鶴)·정창업(丁昌業)이 <흥보가>를 잘하였다 하며, 고종 때에는 최상준(崔相俊)·김창환(金昌煥)이 잘하였다 한다. 김창환은 ‘제비노정기’를 더늠으로 내었던 바, 오늘날 ‘제비노정기’는 그의 더늠을 첫손으로 꼽고 있다.
전승되고 있는 <흥보가> 바디에는 박녹주(朴綠珠)와 박봉술(朴奉述)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宋萬甲) 바디, 정광수(丁珖秀)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 바디, 오정숙(吳貞淑)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金演洙)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朴東鎭)이 짜 부르고 있는 바디 <흥보가>는 김창환 바디에 가깝다.

그 밖의 <흥보가> 바디는 거의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흥보가>는 바디마다 사설과 소리가 얼마쯤 다르게 짜여 있으나, 흔히 ‘초앞’·‘놀보심술’·‘흥보 쫓겨나는데’·‘매품팔이’·‘매 맞는데’·‘집터 잡는데’·‘제비노정기’·‘흥보 박타령’·‘화초장’·‘제비 후리러 나가는데’·‘놀보 박타령’ 등 뒤풀이로 짜인 바디가 많다.

앞과 뒤에는 재담소리가 많고 가운데에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계면조)·‘집터 잡는데’(진양-우조)·‘제비노정기’(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박타령’(진양-계면조)·‘비단타령’(중중모리-평조 또는 계면조)·‘화초장’(중중모리-계면조)·‘제비 후리러 나가는데’(중중모리-설렁제)를 들 수 있다.

<흥보가>는 우스운 재담 대목이 많이 들어 있고 끝에 ‘놀보 박타는 대목’에는 잡가(雜歌)가 나오기 때문에 해학적인 마당으로 꼽힌다. 소리도 잘해야 하지만 아니리와 너름새에 능해야 <흥보가>명창으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아우 흥보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어 복을 받고, 마음씨 고약한 형 놀보는 부자로서 더 부자가 되려고 동생 흥보를 흉내 내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벌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을 담고 있고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는 판소리 전승오가(傳承五歌) 중의 하나.

<흥보가(興甫歌)>의 근원이 된 설화들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서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몽골의 <박타는 처녀 설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처마에서 떨어져 바동거리는 제비 다리를 동여매주니 제비가 좋아서 날아간다. 얼마 뒤 그 제비가 날아와 씨앗을 떨어뜨리니 그 씨앗 심은 데서 큰 박이 열린다. 박을 타는데 그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그 처녀는 거부가 된다. 이웃의 심사가 바르지 못한 처녀 하나가 그 이야기를 듣고 처마 밑에 사는 제비의 깃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실로 매어 날려 보낸다. 얼마 지나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박을 타는데 박 속에서 독사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인다.

이 이야기는 흥보 놀보 이야기와 정확히 대응하는데, 몽골이 침략했을 때 몽골설화가 조선에 전파된 것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몽골에 잡혀간 고려 여인네들에 의해 우리 것이 전파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흥보가의 또 하나의 근원설화는 신라설화라고 알려진 방이,,,

내용
흥보가에는 민담적 사유 체계가 널리 퍼져 있다. 이름에 성이 없이 그저 흥보, 놀보, 째보, 청보 등이라 부르는 것이 그러하고, 박타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성이 박가거나 제비에서 유추되어 성이 ‘연(燕)가’라는 것도 그러하다. 지리적 배경이 ‘충청·전라·경상, 삼도 어름’으로 제시된다거나, 시간적 배경이 옛날 옛적으로 나오는 것도 민담적 사고를 담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력 사항이 제시되지 않는다든가 인물 유형이 평면적 성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민담의 전통과 관련된다. 흥보가의 이야기 구조에서도 민담적 사유 체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흥보가의 거시 구조인 ‘대립적 반복 모방담’은 민담의 ‘흉내 내기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① 착한 사람이 우연히 어떤 행위를 하다. ② 그 보답으로 행운의 결과를 가져오다. ③ 악한 사람이 그 행위를 가식적으로 흉내 내다. ④ 그 응답으로 악운의 결과를 가져오다.’와 같은 서사구조를 흥보가 또한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①와 ②는 흥보 이야기, ③와 ④는 놀보 이야기와 대응된다.

