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最高)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 세한도(歲寒圖)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詩)와 산문(散文)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金石學)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天才)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었다. 김정희만큼 호(號)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이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號)를 바꿔가며 사용하였다.
천재(天才)의 출생인 만큼 탄생설화(誕生說話)가 없을 리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산 나무들이 아기 '김정희'의 생기(生氣)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이야기도 전한다. 탄생설화는 천재(天才)를 포장해 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
김정희 집안은 '안동김씨' 그리고 '풍양조씨'와 더불어 조선 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名門)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英祖)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한신(金漢藎)이 39세에 후사(後嗣) 없이 죽자, 월성위의 조카인 '김이주'가 양자(養子)로 들어가 대(代)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김정희의 조부(祖父)이다.
추사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養子)로 입양되었다. 큰댁으로의 양자(養子) 입양은 조선 후기 양반 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1800년 15세의 나이에 '한산 이씨'와 결혼한 김정희(金正喜)는 이 시기를 전후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부딪친다. 이미 10대 초반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805년에는 부인인 '한산 이씨'와 사별(死別)했고, 뒤이어 스승인 박제가(朴齊家)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의 10대 시절은 끊이지 않는 집안 흉사(凶事)로 고통과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늘이 내린자질,
어린 김정희의 천재성(天才性)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7살 때의 일이다. '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 붙인 ' 입춘첩(立春帖) '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채제공(蔡濟恭)은 문을 두드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물었다. 마침 친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글씨의 주인공을 안 '채제공'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名筆)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 ... 대동기문(大東奇聞)
김정희는 어린시절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보냈다. '월성위궁'은 영조(英祖)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김정희(金正喜)가 서울 집이 아닌 충난 예산(禮山)에서 출생한것은 그때 당시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하여 잠시 이주한 것이라고 한다. 월성위궁에는 매죽헌(梅竹軒)이라고 하여 '김한신'이 평생 모은 서고(書庫)가 있었다.
수많은 장서(藏書)는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바다처럼 넓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 '김노경'은 아들의 자질(資質)을 알아보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거두(巨頭)이었던 박제가(朴齊家) 밑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스승이었던 ' 박제가 ' 역시 어릴 적 김정희의 '입춘첩(立春帖)' 글씨를 보고 ' 이 아이가 크면 내가 직접 가르쳐 보고 싶다 '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정희 묘(墓),
김정희의 묘(墓)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하고 있다.처음에는 과천(果川)에 있었으나, 그 후손들이 1937년 선조(先祖)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였다.김정희 고택(故宅)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생가(生家)와 나란히 하여 그의 묘(墓)가 있다.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이 이웃하여 자리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즉, 음택과 양택의 동거(同居)이다. 증조부 김한신(金漢藎)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가 생가(生家)의 오른쪽에 있고, 더 오른쪽에는 고조부(高祖父), 김흥경(金興慶)의 묘가 단정하고 온화한 터에 있다. 그런가 하면, 생가(生家)의 왼편에 추사 김정희 본인의 묘(墓가 있는 것이다. 김정희 생가(生家)의 좌우로 커다란 묘(墓)들이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보면 묘지의 중간에 집이 있는 구조이다.
집과 묘(墓)가 나란히 있다는것은 산 자(者)와 죽은 자(者)의 동거(同居), 어둠과 밝음의 동거인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사생관(死生觀)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어디 멀리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다. 죽음이 무섭고 낯선 것이 아니라 옆집처럼 임의롭고 친숙한 것이다. 그리고 순환한다. 양택이 음택이 되고, 음택이 양택이 된다....는 의미는 조상이 좋은 묫자리에 들어가면 다시 그 집 후손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한산 이씨'와의 짧은 인연을 뒤로 하고, 김정희(金正喜)는 23세인 1808년에 '예안이씨'와 재혼(再婚)하였다. 그 뒤로는 집안 흉사(凶事)도 그쳤고 평안함을 되찾았다. 생부(生父) 김노경(金魯敬)이 호조참판(戶曺參判)으로 승진하였고, 또 동지부사가 되어 청(淸)나라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당시 사마시험(司馬試驗 ... 생원, 진사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김정희는 외교관의 자제 혹은 친인척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사행(使行)길에 동행하였다. 사행단(使行團)의 한 사람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외국 견문을 넓히고 온 경험은 인생의 전환기(轉換期)라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연경(燕京)을 세 번이나 다녀온 스승 박제가(朴齊家)의 영향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중(韓中)문화의 교류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낱낱이 밝혀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는 20세기 초에 한국의 인사동 서점가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청나라 화가 '조년'이 김정희에게 보내준 그림,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등을 발견하여 구입하였다. '후지츠카'의 연구로 조선의 북학파(北學派)들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김정희(金正喜) 등이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조선후기 지성사(知性史)를 찬란하게 비추었음이 밝혀졌다.
부친을 따라 김정희가 북경(北京)으로 출발한 것은 1809년 10월 28일이다. 북경 체류 기간은 두 달 남짓이었는데, 사행(使行)길에서 2명의 중국인 거유(巨儒)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金石學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이었다.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原)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考證學)의 진수를 공부하였다. 연경학게(燕京學界)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었던 '옹방강(翁方綱)'은 김정히의 비범(非凡)함에 놀라 ' 경술문장 해동제일 (經術文章 海東第一) '이라고 찬탄하였고, 완원(阮元)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어린 아호(雅號)를 받았다. '후지츠카'는 이들의 만남을 한중문화(韓中文化) 교류사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스승인 박제가(朴齊家)가 만났던 '나빙'이나 '기균' 등 노대가(老大家)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김정희는 북경에서 옹방강, 완원과 같은 스승 외에도 이정언, 서송, 조강, 조학년 등 많은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1810년 조선(朝鮮)으로 돌아가는 김정희를 위해 북경 법원사(법원사)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주학년'은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참석자 이름을 모두 기록했다. 그 당시 '주학년'이 그린 전별도(錢別圖) 실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1940년 '이학년'이 모사(模寫)한 그림이 과천시 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연경학계(燕京學界)와의 교류는 귀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만년(晩年)까지 계속되었고,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실사구시 實事求是,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가 주창한 것으로 '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 '는 의미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天文學)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이었다.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현상 등 관측(觀測)에 근거하여 서양 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세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金魯敬)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黃金期)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政局)과 정쟁(政爭)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아들로서 김정희는 꽹가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無罪)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절도안치(絶島安置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나왔다. 이들 부자(父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떠났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훈풍(薰風)도 잠깐, 아버지 '김노경'을 탄핵하였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자화상 自畵像,
이 자화상(自畵像)은 19세기 사실주의적인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으로 '공제 윤두서( 恭齊 尹斗緖), '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의 자화상 계보를 잇는 초상화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자화사은 지금까지 알려진 추사파 초상화, 즉 '소치 허련(小癡 許鍊)'와 '이한철(李韓喆)'의 초상화와는 다소 다르다. 눈매라든가, 굳게 다문 입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비슷하다. 하지만 예컨데 ' 이한철(李韓喆) '의 초상화가 온화하고 원만한 모습이라면 추사의 자화상은 극히 사실적이다. 요컨데 추사(秋史)의 자화상은 전문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의 도식화(圖式化), 양식화(樣式化)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위의 자화상(自畵像)을 그린 '추사 김정희'는 아래와 같이 그림에 자찬(自讚)을 붙였다. 추사 김정희는 자기가 그린 얼굴 모습에 담겨 있는 내면(內面)의 실상을 보아야지, 겉모습이 자신과 닮았느냐, 아니냐는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果老自題 ...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도 없다. 제주(帝珠 .. 제석천의 구슬)가 주렁주렁한데, 누가 큰 마니주(摩尼珠 .. 여의주) 속에서 상(相 ..모습)을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노인이 스스로 쓰다.
