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수용하라.
기뻐하면 기뻐할 일만 생겨난다
힘든 것에는 뜻이 있다.
감사함으로 수용하라.
믿음의 열도를 10배로 늘여라.
100배의 수확이 보장된다
모두를 위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나를 위하는 지름길이다
진리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
길 한번 잘못들면 평생 후회한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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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짚
다양한 쓰임새,
한국의 전통장의기초가되는 메주,
옛날에는 지붕도 짚이엿다,
소먹이 ,
장어구이,
활동하는데쓰는도구들,
월동, 바람막이,
짚신,
민족전통 벼짚공예...
옛날에는 여러곳에 쓰임새가 많았다,
옛날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상이 담겨져있는 이 도구들이 이제는 사용되지 않고 겨우 집안 한켠 장식품 정도로 되고있다. 더욱 슬픈것은 배워주려고 해도 배워줄 젊은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 하는 모습에 우리의 전통 하나가 잊혀져가는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이 틀림없지만 도시화와 산업화가 되며서 우리 주변에서 급속히 사라져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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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패산삼
황절산삼-초가을 부터 서리가 내릴 때 까지 야생에서 발견되는 산심
고패산삼-봄에 산삼 싹이 올라오면서 잎이 피지 않은 상태로 고사리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산삼
봄에 첫 싹이 틀 때 모습이 고사리 같아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약 싹이 올라오고 1주 가량 지나면 영양분이 뿌리 위쪽에 있는 잎과 열매 쪽으로 몰려가기에
싹이 올라오고 더 커지기 전에 영양분이 뿌리쪽에 많을 때 캐서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싹만 조금 올라오는 크기라서 발견하기가 힘들어 가치가 귀하다고 한다.
(뿌리만이 아니라 전체를 다 먹으면 어차피 좋다고 하긴 합니다.)
삼이 땅속에서 막 싹을 틔우는 즉 잎이 아직 펴 지지 못하고 마치 고패같이 생겼다 하여 [고패삼]이라 부른다,
삼은 약초의 정점에 있는 식물이다. 희소성도 크고 성장 속도도 느려서 전문 약초꾼도 산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앞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하는 약초로 유명하다. 실제로 평생 산을 다녀도 심마니들의 꿈인 ‘하늘이 심었다’고 알려진 천종산삼을 만나지 못하고 은퇴하는 심마니도 수두룩하다. 이런 그들에게 천종산삼 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산삼이 바로 고패산삼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2년만에 첯 싹이 돋게 되는데 이때는 잎이 3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3행(삼행)이라한다
2년만에 싹이 트는 이유는 씨앗 껍질이 두터워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고 인삼농사를 하려면 껍질을 벗겨
싹트는 시기를 1년 앞당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껍질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런 씨앗껍질 벗긴것은 (개갑)한
씨앗이라 한다,
3년쩨 나오는 가지가 2개 달린것으로 가지가 각각 있다 하여 각구 또는 2구(이구)라 부른다
원래 산삼은 3년째에 각지가 2개로 되면서 가지 한곳에는 잎이 5장이나 가지 하나에는 잎이 3장으로 나오고
이듬해에 가서야 가지 2개모두 잎을 5장씩 달게 된다,
가지가 1개일때는 잎의 수를 보고 3행,오행으로 구분하나 가지가 2개 이상이 되면 이제부터는 가지수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
사진의 삼은 가지가 3개이니 당연 3구[삼구]라 부른다,
이때도 가지가 2개에서 이듬해 3개로 될때 가지마다 잎을 5장씩 다는것이 아니라 가지 한곳엔 잎이 3장으로
돋고 이듬해에 모두 5장이 되는것이다,
3구에서 한해를 더 먹어 이제 가지를 하나 더 뻗어 가지가 4개가 딘다, 이름하여 4구[사구]
잎을 자세히 보면 가지 하나는 잎이 3장인게 보일것이다, 그런다음 내년에는 가지마다 잎이 5장이 된다.
삼은 첫열매 다는 시기에 3~5개 열고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가 늘어난다,
대개 7월초순부터 익기 시작하여 8월초순이면 모두 익어 떨어지나 지역이나 온도 습도등 장소에 따라
8월말까지 열매가 익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7월이 지나면 사실상 열매 보기가 힘들다.
삼은 다른 풀이 돋기전에 나오기 시작하기에 5월에 가장 눈에 잘 띠고 숲이 우거지면 보이지 않다가
열매가 익으면 빨간 빛깔이 선명히 눈에 들어와 이시기엔 또 잘보인다 그래서 심마니들이 5월과 7월이
가장 심보기가 좋은 철이라 한다.
산에 들어가면 여러형태의 산삼이 있는데 최소한 위 사진처럼 너덜너덜해진 산삼을 찿을수 있어야
하고 서리 내린뒤 산에가서 시든 낙엽을 보고 찿을수 있는 안목까지는 길러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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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申崇謙 ]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무관(武官)이자 서예가이다.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다. 광해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다. 본래 궁예(弓裔)의 막료였는데, 918년 배현경(裵玄景) 복지겸(卜智謙) · 홍유(洪儒)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신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태조가 말하는 대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그러자 태조가 크게 칭찬하며 평주라는 본관(本貫)을 내려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세(租稅)를 받게 하였는데, 이 땅을 "궁위(弓位)"라고 불렀다.