흥보가 이야기의 핵심적 구조를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로는 크게 보아 ‘선악형제담’과 ‘동물보은담’, 그리고 ‘무한재보담’을 꼽을 수 있다. ‘선악형제담’은 우리의 수많은 민담에서 보이는 선과 악의 선명한 대비와 역전의 스토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선악의 주체가 형제가 아닌, 이웃 사람이거나 자매이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아우가 착하고 형이 악한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방이 설화>처럼 형이 선하고 동생이 악한 경우도 있다. ‘동물보은담’은 동물이 자신을 보살펴준 사람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 은혜에 보답한다는 이야기로 우리 민담에 편만해 있는 화소이다. 하지만 이 화소에는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에게는 복수를 한다는 화소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보은’의 국면만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흥보가처럼 ‘보수(報讎)’의 국면이 같이 나타나는 이야기들도 있다.

보은하는 존재로서의 새는 우리 민담에서 까치가 가장 흔한데 흥보가에서는 제비가 대상이 되고 있다. ‘무한재보담’은 선한 사람이 베풂의 대가로 얻게 된 도구에서 무수한 재물이 쏟아진다는 화소이다. 우리 민담에서 원하는 온갖 재물을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도깨비 방망이가 대표적인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외에도 항아리나 냄비·맷돌·쌀바위 등이 우리 민담의 화수분 목록을 차지한다. 그런데 동물보은담이 보은과 보수의 국면을 동시에 갖듯이, 무한재보담 속에는 무한탕진담도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보수의 실천 행위로서 재물을 모두 탕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흥보가는 무한 재보 획득뿐만 아니라 무한 재보 탕진 과정에도 상당한 흥미의 초점이 주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와 같이 흥보가는 민담적 이야기 화소들이 서로 연접되고 중첩됨으로써 전체적인 얼개를 형성한다. 그러나 흥보가는 이러한 이야깃거리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민담적 이야기의 틀거리 사이사이에서 분비되어 나오는 현실적인 성격의 이야기들이 흥보가를 한 편의 사회적 의미를 지닌 판소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민담적 요소들이 흥보가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렸다면, 현실적인 요소들은 그 윤곽에 따라 채색을 가해 삼차원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흥보가에서 흥보와 놀보의 형제 관계라는 민담적 포장을 한 꺼풀만 벗겨내고 보면 거기에는 어떤 집단은 아무리 열심히 품을 팔아도 최저 생활도 하기 힘든 반면, 또 어떤 집단은 그럭저럭 지낼 만한데도 남을 해치는 욕심을 내어 재물이 나날이 불어나는 사회 경제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보의 축재와 흥보의 곤궁을 통해 경제력을 갖춘 신흥 부농층과 생산 수단을 상실한 빈민층으로 분화되는, 당시의 사회 문제인 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질적 신흥 부자와 최하위 빈민 유랑층의 모습은 <놀보심술> 대목이라든지 그의 축재하는 과정, 흥보 내외의 품팔이 대목 등을 통해 잘 나타난다. 한편 흥보의 매품팔이를 통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부역 회피와 궁민층의 대역이라는 부패한 사회 구조를 보여주며, 호방의 환자(還子) 거절과 매품 제안을 통해서는 중간 관리의 농간과 환자 제도의 모순, 그리고 권력의 횡포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놀보의 흥보에 대한 심술과 포악이라든가 매품팔이의 가로챔, 그리고 놀보 박에서의 삯꾼이나 놀이패 집단의 강탈성 등을 통해서는 몰인정한 이익 사회와 그로 인해 해이해진 사회 기강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흥보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반면, 놀보로부터는 축적한 부를 송두리째 뺏는 진술 태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강퍅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옹호 내지는 보존 유지를 염원하는 작가 의식이 흥보가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보가는 민담적인 이야기 구조에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현실 유추의 기능이 이루어지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흥보가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민담식의 재미있는 이야기 재담과 해학적 표현을 통해 발랄하게 웃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풍자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해 시니컬한 웃음을 웃게 된다.

