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이라 명명하였다.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
-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도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책에는 세종어제 서문과 훈민정음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합자해, 용자례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목판본
[ 木板本 ]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하여 판목(版木)에 글자를 새겨 찍어낸 책의 총칭. 각판본(刻板本) · 각본(刻本) · 참본(塹本) · 조판본(雕板本) · 조본(雕本) · 칠본 · 누각본(鏤刻本) · 누본(鏤本)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판목은 대추나무 · 배나무 · 가래나무 등의 판자(梓子)를 소금물〔염빙(鹽氷)〕에 담근 후 말려서 판이 뒤틀리거나 비틀어지지 않게 하고, 또한 글자 새기기도 훨씬 쉽도록 만든다. 이렇게 만든 판목에 글자를 새긴 것을 목판(木版) 또는 책판(册版)이라 한다. 또한 정판(整版)이라고도 일컫는다. 판각(版刻)과 간행(刊行)의 절차는 우선 판각을 위하여 판하용(版下用)으로 정서(淨書)한 책 또는 이미 간행된 책을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투시(透視)되는 반대의 자획(字畫)과 판식(版式)을 각수(刻手)가 새긴다. 판각이 끝나면 먹(墨)을 자면(字面)에 균일하게 칠하여 종이를 놓고 그 위를 부드러운 물질로 고루 가볍게 때리거나 문질러서 찍어 낸다.
인쇄가 끝나면 세정(洗淨)하여 말린 뒤 목궤(木櫃) 등에 넣어 통풍이 잘 되는 높은 건물에 보존한다. 목판에 의한 인쇄 수단이 활자판에 의한 그것 보다도 먼저 기원되어 발달하였기 때문에그 초기의 고간본(古刊本)은 모두 목판본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현재 실물이 전하여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 이전의 간행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 등이 있다. 목판은 활자판에 비하여 책의 간행 부수에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무한정으로 찍어 낼 수 있으며, 또한 오래 보존하면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찍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목판본과 활자본을 식별하는 방법은 다음의 여러 구분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인쇄가 끝나면 세정(洗淨)하여 말린 뒤 목궤(木櫃) 등에 넣어 통풍이 잘 되는 높은 건물에 보존한다. 목판에 의한 인쇄 수단이 활자판에 의한 그것 보다도 먼저 기원되어 발달하였기 때문에그 초기의 고간본(古刊本)은 모두 목판본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현재 실물이 전하여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 이전의 간행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 등이 있다. 목판은 활자판에 비하여 책의 간행 부수에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무한정으로 찍어 낼 수 있으며, 또한 오래 보존하면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찍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목판본과 활자본을 식별하는 방법은 다음의 여러 구분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구분 | 목판본 | 활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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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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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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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뚜름한 것이 많고, 거꾸로 된 것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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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열(字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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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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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삐뚤하여 정연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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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간(字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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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자와 아랫자가 물려 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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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자와 아랫자가 물려 있지 않고 좀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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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字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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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치 않으며 동일한 것이 없다. 다만 활자본을 정교하게 복각한 경우에 한하여 비슷한 자체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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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하고 동일한 것이 판면에 빈번히 나타난다. 그러한 목활자본인 경우는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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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字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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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기나 가늘기가 일정치 않고 도각(刀刻)의 흔적과 실수가 있으며 판각이 오래 된 것은 목륜(木輪)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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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기나 가늘기〔태세(太細)〕 가 고르고, 도각의 흔적과 목륜이 없다. 그러나 목활자본인 경우는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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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색(墨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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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거나 엷음이 없이 순연(純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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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거나 엷음의 차이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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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魚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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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와 계선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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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와 계선이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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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界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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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끊긴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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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곳이 많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굴곡(屈曲)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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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곽(匡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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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四周)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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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판(組版)하기 때문에 사주의 어딘가에 공극(空隙)이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고착(固着)된 것도 있으므로 절대 적인 것은 아니다. (예) 계미(癸未)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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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본, 活字本.
고려 말기의 승려 경한이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경한이 입적하기 2년 전인 1372년(공민왕 21)에 직접 초록한 수고본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활자를 조판하여 찍어낸 책.
내용
이 때 활자는 한 자 또는 관용어를 몇 자 붙여 주조 또는 제작한다. 동의어로 활인본(活印本)·패인본(擺印本)·배인본(排印本)·배자본(排字本)·취진자본(聚珍字本)·취진본·일자판본(一字版本) 등이 쓰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패인본은 우리 나라의 문헌에 쓰이고 있는 용어이다.
동양에서 활자본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북송의 경력연간(慶曆年間, 1041∼1048)이다.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 夢溪筆談≫에 따르면, 필승(畢昇)이라는 사람이 고안하여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로 찍은 책이 최초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교니활자는 찰흙으로 만들어서 오래 쓸 수 없었고, 또 조판이 까다로워 실용하지 못하여 하나의 발명작으로 그치고 말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조에 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창안시기가 언제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3세기에 주자인쇄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고려의 무인정부가 수도 개성에서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강화로 피난한 1239년(고종 26)에 다시 뒤집어 새긴 책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전란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하여 무신정부의 제1인자인 최이(崔怡)가 직접 간행하게 한 것이다. 새김이 정교하여 13세기 전기의 중앙관서에서 찍어낸 주자본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천도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화로 피난한 뒤에는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국가전례서(國家典禮書)인 50권 거질의 ≪상정예문 詳定禮文≫을 28부 주자로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자인쇄는 원나라의 지배로 문화와 교육이 위축되자 자연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이르러 원나라가 신흥세력인 명나라에 의하여 북쪽으로 쫓기고, 국내에서 반원사상(反元思想)과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되자, 그 전처럼 서적포(書籍鋪)를 두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에 걸쳐 책을 고루 찍어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를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1392년 정월에 그것이 제도에 반영되어 다시 서적원이 설치되고, 주자인쇄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관주인쇄가 마비되었던 사이에는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사원에서 주자를 만들어 활자본을 찍어냈다.