927년 공산동수 전투에서, 김락(金樂)과 전이갑(全以甲) · 전의갑(全義甲) 형제와 함께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된 태조를 구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으로 변장하여 숨을 거두었고 왕건은 머리가 잘린 시신에 금으로 만든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를 지내주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신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정오품에 해당하는 원윤(元尹)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건립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다. 해서체(楷書體) 초년작품을 보면, "단(短)" 자(字) 등에서 예서의 획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글자가 매우 정확하다. 또한 종렬(縱列)이 다소 난경(蘭徑)을 걷는 듯하지만, 한자 한자에 매우 충실하였다. 대체적으로, 구양순(歐陽詢) 서풍과 연관이 깊고 "숭(崇)"자 등에서는 조맹부(趙孟頫)의 특징이 보인다.
신숭겸장군유적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고,면적은 7,804㎡이다.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1등에 책록된 공신.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이 곳은 고려 태조때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태봉의 기장으로 있으면서 배현경 등과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이 되어 927년(태조 10년)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에서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장군은 왕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 장군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으며, 이틈을 탄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한다.
태조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예장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묘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후 지묘사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폐사되었으나 1607년(조선 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 표충단, 충열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으며,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르고,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 산은 왕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지명이외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의 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파군재
동화사
보물 제243호 - 동화사 입구마애불좌상-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제247호 -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제244호 -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제254호 - 동화사 당간지주-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제248호 -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고려 초의 무신.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고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했다.
신숭겸장군
출생-사망본관별칭
? ~ 927
평산
초명 능산, 시호 장절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생으로, 《고려사》에는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재 평산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은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았다. 동시에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公山)에서 싸웠으나 크게 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다. 이를 틈타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함께 폐사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새로 지어 지켜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른다.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용산재 및 덕양사,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서원. 전라남도 기념물 제56호. 평산신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개국의 1등 공신인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병장수였다. 그런데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 지 몇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다. 왕건이 이 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왕건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왕건을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웠다. 그리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 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하고, 토지를 내려 이 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1607년(선조 40)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672년(현종 13)에 표충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에 후손들이 재사를 지어 이 곳을 지켜오던 중 1993년에 표충사를 복원하였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지난 74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 장절공의 충절을 기리는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으며, 순절단(殉節壇)과 충렬비(忠烈碑)등이 있다.
[장절공]
신숭겸장군을 '장절공'이라고 하는데 '장절'은 태조 왕건이 신숭겸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군에게 내린 시호이다. 시호란 '큰일을 한 인물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국가가 내려주거나 다음 임금이 그 앞 임금에게 내려준 이름' 을 말한다. '장절(壯節)'이란 뜻은 '절의가 굳세다.', 곧 '마음이 아주 곧고 꿋꿋하며 의리가 있다'는 뜻이며, 여기서 '공(公)'은 신숭겸 장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충절비]
신승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으로, 표충재 동편 석축 위에 있다. 1607년(선조40)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외손 유영순이 영남 유림, 후손들과 의논하여 장절공 사우를 지을 때 같이 세웠으며, 예조판서 신흠은 글을 짓고, 여주목사 김현성을 글씨를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1781년에 비각이 허물어지고 비가 넘어진 것을 관민이 힘을 모아 다음해 8월에 바로 세웠으며, 같은 해에 비각도 고쳐 세웠다. 지금있는 비각은 1979년 대구시에서 고쳤다. 용머리에 거북 받침이 인상적이다.
[표충재와 동재 서재]
표충재는 뒤로 높다랗게 사당을 업고, 순절단이 내려다보이는 왕산 중턱에 있다. 표충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중심 건물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표충사는 일명 표충서원으로 불리면서 유림에서 지켜오다가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에는 순절단을 단소로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다. 여러해 동안 영남 족친들이 건축비를 모아서 1888년(고종 25)에 표충사 옛터에 완공했다. 표충재 현판은 충익공 신정희가 썼다. 표충재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숭겸 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여 건립된 강당인 '상절당'이 있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桐華寺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 석규를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동화사사적기〉에 따르면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智先國師)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 석규(釋窺)와 금산사 주지 혜덕왕사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1608년(광해군 1) 절을 중건할 때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고, 1725년(영조 1)에 다시 중창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동화사금당암삼층석탑
동화사금당암3층석탑
보물 제248호. 높이 동탑 562cm, 서탑 524cm. 동탑의 기단은 대부분 근래에 보수되어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층기단의 중석에 새긴 우주와 탱주는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했으며 갑석 윗면에는 정(井)자형의 굄이 있고 네 귀퉁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에는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2개씩 새겼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각기 다른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옥신에는 우주만 장식했고, 옥개에는 위아래로 2단의 굄과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상륜부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현재 노반·복발·앙련·보륜·보주 등이 남아 있다. 서탑도 역시 2층 기단으로 지대석 위에 있는 중석은 4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면에는 1개의 탱주와 우주를 조각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만 남아 있다.