등장 인물
흥보가의 등장인물인 흥보와 놀보는 한국인의 인물 캐릭터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우리는 흔히 ‘흥보 같은 사람’이니 ‘놀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한다. 흥보는 경제적으로는 무능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착하고 욕심 없고 생명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마음속의 풍요로움을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놀보에게 맞고 돌아와서도 형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아내에게는 변명을 늘어놓는다든가, 마지막에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형 놀보를 따뜻하게 포용한다든가 하는 장면에서 그 선한 형상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반면에 놀보의 형상은 심사가 뒤틀려 남을 해치는 심술을 부린다든가, 재산을 혼자 차지하려고 동생을 집에서 쫓아낸다든가, 양식 얻으러 온 흥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든가,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다든가, 부자가 된 흥보의 집에 찾아와 포악을 부린다든가 하는 장면들을 통해 탐욕스러움에 포악함까지 갖춘 악한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놀보가 경제적 능력이 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고, 그래서 상당 부분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 반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한국인의 심성에 근원적인 거부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흥보 놀보의 성격은 사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민담적 사고의 소산으로서 이후의 근현대 문학 속의 캐릭터에 하나의 전형적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놀보의 성격은 채만식의 『태평천하(太平天下)』에 나오는, 욕 잘하고 이기적이고 반도덕적인 윤직원 영감에게 확장·심화됨으로써 전통적인 인물 캐릭터가 문학적으로 수용되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 본
요즘 활발하게 전승되는 흥보가는 박녹주제, 박봉술제, 김연수제, 강도근제, 박동진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박동진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송만갑의 흥보가를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은 것들이다. 송만갑제 소리 중에서도 오늘날 많은 후학들이 즐겨 부르는 흥보가는 박녹주바디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흥보가는 전승이 끊어지거나 미약한 반면 박녹주바디 흥보가는 한농선과 박송희가 굳건하게 맥을 이었고, 또 그 후학들이 활발하게 전승시키고 있다.

박녹주가 남긴 흥보가 음반에는 <놀보 박타는 대목>이 들어 있는데, 사설이 비교적 소략하게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소략하나마 이 대목을 음반으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흥보 밥 먹는 대목>과 같이 골계적이고 익살맞은 재담 대목도 여러 군데 빠져 있다. 그러나 박녹주의 제자인 박송희 명창이 <놀보 박 사설>을 복원시켜 현재는 흥보가 완질이 전승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흥보가는 전승오가(傳承五歌) 가운데 재담 소리가 가장 많아, 민속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앞과 뒤에 재담 소리가 많다. 특히 다양한 하층 예인 집단 등 온갖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여 놀보를 패망시키는 <놀보 박타는 대목>은 흥보가 중에서도 민속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부분이다. 재담 소리를 폄하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판소리 연행 관습상 흥보가는 지난날 창자로부터 그렇게 우대받던 판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보성소리의 명창 정응민은 제자들에게 흥보가 가운데 <놀보 박타는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명창이 <놀보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만 부르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담소리가 전혀 저평가되지 않는다. 요즘 청중들은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는 재담 대목에 오히려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때 전승이 위축되었던 흥보가가 오늘날에는 다른 어떤 바디보다도 인기가 있다. 흥보가의 재담적 구성이나 해학성 넘치는 담화적 표현들이 없다면 오늘날 판소리 공연의 발랄함과 흥미성은 그나마 확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보가의 재담은 오늘날 창작판소리의 담화적 구성과 표현의 방향을 시사하는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흥보가의 중간 중간에는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엇모리장단―계면조), <집터 잡는 대목>(진양조장단―우조), <제비노정기>(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박타령>(진양조장단―계면조), <비단타령>(중중모리장단―평조 또는 계면조), <화초장타령>(중중모리장단―계면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중중모리장단―설렁제) 등을 들 수 있다.

흥보의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부자가 된다는 상황 설정은 그 내용의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가난을 체험하며 살아야 했던 민중들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어서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송만갑의 <흥보 박타는 대목>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많은 창자들이 다투어 부르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 있으며, 오늘날에도 환상적인 부의 획득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이 존재하는 한 <흥보 박타는 대목>은 흥미의 초점이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가난타령>도 민중들의 삶의 응어리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다. 특히 천민 자본의 횡포가 두드러지는 요즘의 현대 사회에서 흥보네 가족이 겪는 간난(艱難)의 절정은 공감의 진폭이 크다고 할 것이다.