이것은 중앙관서가 주자인쇄한 불서를 통하여 활자인쇄의 이로운 점을 깨닫고 사찰에서 주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예로서 청주목의 흥덕사(興德寺)에서 1377년(우왕 3) 7월에 주자로 찍은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을 들 수 있다.
활자의 주조 및 조판기법이 중앙관서의 주자본보다는 확실히 떨어지고 조잡하여 사주본(寺鑄本)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렇듯 치졸한 고려사주본이지만, 현재 실물이 전해지고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유일한 금속활자본인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자못 괄목할 만하게 발전했다. 태종이 1403년에 첫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로 찍은 것이 계미자본(癸未字本)이었다. 고려 말기의 사주본보다 많이 개량되었지만, 아직 기술이 미숙하였다. 그런 조건에서도 활자로 책을 찍어 국내에 실비로 보급하였으니, 인쇄문화사의 시각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활자인쇄의 기술은 세종이 즉위하여 1420년에 두 번째로 개주하여 찍은 경자자본(庚子字本)에서 2단계로 발전했고, 세번째로 1434년에 개주하여 찍은 갑인자본(甲寅字本)에서 그 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막론하고 크기를 한결같이 똑같게, 그리고 네모를 평정하게 정성껏 주조하였기 때문에 조판에서 점착성 물질인 밀랍 대신 대나무 등을 깎아 빈 데를 메워 조립식으로 손쉽게 판을 짜서,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서 시커멓고 진하며 인쇄가 한결 아름답다. 또한, 이 때 처음으로 한글활자를 주성하여 갑인자병용 한글활자본을 찍어냈다. 갑인자가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인 반면 이 한글활자는 강직하게 직선으로 운필된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이 두 활자가 조화 있게 배자된 활자본을 보면, 그 우아정교도는 우리 나라의 동활자본 중 백미임을 자랑할 만하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 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져 다양하게 책이 찍혔다. 활자 계보에 오른 금속활자로 찍은 것만도 그 종류가 35종에 이른다.
이들 활자본은 재료가 구리·연·무쇠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나무와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필서체 또는 행서체로서 획의 흐름이 자재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인서체로서 획의 연결이 직선적인 것도 있으며, 또 활자 모양이 크고 획이 굵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모양이 작고 획이 가는 것도 있는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활자본은 중앙관서에서만 찍어낸 것이 아니라 지방관서와 서원·사찰과 같은 사사기관, 그리고 특권층에 있는 개인과 민간인들까지, 도처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찍어 각계각층의 수요를 충당하여 주었다.
특히, 민간이 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책은 그것이 비록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민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고루 찍어 서민의 독서와 면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니,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참으로 크다. →책
금속활자,金屬活字.
고려사주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고려사주활자는 고려시대 사찰에서 주조한 금속활자로 1377년 흥덕사에서 주자하여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주자(鑄字)라고도 한다. 금속활자는 재료에 따라 동활자(銅活字)·철활자(鐵活字)·연활자(鉛活字) 등으로 나뉜다. 그 중 동활자는 놋쇠활자를 말하며, 가장 많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 합금의 성분은 구리·아연·주석·납·철 등으로 되어 있는데, 활자마다 구성비율이 일정하지 않다. 철활자는 무쇠활자라고도 하며 관서와 민간에서 만든 것이 몇 종 있다. 연활자는 주석활자라고도 일컬으며, 옛 활자로는 1종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간 주장한 설로는 ‘11세기 기원설’, ‘1102년 기원설’, ‘12세기 중엽 기원설’이 있으나 모두 올바른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었다.
그 중 11세기 기원설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명(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나타난 ‘연참(鉛槧: 詩文을 草하는 일)’을 ‘연판(鉛版)’·‘연활자판(鉛活字版)’·‘금속활자판(金屬活字版)’의 차례로 임의적인 해석을 하고, 고려의 교장본(敎藏本)을 모두 금속활자본으로 본 데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연참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해설하였듯이 “문장의 오류를 바로잡아 판각(板刻)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고, 또 고려의 교장본이 모두 목판본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옳지 않은 주장이라 하겠다.
1102년(숙종 7) 기원설은 ‘고주법(鼓鑄法)’으로 동철을 녹여 엽전을 주조하여 재신, 문·무 양반, 군인들에게 나누어 내려준 바 있었는데, 여기서 고주법을 바로 금속활자의 주조술로 간주한 데서 빚어진 착각이다. 그 착각은 고(鼓)라는 글자를 ‘북 고’로 알고 주물틀인 거푸집을 북 모양으로 만들어 주물 부어내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고주법은 일찍이 한(漢)나라 때부터 행해진 것으로 여순(如淳)이 주해하기를 ‘동철을 녹이기 위하여 불을 붙여 벌겋게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자전(字典)에서는 ‘불을 붙여 일으킨 도가니에 풀무질하여 쇠붙이를 녹이는 것’이라고 자세하게 풀이하였다. 이와 같이 고주법은 풀무질로 불을 벌겋게 일으켜 도가니에서 동철을 녹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거푸집에서 주물을 부어내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고주법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적용해 왔다.
그런데 옛적의 금속활자 인쇄는 동철을 잘 녹여 활자를 부어내는 주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어낸 활자를 판에 고착시키는 점착성 물질(粘着性物質)과,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먹물을 아울러 개발해야 하는 등 이들 3요소가 반드시 갖추어져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2세기 중엽 기원설은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에 찍힌 소장인의 하나를 ‘이영보장(李寗寶藏)’으로 보고, 이영이 1124년(인종 2)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휘종(徽宗)에게 「예성강도(禮成江圖)」를 바친 인물이었다고 논증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소장인을 잘못 판독한 것이며, 그 세부적인 논증도 무리하게 시도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고문진보대전』은 중국에서 13세기 후반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증편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들어왔으며 1367년(공민왕 16) 또는 1374년에 처음으로 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서명에 ‘대전(大全)’이 붙여진 것은 명나라의 사신인 예겸(倪謙)이 1450년(세종 32)에 우리나라에 가지고 온 책 이후에 간인(刊印)된 판본부터라는 것도 밝혀졌다.