'추사'의 자화상은 세로 가로 32.0 × 23.5cm 크기의 하니에 상반신을 포함해서 약간 측면의 얼굴을 조그맣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조선시대의 다른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의관(衣冠)을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채 검은 옷깃의 무명저고리와 탕건(宕巾)만 쓴 모습이어서 귀 뒤로 어지럽게 엉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레나릇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눈매는 가느다랗게 긴, 그러면서도 끝이 약간 올라간 이른바 '봉눈'이어서 볼수록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특히 형형하고도 예리한 눈빛은 예인(藝人)으로서의 그의 삶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고 있다. '과노(果老)' 이라는 자제(自題)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만년(晩年)을 보냈던 과천(果川)시절 즉 60대 중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는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추사 김공상 (秋史 金公像) '과 추사의 제자(弟子)인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 그린 ' 완당선생 초상(阮堂先生 肖像) '과 '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 등 여러 점이 남아 있으며, 이들의 초상화는 눈매라든가 굳게 다문 입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자화상과 비슷하지만, 이한철(李漢喆)과 허련(許鍊)이 그린 초상화들은 조선시대 특유의 도식화(圖式化), 양식화(樣式化)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평범해 보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린 추사(秋史)의 모습도 그저 온화하고 원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자화상은 조금도 꾸밈이 없는 극히 진솔한 모습이다.
이 무렵의 추사 모습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상유현(尙有鉉)의 ' 추사방견기(秋史訪見記)'가 그것으로 그가 13세 어린 소년 시절에 봉은사(奉恩寺)에서 보았던 광경을 약 60년 후 노년(老年)에 기록한 것이다. 그가 보았던 '추사'는 1856년, 즉 추사(秋史)가 죽기 6개월 전의 모습이었다. 수 십 년 전에 본 기억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 안 구석구석에 놓여있는 물품들의 품목이나 작은 붓, 큰 붓의 갯수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추사'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가운데 앉아 계신 한 노인은 몸집이 자그마하고, 수염은 눈 같이 희며 숱은 많지도 성글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옷칠한것처럼 빛났고, 머리는 벗겨져 머리칼이 없었다. 승관(僧冠)처럼 대쪽으로 짠 둥근 모자를 썼으며, 소매가 넓은 옥색 모시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얼굴은 젊은이처럼 혈색이 불그레했지만, 팔이 약하고 손가락이 가늘어 마치 아녀자 같았으며, 손에 염주 하나를 구리고 계셨다. 여러 어른이 절하며 예를 갖추자, 몸을 구부려 답하고 맞으시니, 이 분이 바로 추사(秋史) 어른인 줄 알게 되었다.
503개의 호(號),
우리가 보통 추사(秋사), 완당(阮당) 같은 김정희(金正喜)의 명호(名號 .. 이름과 호를 포함)가 몇개나 될까? 호(號)는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풍속, 즉 복명속(複名俗) 또는 본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 즉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경우, 호(號)의 사용은 당대(당대)부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보편화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의 호(號)는 소성거사(小性居士)이었다.
이러한 호(號)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호(號)는 아호(雅號)와 당호(堂號)로 나누기도 한다. 아호(雅號)는 흔히 시(詩), 문(文), 서(書), 화(畵)의 작가들이 사용하는우아한 호라는 뜻으로 일컬음이요, 당호(堂號)는 본래 집(正堂과 屋宇)의 호를 말함이나, 그 집의 주인을 일컫게도 되어 아호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호(號)를 짓는 기준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소처이호(所處以號) ..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호로 삼는 경우. 소지이호(所志以號) ..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경우. 소우이호(所遇以號) ..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는 경우. 소축이호(所蓄以號) ..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것 등의 네 가지가 곧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數)의 다양한 호(號)를 사용한 이는 김정희(金正喜)이다. 오제봉(吳濟峯)이 조사, 수집한 '추사선생아호집(秋史先生雅號集)'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 이렇듯 많은 김정희의 호(號)에 대하여 '오제봉'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변화무쌍한 선생의 서체(書體)만큼 아호(雅號)의 변화도 무진하게 표일하면서도 각 '아호'에서 풍기는 맛이 다양하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이나 정서, 취향 따위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이를테면 귀양살이의 서러움을 노구(老鷗)라 표현하였고, 물가 생활에서 해당(海堂), 금강(琴江), 노장(老莊)의 사상 속에서 선객(仙客), 공자를 생각하며 동국유생(東國儒생), 석가모니를 생각하며 불노(佛老), 아미타(阿彌陀), 호경금강(護經金剛), 산제거사(蒜提居士), 고경산방(古經山房) 등을 사용하였으며, 선정(禪定) 속에서 노닐 때에는 방외도인(方外道人), 무용도인(無用道人), 설우도인(雪牛道人) 등 생각나는대로 구사하였다. 시정(詩情)어린 시구(詩句)가 바로 아호로 등장한 것도 있으니, 부용추수차린거(芙蓉秋水此隣居), 해당화하희아손(海堂花下戱兒孫)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수를 먹다가 문득 최면노인(최麵老人), 취흥이 도도하면 취옹(醉翁)이라고 한것은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반거사(白飯居士) 같은 우스꽝스러운 것도 있으며, 정희추사(正喜秋史)라고 거꾸러 써서 장난스러운 것도 있고, 아념매화(我念梅花) 같은 정서적인 것도 있다.
