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7일 월요일

대마도, 한국 땅,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대마도, 한국 땅,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거제도에서 본 대마도,

일본 후쿠오카 까지는 138Km이지만 부산까지는 49.5Km의 거리에 있어 맑은 날은 대마도 (쓰시마)의 서해안에서 한국의 산과 거리를 볼 수 있다,

  대마도 우리 땅.  독도가지고 버티는 것은 대마도를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하는 일본의 수작.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무식한 미국 실무자들 때문에 대마도가 일본 지배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한국은 미국 때문에 피해가 많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친일파 정군들이  일본에게  침묵한 결과가  대마도를  내 준 것이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던 지도,



대마도, 독도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 한가운데 한일 사이에 노랗게 떠 있는 섬이 대마도인데,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미국도 인정한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한 1734년 프랑스제작 지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일본 에도시대 대학자 하야시 시헤이(1738~93)이 1785년에 지은 삼국통람도설은 조선, 오키나와, 북해도 3국에 대한 정치지리서이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중 주목할 부분은, 삼국접양지도와 조선팔도지도이다.


김일성 때문에 찾지 못한 대마도. 멍청한 김일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일단 이번에 발견된 고지도부터 살펴보자. 2018년 8월 24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2월11일 일본의 지도 학자 구보이 노리오 교수를 통해 고지도를 입수했다.

이 지도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Kernot이 1790년 탐험에 나서면서  작성했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32, 세로 24센치로 소형 판본이며, 채식인쇄 기법을 사용했다. 지도 상단 중앙에 일본 수도 YEDO, 좌측 하단에 조선의 관리로 보이는 3명이 COREANS, 우측 하단에 거북선으로 보이는 STATE BARGE 라고 적힌 3장 삽화를 첨삭한 것이 특징이다.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위 지도의 빨간색 원안에 표시된 곳이 대마도인데, 한국 해협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는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색깔로 분류했는데, 모두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이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식 발음인 ‘Dagelet(다제레트)’, 울릉도는 ‘Argonaut(아르고노우트)’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J.H.Kernot가 이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일본 자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소장은 “당시 일본인들도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마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적잖이 발견됐다. 대마도는 일본 고지도나 고문서에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했던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발견된 지도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또 세계인들도 오래전부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 고지도에 숨겨진 비밀, 그것은 바로 ‘대마도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정치가.)이 조선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전도' 에는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하여 '일본 영토' 가 아닌 '침략 대상' 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소속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그런데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의, 일본인이 작성한 고지도가 21년 전인 1996년 발견됐습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이 나던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신하들에게 명령해 만든 것으로 독도와 함께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명기돼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영토였던 것으로 알려진 대마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일본에 편입됐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요. 독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일본의 망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려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국 사람들을 경계한다.   양심이  두려운거지,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 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겡싱)의 저서 《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 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사부 영정,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할 때 ‘대동여지도’를 들먹이지 않는다. 왜냐면 독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국(우산도와 울릉도)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계획을 세워 편입한 영토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은 여진족이며 우해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무 상자를 싣고 가 위협으로 굴복시켜 편입시키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어야 할 땅이다. 실효적 지배보다는 역사적인 지배 상태다. 이에 비해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지만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49.5㎞, 히타카쓰항까지 배 타는 시간은 1시간10분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길이 약 82㎞, 폭 약 18㎞에 면적은 거제도 1.7배 크기인 섬이다.

제주보다 가까운 섬 대마도,

1)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와 조선말까지 대마도는 한국의 경상도 계림(신라)의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2) 대마도 원주민들의 혈액 DNA가 한국인과는 100% 동일하여도 일본인들과는 30%가 같지 않다.

3) 대마도를 지배 했던 소씨(蘇)는 진주가 본관인 한국 성씨이다.

4) 삼국시대에는 진도라는 우리의 영토로 불리었다.

5) 신라 때 볼모로 잡혀갔던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된 신라 국사 박제상 공의 순국비가 있다.

6) 고려 창왕(1389년) 때 박위 장군의 지휘로 왜구의 소굴로 변한 대마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대마도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그 후 조선 태조(1396년) 2차 정벌, 세종(1419년) 이종무 장군의 3차 정벌 후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서약서도 있다.