그리고 이 책은 글자 획에 거친 칼자국이 완연하게 보이는가 하면, 인쇄기술이 미숙하다. 그러나 판짜기는 완전한 조립식으로, 둘레의 모퉁이와 계선(界線)이 모두 떨어지고 윗글자와 아랫글자 사이가 여유 있게 떨어져 있으며, 매줄의 글자 수도 일정하게 19자이다. 이것은 1434년에 주조된 갑인자로 찍어낸 활자본 이후에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지방활자본으로 추정되므로 12세기 중엽 기원설을 뒷받침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한 사례는 13세기 전기에 나타나고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중조본(重彫本)의 권말에 있는 최이(崔怡)의 지(誌)에 의하면, “이 책은 선문(禪門)에서 가장 긴요한 책인데, 전하는 것이 드물어 얻어 보기 어려워 주자본(鑄字本)에 의거하여 1239년(고종 26) 다시 새겨 널리 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글에 의하여 금속활자가 1232년 강화로 천도하기 이전인 13세기 초기 개경에서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바탕책을 뒤집어 새긴 것이지만, 중앙관서가 정교하게 새겼기 때문에 바탕이 된 관주활자본(官鑄活字本)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 인판(印版)에 같은 글자의 동일한 꼴이 나타나지 않지만,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비교적 일정하고 가지런하며, 글줄이 곧바르지 않고 좌우로 비뚤어져 있다.
또 특정 글자가 유달리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으며, 옆줄이 잘 맞지 않고 윗자와 아랫자의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13세기 전기에 중앙관서가 실시한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그런대로 파악할 수 있다.
피란지인 강화에서는 천도할 때 황급한 나머지 예관(禮官)이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50권 거질(巨帙)의 국가 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최이가 가지고 온 한 질의 책에 의하여 주자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이규보(李奎報)가 진양공(晉陽公) 최이를 대신하여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로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후집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군의 침략에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는 난리중인데도 이렇듯 주자로 손쉽게 거질의 책을 찍어냈다는 것 또한 천도 이전에 이미 개경에서 주자인쇄를 경험하여 그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중앙관서의 금속활자 인쇄는 그 뒤 원나라의 굴욕적인 지배로 학문이 위축되자 자연 그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원나라가 중원에서 신흥세력인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기자 우리 국내에서도 배원사상이 싹트고 주권 복구의식이 대두되었다.
이에 힘입어 마침내 학계에서도 종전처럼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책은 물론 의방서·병서·율서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찍어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좀 늦기는 했지만, 1392년 정월에 제도상으로 조처(措處)되어 서적원이 생기고 주자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굴욕적인 정치 지배를 받음으로써 중앙관서의 주자인쇄 기능이 마비된 사이에 있었던 실로 중요한 일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찰이 활자를 주조하여 불교서적을 찍어낸 점이다. 이것은 중앙관서에 의해 이루어진 주자인쇄의 이로운 점이 사찰에까지 영향을 끼쳐 이와 같이 주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던 것이다. 그 인쇄물로는 1377년 7월 청주목(淸州牧)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興德寺)가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들 수 있다.
그 인본을 살펴보면 글자의 먹색에 진하고 엷음의 차이가 심하며, 특정 글자가 유달리 옆으로 기울어지고 글줄이 곧바르지 않다. 본문 중에 거꾸로 식자되거나 인쇄중에 탈락된 것이 있으며, 또한 탈락된 것을 뒤에 붓으로 써 넣은 것도 있다. 약간의 부족한 글자를 보충한 것을 제외하고는 글자획에 칼로 새긴 자국이나 나뭇결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초기의 치졸한 금속활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그 주조방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한 인판(印版)의 같은 글자에 동일한 꼴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활자의 모양이 정교하게 주조된 것이 있는가 하면 주조를 잘못하여 그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거나 일그러지고 획의 일부분이 끊긴 것도 있으며, 주조 과정에서 생긴 기포의 흔적과 너덜이가 붙어 있는 것도 있다.
활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각 줄의 글자 수가 18∼20자와 같이 한두 자의 드나듦이 생겨 옆줄이 맞지 않고 윗자와 아랫자의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관주활자(官鑄活字)와 같이 활자의 크기와 꼴을 꼭 같게 다량 생산하는 주물사(鑄物沙)의 방법으로 주조한 것이 아니라, 사찰이 전통적으로 적용해 온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주조한 사주활자본(寺鑄活字本)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고려의 현존 활자로는 개경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복()’ 활자 한 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활자 꼴이 가지런하지 않고 글자획이 고르지 않으며, 또한 활자 네 변의 길이가 앞뒤로 차이가 있다. 밀랍주조법에 의한 특징을 나타내 준다. 이 활자는 뒷면이 타원형으로 옴폭 파져 그곳에 밀랍이 꽉 차서 굳으면 인쇄 도중 움직이지 않고, 또한 동의 소비량을 줄이는 단계로 개량한 점에서 주목된다. 고려 금속활자 주조 및 조판 기술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실물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시대에 와서 금속활자는 세계 인쇄문화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발달하였다. 1403년(태종 3)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수개월에 걸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계미자(癸未字)이다.
계미자본과 고려 말기의 사주활자본(寺鑄活字本)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비교해 보면, 활자의 주조술이 밀랍을 이용한 주조법에서 주물사를 이용한 주조법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에 활자가 비교적 고르고 동일한 글자의 모양이 같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고려의 ‘복’ 활자와 비교해 볼 때도 활자 뒷면을 뾰족하게 개량하여 밀랍에 잘 꽂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 기술이 미숙하여 인쇄능률이 저조했지만, 이후 금속활자 주조술의 개량과 인쇄술 발달의 첫 단계가 되었다.
1420년에 주조된 경자자(庚子字)에 이르러 두번째 단계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해 그보다 작으면서도 글자획을 박력 있고 예쁘게 주조한 것이며,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어 서로 잘 맞도록 개량하였다. 그리하여 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고 매우 해정(楷正: 글자획이 바름.)하여 인쇄 능률이 크게 올라 계미자의 하루 인출 능률이 ‘수지(數紙)’인 데 비하여 경자자는 ‘이십여 지’로 늘어났다.