500개가 넘는 호(號)를 사용하였던 김정희(金正喜)는 그래서 백호선생(百號先生)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호(號)가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다. 금정희가 중국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23세 때인 1808년까지의 호(號)는 현란(玄蘭)이었다. 검고 깊으며 심오하다는 뜻을 지닌 '현(玄)'과 난초를 의미하는 '난(蘭)'이다. 김정희는 '현란'을 통해 선비의 신비함과 고결함을 표혀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1809년 중국 연경(燕京)으로 갈 때 '추사(秋史)'라는 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추사의 일생에서 모색과 전환을 꾀하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추사(秋史)의 '추(秋)'에는 추상같다, 오행(五行) 중 금(金) 등의 의미가 있고, '사(史)'에는 사관(史官), 서화가 등의 의미가 있다. 완당(阮堂)은 중국의 완원(阮元)을 스승으로 삼은 이후 완(阮)을 많이 사용하면서 나온 호(號) 중 하나인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 문화(文化) 예술(藝術)을 상징하는 인물은 '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영,정조(英,正祖) 시대, 조선 후기, 문화(文化)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 진경문화(眞景文化) '를 이끌던 세력의 중심에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약용(丁若鏞)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藝術)을 논하려면 김정희(金正喜)를 비켜갈 수는없는 것이다.
추사의 서예관 秋史의 書藝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의 ' 3대 예술 '이라고 할 수 있는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은 공통적으로 인문학적(人文學的) 교양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다. 응축된 학문적 바탕이 없이, 기교나테크닉만 가지고는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시서화(詩書畵),삼절(三絶)가운데에서도 시(詩)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시(詩)가 읽는 예술이라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글씨(書)는 양쪽을 모두 겸비(兼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서예(書藝)라고 하는 예술분야는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예술인 동시에 글씨 마다의 조형적(造形的)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서예(書藝)가 시(詩)와 그림 양쪽의 중도통합적(中道統合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보니, 한자문화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시(詩)나 그림보다 더욱 존중되었던 예술세계이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서예관(書藝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文字)의 향기, 즉 문자향(文字香)과 서권(書卷)의 기(氣)에 무르녹아 손 끝에 피어나야 한다 ' 즉, 명필(名筆)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思索)을 통하여 인문적(人文的) 교양(敎養)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다.아무튼 추사 김정희가 창안한 ' 추사체 '라는 서예는 서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思考)의 깊이와 문자(文字)의 향(香)이라고 하는 감성(感性)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韓中日)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반향(反饗)을 일으켰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명선 茗禪,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면, 바로 그 사실을 글자로써 표현한 작품이 있다. 바로 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115.2 × 57.8cm크기의 종이에 묵으로 쓴 예서체(隸書體)을 글씨이다. 추사(秋史)의 이 작품은 차(茶)를 의미하는 ' 명(茗) '이라는 글자와 ' 선(禪) '이라는 두 글자인데 그야말로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이 두 글자는 예서(隸書)이지만 꾸밈이나 억지를 부린 바가 전혀 없어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힘찬기운이 돋보인다. 서법(書法)과 격식(格式)이 분명한 예서(隸書)이면서도 그 격식을 넘어서는 탈속(脫俗)과 자유분방의 멋이 가득하다.
추사 김정희의 명선(茗禪)은 1815년 당시 학승(學僧)으로 이름 높던 백파대사(白破大師)의 거처인 수락산 학림사(鶴林寺)에서 초의(草衣)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그때 나이 30세의 동갑나기 두 젊은이의 인연이 시작되어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로 지냈다. 두 사람은 여러 이질적(異質的) 요소가 많았으나 1786년 동갑내기로 천성이 지극히 순수하였고, 종교와 신분 계급을 초월하여 예술의 본질에 투철하고 다도(茶道)의 진수를 터득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였다. 방서(傍書 .. 곁에 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草衣寄來自製茶, 不滅蒙頂露芽,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 .... 초의(草衣)가 스스로 만든 차(茶)를 보내왔는데, 몽정과 노아에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筆意)로 쓴다. 병든 거사(居士)가 예서(隸書)로 쓰다. 몽정(蒙頂)은 중국 사천성 명산현 몽산(蒙山)에서 나는 천하제일의 고급 차를 말하고, 노아(露芽)는 중국 강소성 강령현 동남방산(東南方山)에서 나는 유명한 차를 의미한다.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는 중국 하북성 원씨현 백석산에 있는 비석으로, 백석산신(白石山神)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후한(後韓)시대에 예서(隸書)로 쓰여진 비석이다.
명선(茗禪)은 추사 김정희가 다성(茶聖)으로 불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 ~ 1866)에게 선사한 호(號)이다. 또한 명선(茗禪)은 차싹 명(명)으로, 차(茶)와 참선은 같은 것이다 .. 차를 마시는 것은 자기 수양이다 ..라고 풀이할 수 있다. 추사(秋史)가 초의(草衣)에게 차값으로 써보낸 글씨가 바로 명선(茗禪)이다. 글씨는 한(漢)나라 때 비문(碑文)에서 그 보을 구해 옹혼한 힘과 엄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필획(筆劃)의 변화가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추사(秋史) 예서체(隸書體)의 진수이다. 특히 작품의 내력을 적은 잔글씨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예술적 깊이를 더해주어 추사예술의 백미(白眉)로 꼽는다.
추사(秋史)는 귀양살이가 도합 13년일 만큼 일생동안 유배와 귀향(歸鄕)을 반복하였다. 그의 나이 55세, 제주도(濟州道) 유배 때 초의(草衣)는 손수 법제한 차(茶)를 세 차례나 보냈고, 직접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半年)을 곁에 있기도 하였으나, 추사는 매번 초의(草衣)에게 차(茶)를 구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 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은 없을 줄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세속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도 외면하는 것입니까.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茶)와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茶)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거요....
다산, 추사 그리고 초의,
우리나라의 차문화(茶文化)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역사도 짧고 그다지 성하지 못한 현실이다. 고래(古來)로 식혜니 숭늉이니 약수 따위 마실 우리 것이 많아서였을까.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도(茶道)를 확립한 사람이 조선 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횻일 정도이니 차문화(茶文化)에서는 매우 후진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차(茶)보다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서양풍이 압도적이다.
차문화를 얘기할 때 다성(茶聖)이라는 초의선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 .. 1786~1866)은 왕조의 혜택을 그다지 받지 못하면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의 배불(배불의 유교신앙(儒敎信仰)의 5대 왕조시대에 걸쳐 다사다난하게 스님으로 장수(長壽. 80세)하며 살다 간 인물이다. 흥성(興城) 장씨(張氏)로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출생하여 1800년에 출가, 일생 대처(帶妻)하지 않아 절손(絶孫), 1824년 해남 대둔사(大芚寺 .. 지금의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頭輪山) 자락에 일지암(一枝庵)을 만들어 1866년 입적(入寂)할 때까지 기거하였다.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와는 1815년 처음 상경하여 30세에 초대면하고 평생 교유하였고, 20여 년이나 년장(年長)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는 1801년 다산(茶山)이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8년이나 지난 1809년 강진의 백련사(白蓮社)에서 다산과 초대면하고부터 초의선사가 극진히 모시는 선배 내지 스승과 제자격의 교유가 있었다.