8)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해 만든 지도(팔도전도, 1592년이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나선 군사들에게 내린 하교문,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조선과 대마도를 부자관계로 비유한 퇴계 이황 선생, 순암 안정복 선생의 동사외전, 동사강목, 정약용의 비어고에도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조선 왕조 500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11) 1750년 영조 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의 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는 문구나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 독도,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 국내의 많은 역사 기록문에 명백히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하라! 대마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무력 강점했지만 의병들이 격퇴한 전적비가 남아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영토의 상당 부분을 200년도 안되는 사이에 빼았겼다.   아래 표시된 부분은 하루빨리 우리가 복원해야하는, 조상이 물려준 우리의 영토이다.

대마도는 한국땅,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아랫 사진이 여러분 땅 ~~ 한국땅 대마도입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영토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거 양국 간의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만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최근 이 섬이 한국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19년 12월 8일 일본의 유명 언론 매체 산케이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인들이 대마도에 수많은 땅들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하며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표현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고령화와 과소화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일본인이 없어지고 틀림없이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대마도 땅 매입 소식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한국의 큰 손들이 대마도의 많은 영도를 사들여서 호텔과 민박 등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부동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대마도가 관광지로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무려 40만 명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와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많이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마도에 대해 아직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근거가 존재했습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 팔도총도에 대마도는 경상도에 속한 섬으로 그려졌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830년에도 일본이 만든 조선국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에 이 섬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한 대한민국 땅 독도입니다.


한일 감정으로... 문제는 세계에서 보는 시각이 한국으로 그간 식민지 생활, 그들의 만행으로 잘못됨은 바로 잡히고 반전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수수방관 하에 적당한 대응으로 잠자는 사자 건드려 봐야 이로워질게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조국 내가 지킨다고 발언하는대 어느 국민이 머라하겠소 ! ??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능사는 아닐듯...?

이권 그만 챙기고 나라 위한 발언 한번 해보세요 ....정치인님 ????

일본 측과 대화도 간단합니다 ?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일본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국땅,  

대마도 [大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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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 광산 매각 논란!!!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니켈 광산 매각 논란!!!

당장 팔아야" vs "日 좋은 일만 할 수도"…

정부·광물公 내부서도 팽팽,

"2조 들어간 애물단지 광산,
벌써 1조 손실…손절해야,"

"지금 팔면 日이 헐값 인수,
배터리 핵심 원료 확보해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광물자원공사가 2조1000억원을 투입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암바토비 니켈광산 매각을 놓고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정부와 광물공사는 1조원 가까운 손실을 낸 이 광산을 내년까지 매각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광산이 일본 기업 등에 헐값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 등이 제기되면서 광물공사 이사회 내부에서 매각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일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이 입수한 광물공사의 최근 2년간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사회 참석자들은 암바토비 광산 매각을 놓고 수차례 이견을 드러냈다. 암바토비는 니켈 원광 1억4620만t이 매장된 세계 3대 니켈 광산 중 하나다.

광물공사는 2006년 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지분 33.3%를 보유 중이다. 일본 스미토모상사(지분 47.67%)와 캐나다 셰릿(12%)도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폭발 사고 등으로 생산 차질을 빚으면서 광물공사는 지금까지 1조원의 손실을 봤다. 정부는 광물공사 부채를 줄이기 위해 광산을 내년까지 팔 계획이다.

“한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기 때문에, 이번에 광산을 다 팔아도 결국 언젠가는 다시 해외 자원개발을 시도하게 될 겁니다. 그 때는 각종 기술과 노하우가 전부 사라진 다음이겠죠. 광물 개발은 20년은 돼야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니켈 가격도 뛰는데, 얼마간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암바토비 광산을 안고 가는게 맞다고 봅니다. 특히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 스미토모그룹에게 모든 지분이 헐값에 넘어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광물자원공사 A 이사)

“매년 막대한 손실이 나는데 이걸 어떻게 감당합니까. 이미 2조1000억원이 들어가서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제 값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고요. 하지만 제 값을 받지 못하더라도, 갖고 있으면서 속절없이 손실만 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광물자원공사 B 감사위원)

광물자원공사가 2조1000억원을 투입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산사업을 둘러싸고 매각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정부와 광물공사는 암바토비 광산을 내년까지 매각한다는 방침이다. 이때까지 막대한 손실이 났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니켈과 코발트로 만든 전기자동차 배터리가 ‘제2의 반도체’로 떠오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마다가스카르 니켈 광산…광물公, 지분 매각 착수???