조선시대에 세번째로 개량된 활자는 갑인자이다. 앞서 주조한 경자자의 글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조금 크고 해정한 필서체 활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큰 활자와 작은 활자의 크기가 서로 같고 네모가 평정하여, 옆줄이 정연하게 일직선을 이루고 글자 사이도 일정한 공간을 여유 있고 늠름하게 유지하고 있다. 조판에서는 대나무 등을 사용하여 빈 데를 메우는 완전조립식으로 발전시켰다. 먹물도 진하고 잘 묻게 만들어 내어, 한결 까맣고 윤이 나서 인쇄가 아름다웠다.
이와 같이 금속활자는 그 주조·조판·인출의 기술이 갑인자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한글 활자가 주조, 병용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 한글 활자는 근래의 인서체에서 보는 바와 같은 고딕체의 큰 자와 작은 자로, 갑인자의 유려하고 부드러운 필서체와 조화 있게 배자되어 찍힌 인본을 보면, 그 우아 정교도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본 중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세종 때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졌다. 활자 계보에 오른 금속활자만도 그 종류가 무려 35종에 이른다. 우리나라 명필가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활자가 17종 있는가 하면, 중국 각 역조의 간본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것이 18종이나 있다.
활자를 재료별로 보면, 동활자가 주로 만들어졌고 연활자와 철활자도 주조되었다. 활자를 주조한 주체별로 보면, 주로 관서에서 만들어 냈지만, 민간에서 만들어 낸 활자도 있었다. 또 활자의 모양은 네모가 평정하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뒷면을 고려 때보다도 더욱 옴폭 들어가게 하였다. 다양한 종류의 활자가 나왔지만 그 기술은 갑인자를 능가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 때는 활자왕국으로 군림할 수 있는 터전이 구축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나온 각종 금속활자본을 조사, 비교해 보면 그 주조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대 또는 사찰, 민가 및 관서에 따라 각각 다르므로 조선시대의 고도로 발달된 관주활자의 주조방법으로 일관된 설명을 할 수 없다.
사찰에서 비교적 근대에 이르기까지 습용해 온 금속활자의 주조방법은 활자 모양으로 만든 밀랍에 글자를 새기고 녹인 쇳물의 열에 견딜 수 있도록 도가니 만드는 흙과 질그릇 만드는 흙을 잘 섞어 반죽하여 덮어 싸서 주형(鑄型)을 만들어 구운 다음, 녹인 쇳물을 부어 활자를 조성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밀랍을 이용한 주조법은 그 주형을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동일한 글자에서 같은 모양의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까지 주로 민간에서 사용해 온 활자의 주조방법도 있는데, 이는 『동국후생신록(東國厚生新錄)』에 나타나 있다. 질그릇 만드는 흙을 곱게 빻아서 잘 이겨 나무판 위에 다져 까는데, 그 판의 네 가장자리는 모두 둘레를 하였다. 다져 깐 흙이 고루 판판해지면 한낮에 볕에 쪼여 반쯤 말린다.
또 얇은 닥종이에 크고 작은 글자를 해서(楷書)한 다음, 밀랍을 녹여 칠하여 판 위에 덮어 붙이고 각수(刻手: 조각을 업으로 하는 사람)로 하여금 새기게 한다. 다 새기면 쇠를 녹여 그 쇳물을 국자로 떠서 판 위에 만든 홈길을 따라 옴폭 새긴 곳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고루 판판하게 하여 식힌 다음, 판 위의 것을 들어내서 하나씩 잘라내어 줄로 갈고 다듬어 활자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완성시킨다. 이와 같은 찰흙을 이용한 주조법도 동일한 글자에서 똑같은 모양의 활자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발달된 관주활자 주조법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알 수 있다. 먼저 바탕글자를 정하고, 인쇄할 책에서 필요한 크고 작은 글자를 파악하여 글씨를 쓰게 하거나, 이미 간행된 책을 자본(字本)으로 삼는 경우는 소요되는 글자를 가려내고 부족한 글자는 비슷한 글자 모양으로 보사(補寫)시킨다. 그런 다음 바탕글자를 나무판에 붙이고 각수로 하여금 새기게 한다.
나무는 대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며, 글자를 새기면 하나씩 잘라내어 네 면을 잘 다듬어서 크기와 높이가 일정하도록 정밀하게 손질한다. 이 때 나무판은 목장(木匠)이 맡고, 글자 새기는 일은 각자장(刻字匠)이 맡는다.
한편, 주장(鑄匠)은 인판에 고운 갯벌흙인 주물사를 가득 채워 다지고 면을 판판하게 한 뒤 나무에 새긴 어미자를 하나하나 박고 잘 다져 옴폭 들어간 글자 자국을 만든다. 그 글자 자국이 다 만들어지면 쇳물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홈길을 만든다.
이어 두 개의 인판을 합하고 뚫린 한 개의 구멍으로 녹인 쇳물을 쏟아부어 찍힌 자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한다. 쇳물이 굳은 다음 인판을 분리하여 홈길에서 굳어진 가지쇠에 달린 활자를 들어내어 두들겨 하나씩 떨어지게 하거나 떼어낸다. 떼어낸 활자를 줄로 하나하나 갈고 다듬어서 완성시킨다.
이 주물사를 이용한 주조법은 일정한 어미자를 만들어 필요한 만큼 주형을 찍어 활자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 글자 모양이 모두 똑같게 된다. 이는 조선의 관주활자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옛 금속활자는 1883년(고종 20)에 설치된 박문국(博文局)에 일본에서 신식 연활자가 도입된 이후 병용되다가 서서히 대치되어 한말에 이르렀다. 그 마지막 인본은 1914년에 개최된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에 전시되었던 임진자본(壬辰字本) 『청구시초(靑丘詩鈔)』가 될 것이다. →활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
사람들은 금속 활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 구텐베르크라는 독일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보다 78년이나 앞서 고려에서는 이미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틀에 배열한 후 인쇄하는 발전된 방식이 사용되었어.