추사(秋史)가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것은 1840년 9월2일의 일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18일 만인 9월20일 대둔사(大芚寺)에 도착, 저녁 무렵 일지암(一枝庵)으로 초의(草衣)스님을 찾았다. 이들은산차(山茶)를 앞에 두고 밤을 세워 시국을 논하고 달마(達磨)의 관심법(觀心法)과 혈맥론(血脈論)을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 대둔사를 떠나 유배지로 향하는 '추사'를 위해 완도 이진포(梨津浦)까지 따라갔던 초의(草衣)스님은 9월23일 추사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제주화북진도 ( 濟州華北津圖 ... 위 사진 )'를 그린다. 화북진(華北津)은 제주(濟州)의 첫 관문이다. 완도(莞島)의 이진포(梨津浦)를 떠난 추사는 필시 거친 풍랑과 싸우며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제주땅을 밟았으리라. 모슬포에 위치한 작은 항구인 화북진(華北津)은 지금도 옛 포구(浦口)의 정취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데, '제주화북진도'는 초의(草衣)의 상상력에서 나온 그림이다. 실제 '초의'가 화북진을 통해 제주에 들어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바람이 많고 환경이 척박하여 이곳 사람들조차 '못살포' 또는 '못슬포'라 불렀던 척박한 땅, 이곳에서 추사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다.
유배지에서의 유일한 낙(樂)은 차를 마시는 일과 독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특히 초의(草衣)가 보내준 차(茶)는 그에게 더없는 기쁨이었으며 위안이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차를 재촉하는 글이 많지만 추사의 편지에는 해학과 기지가 넘친다. 특히 초의(草衣)가 그린 '제주화북진도'의 화제(畵題)에는 이들의 우정이 잘 드러난다.
지기(知己)를 아끼는 초의(草衣)의 마음이나 대둔사(大芚寺)르 찾았던 추사의 초췌한 모습, 추사의 처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초의의 정회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화제(畵題)는 제법 긴 글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추사(秋史)와 초의(草衣)의 교유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1840년 (도광 20년) 9월 20일 해거름에 조착한 추사(秋史), 초의(草衣)가 증언한 당시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도광 20년(1840) 9월 20일 해거름에 추사공(秋史公)이 일지암(一枝庵)의 내 처소에 들러 머물렀다. 추사는 9월 초2일 한성을 떠나 늦게 해남(海南)에 도착하였는데, 앞서서 추사는 영어(囹圄)의 몸으로 죄 없이 태장(苔杖)을 맞은 일이 있어서 몸에 참혹한 형(刑)을 입어 안색이 초췌하였다. 이런 가운데 ' 제주 화북진(華北津)에 정배(定配)한다 '는 명을 받아, 길을 나선 틈에 잠깐 일지암(一枝암)에 도착한 것이다.
평시에 추사는 나와 더불어 신의(信義)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가는 길에 머무르게 되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산차(山茶)를 마시며 밤이 새도록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과 혈맥론(血脈論)을 담론함에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에 형벌의 상처를 입었으나 매번 지중한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고 백성들에게 처한 괴로움과 자신의 괴로움인 양 중히 여기니 참으로 군자(君子)라고 할 만하다.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君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가. 탄식하고 또 탄식할 만한 일이로다. 이튿날 추사는 적소(謫所)로 떠나니 추사의 원망스러운 귀양살이에 눈물 흘리며 비로소 '제주화북지도(濟州華北津圖)' 한 폭을 그려 이로서 나의 충정을 표한다. 도광 29년 9월23일. 초의(草衣) 의순(意恂)은 낙관(落款)하지 않고 예를 갖추어 그리노라.
초의선사의 이 글에 의하면 추사는 이미 제주도로 정배(定配)가 결정되기 전 태장(苔杖)을 당했다는 것인데, 이는 1840년 대사헌(大司憲) 김홍근(金弘根)의 상소(上疏)에서 비롯된 일이다. 10년 전 추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과 윤상도(尹商度)의 옥사(獄사)를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김홍근'의 상소로 인해 추사의 관직이 삭탈되었고, 망부(亡父) 김노경(金魯敬)의 관직도 추탈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예산에 낙향(落鄕)해 있던 추사는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로 압송되었다. 추사가 죄 없이 태장(苔杖)을 당했다는 초의선사의 증언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추사가 몸에 참혹한 형(刑)을 입어 안색이 초췌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추사가 혹독한 고문(拷問)으로 빈사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하나. 추사가 겨우 목숨을 부지해 제주도 대정현(大精縣)으로 위리안치될 수 있었던 것은 우의정 조인영(趙仁榮)의 상소 덕분이었다.
유배 길에 오른 추사가 전주, 남원, 나주를 거쳐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일지암(一枝庵)을 찾았다. 평소 서로간의 신의(信義)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 不忘相思相愛之道 ' 이들의 충심(衷心)은 그라대 일지암에 무물게 됨을 다행으로 여기는 초의선사의 마음에서 잘 드러난다. 초췌한 추사를 대하는 초의선사의 마음은 실로 ' 불행 중 다행 '이었으리라.
산차(山茶)를 앞에 놓고 나눈 이들의 담론(談論)은 세상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군은(君恩)의 중후함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君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버리는가... 天何以不保君子 地何以不育宏士志 如此困橫脫機 '라고 한 초의(草衣)의 회한은 추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추사는 완도(莞島)까지 따라온 초의선사의 배웅을 받으며 제주도로 향하였는데, 그가 실제 배를 탄 것은 9월27일이었다. 따라서 초의선사가 이 '제주화북진도'를 그린 곳은 완도(莞島)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완도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초의선사는 이 그림을 그려 추사에게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의선사가 화제(畵題) 말미에 ' 낙관(落款)을 하지 않고 합장하고 그렸다 '고 한것은 이 추정을 방증할 만하다.
한편 ' 소치시록(小癡實錄) '에는 스승의 적거지(謫居地)를 찾았던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증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841년) 2월에 나는 대둔사(大芚寺)를 경유하여 제주도로 들어갔습니다. 제주(濟州)의 서쪽 100리 거리에 대정(大精)이 있었습니다. 나는 추사선생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으로 찾아가 유배생활을 하시는 선생께 절을 올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소치(小癡) 허련(許練)이 제주도로 추사를 찾은 것은 1841년 2월이다. 그가 대둔사를 경유했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일지암(一枝庵)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를 찾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초의선사는 소치 허련편에 추사에게 보낼 편지와 차(茶)를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소치(小癡)의 제주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중부(仲父 ..둘째 아버지)가 죽었다는 부음(訃音)을 받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소치(小癡)는 세 차례나 제주도를 찾아 스승을 모셨는데, 초의(草의)와 추사(秋史)의 편지와 차(茶)를 전한 이는 소치(小癡)이었다.