생산사업 보유지분 33% 대상, 유동성 위기 해소될지 촉각



광물자원공사가 마다가스카르에 위치한 광산 지분을 매각한다. 수년 동안 거듭된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광물자원공사는 최근 국외 자산을 매각하기 위해 자문사 선정에 나섰다. 다음달 중순까지 제안서를 받은 뒤 입찰 절차를 속도 있게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우선협상대상자는 늦어도 9월 말께 확정될 예정이다.

이번 매각 대상은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코발트 생산사업 지분 33%다. 포스코인터내셔널(5.87%)과 STX(1%)도 지분 투자에 참여했다. 시장에서는 두 기업도 지분 매각을 위한 옵션 행사에 나설 것으로 전망한다. 그 외 주주인 일본 스미토모(47.67%)와 캐나다 셰릿(12%) 행보는 정해지지 않았다.

공사가 참여한 암바토비 사업은 마다가스카르 중동부 지역 니켈 광산을 개발한 것이다. 2012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원광 1억4620만t이 매장돼 있다. 매년 니켈 6만t과 코발트 5600t을 생산할 수 있다. 지난해 해당 용지에서 생산된 니켈은 3만3736t, 코발트는 2897t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총사업비만 89억달러(약 10조원)에 달해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광물자원공사로서는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재무 부담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말 연결재무제표 기준 공사 매출액은 5140억원, 영업손실은 5051억원이었다. 암바토비 생산사업 법인 당기순손실만 4985억원에 달했다.

공사는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자산 유동화를 꾸준히 시도 중이다. 암바토비 사업뿐만 아니라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 호주 와이옹 광산 지분 매각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인수 희망자가 마땅하지 않고 지분 구조도 복잡해 진척이 더딘 상황이다. 공사는 국부 유출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내 민간 기업과 사모펀드(PEF)에 파는 걸 선호하고 있다. 공사 신용등급은 잇단 국외 투자 리스크로 하락세다.

"암바토비 니켈광산은 한국에 보물, 절대 팔아선 안돼"!!!???

유럽연합 분쟁광물 사용금지 제도화,
배터리 핵심재료 코발트 수급 영향,
정부 방침으로 광물공사 지분 매각 처지,


한국광물자원공사, 포스코대우, STX가 참여하고 있는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 광산의 전경.

최근 유럽연합(EU)에서는 비윤리적으로 생산한 분쟁광물이 들어간 제품에 대해서는 사용 및 판매를 제한하는 제도를 마련 중이다. 코발트는 대표적인 분쟁광물로, 우리나라 차세대 먹거리산업인 배터리(2차전지)에 핵심재료로 사용된다.

광물공사는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에 2차전지 핵심재료인 니켈과 코발트가 생산되는 광산의 주요 지분을 갖고 있는데,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 때문에 지분을 무조건 매각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7일 글로벌 카메이커 볼보에 따르면 곧 출시되는 첫 번째 전기차 XC40 리차지에 특별한 배터리를 사용된다. 이 모델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업체는 LG화학과 중국의 CATL이다.

XC40 리차지에 사용될 배터리의 특별한 점은 분쟁광물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LG화학은 IBM으로부터, CATL은 오라클로부터 블록체인을 활용한 검증시스템을 통해 코발트의 채굴부터 운송, 사용까지 윤리적 문제를 검증받고 있다.