사람들은 금속 활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 구텐베르크라는 독일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보다 78년이나 앞서 고려에서는 이미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틀에 배열한 후 인쇄하는 발전된 방식이 사용되었어.
이때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은 전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1)되었어.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야. 줄여서 《직지》라고도 부르지.
백운화상 스님이 불교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펴낸 책이야.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경의 내용을 정리하여 상·하 2권으로 엮었는데,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곧 부처님의 마음이 된다는 게 주요 내용이래.
《직지심체요절》은 지금 어디에?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 유산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없어. 조선 고종 때 주한 프랑스 대리 공사로 근무한 꼴랭 드 뿔랑시가 가져갔는데, 그 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에게 넘어갔대. 1950년에 그가 죽고 나서 프랑스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졌어.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 유산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없어. 조선 고종 때 주한 프랑스 대리 공사로 근무한 꼴랭 드 뿔랑시가 가져갔는데, 그 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에게 넘어갔대. 1950년에 그가 죽고 나서 프랑스 국립 도서관으로 옮겨졌어.
이 책은 원래 상·하 2권인데,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어.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남아있어.
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 활자'
고려사주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고려사주활자는 고려시대 사찰에서 주조한 금속활자로 1377년 흥덕사에서 주자하여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금속 활자.
금속을 녹인 뒤 굳혀 만든 활자.
금속으로 만든 활자이다. 무쇠로 만든 철활자, 주석으로 만든 연활자, 놋쇠로 만든 동활자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부터 금속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금속 활자로 만든 인쇄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직지심체요절》을 자랑하고 있다.
금속으로 만든 활자를 조합한 뒤 먹물을 발라 찍어 내면 손쉽게 여러 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글자를 직접 써서 만들 때처럼 더디지 않고, 나무 활자처럼 닳지 않아 편리하다. 하지만 금속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를 만들었다.
고려 시대인 12세기에 이미 금속 활자를 사용하기 시작해, 13세기 초에는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금속 활자로 찍어 냈다는 기록이 있다. 1377년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펴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금속 활자본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줄여서 《직지심체요절》이라고도 부르는 이 책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70여 년이 앞선 것으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직지심체요절》은 상 · 하 두 권으로 발행되었는데, 현재 하권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한 외교관이 가져가서 현재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심화
금속 활자는 조선 시대에 크게 발전했다.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하여 금속 활자를 연구하고 만들도록 했다. 이때 만든 금속 활자는 고려 때보다 모양이 고르고, 책을 펴낼 때 글자를 짜 맞추기 쉽도록 개량되었다.
금속 활자 기술은 세종 때 만들어진 활자인 갑인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갑인자는 글자체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글자를 조화 있게 배열할 수 있었다. 이후 한자뿐 아니라 한글 활자도 만들어져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으며, 조선 말기까지 만들어진 금속 활자의 종류만 35종에 이르렀다.
금속 활자'
고려는 인쇄술이 크게 발달하여 많은 책이 인쇄되었습니다. 전기까지는 목판 인쇄가 성행했습니다. 대장경이 가장 대표적인 성과물이죠. 그러나 여러 종류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려면 목판보다 활판 인쇄가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활판 인쇄술을 개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고려에서 발명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종 때의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습니다(1234).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은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입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개화기 때 조선에 왔던 프랑스 외교관이 프랑스로 가지고 간 후, 아직까지 그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금속활자의 사용이 활발해지자 전문 인쇄기관이 설치되었습니다. 공양왕 때 서적원이 만들어졌지요. 이곳에서 글자를 만들고 인쇄하는 여러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의학도 상당한 수준이었답니다. 당 · 송 의학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 우리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이 발전했습니다. 《향약구급방》1)이라는 의학 서적이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지금까지 전하는 소중한 우리의 의서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워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지요. 최무선은 진포 싸움에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과학 기술이 왜구를 무찌르는 데 이바지했던 것입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든 나라는 어디일까요? 혹시 1452년에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알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상식이에요. 우리나라는 이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1200년대에 이미 금속 활자를 만들었답니다.
그동안 책을 찍을 때 이용했던 목판에 새긴 활자는 금방 닳아 없어져서 책을 여러 권 찍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활자를 파는 시간도 오래 걸렸지요. 그래서 고려 사람들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글자만 새로 배열해서 몇 번이고 다시 쓸 수 있는 금속 활자를 만들었어요. 이 금속 활자로 1230년대에 《신인상정예문발미》라는 책을 찍었다는 기록이 《동국이상국집》 후집에 전해져요. 그러나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답니다.
1377년에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남아 있어서 우리 조상들의 앞선 기술을 잘 보여 주고 있어요. 《직지심체요절》은 짧게 줄여서 《직지》라고도 하는데, 고려 말의 백운이라는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이에요. 이 책 덕분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발명한 나라는 독일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증명할 수 있었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직지심체요절>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박병선 박사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쇠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를 찍어 배포했다.”
이 짧은 문장이 박병선 박사의 눈을 사로잡은 거예요.
‘고려에서는 1377년에 이미 금속 활자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박병선 박사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세계 최초라고 알려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보다 고려의 금속 활자가 78년이나 앞선 기술이었기 때문이에요.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나무판에 글씨를 새겨 책을 인쇄했어요. 하지만 나무판은 갈라지거나 뒤틀리기 쉽고, 힘들게 만들어도 그 책을 찍는 데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고려 사람들은 단단한 금속으로 활자를 한 자 한 자 만들어 두고, 인쇄할 때 필요한 글자를 짜 맞추어 쓰는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이것이 바로 ‘금속 활자’랍니다.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있어요.
이 책을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평생을 애쓰다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직지심체요절>은 아직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직지심체요절>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박병선 박사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쇠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를 찍어 배포했다.”
이 짧은 문장이 박병선 박사의 눈을 사로잡은 거예요.