한편 초의선사(草衣禪師) 또한 추사의 적거지(謫居地) 제주도를 찾았느네, 그 시기는 1843녀 봄 무렵이라 여겨지고 있다. 초의(草疑)는 제주도에서 반년(半年) 동안 머물다 대둔사(大芚寺)로 돌아왔다. 1843년 8월29일 추사(秋史)가 초의(草衣)에게 보낸 편지에다전(茶奠)은 모두 훌륭하지만 스님과 함께 죽로(竹爐)의 옛 인연을 다시 잇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포장을 꺼내니 병든 위(胃)가 감동하고 또 감동하였습니다 '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 편지는 초의(草衣)가 제주도에서 대둔사로 돌아온 후 추사(秋史)에게 차(茶)와 장류(醬類)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병(病)든 위(胃)가 감동하였다는 대목에서 초의선사가 보낸 차(茶)가 추사에게 있어 얼마나 감동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의 옛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이나 그 성격, 위상 등을 담고 잇는 현판(顯板)이 걸려 있다. 궁궐은 물론 서원(書院)이나 누각(樓閣), 사찰 건물에는 거의 예외없이 다양한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건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王)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나 명필(名筆)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다. 따라서 현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은 물론 예술(藝術)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는 보고(寶고)라 할 수 있다.
현판 중에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연이 쓰여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판의 의미에 대해 사전에서는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門) 위에 거는 편액(扁額)이라고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을 총칭한다. 간단히 말해 편액(扁額)은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이고, 주련(柱聯)은 건물의 기둥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거나 새겨 거는 것을 말한다. 주련(柱聯)은 글귀를 이어 기둥에 건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다.
추사의 마지막 글씨
이러한 현판(顯板) 중 유일하게 문화재(文化材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울 봉은사(奉恩寺)의 '판전 (板殿)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별세(別世) 3일 전에 남긴 글씨이다. 육신(肉身)이 아픔을 붓에 모아 승회시킨 듯 글도 삶도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경지를 느껴보게 하는 추사의 마지막 글씨이다.
절이 하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절이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사)이다. 입구에 들어가 조금 올라가면 진여문(眞如門)이 있고, 그 속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문을 지나 법왕루와 선불당, 대웅전과 영산전을 지나면 판전(板殿)이 있다. 지금은 강남의 한복판에 있지만, 고려(高麗)시대에는 수도 개경(開京)에서 멀리 떨어진 절이었고,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와서도 처음에는 사대문(四大門) 밖, 그것도 한강 남쪽의 외진곳에 있어서 봉은사 가는 길은 녹녹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이 절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을 지닌 시골의 작은 절에 불과하였다.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인 1498년, 성종(成宗)의 무덤인 선릉(宣陵)의 원찰(願刹)로서 중창되고, 봉은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중요한 절이 되었다. 이후 1562년 보우(普雨)스님이 중종(中宗)의 무덤 정릉(靖陵)을 선릉 옆으로 옮기면서 봉은사(奉恩寺)도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 ' 선왕(先王)들의 은혜를 받들어 섬긴다 '는 봉은사(奉恩寺)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봉은사가 조선시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스님이 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승과(僧과)시험 장소이었기 때문이다. 보우(普愚)가 이곳 선불당(先佛堂)에서 승과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청허(淸虛) 휴정(休靜)스님과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스님도 이곳에서 합격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노년(老年)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果之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奉恩사)에 자주 들리곤 하였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晩年)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서화)에 침잠하였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落款)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살의 과(果)가 병중에 쓰다 ' 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하였던 과도인(果道人), 과노(果老), 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신용복교수는 그의 저서 ' 강의 - 나의 동양고전'에서 '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고 하였다. 노자(老子) 45장에서도 '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다 .. 大直若屈 大巧若拙 '이라 하였다. 가장 곧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최고 수준을 나타낸다. 대직(대직)과대교(大巧)는그 상대개념으로 전화(轉化)해 간다.
최고(最高)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못되고 상대적(相對的)인 것이어서 곧은 것과 굽은 것, 뛰어난 기교와 서툰 것은 자연히 생성하고 소멸하 듯 상호 전화(轉化)될 수 있다. 한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인 대직(大直)과 대교(大巧)는 없다는 것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작위적(作爲的)인 것이어서 자연을 거스리고 자연의 질서를 해친다는 의미이다. 위의 사상을 눈으로 보면서 음미할 만한 두 걸작(傑作)이 있다. 하나는 서산 개심사(開心寺)의 심검당(尋劍堂) 부엌이고, 다른 하나는 추사(秋史)의 봉은사(奉恩寺) 판전(板殿) 글씨이다.
심검당 부엌이 굴미(屈美)의 극치라면 졸미(拙美)의 극치는 봉은사 판전(板殿) 글씨이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1856년 여름부터는 거처를 과천(果川)에서 봉은사(奉恩寺)로 옮겨 생활하면서 판각불사(板刻佛事)에 관여하게 된다. 1856년 9월에 판전(板殿)이 완공되고 얼마 후 추사(秋史)는 생애 마지막 작품인 판전(板殿)의 편액글씨를 남긴다. 판전의 편액글씨 옆에는 '칠심과병중작'이라 써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하다.
유홍준(劉弘濬) 교수는 그의 저서 '완당평전(阮堂評傳)'에서 판전 글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拙)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판전(板殿) 글씨는 기교(技巧)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기교를 감추고 서눈 것을 존중하는경지에 이른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뛰어난 기교는 서툴게 보인다 .. 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과 '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라는 문구에 가장 어울리는 본보기이다. 이 글씨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광사(李匡師)가 쓴 해남 대둔사(大芚寺) 대웅전 현파글씨에 독설(毒說)을 퍼붓던 추사의 기고만장한기개는 쏙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추사(秋史)는 제주도 귀양 길에 해남 대둔사에 들러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게 이광사(李匡師)인데 어찌 저런 촌스러운 글씨를 달고 있는가 ?' 라고 하면서 자신이 쓴 글씨로 바꿔 달게 하였다.
9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추사(秋史)는완전히 달라졌다. 다시 대둔사(大芚寺)에 들러 '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보았어. 예전의 현판이 있거든 다시 달아주게 '하였다. 기고만장한 기개는 사라지고 완숙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봉은사 판전(板殿) 글씨에는 이러한 추사의 완숙함 아니 그 보다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유배(流配)란 중죄인들을 멀리 보내 쉽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말한다. 제주도(濟州島)는 본토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여건과 교통이 또한 불편함으로 인해 유배지로는 최적지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온 대정(大靜)은 제주도에서 가장 험한 지역이기 때문에 포구(浦口)인 '모슬포'를 일컬어 ' 사람이 못살, 못살포 ... 모슬포' 라고 비하(卑下)했던 것처럼 조선시대 원악(遠惡)의 유배지로서 가장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위리안치(圍籬安置 또는 加棘安置 ... 중죄인에게 적용되었는데,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위리.. 圍籬), 가시덤불을 쌓고(가극 .. 加棘)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킴으로써 죄인의 중연금상태를 내외에 상징하는 것) 유배형을 받고 머물렀던 '강도순(姜道淳)'의 집이 있다. 김정희는이곳에서 그 유명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고, 8년 3개월만에 해배(解配)되어 돌아간다.