이러한 볼보의 정책은 유럽연합 정책에 따른 것이다. 유럽연합은 오는 2021년부터 분쟁광물 등 고위험군 광물에 대한 지속가능한 구매와 공급망 관리를 의무화한 OECD 공급망 가이드를 법제화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은 코발트를 비롯한 원재료에 대한 투명한 공급망 정보 공개 및 제3자 실사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 폭스바겐그룹은 지난 7월부터 협력사를 대상으로 지속가능 등급제 ‘Sustainabilityrating’을 도입해 지속 가능한 공급망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럽연합의 강력한 광물 사용 제한 정책으로 인해 광물가격이 오르는 것은 물론 수급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반도체를 이을 차세대 먹거리산업인 배터리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배터리업체의 주 생산방식이자, 글로벌 표준이 된 리튬배터리에는 삼원계 원소로 불리는 니켈, 코발트, 망간이 핵심재료로 사용된다. 최근들어 이 광물의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철광석이나 유연탄 같은 광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격이 급상승하고 있다.

한국광물자원공사 코미스(KOMIS)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 국제거래 철광석 가격은 톤당 87달러, 유연탄은 63달러인 반면, 니켈은 1만6235달러, 코발트는 3만5500달러, 망간은 1245달러를 기록했다.

삼원계 광물의 가격이 지금도 비싼 상태이지만, 향후에는 공급 부족으로 상상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해외에서 니켈과 코발트가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생산도 진행 중인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산이다.

이 광산 개발에는 한국광물자원공사(22.5%)와 포스코대우(4%), STX(1%)로 구성된 한국컨소시엄이 지분 27.5%를 보유, 주 운영자로 참여하고 있다. 광산의 매장량은 1억9040만톤이며, 2007년 개발에 착수해 2015년부터 연간 니켈 6만톤, 코발트 5600톤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한국컨소시엄은 생산량의 50%에 대한 처분권까지 확보하고 있어 배터리산업을 육성 중인 우리나라로서는 보물을 확보한 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암바토비 니켈광산은 개발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당 광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많이 나오는 관계로 대규모 정화설비를 설치했는데, 이로 인해 투자비가 많이 소요돼 캐나다 참여사의 경우 지분 일부(12.8%)를 다른 참여사에 매각해야 했다. 한국컨소시엄은 이 지분에 대한 콜옵션 권한을 갖고 있어 이를 행사할 시 지분은 40%대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광물공사는 암바토비 광산 지분 전량을 매각할 처지에 놓였다. 정부의 자원개발공기업 구조조정 방침 때문이다.

광물공사는 지난 10년간 암바토비를 비롯해 해외 광산개발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떠 안게 됐다. 결국 정부로부터 모든 해외 광산을 매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 인해 광물공사는 생산 중인 암바토비 니켈광산, 멕시코 볼레오 동(구리)광산, 중국 희토류 광산을 포함해 총 23개 해외광산을 모두 매각해야 한다.

이러한 정부 방침은 해외 자원시장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며, 실제 매각한다면 향후 엄청난 피해로 돌아올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콩고에서 어린이들을 이용해 코발트를 채취했다고 하는데, 이제 그런 비윤리적으로 채취한 광물은 사용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광물 사용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광물 수급 어려움에 대한 정부의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자원개발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회 논의 중인 광물공사와 광해관리공단을 통합하는 통합공단법에서는 해외 자원개발 업무를 아예 못하게 막아 놓고 있다"며 "민간기업 중심으로 자원개발을 하면 된다고 하는데 민간기업은 당장 수익이 나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않는다. 암바토비 광산은 한국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절대 매각하지 말고 한국의 안정적 광물 수급에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원公 3사 구조조정 '공염불'...24년 부채 55조, 10년전과 같아

가스·광물·석유공사 등 부채 눈덩이! 해외자원개발 실패 여파!??
자원공기업의 부채가 오는 2024년 55조원에 달해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조사됐다. 알짜 자산을 팔아치우면서까지 체질 개선을 꾀하고 있으나 자구 노력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정부가 ‘선(先) 구조조정, 후(後) 지원’ 원칙을 고수하며 한발 물러나 있는 사이 국가 자원개발 역량과 공기업 재무구조가 모두 악화한 셈이다.