‘고려에서는 1377년에 이미 금속 활자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박병선 박사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세계 최초라고 알려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보다 고려의 금속 활자가 78년이나 앞선 기술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짧은 문장이 박병선 박사의 눈을 사로잡은 거예요.
‘고려에서는 1377년에 이미 금속 활자를 사용하고 있었구나!’
박병선 박사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세계 최초라고 알려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보다 고려의 금속 활자가 78년이나 앞선 기술이었기 때문이에요.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나무판에 글씨를 새겨 책을 인쇄했어요. 하지만 나무판은 갈라지거나 뒤틀리기 쉽고, 힘들게 만들어도 그 책을 찍는 데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고려 사람들은 단단한 금속으로 활자를 한 자 한 자 만들어 두고, 인쇄할 때 필요한 글자를 짜 맞추어 쓰는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이것이 바로 ‘금속 활자’랍니다.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있어요.
이 책을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평생을 애쓰다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직지심체요절>은 아직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아직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박병선(1923~2011) 박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로 유학해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서들을 찾아보라는 스승의 말을 되새기며 수많은 고서들을 뒤졌어요.
1972년 드디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발견했지요. 이 책에 찍힌 ‘주조’라는 글자를 본 그녀는 1377년에 만들어진 금속 활자본임을 확신하고, 실험을 거듭한 끝에 이를 증명해 냈어요.
<직지심체요절>이라고도 부르는 이 책이, 1455년에 찍은 서양 최초의 금속 활자인 구텐베르그 성서보다 78년 앞선 것임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어요.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도 올라갔지만 아직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여러 경전과 법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좋은 구절만 뽑아 편집한 불교 서적이다. 《직지심체요절》은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금속 활자 기술이 서양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원래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이고 '직지심요', '직지' 또는 '심요'라고 약칭되기도 한다.
이 책을 엮은이는 조계대 선사인 백운 경한(1287~1374)이다. 백운은 호이고 경한이 법명이다. 직지심요는 그의 나이 75세가 되던 해인 1372년(고려 공민왕21)에 저술되었고 1377년(고려 우왕3) 6월에 청주목의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
이때는 독일의 구텐베르그 금속활자 인쇄보다 약 70여년이 앞선 때 였다.
책의 내용은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역대 불조사들의 어록을 수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내용 가운데 중요한 대목만 따온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수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은 상.하 두권이 한책으로 찬술한 것인데, 현재 원본은 총 39장 중 제1장이 떨어져 나간채 하권만(2장부터39장까지)이 한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의 원본은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도서관(Bibliotheque nationale)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우왕 4년(1378년)에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은 상-하 양권이 온전하게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7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책의 역사'에 관한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출품한 '직지심체요절'이 고려의 우왕 3년(서기 1377년)에 인쇄된 금속활자본임이 밝혀져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887년 프랑스의 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다른 장서와 함께 한국에서 수집한 이 책을 본국으로 가지고 간 뒤 파리의 골동품수집가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그 수장가가 사망하자 상속인이 이 책가지 등을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여 현재 직지심요가 파리에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직지심체요절'의 권하뿐이고 권상은 일실되어 없다. 그리고 권하의 첫장은 결락되었다.
'직지심체요절' 권하의 마지막장에는 '선광칠년 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바로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인쇄수단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이 소상하게 명기되어 있다. 간기(刊記)는 주조활자개발면에서 한국이 독일에 앞섰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굳혀준 물증이다.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9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선정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4년엔 유네스코에서 직지심경의 이름을 딴 '직지상'이 제정되었다.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말기의 승려 경한(景閑)이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상하 2권.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간략 서명은 ≪불조직지심체≫이며, 판심제(版心題)는 ≪직지≫ 또는 ≪심요 心要≫이다. 이 책은 경한이 입적하기 2년 전인 1372년(공민왕 21)에 직접 초록한 수고본(手稿本)이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선문염송 禪門拈頌≫ 등의 사전(史傳)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역대의 여러 부처를 비롯한 조사와 고승들의 게(偈)·송(頌)·찬(讚)·명(銘)·서(書)·시(詩)·법어·설법(說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한 것이다.
권상(卷上)에는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일곱 부처와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인도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하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尊)이 실려 있다.
중국의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의 5조사와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고승 대덕 중 안국대사(安國大師)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권하에는 아호대의화상(鴉湖大義和尙) 이하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신라 대령(大領)의 것도 초략되어 있다.
이 책의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깨달을 때 그 심성이 바로 부처의 실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에 의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그 심성이 자정(自淨)함을 깨닫고 늘 자수(自修)·자행(自行)하면 곧 불성(佛性)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며, 자기 마음이 바로 불심이 된다는 요지이다.
사람이 눈을 외계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올바로 가지면서 참선하여 도를 깨친다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됨을 뜻한다.
스승이 주는 공안(公案:참선의 과제로 주어지는 화두)에 의하여 선을 공부하는 간화선(看話禪)보다는, 일체의 사심과 망념에서 떠난 진심(眞心)을 중시하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지로 삼음이 경한의 특징적인 선풍(禪風)이다. 이와 같은 특색있는 선풍을 펼치기 위하여 경한은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그가 주창한 무심선(無心禪)을 연구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그가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그 초인본(初印本)이다. 그 간행에 조연(助緣)한 문인(門人)은 석찬(釋璨)과 달잠(達湛)이고, 시주한 사람은 비구니 묘덕(妙德)이다. 이 때 간행된 상하 2권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 장은 결락)뿐이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인 쿠랑(Courant,M.)이 엮은 ≪한국서지 Bibliographie Coreenne≫의 부록에 일찍이 소개되었으나 책의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1972년 ‘세계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도서의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말에 주한프랑스대리공사로서 서울에 부임한 바 있었던 플랑시(Plancy,C.de.)가 수집해 간 장서 속에 있었던 것이 1911년 골동품상 브베르(Vever,H.)에게 180프랑으로 팔렸으며 이것이 그가 죽은 다음해인 1943년에 그의 상속인에게 넘어가 관리되어 오다가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아주 미숙하였던 고려시대에 관서(官署)가 아닌 지방의 한 사찰이 전통적인 밀랍주조법으로 주조하여 찍어낸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모양이 고르지 않고, 또 본문을 찍은 중자가 부족하여 소자와 나무보자로 충용하여 찍어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한 편이다.