제주도 유배생활
김정희는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병과)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弼善 .. 세자의 스승)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때문에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후 헌종(憲宗)이 즉위한 1835년, 친분이 있던 '풍양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헌종 6년인 1840년 무렵 '안동김씨'가 다시 집권하자 '윤상도의 옥(尹尙度의 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40년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정치적 투쟁 속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김정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金有根)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고, 또 사랑하는 아내아도 영원히 이별하고 말았다.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다. 서울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희'는 오직 책을 벗삼아 지낼 뿐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 때문에 무고(誣告)를 당한다.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拷問) 끝에 36대의 곤장을 맞고서 만신창이 몸으로 제주도 대정현(大精縣) 마을에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을 받는다. 이에 따라 '추사'는 1840년 9월 4일, 한양을 출발하여 9월 28일 완도(完島) 이진포에서 배를 타고 그날 저녁 제주도 '화북포'에 도착하였다.
화북포구에서 유배지 대정현(大精縣)까지는 80리 길, '추사'는 산간마을을 잇는 지름길로 대정현에 도착하였다. 돌 많은 제주의 산간은 온통 돌 투성이, 사람과 말이 불을 붙이기 어려웠다. 터덜터덜 돌길을 걷고 걸어 유배지에 오니 1840년 10월 2일이었다. 유배(流配)의 명을 받은 지 꼭 한달 만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두른 유배지에 도착한 것이다. '추사'는 처음 대정읍성(大精邑城) 안동네 '송계순'이 집에 거처를 정했으나 이후 두번 더 거처(居處)를 옮긴다.
절해고도(絶海孤島) 원악지(遠惡地) 유배지의 생활은 외로움과의 싸움인 것이다. 그는 그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편지를 썼다. '추사'가 쓴 편지의 대부분은 제주 유배지에서 쓰여졌다. '추사'는 귀양살이 동안 몸이 계속 편치 않았고, 잦은 질병(疾病)에 무척 고생하였다. 아우 '명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혀에 난 종기(腫氣)와 콧 속에 난 혹이 아직도 아파서 5, 6개월을 끌어오고 있네. 이것이 비록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질병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지루하게 고통을 주는 병이 있다는 말인가. 음식물은 점점 더 삼키기 어려워지고, 삼킨 것은 또 체해서 소화가 되지 않으니 실로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귀양살이 넉 달 만에 ' 마음의 제자 '라고 생각했던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 스승을 찾아왔다. '추사'는 그를 무척 아껴 사랑채에 머물게 하면서 서화(書畵)를 지도하였다. 만난 지 2년 만에 스승이 유배되었으니, '소치 허련'으로서는 정신의 끈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소치 (小癡)'는 무작정 스승을 찾아 유배지 제주도에 온 것이다. '소치'의 작품으로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川一笠像)'이 있다. 이 그림은 '추사'의 부탁을 받은 '소치(小癡)'가 소동파(蘇東坡)의 입극도(笠棘圖)를 번안(飜案)하여 '완당' 즉 '추사'의 유배시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마치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 유배객(流配客)의 처연한 자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추사'는 유배 이전까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과 글씨를 좋아 했으나, 제주에 유배된 이후 가만히 생각해 볼수록 자신의 처지가 ' 원우의 죄인이 되어 입극(笠棘 .. 삿갓과 나막신) 차림으로 세상과 떨어져 있던 말년(末年)의 소동파(蘇東坡)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외롭고 괴로운 귀양살이에서 아끼는 제자인 '소치'가 찾아오니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치'는 작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제주(濟州)에 온지 4개월 만에 다시 육지로 떠났다. '추사'는 제주 유배생활이 만 2년이 지난 1842년11월, 아내 '예안이씨'의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의 죽음도 모르고 병(病)이 낫기를 고대하던 '추사'는 부음(訃音)을 듣고는 고향을 향해 엎드려 피눈물을 흘렸다.
다음해 봄, 아내를 잃은 슬픔에 더욱 외로움에 빠지 수 밖에 없었던 '추사'에게 더없이 반가운 벗이 찾아왔다. 일지암(一枝庵)의 초의(草衣)스님이 '추사'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하여 거친 바다를 건어온 것이다. '추사'와 '초의(草衣)'는 한 지붕에 같이 지내면서 많은 대화를 하고 슬픔을 달랬다. 비록 반년(半年)에 지나지 않았지만 '추사'의 외로운 유배생활은 '초의(草衣)'가 있어 큰 위안이 되었고, '추사'의 심오한 학예의 경지는 더욱 깊어갔다.
'추사'는 귀양살이 나날 속에서 참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썼다. 그가 얼마나 책읽기를 좋아했는가는 자필(自筆)로 쓴 장서(藏書) 목록을 통해 그 방대한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목록(目錄)에 따르면 장서(藏書)의 종수(種數)로는 약 400을, 책 수로는 약 7,000권을 헤아린다. '추사'는 읽은 책들을 제주도에 가져다 보았고, 새로운 서적과 서첩을 구해보기도 하였다.
추사가 아우 '상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의 지적(知的) 욕구를 엿볼 수 있다. 청애당첩(淸愛堂帖)은 근래에 왔는가 ? 이 것 또한 편한대로 가까운 인편에 보내준다면 매우 다행스럽게쎄. 죽기 전에 예전부터 보고 깊었던 것들을 점차로 가져다가 한 번씩 볼 계획일세. 비록 별도의 경비가 들고 특별히 사람을 부려야 되는 일이라도 따지지 않고 시도하려고 하니, 그렇게 헤아려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
'추사'하면 떠올리게 되는 '세한도 (歲寒圖)' 역시 '추사'의 학구열에서 나온 결과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나이 59세 때인 1844년에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성품을 송백(松柏)의 지조(志操)에 비유하며 그려준 그림이다.이상적(李尙迪)은 한 해 전에 북경(北京)에서 청나라 학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문庫)를 제주도로 보내주었고, 1년 뒤에는 '하장령'이 편찬한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냈던 것이다. '추사'는 이상적(李尙迪)의 정성에 너무나 감격하여 감사의 뜻으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며, 발문(跋文)에 이렇게 적었다.... 공자(孔者) 이르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前)이라고 더 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추사'는 날이 갈수록 제주의 귀양살이에 익숙해져 갔다. 점차 제주의 풍토와 자연을 관조(觀照)하면서 무심(無心)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무렵 '추사'는 자신의 당호(堂號)를 '귤중옥(橘中屋)'이라 짓기까지 한다. '추사'는 갑갑한 유배생활 중에서도 제주목사(濟州牧使)의 아량으로 제주읍까지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야말로 귀양살이 중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그는 제주에 유배되어 왔던 선비를 모신 '오현단(五현壇)'과 한라산 등을 찾는다.