참조어
박타령

국악, [ Gugak , 國樂 ]

한국음악의 준말.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총칭. 일명 한국음악.
이칭/ 별칭/ 유형/ 시대/
한국음악, 한국전통음악, 한민족음악
개념용어
근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 한국음악·한국전통음악·한민족음악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뜻하는 국어(國語)·국문(國文)이라는 말처럼 현재 사용되는 국악이라는 용어는 1907년 일제통감부(日帝統監府)가 교방사(敎坊司)를 장악과(掌樂課)로 개칭할 때 두었던 국악사장(國樂師長)과 국악사(國樂師)에서 기원됐다. 그런데 이 국악이라는 용어는 당시 통감부에 파견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일본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고쿠가쿠(國樂) 곧 국악의 명칭을 소개한 결과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악이라는 말 대신에 아악(雅樂) 또는 조선음악(朝鮮音樂)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8·15광복 직후 등장한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 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 및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라는 명칭에 사용됨으로써 국악은 서양음악을 뜻하는 양악(洋樂)의 대칭어로 사용됐다.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설립된 국악과(國樂科)라는 명칭은 그 후에 설립된 대학교의 국악과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국악과라는 학과명 대신에 한국음악과(韓國音樂科)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악이라는 명칭은 20세기 후반까지의 전통음악을 지칭하는 과거지향적 용어로 규정하고 새로운 창작곡을 포괄하는 새로운 한국음악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

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

현황,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농악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등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
판소리《박타령》민속악의 하나로 광대의 소리와 그 대사의 총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수궁가》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작의 판소리.
판소리《심청가》조선시대 작자 , 연대 미상의 판소리.
판소리《적벽가》조선시대의 판소리.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
판소리《춘향가》조선 후기에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지은 판소리.
한국음악이란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 속에는 서양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즉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킨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 즉 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부르기도 한다(문화재보호법 참조).

이 밖에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하여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함은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거나 한편으로는 19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이라 함은 한국 전통음악을 비롯하여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범주에 한국음악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도 안산 지역의 국악을 주요 국악인 및 국악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국악가요, [ 國樂歌謠 ]
유형/ 시대/
개념용어
현대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창작가요.

민요풍의 노래로서 국악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연관되어 198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국악 갈래이다. 「어디로 갈꺼나」, 「한네의 이별」, 「삼포가는 길」,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이 국악가요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국악가요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찾아진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국악 혼합합주(일명 鮮洋合奏)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다.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양·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내용
국악가요의 원천에 해당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한다. 〈노들강변〉, 〈처녀총각〉, 〈조선팔경가〉 등 민요양식과 유행가 양식이 혼합된 노래들이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하여 신민요라는 갈래가 당시 성행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창작민요는 전문 국악인들의 창작 및 가창 전승을 통해 기존의 통속민요와 함께 전문 국악인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었고 민요양식과 결별한 한국대중가요는 미국식 대중음악어법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악계와 대중음악계,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사이의 교차적 틈새 영역에서 국악가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TV주제가 〈삼포 가는길〉 등은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신서사이저의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을 젊은이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악가요는 그간 소수 매니어 혹은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 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의고적·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주요 국악인,
향토 국악인
국악을 즐겨 부르며 예향(藝鄕) 안산 국악의 명맥을 지켜 온 대표적인 안산의 향토국악인으로는 천병희, 주장성, 김수옥, 김석근, 장석준 등이 있다. 이들은 안산 지역이 크게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그윽하고 우아한 가락으로 애환을 달래 가면서 아직도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안산의 기질과 정서를 몸속 가득 체득하고 있는 향토국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천병희는 1985년 한국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천흥과 박해일 등이 이주해와 안산에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할 당시 이들의 활동에 부응하여 안산의 가락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일에도 열중하였다.

김천흥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기능보유자이자 김천흥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 우리 전통음악과 무용을 배웠으며 순종황제가 태어난 지 50년을 기념하는 기념 잔치 때 무동이 되어 순종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

아악부에서 일하며 1932년에는 아악수장이 되었고 해방 뒤에는 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바뀌자 이사 겸 무용부장 및 예술사로 일하였다. 1955년에는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열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2008년 8월 타계할 때까지 우리의 전통무용과 음악을 살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을 받기도 하였다. 남긴 작품으로는 무용극 「처용량」, 「만파식적」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우리춤 이야기』가 있다.