동탑과는 세부형식에서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양식적 특징은 같이 하고 있다. 1957년 서탑을 해체했을 때 안에서 99개의 소탑(小塔)과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두 탑은 배치에서 통일신라시대 쌍탑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차이를 보이며 결구방식이나 크기, 세부처리 등에서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동화사비로암삼층석탑
보물 제247호. 높이 371cm. 1층 옥신에서 나온 납석제 사리호의 표면에 "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 時咸通四年 歲在癸未無射之 月十日記" 등의 명문이 있어 863년(경문왕 3)에 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된 석탑임을 알 수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보여준다. 하층기단은 4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를 표현했는데 특히 갑석 위에 굄을 만들고, 아래는 잘록하게 안으로 파여져 있어 마치 다른 돌을 끼운 듯한 형태는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석탑양식이다. 상층기단도 마찬가지로 4매의 돌에 탱주와 우주가 각각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다른 돌로 만들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간략하게 표현했고 옥개석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보주만 남아 있다.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244호. 전체높이 293cm. 상높이 129cm. 이 불상은 비로암 법당 앞에 있는 3층석탑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동화사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통일신라), 보물 제244호, 전체높이 293cm, 상높이 129cm, 대구 동구 도학동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으로 현재 얼굴을 비롯하여 불신과 광배, 대좌의 윗부분에 호분을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다시 채색을 가하여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나발의 머리 위에 얹은 육계는 나지막하여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부분에는 각각 계주가 있는데 후대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비교적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는 양끝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와 낮고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다. 좁아진 어깨와 두 다리의 폭은 상 전체를 위축된 자세로 보이게 하며 평행으로 연속되어 내려오면서 표현된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9세기경에 유행한 불좌상 형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으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연화무늬·보상무늬·당초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또 경계선을 따라 8구의 화불이 배열되어 있다.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안치했다. 대좌는 8각형의 연화대좌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화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중대에는 복잡한 구름무늬 사이로 사자를 1마리씩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동화사비로암석탑내발견사리함금동선각사방불
각 면 크기 세로 14.5cm, 가로 1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개의 금동판에는 천개 밑에 좌상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서 있는 삼존형식의 불상이 각각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은 각각 지권인, 항마촉지인, 합장인, 그리고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사방불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각 상의 도상적 명칭을 정확히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북방에 위치한 지권인의 상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며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도상과는 달리 보관을 쓴 여래형으로 표현되었다.
약함을 든 상은 약사여래로 생각되나 금동판의 연결구조로는 남방보생여래로 볼 수 있고, 촉지인은 동방의 아촉여래, 합장인은 서방의 아미타여래로 각각 추정된다. 얼굴은 생동감이 사라져서 무표정한 모습이며 탄력감이 줄어든 몸체 위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내려오면서 양 다리를 덮고 있다.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씩 틀고 있는 두 보살상도 거의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리기의 선각사방불상은 함께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라 사방불상 표현의 한 예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화사수마제전금동불좌상
이 불상은 1702년에 건립된 수마제전에 안치되어 있으나 원래 있었던 장소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광배부분이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는 자세로 허리가 유달리 길게 표현되었고 상체에 비하여 무릎의 높이가 낮은 편이어서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나발로 표현된 머리의 중앙에는 계주가 장식되었으며, 턱이 겹친 비만한 얼굴에는 오똑한 코와 꼭 다문 작은 입 등이 표현되어 있다. 좁은 어깨와 밋밋한 가슴에 걸쳐진 통견의 법의는 규칙적인 단을 이루면서 무릎 밑에까지 내려와 양 다리 사이로 부채꼴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왼쪽 어깨에서 1번 접혀 내려온 옷자락이 그대로 가슴의 옷깃 속으로 들어간 착의법이나 가슴 위로 보이는 내의와 띠매듭의 표현 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불좌상의 형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두 손은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비만해진 얼굴모습이나 신체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는 점, 규칙적인 띠 모양으로 처리된 옷주름 등으로 보아 대체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보물 제243호. 높이 106cm. 얼굴은 약간 살이 찐 편으로 풍만하며 각이 진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고 옷주름은 좁은 간격으로 복잡하게 늘어져 있다. 특히 가슴 위로 보이는 대각선의 내의와 띠매듭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의 전형적인 법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앉아 있는 자세는 완전한 결가부좌의 모습이 아니라 오른쪽 다리를 대좌 위에 비스듬히 내려놓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앙련과 복련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이 연화대좌 밑으로는 구름무늬가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불상이 천상의 정토세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마애불상은 전반적으로 얕은 저부조로 표현되어 부드럽고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나 얼굴의 굳어진 표정이나 비교적 경직된 어깨선,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에 나타나는 양식적 경향으로 대체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동화사사적비》(1931년)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유가사(瑜伽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것을 흥덕왕(興德王) 7년(832년) 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화사라는 이름은 중창할 당시,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심지조사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유사》(13세기)에는 진표(眞表)로부터 불골간자를 이어받은 영심(永深)이 다시 심지조사에게 간자 두 개를 전했고, 심지조사가 그것을 봉안할 땅을 찾고자, 중악(中岳)의 두 신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가 곧 바람에 날려 날아갔고, 간자가 떨어진 곳이 동화사 참당(籤堂)의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었다. 그리고 심지조사는 그곳에 강당을 지어 간자를 봉안했다고 한다.