미래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광물자원공사·한국가스공사·한국석유공사의 ‘2020~2024년 중장기 재무관리 계획안’에 따르면 이들 공기업의 2024년 총부채 규모는 55조6,362억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국회에서 해외 자원개발 사업 부실 의혹이 드러난 2015년 당시 부채(55조9,000억원)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각사별로 보면 석유공사의 부채는 10년 전보다 2조원 넘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광물자원공사의 부채 감축폭(1조1,976억원)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2015년 자원공사 3사 중 부채가 가장 많던 가스공사 역시 2024년에도 30조원이 넘는 빚을 거의 줄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다.

자원 공기업이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해외 자원개발사업 실패 여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사업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자 정부는 부실자산을 정리해 재무구조를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2010년 전후 연평균 배럴당 100달러를 오르내리던 유가가 2013년 들어 반토막 나면서 부실자산을 처리는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다. 특히 처분하지 못한 해외자산에서 대규모 손상차손까지 발생하면서 경영난이 심화하고 있다. 



석유공사의 경우 2024년까지 1조원대의 손상차손이 발생할 것으로 알려졌다. 급증한 부채를 줄이려 알짜 자산까지 매물로 내놓는 판이지만 재무구조 개선 효과는 불분명하다.

저유가 기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기침체까지 맞물려 제값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헐값에 판다 한들 앞으로의 수익원이 사라지는 터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광물자원공사는 이번 중장기 재무 관리안에 ‘자산 매각 완료 후 자체 수익원이 없는 산업 진흥기관이 될 것’이라고 적시했다. 돈을 벌기는커녕 남은 부채에 대한 이자비용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좀비기업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자원공기업의 재무구조가 재기 불능 상태로 치닫는 데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도 작용했다. 정부는 2017년 1차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지만 ‘선 구조조정, 후 정부 지원’ 원칙을 내세웠다. 자산을 다 팔고 난 뒤에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2차 TF를 조직해 다양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자원 개발을 적폐시하는 여론이 여전한 터라 과감한 지원책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 자원개발 전문가는 “앞서 정부가 이자비용이라도 지원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우량 자산을 헐값에 팔아치우는 것도 국익 차원에서 바람직한지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검찰, 아프리카 니켈광산 개발사업 의혹 본격수사,

광물공사 통해 경남기업에 빌려준 예산 130억원 사용처 추적,
자원외교 비리를 수사 중인 검찰이 아프리카 니켈광산 개발사업 과정에서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20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산 개발사업에 참여한 경남기업이 광물자원공사로부터 130억원을 융자받는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날 오후 서울 동작구 한국광물자원공사 입구.

자원외교 비리를 수사 중인 검찰이 아프리카 니켈광산 개발사업과 관련한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이 사업은 2006년부터 1조4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 투자가 이뤄졌으나 2020년까지 적자가 예상돼 이명박 정부 자원외교의 실패작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임관혁 부장검사)는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산 개발사업에 참여한 경남기업이 광물자원공사로부터 130억원을 융자받는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대출목적 이외의 다른 용도로 쓰지 않았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검찰은 광물자원공사로부터 대출 관련자료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아 분석하는 한편 경남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구체적인 자금 사용처를 캐묻고 있다.

검찰은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회계자료를 분석하고 관련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자금흐름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자금 사용처를 확인하는 게 우선 수사대상"이라고 말했다.

광물자원공사는 경남기업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암바토비 개발사업에 뛰어든 2006년부터 2008년 사이 경남기업에 130억원을 빌려줬다. 경남기업이 석유공사를 통해 330억원을 차입한 뒤 횡령한 혐의가 있는 '성공불융자금'과 달리 일반 융자다.

해외자원개발사업법은 외국 광물자원개발에 참여하는 업체에 융자심의회를 거쳐 사업비의 최대 80%를 빌려줄 수 있도록 했다. 검찰은 경남기업이 광물자원공사를 통해 빌린 130억원을 다른 데 쓴 혐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수사진은 융자금 130억원의 흐름을 추적 중이다. 광물자원공사에서 경남기업으로 보내진 융자금은 암바토비 니켈광산 사업 운영권자가 사업비를 요청할 때마다 경남기업의 참여지분율대로 운영권자 측으로 송금되는 게 정상이다.