이와 같이 기술이 미숙한 단계의 사주본(寺鑄本)이지만, 문헌에만 전하여지고 있던 여러 종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금속활자본으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사뭇 높이 평가된다.
우리가 최초로 주자를 창안, 발전시킨 슬기로운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우리의 긍지를 온 세계에 과시할 수 있게 한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이 책의 고간본(古刊本)으로는 흥덕사주자본보다 한 해 뒤인 1378년에 개판된 목판본도 있다. 그 책에 적혀 있는 간기(刊記)에 의하면, 지금의 여주(驪州) 북쪽에 위치한 천녕현(川寧縣)혜목산(慧目山) 소재의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되었다.
목판에 새기기 위한 판서본(板書本)의 글씨는 일암(一菴)·선화(禪和)·천단(天旦) 등이 썼고, 판각은 종탁(宗倬)·참여(旵如)·신명(信明) 등이 담당하였으며, 판각을 위한 모연(募緣)은 법린(法麟)·자명(自明)·혜전(惠全)이 맡았다.
경한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바로 1년 전에 흥덕사에서 주자로 찍어냈음에도 이처럼 다시금 목판으로 간행한 것은 지방사찰의 주자인쇄술이 미숙하여 간행부수에 제한을 받았고 또한 활자판은 목판과 달리 후쇄가 없으므로 보다 많은 공급을 오래 지속하기 위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목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은 1992년에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다.
국내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신간서는 문화재관리국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의 고려 흥덕사주자본 권하 1책(첫장 결락)에 의거 원본 크기로 복제한 흑백 영인본과 해제 2책을 1973년에 발행한 것이다. 또 원색으로 복제한 영인본과 해제 2책이 1987년에 다시 발행되었다.
문헌.
- 『나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80)
- 『프랑스국립도서관장 흥덕사주자판영인본 불조직지심체요절 및 해설』(문화공보부, 1973, 1987 영인)
- Bibliographie Coreenne(Courant, M., Paris, Imprimerie Nationale, 1901)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여러 경전과 법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좋은 구절만 뽑아 편집한 불교 서적이다. 《직지심체요절》은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금속 활자 기술이 서양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원래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이고 '직지심요', '직지' 또는 '심요'라고 약칭되기도 한다.
이 책을 엮은이는 조계대 선사인 백운 경한(1287~1374)이다. 백운은 호이고 경한이 법명이다. 직지심요는 그의 나이 75세가 되던 해인 1372년(고려 공민왕21)에 저술되었고 1377년(고려 우왕3) 6월에 청주목의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
이때는 독일의 구텐베르그 금속활자 인쇄보다 약 70여년이 앞선 때 였다.
책의 내용은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역대 불조사들의 어록을 수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내용 가운데 중요한 대목만 따온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수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은 상.하 두권이 한책으로 찬술한 것인데, 현재 원본은 총 39장 중 제1장이 떨어져 나간채 하권만(2장부터39장까지)이 한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의 원본은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도서관(Bibliotheque nationale)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우왕 4년(1378년)에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은 상-하 양권이 온전하게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7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책의 역사'에 관한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출품한 '직지심체요절'이 고려의 우왕 3년(서기 1377년)에 인쇄된 금속활자본임이 밝혀져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887년 프랑스의 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다른 장서와 함께 한국에서 수집한 이 책을 본국으로 가지고 간 뒤 파리의 골동품수집가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그 수장가가 사망하자 상속인이 이 책가지 등을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여 현재 직지심요가 파리에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직지심체요절'의 권하뿐이고 권상은 일실되어 없다. 그리고 권하의 첫장은 결락되었다.
'직지심체요절' 권하의 마지막장에는 '선광칠년 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바로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인쇄수단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이 소상하게 명기되어 있다. 간기(刊記)는 주조활자개발면에서 한국이 독일에 앞섰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굳혀준 물증이다.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9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선정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4년엔 유네스코에서 직지심경의 이름을 딴 '직지상'이 제정되었다.
이 책을 엮은이는 조계대 선사인 백운 경한(1287~1374)이다. 백운은 호이고 경한이 법명이다. 직지심요는 그의 나이 75세가 되던 해인 1372년(고려 공민왕21)에 저술되었고 1377년(고려 우왕3) 6월에 청주목의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
이때는 독일의 구텐베르그 금속활자 인쇄보다 약 70여년이 앞선 때 였다.
책의 내용은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역대 불조사들의 어록을 수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내용 가운데 중요한 대목만 따온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수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은 상.하 두권이 한책으로 찬술한 것인데, 현재 원본은 총 39장 중 제1장이 떨어져 나간채 하권만(2장부터39장까지)이 한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의 원본은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도서관(Bibliotheque nationale)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우왕 4년(1378년)에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은 상-하 양권이 온전하게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1977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책의 역사'에 관한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출품한 '직지심체요절'이 고려의 우왕 3년(서기 1377년)에 인쇄된 금속활자본임이 밝혀져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887년 프랑스의 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다른 장서와 함께 한국에서 수집한 이 책을 본국으로 가지고 간 뒤 파리의 골동품수집가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그 수장가가 사망하자 상속인이 이 책가지 등을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여 현재 직지심요가 파리에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직지심체요절'의 권하뿐이고 권상은 일실되어 없다. 그리고 권하의 첫장은 결락되었다.
'직지심체요절' 권하의 마지막장에는 '선광칠년 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라는 '간기(刊記)'가 있어, 바로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인쇄수단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이 소상하게 명기되어 있다. 간기(刊記)는 주조활자개발면에서 한국이 독일에 앞섰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굳혀준 물증이다.