동화사 당간지주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에 동화사에 딸린 비로암의 3층 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경문왕 자신의 명의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을 즈음해서는 금당암의 3층 석탑도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화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사는 신라 말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한 현장으로,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거느리고 온 1만 명의 군사가 이곳 동수, 동화사에 주둔하며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순왕 1년(928년) 영조선사(靈照禪師)에 의해 부속 암자인 염불암이 지어지고, 같은 왕 7년(934년)에 동화사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동화사는 정종(靖宗) 2년(1036년), 왕명에 따라 개경(開京)의 영통사(靈通寺)와 숭법사,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와 함께 출가자의 불교 경율(經律)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명종(明宗) 20년(1190)에는 조계종의 개조(開祖)가 되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신종(神宗) 5년(1202년)에 경주의 별초군이 난을 일으켰을 때 난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년) 앞서 동화사를 하안소(下安所)로 삼았던 홍진국사(弘眞國師)의 유지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그가 입적한 뒤에 부도도 동화사에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1606년),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유정(惟政)이 다시 중창하는데, 이때 동화사는 전국의 승병을 지휘하는 총본부로서의 역할도 갖게 되었다. 숙종(肅宗) 3년(1677년)에 상숭대사(尙崇大師), 영조 8년(1732년) 관허(冠虛)와 운구(雲丘), 낙빈(洛濱), 청월(晴月) 등에 의해 중창 중건되었는데, 현재 동화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의 당우들은 영조 때 중창된 것이다.
1911년 동화사에 아미산 포교당이 창건되었다. 일제 시대 31본산의 하나였던 동화사는 1919년3.1 운동 당시 중앙학림의 지시에 따라 대구로 온 윤학조가 3월 23일 동화사 지방학림(지금의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던 후배 권청학 · 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 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한 이들은 3월 30일, 대구 덕산정시장(남문 밖 시장)의 장날을 맞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투옥된다(3.30 대구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로 1917년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 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봉서루(鳳棲樓)동화사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에서 '봉황이 알을 품은 지세(鳳巢抱卵)'라 불리는 형세로 여겨졌다. 봉서루는 동화사의 누문(樓門)으로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서 동화사에서 승병(치병)을 지휘했던 연고에 따라 봉서루 안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어 흔히 이 부분을 '봉황의 꼬리'라 부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세 개의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웅전(大雄殿)세조(世祖) 10년(1465년)에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존하는 대웅전 건물은 선조 39년(1606년)에 학인에 의해 세워진 것을 숙종 3년(1677년)에 한 번 수리하였고, 최종적으로 조선 영조 3년(1727년)에서 영조 8년(1732년) 사이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헌종 4년(1838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영산전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의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글씨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 양식을 갖춘 현재의 영산전은 현종 10년(1669년)에 학찬(學贊)이 세웠던 것을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심검당(尋劒堂)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참선이나 불경 강설용으로 쓰이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동화사 심검당은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천령(天靈)에 의해 지어졌다. 1919년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남 지방학림의 승려 아홉 명이 당시 만세운동 계획을 결의하고 수립했던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화사 승려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조사전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대웅전 뒤편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동화사를 처음 세웠다는 극달 화상과 중창조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동화사 금당선원.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화사 첨당 우물이 위치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금당선원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삼국유사》에 진표로부터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진 간자를 봉안할 곳을 찾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을 때 간자가 떨어진 우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등 해방 이후로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세웠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정비되었으며,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삼층 석탑 2기(보물 제248호)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화사가 위치한 팔공산 일대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산지에 위치한 사찰끼리 서로 필요한 물품을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거래하던, 이른바 승시(僧市)라고 하는 승려들의 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동화사는 이 승시를 재현한 '팔공산 승시축제'를 2010년부터 개최하고 있다. 승시라는 독특한 전통의 계승 및 불교문화의 대중화를 목표로 승시와 관련된 학술 세미나와 승시에서의 물물교환 재현 및 승려들이 제작한 불교용품 자선바자회를 비롯하여, 사찰 음식 시연 및 영산재, 극달화상 영정이운식, 승무 시연, 판각 및 탁본체험, 단청 및 불화(탱화)그리기, 염주, 목탁, 컵등 만들기 등의 체험행사와 외국의 불교문화 소개 등의 행사와 더불어, 전통문양 활용 패션 경연대회, 찬불가 경연, 요일별 풍물공연과 줄타기, 널뛰기, 청소년 댄스공연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부터는 승려들간의 씨름 경기인 ‘동화사 주지스님배 씨름대회’도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개최되었다.
Jinul(Donghwasa, Daegu)_지눌(대구 동화사)
Address : 1, Donghwasa 1-gil, Dong-gu, Daegu, Republic of Korea
Korea's representative religions are Christianity, Catholicism, and Buddhism. Buddhism is the oldest and most profound influences of Korean people's emotions and culture. The Jogye Order is the representative religious order of Korean Buddhism, which was introduced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as the ruling ideology of the past nations and deeply rooted in the lives of the people. There is a person, who has established the idea of Jogye Order that plays the central role with the greatest number of believers, and he is Jinul who is great people in Goryeo dynasty. For more information on Jinul, please refer to reference room in my blog
Palgongsan mountain, located on the north side of Daegu Metropolitan City, is a pair of mountains that make Daegu a basin with Biseulsan Mountain in the south. There are many historical sites in Mt Palgongsan including Gatbawi Rock and the representative ones are the Gatbawi Rock and the Donghwasa Temple. The Donghwasa is a major temple of the Buddhist Jogye Order of the Korean Buddhism and possesses many cultural assets of treasure level so that it has Buddhist Museum separately. One of these treasures is the portrait of Jinul. It was produced during the Joseon Dynasty. Though it was made hundreds of years after the death of Jinul National Priest, the appearance of the portraits in the whole country is similar each other. It is presumed that the paintings that were painted in his lifetime were redrawn many times, and his appearance was transmitted without lost.