검찰은 이 같은 융자금 집행 과정에서 누락이 있었는지 등을 경남기업 측 금융계좌에 대한 추적 작업과 광물자원공사 측 제출 자료를 대조하며 확인하고 있다.

검찰이 암바토비 개발사업 수사에 착수함에 따라 지분정리 과정에서 광물자원공사가 경남기업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으로 보인다.

광물자원공사는 2006년 10월 경남기업 등 국내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암바토비 개발사업에 1조9천여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계약 당시 지분구조는 광물자원공사 21%, 경남기업과 대우인터내셔널 2.75%, STX 1%였다.

광물자원공사는 경남기업이 자금사정 악화로 내지 못한 투자비 171억여원을 대신 내주고 납부시한을 연장해줬다. 경남기업이 2010년 사업지분을 매각할 당시 계약조건과 달리 투자금 100%를 주고 지분을 인수하기도 했다. 당시 계약조건대로라면 투자비를 미납할 경우 투자금의 25%만 받고 지분을 반납해야 했다. 이 때문에 광물자원공사는 116억원의 손해를 봤다.

이 과정에서 김신종(65) 전 광물자원공사 사장이 성완종(64) 경남기업 회장의 부탁을 받고 지분을 사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검찰은 경남기업이 러시아 캄차카반도 석유탐사 비용 등 명목으로 빌린 성공불융자금 330억원의 사용처도 계속 추적 중이다. 100억원 안팎이 가족 명의 계좌 등으로 빼돌려진 정황이 포착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다음 주께 성 회장을 소환 조사할 계획이다.

경남기업은 "암바토비 지분매각 당시 워크아웃 중이어서 채권단이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자산매각을 결정한 것이고 특혜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융자금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융자금은 지분율에 따라 적법하게 집행됐고 유용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테슬라도 니켈 확보전 나섰는데, 한국은 왜 니켈 광산을???
차세대 배터리 하이니켈이 대세,
세계적으로 수요 급증하지만 재무악화 광물자원공사, 정부 압박에 광산 매각,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분기 실적발표 후 니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광산 회사는 니켈을 더 많이 채굴하십시오.

니켈을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채굴한다면 테슬라는 오랜 기간동안 엄청난 계약을 선사할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다시 한번 니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니켈은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로 떠오르면서 몸값이 치솟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분기 실적발표 후 니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전세계 배터리 업계가 니켈 등 원자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정작 한국은 보유하고 있던 니켈 광산 매각을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니켈 광산 #광물자원공사 #니켈 광산 매각 논란 #당장 팔아야 #日 좋은 일만 할 수도 #산업통상자원부 #한국광물자원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석유공사 #2020~2024년 중장기 재무관리 계획안 #정부·광물公 내부서도 팽팽 #2조 들어간 애물단지 광산 #벌써 1조 손실 #손절해야 #지금 팔면 日이 헐값 인수 #배터리 핵심 원료 확보해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광물자원공사가 2조1000억원을 투입한 #마다가스카르 니켈 광산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암바토비 #니켈광산 매각 논란이 격화되고 #중장기 재무 관리안 #자산 매각 완료 후 자체 수익원이 없는 #산업 진흥기관 #좀비기업 #자원 공기업이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해외 자원개발사업 실패 여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사업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자 #정부는 부실자산을 정리해 재무구조를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2010년 전후 연평균 배럴당 100달러를 오르내리던 유가가 2013년 들어 반토막 #부실자산을 처리는 기약 없이 지연되고 #처분하지 못한 해외자산에서 #대규모 손상차손까지 발생하면서 경영난이 심화 #석유공사의 경우 2024년까지 #1조원대의 손상차손이 발생할 것 #급증한 부채를 줄이려 #알짜 자산까지 매물로 내놓는 판 #재무구조 개선 효과는 불분명 # 중장기 재무 관리 #경기침체 #석유공사의 경우 2024년까지 1조원대의 손상차손이 발생 #자원 공기업이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해외 자원개발사업 실패 여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 #자원 공기업이 부채의 늪 #자원公 3사 구조조정 #공염불 #24년 부채 55조 #10년전과 같아 #가스·광물·석유공사 #부채 눈덩이 #해외자원개발 실패 여파 #정부 방침은 해외 자원시장 #자원개발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회 논의 중인 광물공사와 광해관리공단 #통합하는 통합공단법 #공기업의 2024년 총부채 규모는 55조6,362억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국회에서 해외 자원개발 사업 부실 의혹이 드러난 2015년 당시 부채(55조9,000억원)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암바토비 니켈광산은 개발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당 광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많이 나오는 관계로 대규모 정화설비를 설치 #투자비가 많이 소요돼 캐나다 참여사의 경우 지분 일부(12.8%)를 다른 참여사에 매각해야 했다 #한국컨소시엄 #이 지분에 대한 콜옵션 권한을 갖고 있어 이를 행사할 시 지분은 40%대로 늘어나게 된다 #광물공사는 암바토비 광산 지분 전량을 매각할 처지 #정부의 자원개발공기업 구조조정 방침 때문 #테슬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경남기업