박해일
박해일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재담예능)의 기능 보유자이며 안산 출신이다. 1923년 2월 25일 태어나 1942년 6월 조선연예단에 입단했으며 조하소 선생으로부터 화술, 재담을 사사받았다. 만주국 공연을 진행했으며 민요재담 「잔칫집 풍경」, 「장님타령」 등으로 당시 한창이었던 산림녹화 현장이나 농어촌으로 미신타파 및 계몽을 위한 순회공연을 펼쳤다.

또한 한국국악협회 감사,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를 역임하고 광주비엔날레 개최기념 국가무형문화재 발표공연에도 참여하였다. 한국국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전국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는 등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지난 2007년 10월 21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주, 국악 관련 단체,
한국 국악협회 안산지부
1989년 4월 4일 안산 지역 국악의 발전을 위해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소재 안산시 근로청소년복지회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초대지부장에 국가무형문화재 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인 김천흥을, 부지부장에 박해일·안병덕·천병희를 각가 선임하면서 한국국악협회 안산지부가 출범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한국국악협회로부터 공식인증을 받고 지부조직으로 농악, 민요, 기악, 국극, 무용 등 5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지회 직속 가무단을 창단하였다.

이후로 안산 지역의 고유문화유산인 와상농기와 둔배미놀이 등을 발굴하여 경기민속예술경연대회에 안산시 대표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경기도 대표로 각각 출전했으며 매년 별망성예술제에도 참가하여 국악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1991년 3월 19일에는 소속 회원인 김천흥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양금, 해금 발표회를 열기도 했으며 1993년부터 현재까지 총 14회에 걸쳐 국악 경기소리·서도소리 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국악의 저변확대에 공헌하였다.

2006년 9월에는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서 경기민요, 남도민요, 단소, 한국무용, 사물놀이 등을 강좌내용으로 하는 무료국악교실을 개설하여 14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등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전국청소년 국악경연대회, 동(洞) 대항 농악경연대회, 신인국악무료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국악의 해맞이 경축 창극 「어사와 옹새원」과 연말 불우이웃돕기 자선 국악을 공연하고 있다. 초대 지부장 김천흥, 제2대 지부장 박해일에 이어 제3대 지부장은 박순금, 제4대 지부장은 박미옥이 맡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
안산시립국악단은 1996년 10월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29회의 정기연주회를 개최했으며 청소년 및 시민들을 위한 연간 80여 회의 음악회와 국악강습회도 열고 있다. 그리고 국악을 바탕으로 만든 어린이 연극, 뮤지컬, 재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악제, 작곡축제, 전주소리축제, 제17대 대통령취임식연주 등의 초청연주회, TV나 라디오 등 방송매체를 통한 실황연주 프로그램 참여, 15장의 음반작업 등 열정이 넘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금, 피리, 가야금, 해금, 아쟁, 타악 등 민요 분야 45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산국악동호회
1994년 5월 10일 아름다운 우리가락을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전통국악을 유지 보전하는 데 뜻을 같이 하는 안산 지역사회의 국악 동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산국악동호회를 탄생시켰다. 이들 동호인들은 1994년 국악의 해를 맞아 국악무료강습회를 실시했으며 별망성예술제, 성호문화제 등의 문화행사에도 참여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기타
안산 지역의 기타 국악단체로는 시흥 지역의 초·중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있다. 풍물패는 풍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이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더불어 풍물을 통한 학생 교육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창립했으며 안산시민을 위한 단오맞이공연, 샘두레 제1회 창립공연, 어린이날 축하공연, 제1회 경기도초등교원예술제 등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악아카데미에서는 가야금 교육프로그램을 개설·운영하고 있다. 안산시립국악단원 중 가야금 선생을 강사로 위촉하여 어린이반, 성인반 등으로 나누어 20여 명을 교육하고 있으며 수강생들은 가야금과 연습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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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mxijRqfQh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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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eo2uTjp8iLk-캬바레 경음악 총결산 1집(지루박),2집(디스코),3집(트로트)
***youtu.be/yyC0WZCHn9c-정통 사교춤 경음악 총결산 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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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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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학자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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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음악비평· 생존과 자유』(이소영, 민족음악연구회, 2005)
[한국음악의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소영, 민속원, 2005)
[퓨전국악의 대중화:국악의 대중화와 대중음악화 사이에서」(이소영, 『대중음악』 통권1호, 한울, 2008)
[국악가요 [國樂歌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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