Daegu Donghwasa is located in Donggu, Daegu and takes about 3 hours and 40 minutes from Seoul by car. Palgongsan is located on the outskirts of Daegu city, which takes about 30 minutes by car from center of Daegu. It is good place for enjoying a quiet atmosphere, but please make sure that there may be a lot of tourists at the time of spring cherry blossoms and autumn leaves season.
If you can see the magnificent gate below, you can see that it is at the entrance of Donghwasa Temple. It is special from the entrance as the best temples in Daegu. Admission is 2,500 won for adults 1,500 won for teenager 1,000 won for children. The parking fee is 2,500 won per vehicle and 5,000 won for large buses.
If you go a little further inside after entering the entrance, there is a parking lot as shown below. If you park here and walk for a while, you can see Donghwasa.
The scale is quite large because it is a nationally famous temple. It is divided into two areas. 1st one is the region which has the main temple and 2nd region has Buddhist Museum and large Buddha statue called Unification Medicine Big Buddhist.
First, I decided to visit from the place where main temple is located. The atmosphere of the temple is calm with the bare branches in the early winter.
The large front yard is well paved and there are quite a number of visitors.
Below is a building called Lecture Hall, which is a location for lecture regarding Buddhist scriptures.
It is a building called Beomjongnu that keeps the Buddhist temple bell used in the temple. Beneath the building are many small bells hanging with pieces of papers that wish to fulfill their wishes. Every time the wind blows, the bells shake and make a clear sound. Each time, the wishes of the people seemed to be delivered to the sky with a form through branches of Palgongsan.
Since Buddhism was introduced to Korea a long time ago, it has become a traditional religion with unique characteristics of Korea combined with Korean folk beliefs. There are various forms of faith for blessing in praying for the blessings of people all over the place. The small bells hanging under Beomjongnu and Bokjjeonham(Donation Box for blessing) below are what they are.
People pray for their wish fulfillment by putting money into the Bokjjeonham underneath the unique-shaped stone. It is said that the geographical feature of Donghwasa is the form that a phoenix incubating an egg. So, Models of stone egg are here, and when people make a wish touching the egg, it would be fulfilled.
The golden lanterns below are also a kind of faith for blessing. When a certain amount of money is paid to the receptionist of the temple, the paper with the names and wishes of the believers and family is hanged under the lanterns, and prayers are prayed periodically in the temple for fulfillment of wishes. One interesting thing is that while other temples decorate the lanterns in various colors, they are all unified in gold. It seems that many people in Daegu want to be rich.
This building called Hwaeom-dang, is Yosachae, which is a space where monks live. What I felt when I looked around the Donghwasa was that there were a lot of very large scales Yosachae. It is not only the size of the temple is big but also the number of Buddhist monks practicing are many, which means that this temple gives a great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Korean Buddhism now.
The dancheong(traditional multicolored paintwork on wooden buildings) of the temple building is usually decorated splendidly like below
Among the buildings of Donghwasa, there are simple buildings that retain the original color of the building materials without any decoration.
The appearance of Sansingak. You can see the exquisite harmony of Buddhism and Korean local beliefs here, which is an annex to honor mountain god who has no direct connection with Buddhism. The believers who come to offer a Buddhist prayer to the temple come to the Sansingak here and pray to the mountain god for their well-being and prosperity.
The building below is called Josajeon, which is a place where the portraits of the greatest priests who passed through the Donghwasa are kept. The portrait of Jinul, today 's main character, is also here.
As you will see later, I could not see portrait of Jinul because there was a delay in the maintenance schedule of the Buddhist Museum, which is kept the treasures of the Donghwasa. As a result, I had no choice but to replace it by this portrait in this building. In the inside of the Josajeon, the portrait of Jinul were enshrined along with the other high priests. The black and white photographs of the central is portrait of Jinul National Priest.
The portrait of Jinul who is searched on the internet is as follows. I will directly check it on next visit of Donghwasa.
An old look tree stands in the front yard of Josajeon. This tree has a legend that one of the high priests of Donghwasa put monk’s staff on the ground and it had been changed to tree and bloomed.
It is the Chilsunggak to honor Chilsung, who is a gad to presides extend of lifespan, and good evidence to show the process of indigenization of Korean Buddhism with Sansingak.
The monk who is picking up persimmon in the front yard of the Donghwasa Temple and the cloudy sky of Palgongsan are combined to produce nice view like painting.
One side of the entrance sells Roasted sweet potatoes, so sweet odor of Roasted sweet potato pervaded in the temple. Eating yellow Roasted sweet potatoes in the mountains during winter is always wonderful!
I went down the stairs to see the Unification Medicine Big Buddhist and the Buddhist museum.
Memorial stone which is recorded history of Donghwasa.
The path to the Unification Medicine Big Buddhist is beautifully paved.
Go up the stairs below
A magnificent Unification Medicine Big Buddhist and a tower come into the eye. Buddhist temples with economic power enough to create such a scale of architecture are among the best in the nation.