2020년 9월 6일 일요일

라면, 1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라면, 1

라면의 기원은 1870년대 일본 요코하마 중화거리, 고베 난킨마치 등의 중국요리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과 1922년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돼지뼈, 닭고기, 야채,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수프로 양념을 하여 삶은 중화면()과 함께 먹는 것이 대체적이다. 

라면이 많은 인기를 끌자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서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가미하여 먹은 것을 인스턴트라면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인스턴트라면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58년으로 산시쇼쿠산(サンシㅡ:현재 닛신식품)에서 생산한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이 시작이었다.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가 면을 기름으로 튀기는 것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인스턴트라면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60년경으로, 현재 여러 식품회사에서는 각각 특색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 시판한다. 라면은 건조식품이므로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법,
① 배합공정:소맥분과 배합수를 혼합하여 반죽을 만든다.
② 면대형성:롤러로 압연하여 면대를 만든다.
③ 제면공정:제면기로 국수 모양을 만들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하여 라면 특유의 꼬불꼬불한 형태로 만든다.
④ 증숙공정:스팀 박스를 통과시키면서 α화(호화)시킨다.
⑤ 성형공정: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납형 케이스에 넣는다.
⑥ 유탕공정:150℃ 정도에서 튀기고 수분을 휘발시킨다.
⑦ 냉각공정:상온으로 냉각시킨다.
⑧ 수프제조공정:주원료를 고압처리하여 진공농축, 진공건조시킨 다음 각 원료를 혼합하여 포장한다.
⑨ 포장공정:수프를 첨부하여 완제품으로 포장한다.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박정희 대통령은 제작비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 고춧가루를 투입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쌀을 아끼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 캠페인과 정책은 시너지를 이루며 라면 붐을 일으킨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맵고 짠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의 탄생이었다. 중량 100g, 가격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을 통해 삼양사는 6년간 매출액 면에서 300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삼양의 성공이 시발점이 되어 롯데공업(농심),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라면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라면을 대체 식품이라기보다 기호식품으로 인식하게 되고,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오히려 쌀의 소비가 늘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은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한국.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라면의 붐은 1989년 면을 공업용 쇠기름으로 튀겼다는 보도로 촉발된 ‘우지파동’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삼양과 오뚜기는 폐업 직전까지 몰리고 비단 특정 회사만이 아닌 라면 전체에 신뢰를 잃은 소비자 때문에 라면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라면 파동은 기업들이 라면의 고급화ㆍ다양화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220개 종의 라인업과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이루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라면은 분명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납면과 라멘과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분화된 상태로, 그것의 계보를 따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라는 점, 그리고 라면의 시초였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입국이라는 점을 그 계보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후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수프를 별첨한 인스턴트 식품. 휴대용식품으로 많이 사용 된다.
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또는 액상스프를 별첨하여 만든 즉석식품의 하나.,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세계 최고다. 국민 1인당 5일에 한 번, 1년에 80번 출출한 배를 채워준다. ‘신라면’의 경우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월까지 누적 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다.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1만 8000개 높이와 맞먹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따르면 국내 라면시장은 2010년 말 현재 1조 9500억 원 수준에 이른다.