유배시절, '추사'는 제주섬의 수선화(水仙花)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여러 편의 수선화시(水仙花詩)가 전하며, 벗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수선화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수선화(水仙花)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이라네. 이곳에는 촌 동네마다 한치나 한 자 쯤의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지펀하게 깔려 있는 듯 같고,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 하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제주도에서의 유배시절, '추사'의 글씨는 점점 금석기(金石氣)와 예미(隸美)가 들어가면서 점차 확고한 자기틀과 형식을 갖추어 갔다. 즉, 전서법(篆書法)에 연유하여 예서(隸書)로 들어간다는 서한시대 '예서'의 맛과 정신을 곁들이면서 우리가 말하는 ' 추사체 (秋史體) '의 갱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추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 박규수 (朴珪壽) '의 증언을 통하여 '추사체'의 성립 과정을 똑똑히 살펴 볼 수 있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때는 오직 '동기창(董基昌)'에 뜻을 두었고, 연경(燕京)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翁方綱)'을 쫓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지만, 너무 기름지고 획(劃)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晩年)에 제주 귀양살이를 마치고 바다를 건너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대가(大家)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潮水)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
역설(逆說)처럼 느껴지지만, 조선시대 행형(行刑)제도에서 유배형(流配刑)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 강제적인 기회 (强制的인 機會) '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의 학문은 18년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이었고,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의 글씨도 22년 유배(流配)의 산물이었듯이, '추사(秋史)'는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심화(深化)시킬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1848년 겨울 12월 6일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햇수로 9년, 만(滿)으로 8년 3개월만이었다.
어제 윤씨 친척이 옴에 편지를 보고 그간 가족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 기쁨이 어찌 이루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 다만 그 곳의 땅과 물과 눈과 달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움을 그치게 하지 않게 하네... 이런 가운데 부모님은 한결같이 편안하시고 모두 별 탈이 없네. 둘째는 오늘 당직을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네. 그저께 종에게 편지를 돌리도록 하였으나, 다만 복물만 가지고 가서 그로 하여금 다시 쫒아가 붙이도록 하였는데, 혹 받았는가? 아버님의 돌아 오시는 일은 저번부터 조정에 장계로 청한지가 오래 되었으나 확정을 받지 못 하여서 잠시 그 결과를 실피느라 이렇게 늦어졌네만 또한 며칠 걸리지 않을걸세. 그럼 이만 줄이네,
추사 김정희가 실학자(實學者)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부분은 금석학(金石學)이었다. 금석학(金石學)이란, 굳은 돌이나 단단한 물질에 기록된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초기에는 글자체를 주요시하여 서첩(書帖)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탁본(拓本)을 주로 하던 학문이었으나,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하여 고증(考證)을 위하여 금석문(金石文)을 정리, 연구하게 되었다.
금석학자, 김정희
당시 중국의 연경(燕京)학회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 점차 발전하는 가운데 금석학, 역사학, 음운학, 지리학(地理學)이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 위치에서 벗어나 독자(讀者)의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석(金石)자료의 수집 및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우선 함흥 황초령(黃草嶺)의 신라(新羅) ' 진흥왕순수비 (진興王巡수碑) '에 관하여 고석(考釋)하였고, 1817년에는 조인영(趙仁永)과 함께 북한산(북한산)에 올라가 ' 진흥왕 정계비 (眞興王 定界碑) '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그때까지 막연하게 조선 초기의 승려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비(碑)라고 여겼던 설(說)을 뒤집기도 하였다.
그리고 '추사'는 '진흥(眞興)'이라는 칭호가 죽은 후의 시호(諡號)가 아니고, 살아 있을 때의 시호(諡號)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비(비)의 건립연대를 진흥왕 29년 이후로 단정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사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과 진흥이비고(進興二碑考)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금석(金石)에 대한 연구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는 학문방법이 적용된 것이며, 단지 감상(鑑賞)과 감별(鑑別)을 주로 하던 청나라 학자들의 태도에 비하여 앞선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종가 유물 宗家 遺物
이 유물(遺物)들은 원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김정희 종가(宗家)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보존문제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김정희 ' 종가유물 '은 생전에 그가 지니던 인장, 염주, 벼루, 붓의 유물류와 그의 습작(習作)부터 편지, 역서(曆書), 필사본, 대련(對聯) 등에 이르는 유묵(遺墨) 그리고 독립된 서첩(書帖)인 금반첩(金槃帖)과 심경첩(心經帖)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있다.
세한도 歲寒圖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식 명칭은 '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이다. 김정희는 수많은 호(號)를 사용하였는데 '세한도'에서는 완당(阮堂)이라는 호(號)와 낙관(落款)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전문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선비가 그린 문인화(文人畵)의 대표작으로 이넝받아 대한민국 국보(國寶) 제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초라한 집 한채와 고목(古木) 몇 그루가 한 겨울 추위 속에 떨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도대체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
옛 그림 연구에 업적은 남긴 ' 동주 이용희 '는 ' 일견 퍽 싱거운 그림 '이라고 평하였다.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한 채있을 뿐, 아마츄어가 보면 왜 좋은 그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서인 ' 완당평전 (阮堂評傳)'을 내 놓은 '유홍준'도 ' 실경산수(實景山水)로 치자면 0점짜리 그림 '이라고 거든다.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극치(極致)로 꼽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 즉 뜻을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도와 묘사력이 뛰어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 글의 내용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고 있어 좋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즉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이다.
이상적 李尙迪
김정희의 제자 ' 우선 이상적 (藕船 李尙迪) '은 그런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을 구해다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제자가 3천명이라고 회자될 만큼 '추사'는 많은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들 중 사당수는 돈과 실력을 갖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을 비롯한 중인층(中人層)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이다. 이상적의 제자도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 吳世昌이 그의 아들)이고, 오경석(吳慶錫)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고증학)을 연마한 바탕 위에 '추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계승 더욱 발전시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오경석(吳慶錫)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는데, 그의 불교 사상은 다시 절친한 친구이자 개화파(開化派)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에게 전해진다.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우던 유대치(劉大致) 역시 중인(中人) 계급인 한의사이었으며, 오경석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치(劉大致)는 개화파의 주역들인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英孝), 서광범(徐光範)에게 게화사상(開化思想)을 전해 주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연경(연경)에 갔던 '이상적'이 '경세문편(經世文編 .. 위 사진)'이라는 책을 구해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와 신분이 보장되었을텐데, '이상적'은 바다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책을 받은 김정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뭉클한 감정에 눈물짓고 말았다.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子罕)'편의 '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 寒 然 後 知 松 柏 之 後 凋 '라는 구절이었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이다.