When you look at the picture, it could not be felt its size, but I was overwhelmed by its scale. As the representative Buddha status of the Donghwasa, the total height reaches 33m and is said to be the world's largest stone Buddhist statue. It is a structure rather than a Buddhist statue and was completed in 1992, and a Buddhist cultural center is built in the basement.
Follow the entrance to the 'Bub Hwa Bo Goong(Buddhist Sermon Palace)' on the right side of the photo below
You can see the Buddhist Cultural Center. The 1st Tripitaka Koreana and the famous Tripitaka Koreana were explained in detail with various materials. The Tripitaka Koreana is the complete collection of Buddhist Sutras.,,,,
불교문화관을 관람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과 유명한 팔만대장경에 대해 여러 자료들과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대장경이란 불경을 집대성한 경전을 말한다.
It is said that the 1st Tripitaka Koreana was made from 1011 to 1051 when Goryeo was invaded by the Kitan with faith to protect the nation and the people from the invasion of outside. All of the wooden boards were burnt down during the invasion of Mongolia in 1232, and only the printed copies are now remained.
초조대장경이란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략을 받았을 때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신앙심으로 조성된 것으로 1011년~1051년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목판은 모두 불타버렸으며 현재 인쇄본만 전해지고 있다.
The woodcuts of Tripitaka Koreana are preserved in Haein Temple in Hapcheon, Gyeongnam Province. It is designated as the Korean National Treasure No. 32. It was made between 1236 and 1248 and consists of exactly 81,352 wooden boards. The number of letters carved on the wooden board is 52,729 thousand, and it is said that the technician bowed three times every time one letter is engraved. Only 158 characters of all things are known to be misprinted, and I cannot help but be surprised because even them has been recently found.
고려대장경이란 팔만대장경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경남 합천 해인사에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보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1236~1248년에 제작되었으며 정확히 8만 1352개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판에 새겨진 글자수는 총 5272만 9천자에 달하며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하니 그 정성이 마음속에 진하게 전해진다. 이 중에 오탈자로 밝혀진 것은 단 158자에 불과하며 이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The Buddhist Cultural Center also exhibits works of art based on the theme of Buddhism, and it is worth to see because every piece of work has lots of characteristics.
불교문화관에는 이외에도 불교를 주제로한 예술작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는데 작품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쳐 볼 만하다.
In addition to the Buddhist Cultural Center, there is a Buddhist temple which enshrine the Buddha’s sari under Unification Medicine Big Buddhist. Sari means stone-like material that remains after the monks have died and cremated. In Buddhism, it is accepted as the highest sacred treasures. It is said that it had originally been kept in a Buddhist temple in Sri Lanka since 103 AD and moved to Donghwa Temple in 2013. Typically, there is a Buddhist statue in the middle of the Buddhist temple, however, the temple which enshrine the Buddha’s sari don’t have status. It is because the Sari itself is regarded as Buddha.
약사여래대불 지하에는 불교문화관 이외에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 있다. 사리란 스님들이 돌아가신 후 화장하면 나온다는 돌과 같이 딱딱한 물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란 부처님의 사리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최고의 성물로 받아들여진다.
원래 서기 103년부터 스리랑카의 한 사찰에서 보관해 오던 것을 2013년에 이곳 동화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보통 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가운데에는 불상이 있기 마련인데 진신사리가 봉안된 법당은 따로 불상을 제작하지 않는다. 진신사리 자체를 부처님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I could see many buildings and artifacts in the Donghwasa, but I could not visit the portrait of Jinul because Buddhist Museum was under renovation.
동화사에서 많은 건물과 유물들을 볼 수 있었지만 정작 목표로 했던 지눌국사 진영은 성보박물관이 보수공사 중이라 관람할 수가 없었다.
On the way down to the parking lot, I put the sadness behind me, the view of the Palgongsan Mountain come to my eye. A very famous Korean high priest left it. ‘The mountain is a mountain and the water is water.’ The mountain is here, and even though the portrait of Chinul is not even visible. it is here in the Donghwasa. I decided not to associate it with what I did not see.
다음을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팔공산 자락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한국의 아주 유명한 고승이 남긴 말씀이다. 그 산은 여기 이 산이며 지눌의 초상화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이곳 동화사에 있다. 직접 보지 못한 것에 연연해 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대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桐華寺)’
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도굴한 것으로 전해지는 납석사리호.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7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
신라경문왕 3년인 863년에 대구광역시동화사에서 만들어진 납석사리호로, 당시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의 삼층석탑 안에 장치했던 것을 훗날 1966년에 도굴꾼들이 도굴했다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정의구현을 당하고 다시 회수된 것이다.
개설 보물 제741호. 납석으로 제작된 사리호는 대구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및 특징 사리호는 납석으로 만들었고 기물의 표면 전체에는 흑칠을 하였다. 외형은 구연부가 넓고 어깨 부분이 부풀어졌다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며, 어깨 부분은 띠를 두르듯 공간을 만들고 문양을...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741호 성격 : 사리장엄구 유형 : 유물 크기 :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 재질 : 납석 분야 : 예술·체육/공예 소장/전승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1길 30(필동3가) 동국대학교박물관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경문왕 3년(863)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였다.