'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9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선정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4년엔 유네스코에서 직지심경의 이름을 딴 '직지상'이 제정되었다.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말기의 승려 경한(景閑)이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상하 2권.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간략 서명은 ≪불조직지심체≫이며, 판심제(版心題)는 ≪직지≫ 또는 ≪심요 心要≫이다. 이 책은 경한이 입적하기 2년 전인 1372년(공민왕 21)에 직접 초록한 수고본(手稿本)이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선문염송 禪門拈頌≫ 등의 사전(史傳)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역대의 여러 부처를 비롯한 조사와 고승들의 게(偈)·송(頌)·찬(讚)·명(銘)·서(書)·시(詩)·법어·설법(說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한 것이다.
권상(卷上)에는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일곱 부처와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인도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하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尊)이 실려 있다.
중국의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의 5조사와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고승 대덕 중 안국대사(安國大師)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권하에는 아호대의화상(鴉湖大義和尙) 이하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신라 대령(大領)의 것도 초략되어 있다.
이 책의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깨달을 때 그 심성이 바로 부처의 실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에 의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그 심성이 자정(自淨)함을 깨닫고 늘 자수(自修)·자행(自行)하면 곧 불성(佛性)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며, 자기 마음이 바로 불심이 된다는 요지이다.
사람이 눈을 외계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올바로 가지면서 참선하여 도를 깨친다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됨을 뜻한다.
스승이 주는 공안(公案:참선의 과제로 주어지는 화두)에 의하여 선을 공부하는 간화선(看話禪)보다는, 일체의 사심과 망념에서 떠난 진심(眞心)을 중시하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지로 삼음이 경한의 특징적인 선풍(禪風)이다. 이와 같은 특색있는 선풍을 펼치기 위하여 경한은 이 책을 편찬한 것으로, 그가 주창한 무심선(無心禪)을 연구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그가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그 초인본(初印本)이다. 그 간행에 조연(助緣)한 문인(門人)은 석찬(釋璨)과 달잠(達湛)이고, 시주한 사람은 비구니 묘덕(妙德)이다. 이 때 간행된 상하 2권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 장은 결락)뿐이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인 쿠랑(Courant,M.)이 엮은 ≪한국서지 Bibliographie Coreenne≫의 부록에 일찍이 소개되었으나 책의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1972년 ‘세계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도서의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말에 주한프랑스대리공사로서 서울에 부임한 바 있었던 플랑시(Plancy,C.de.)가 수집해 간 장서 속에 있었던 것이 1911년 골동품상 브베르(Vever,H.)에게 180프랑으로 팔렸으며 이것이 그가 죽은 다음해인 1943년에 그의 상속인에게 넘어가 관리되어 오다가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아주 미숙하였던 고려시대에 관서(官署)가 아닌 지방의 한 사찰이 전통적인 밀랍주조법으로 주조하여 찍어낸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모양이 고르지 않고, 또 본문을 찍은 중자가 부족하여 소자와 나무보자로 충용하여 찍어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한 편이다.
이와 같이 기술이 미숙한 단계의 사주본(寺鑄本)이지만, 문헌에만 전하여지고 있던 여러 종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금속활자본으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사뭇 높이 평가된다.
우리가 최초로 주자를 창안, 발전시킨 슬기로운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우리의 긍지를 온 세계에 과시할 수 있게 한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이 책의 고간본(古刊本)으로는 흥덕사주자본보다 한 해 뒤인 1378년에 개판된 목판본도 있다. 그 책에 적혀 있는 간기(刊記)에 의하면, 지금의 여주(驪州) 북쪽에 위치한 천녕현(川寧縣)혜목산(慧目山) 소재의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되었다.
목판에 새기기 위한 판서본(板書本)의 글씨는 일암(一菴)·선화(禪和)·천단(天旦) 등이 썼고, 판각은 종탁(宗倬)·참여(旵如)·신명(信明) 등이 담당하였으며, 판각을 위한 모연(募緣)은 법린(法麟)·자명(自明)·혜전(惠全)이 맡았다.
경한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바로 1년 전에 흥덕사에서 주자로 찍어냈음에도 이처럼 다시금 목판으로 간행한 것은 지방사찰의 주자인쇄술이 미숙하여 간행부수에 제한을 받았고 또한 활자판은 목판과 달리 후쇄가 없으므로 보다 많은 공급을 오래 지속하기 위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목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은 1992년에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다.
국내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신간서는 문화재관리국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의 고려 흥덕사주자본 권하 1책(첫장 결락)에 의거 원본 크기로 복제한 흑백 영인본과 해제 2책을 1973년에 발행한 것이다. 또 원색으로 복제한 영인본과 해제 2책이 1987년에 다시 발행되었다.
문헌.
- 『나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80)
- 『프랑스국립도서관장 흥덕사주자판영인본 불조직지심체요절 및 해설』(문화공보부, 1973, 1987 영인)
- Bibliographie Coreenne(Courant, M., Paris, Imprimerie Nationale, 1901)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 『동국후생신록(東國厚生新錄)』
-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편, 1919)
-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 『라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78)
-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 『조선조활자고』(윤병태, 연세대학교, 1976)
-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 『한국고활자개요』(김원룡, 을유문화사, 1954)
- 「금속활자」(천혜봉, 『한국사시민강좌』23, 1998)
- 「고려주자인쇄술의 연구」(천혜봉, 『성균관대학교논문집』22, 1976)
- 「고문진보대전에 대하여」(천혜봉, 『역사학보』61, 1974)
- 「고려금속활자본과 그 기원」(윤병태, 『도협월보』14, 1973)
-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 『한국목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 『한국서지학 개정증보판』(천혜봉, 민음사, 1997)
- 활자본 [活字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목판본 [木板本]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 출처문화재청
- 직지심체요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금속활자 [金屬活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금속 활자 [金屬活字] -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한국사 개념사전,)
금속 활자 [金屬活字] -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한국사 개념사전, 2010.
금속 활자 - 금속을 녹인 뒤 굳혀 만든 활자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 과학 기술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 직지심체요절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11. 5.)
-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금속 활자 (재미있는 발명 이야기, 2013. 12.)
-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책, <직지심체요절> (EBS 어린이 지식e, EBS 지식채널ⓔ 제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