간편식의 대명사인 라면. 값싸고 조리하기 쉬워 ‘제2의 식량’으로도 불린다. 다양한 요리와 잘 어울려 라면 조리법도 무궁무진하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cm. 한 봉지에 보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가 총 길이는 약 50m이다. 라면은 꼬불꼬불한 면발이 뭉쳐져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돼 있다.

면발은 왜 꼬불꼬불한 걸까. 작은 봉지에 넣으려면 긴 면발보다 최대한 꼬불꼬불 뭉쳐 있는 면이 나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하면 면이 잘 부서지지 않는다. 조리 시간이 단축되고 면이 더 쫄깃쫄깃해 맛도 더 좋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잘 튀겨진다.

라면에는 방부제가 첨가돼 좋지 않다는 것은 오해다. 라면의 경우 면의 수분 함량이 10% 이하(대부분은 4~8% 정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미생물이 번식하기 어렵다.

라면은 중국의 납면(, 중국 발음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길게 뽑아낸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타자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라미엔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인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 중국식 라미엔에 일본 맛이 더해져 일본식 라멘이 됐다.

라면은 1958년 8월 25일 안도 모모후쿠(, 1910~2007)가 개발했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심각한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도가 설립한 닛신식품()이 국수 면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섞은 아지스케면()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판한 것이 라면의 시초다. 제품명은 치킨라멘. 뒤이어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조식품()이 가세했다.

당시 라면은 아지스케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묘조식품은 이 점을 보완해 1961년 현재와 같은 분말스프를 첨가한 라면을 첫 생산했다. 이것이 오늘날 라면의 모태가 됐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 산업은 급성장했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등장하면서 조리와 휴대의 간편함을 극대화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1963년도 최초의 삼양라면 ⓒ삼양식품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삼양라면 초기 광고 ⓒ삼양식품,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신요코하마라면박물관,


출처 ^ 참고문헌,
[삼양라면
[농심라면
[네이버 지식백과]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갈릴레오 SNC)
[게티이미지 코리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물의 민낯
[발명상식사전
[SERICEO - 잡동사니 해부학
[doopedia.co.kr
[우리나라 농심이 라면을 처음 만들었다??? (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 2010..,)

#라면 #한국식 라면 #삼양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삼양라면 #농심라면 #인스턴트 라면 #북미지역에서 BTS 등으로 대표되는 한류 문화의 확산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으로 튀긴 꼬불꼬불한 유탕면과 국물을 만드는 수프가 첨부돼 있다 #1966년 3월 21이라는 제조일자 #최고의 맛 #정확한 양 #최선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써 있다 #라면은 일본의 명성식품주식회사와 기술 제휴하여 만든 제품으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삼양라면 1980년대에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 #맵고 짠 한국식 라면의 폭발적인 성장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한국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코로나19로 수출 여건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치 라면 수출 #김종구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관 #국가별 전략 품목을 선정 #민간과 정부가 협력해 온라인 비대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결과 농식품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 #장기보관 #가정 내 간편식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일본·중국 주요 수출대상국 #주요 수출대상국에서 큰 폭으로 증가하여 전년 동기대비 36점7% 증가한 4억 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 #소스류 #쌀 가공식품 #즉석밥 #떡볶이 #가정에서 요리에 활용되는 고추장 등 장류의 인기가 오르면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닭고기는 홍콩·미국에서 간편식 삼계탕 수요가 증가했으며 베트남에서 닭가슴살 인기가 오르면서 5000만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침체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면의 종류 #유탕면 #호화건면 #숙면 #유탕면은 가장 기본형태의 라면으로 기름에 튀긴 면 #호화건면은 한번 익힌 면을 다시 말린 것을 말한다 #숙면은 반쯤 익혀서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상태에서 포장한 면이다 #용도에 따라 #비빔면 #컵라면 #라면사리 등으로 나눌 수 있어 비빔면은 비벼 먹을 수 있게 얇고 꼬들꼬들한 면으로 만들어지고 #컵라면은 끓이지 않고 뜨거운 물을 부어도 완전히 익을 수 있게 면의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라면사리 #음식점에서 부대찌개나 전골 등에 추가해서 먹는 것 #분말 수프와 건더기 수프 없이 면만 포장하여 판매한다 #조리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