의 발원에 의해 쾌민(快旻)을 비롯한 체원(體還), 체준(體俊), 굉원(宏遠), 법징(法澄), 새정(璽淨), 지성(智性) 등 7명의 화승이 제작한 지장시왕도로서, 동화사를 비롯하여 경상남·북도 지역 25개 사찰의 승려 80여 명과 신도 40여 명의 시주에 의해 조성되었다. 가로 228㎝, 세로 187.7㎝의 대형 화폭에 본존 지장...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快旻(快旻), 體還(體還), 體俊(體俊), 宏遠(宏遠), 法澄(法澄), 璽淨(璽淨), 智性(智性) 문화재 지정 : 보물 제1773호 창작/발표시기 : 1728년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세로 185.7㎝, 가로 228㎝ 권수/책수 : 1점 재질 : 비단바탕에 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집의 대부분에 삼장의궤(三藏儀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수륙재의 중단의례용(中壇儀禮用)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장보살도는 1728년에 동화사 대웅전의 중단탱으로 조성되었으며, 세로 176.5㎝, 가로 274㎝의 긴 직사각형의 화면 중앙에 천장보살과 권속을 배치하고, 향우측에 지지보살과 권속, 향좌...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쾌민(快旻), 체환(體還), 체준(體俊), 굉원(宏遠), 법징(法澄), 새정(璽淨), 지성(智性) 문화재 지정 : 보물 제1773호 창작/발표시기 : 1728년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세로 176.5㎝ , 가로 274㎝ 권수/책수 : 1점 재질 : 비단바탕에 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대승사 등에 주석하면서 우송 상수(友松堂尙守)·영운 봉수(影雲奉秀) 등과 함께 해인사, 남장사, 통도사 등의 불화를 조성하였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제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경기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호 진철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시대 : 근대/개항기 저작자 : 동호진철(東昊震徹),봉화(奉華), 상조(尙祚), 용주(用周), 성연(性演)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2호 창작/발표시기 : 1896년(건양 1)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384×406㎝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개설 보물 제244호.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와 사촌간인 왕사 심지(心地)가 863년(경문왕 3) 비로암의 창건과 동시에 봉안한 불상이다. 호분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중후하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보여 준다. 내용 둥근 얼굴, 작은 백호(白毫),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 바로...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44호 건립시기 : 863년 성격 : 불상 유형 : 유물 크기 : 높이 293.6㎝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도학동), 동화사 분야 : 예술·체육/조각
내용 보물 제248호. 금당암 극락전 앞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동탑의 높이는 5.62m이고, 서탑의 높이는 5.24m이다. 동화사는 계곡을 중심으로 동서의 두 사역(寺域)으로 구분되는데, 금당암은 동쪽 사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탑은 동화사 안에 있는 여러 석조물과 비교하면, 동화사 창건 당시에 건립...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48호 건립시기 : 통일신라 성격 : 석탑 유형 : 유적 크기 : 동탑의 높이 5.62m, 서탑의 높이 5.24m 면적 : 2기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 (도학동), 동화사 분야 : 예술·체육/건축
외벽의 사명대사행일본지도(四溟大師行日本之圖)가 신겸의 주도 하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져 벽화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 등 지장살삼존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경상북도 사불산...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신겸(信謙), 운용○보(雲容○輔), 상옥(尙玉), ○보(○甫), 두천(斗天)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 창작/발표시기 : 1816년(순조 16)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96.2×75.2㎝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보인다. 채색은 적색, 녹색, 청색, 백색 등이 사용되었고, 특히 적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어 19세기 말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관경16관변상도를 축소해 그린 것으로, 극락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삼존을 크게 부각시켜...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東峯法○, 片手 定○, 仁○,戒○,采○, 志欣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8호 창작/발표시기 : 1841년(헌종 7)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170.5×163㎝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무늬와 황토색 배경, 중간색조의 구름, 적색과 녹색의 대비, 섬세한 필치의 다양한 문양 등은 의균의 작품 제석천도와 유사한데, 이는 체준이 동화사에 전해오던 의균의 제석천도를 참고하여 이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화사 제석...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체준(體俊)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6호 창작/발표시기 : 1728년(영조 4) 경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97.7×95㎝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개설 보물 제243호.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이 마애불은 조각 수법이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내용 머리와 상체는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대좌와 광배는 얕게 부각되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肉髻)는 표현되지 않았다. 턱을 군살 지게 표현하여 얼굴은 비만하나 이목구비가...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43호 건립시기 : 9세기 성격 : 불상 유형 : 유적 크기 : 높이 1.06m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201길 41 (도학동), 동화사 분야 : 예술·체육/조각
광선으로 가득 광배 안을 채우는 기법 등은 신겸을 비롯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양식인데, 이 불화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가로로 긴 화폭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연꽃을 든 두 협시보살이 시립한 모습...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응상(應相), 덕유(德裕), 채홍(采洪)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9호 창작/발표시기 : 1857년(철종 8)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123.1×159.5㎝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보다는 사천왕과 호법신중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붉은 바탕에 묵서로 화기가 적혀있는데, 건륭 30년, 즉 1765년(영조 41) 1월에 동화사 천룡탱으로 조성되었다는 내용과 증명(證明), 송주(誦呪), 화승(畵僧)의 이름만이 간단하게 적혀있다. 2012년 1월 30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성총(性聰), 전수(典秀), 유봉(有奉) 문화재 지정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창작/발표시기 : 1765년(영조 41) 성격 : 불화 유형 : 작품 크기 : 91.5×83㎝ 권수/책수 : 1점 재질 : 견본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동화사
내용 보물 제247호. 높이 3.71m. 비로암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의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나직한 흙단 위에 2층의 받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신 신라 석탑이다. 1967년에 해체 복원 공사를 하였다. 아래층 받침돌은 4장의 길고 큰 돌로 구성되었는데, 1장의 돌로 이루어진 각...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47호 건립시기 : 863년 성격 : 석탑 유형 : 유적 크기 : 높이 3.71m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 (도학동), 동화사 분야 : 예술·체육/건축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군 사령부로 삼아 지휘한 곳이다. 동화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심지대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桐華寺)’라고...
있다. 화면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입적한 이후 받은 시호인 ‘願力受生海東佛日普照國師(원력수생해동불일보조국사)’가 기입되어 있다. 보조국사 진영은 동화사뿐만 아니라 순천 송광사, 여수 흥국사 등에도 봉안되어 있는데, 얼굴 표정이나 앉은 자세, 의자, 주장자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모습이지만 장삼과 가사의 색상...
시대 : 조선후기 문화재 지정 : 보물 제1639호 성격 : 초상화 유형 : 유물 재질 : 비단 바탕에 채색 분야 : 예술·체육/회화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구동화사 당간지주는 당간은 없어지고 두 기둥만이 66cm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쪽 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
둥근 모습으로 되어 있다. 현재 댓돌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다만 둔중함이 엿보이고 있어, 제작 시기는 신라 말기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사가 832년(흥덕왕 7)에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해 창건되었음을 참작하면, 이 당간지주의 조성 연대도 창건 당시와 부합된다고 하겠다.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 보물 제254호 건립시기 : 832년 (추정) 성격 : 당간지주 유형 : 유적 크기 : 높이 3.1m, 너비 0.76×0.34m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도학동), 동화사 분야 : 예술·체육/건축
보물 제244호. 전체높이 293cm. 상높이 129cm. 이 불상은 비로암 법당 앞에 있는 3층석탑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
민애왕석탑사리합기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기(傳大邱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蠟..
외면에 가는 선으로 7자 38행의 공간을 만들고, 발원문을 해서로 음각하였다. 발원문에 따르면, 석탑은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의 추복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동화사의 주지로 여겨지는 심지(心智)와 융행(融行) 대덕이 주도하였으며, 한림(翰林) 이관(伊觀)이 발원문을 지었다. 내용 심지는 헌덕왕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문화재 지정 : 보물 제741호 성격 : 금석문 유형 : 유물 크기 : 높이 8.3㎝, 몸통 지름 11.5㎝,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 재질 : 납석(蠟石) 제작시기 : 863년 9월 10일 분야 : 역사/고대사 소장/전승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1길 30-0 (장충동2가, 동국대학교)동국대학교박물관
대구동화사 대웅전(大邱 桐華寺 大雄殿)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이다. 2008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63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후 8차례에 걸쳐서 새로 지었으며, 대웅전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대구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大邱 桐華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2018년 7월 24일 보물 지정예고를 거쳐, 2018년 10월 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99호로 지정되었다., 제19350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18. 10. 4. / 189 페이지 / 730.6KB '대구동화사...
전 대구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서울특별시 중구,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의 사리장치이다. 1982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41호로 지정되었다. 전 대구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대구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탱화도이다. 2006년 12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05호로 지정되었다.문화재청고시제2006-112호,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6410호, 1191면, 2006-12-29 등받이가...
대구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 사찰에 있는 통일신라의 불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44호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舍那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
부도암 부도(浮屠庵 浮屠)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동화사 부도암에 있는 조선시대의 승탑이다.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부도암은 동화사에서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 동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산 기슭에 이 부도가 놓여 있다. 부도란 승려의...
대구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大邱 桐華寺 念佛庵 磨崖如來坐像 및 菩薩坐像)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동화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이다. 삼각형 모형의 암반의 서쪽면과 남쪽면에 각각 조각된 여래상과 보살상으로 이뤄져 있다.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동화사 아미타회상도(大邱 桐華寺 阿彌陀會上圖)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이다. 2009년 2월 2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10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화는 1699년 대화원(大畵員) 의균(義均)을 비롯한 묘해(妙解)·지영(智英)·상명(尙明) 등 이 참여해서 그린 아미타불화로서 불보살과 호법...
대구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대구광역시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 2기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의...
대구동화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大邱 桐華寺 普照國師 知訥 眞影)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이다. 2010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39호로 지정되었다.문화재청고시제2010-18호,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202호, 135-146면, 2010-02-24 고려시대...
대구동화사 염불암 청석탑(大邱 桐華寺 念佛庵 靑石塔)은 대구동화사에 딸린 암자인 염불암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 시대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청석탑(靑石塔)이다.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에 딸린 암자인 염불암 안마당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를 굳건히...
대구동화사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동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6년 12월 5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는 493년 극달이 ‘유가사’라 하며 세웠고, 통일신라 흥덕왕 7년(832)에 왕사였던 심지가 고쳐 지으면서 ‘동화사’로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