공자(孔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 자신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추사'는 '이상적'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된 신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자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으로 보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 '추사'가 떠올린 것은 송(宋)나라 소동파(蘇東琶)가 그린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이었다. 소동파(蘇東坡)가 혜주(惠州)로 유배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소동파'의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어린 아들이 방문에 너무도 기뻤던 소동파는 아들을 위해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을 한 폭 그리고,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언송도" 그림은 전해오지 않고, 소동파가 쓴 글씨만 남아 있었는데, 옹방강(翁方綱)이 소장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 갔을 때 '옹방강'의 서재를 방문했던 '추사'는 그곳에서 소동파의 '언송도'에 쓴 글씨를 보았던 것이다.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추사'는 소동파를 생각하였다. 혜주(惠州)로 유배되었던 '소동파'의 상황과 제주도로 유배된 자신의 상황이 비슷하였다.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 찾아온 어린 아들의 마음이나 멀리서 책을 어렵게 구해 자신에게 보내준 '이상적'의 의리나 비슷하였다. 소동파가 '언송도'를 그렸듯이, '추사'는 자신만의 '언송도'를 그리기로 했다.
세한도 글 내용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藕船)은 보아라. 작년에도 만하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보내 주었고, 올해에도 또 우경(藕莖)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리니, 세상의 도도한 인심(人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책을 구하려고 이와같이 마음과 힘을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러한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 가장 추운 시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아레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겼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주거늘, 나의 곤경 이전에는 그대는 칭찬할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聖人)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
성인(聖人)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松柏)의 굳은 절조(節操)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歲寒)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 한(漢)나라 시경(詩經)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떼, 급암과 정당시 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흥(興)하고 쇠(衰)하였으니,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붙인 것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추사 김정희'보다 18세 년하(年下)의 중인(中人)이었다. 추사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 위주로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그 문하에서는 진보적(進步的) 양반 자제는 물론 중인(中人)과 서얼(庶孼) 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문사(文士)들과 교류를 깊이 하였다. 그는 특히 시(詩)로 명성을 얻어 1847년에는 중국에서 시문집(詩文集)을 발간하기도 항ㅆ다. 이상적(李尙迪)은 스승의 세한도(歲寒圖)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歲寒圖) 한 폭(幅)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 아 !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世波)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서 스스로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書冊)은 비유컨데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表具)를 해서 옛 지기(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이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俗世)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李尙迪)은 위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북경(北京)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청(淸)나라의 문인(文人) 16명과 같이 한 자리에서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歲寒圖)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高孤)한 품격에 위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李尙迪)은 이 글들을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제주도(濟州道)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었다.
1년이 지나, 세한도를 다시 대하게 된 추사(秋史)의 훼한 가슴에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는지는 보지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은 후에 스승 김정희(金正喜)의 부음(訃音)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知己平生存水墨 평생에 나를 알아준 것은 수묵화이었네 素心蘭又歲寒松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이상적(李尙迪)은 역관(譯官)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45년 전답(田畓)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스승인 '김정희'의 영향으로 시(詩) 외에도 골동, 서화, 금석(金石)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는 역관답게 언어에 대한 능숙한 기교가 돋보이며, 당대여항문인(閭巷文人)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역관사가(譯官四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여항(여항)이라는 말은 신분제 사회에서 공경대부가 아닌 측들이 생활세계르 범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여항인(閭巷人 ..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에 의해 '여항의 문학예술'이 형성되었고, 뒤이어 사회의 기저층에서 '민중문학'이 성장하였다.
장무사망 長毋相忘,
붓으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義理)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古木)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을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나무 하나,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추사'는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이상적(李尙迪)'의 의리(義理)를 칭찬하며 겨울에도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比喩)하는 내용이었다.
그림을 마친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 우선시상 (藕船是賞) '이라고 썼다. 우선(藕船)은 이상적(李尙迪)의 호(號)이었다. ' 이상적(李尙迪)은 감상하게나...'라는 의미이다.그림을 마친 '추사'는 마지막으로 인장(印章)을 하나 찍었다. ' 장무상망 (長毋相忘) '이라는 인장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 '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藕船).
이렇게 그려진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해졌고,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으로 사신(使臣)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져갔다. '이상적'의 친구들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앞다투어 '이상적'의 의리 (義理)에 감동하고, 김정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지어주었다. '세한도'에 담겨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李尙滴)의 의리에 감동한 '추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추사'를 감동시킨 그 의리(義理)와 절개(節介)는 조선 지식인의 피 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義理)이자 절개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그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변환시켜 이 그림에 담아냈던 것이다.
세한도의 기구한 운명,
이렇게 꾸며진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李尙迪)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갔고, 그뒤에는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일본인 '후지츠까 치까시 (藤塚隣)'에게 팔아 넘겼다. '후지츠까'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철학 연구가로 청나라 경학(經學)이 그의 전공이었다.
청나라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하면서 그는 당시 조선에도 이 학문이 전파되어 박제가, 유득공,김정희 등 많은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놀랐다. 그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왔다. 서울에 도착한 '후지츠까'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실학자(實學者)들의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추사(秋史) 관계 책과 글씨, 편지는 닥치는대로 모았다.
그가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 청조문화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에서 후지츠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리하여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이다 ' 그러던 1944년 여름, '후지츠까'는 태평양 전쟁 말기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살림살이를 싸들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수집가이었던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고 크게 걱정하다가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후지츠까'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美軍)의 공습(空襲)이 한창인 때였고, 후지츠까는 노환(老患)으로 누워 있었다. 손재형(孫在馨)은 '후지츠까'를 만나 막무가내로 ' 세한도(歲寒圖)'를 넘겨달라고 졸랐으나, 후지츠까는 단호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손재형은 뜻을 버리지 않고 무려 두 달간 매일 찾아가 졸랐다. 손재형은 매일 아침 '후지츠까'를 찾아가 문안 인사만 올리고 되돌아 오곤 하였는데, 후지츠까는 조금도 세한도를 내줄 기미가 없었다. 손재형이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린 지 90일 되던 날 '후지츠까'는 손재형에개 말했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遺言)해서 자네 앞으로 보내줄테니 돌아가라. 그래도 손재형이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 더 문안을 드렸다. 이에 감복한 후지츠까는 그러던 12월 어느날, 후지츠까는 손재형(孫在馨)의 열정에 굴복하여 '세한도'를 건네주면서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만 보존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손재형(孫在馨)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쯤이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까' 가족이 공습을 피해 소개해 있던 사이 그의 서재는 폭격을 당하였고, '세한도'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 남았다. 그후 손재형(孫在馨)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에 쪼들리게 되자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고, 결국 '세한도'는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후지츠까의 아들 ' 아끼나오'는 아버지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고, 부친이 모아둔 나머지 추사(秋史) 자료 2천 점을 2007년 과천문화원(果川文化院)에 기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는데, 그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들 ' 아끼나오'는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하면서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추사 연구에 써달라고 200만 엔을 쾌척하였다.
#한국사 #19세기 최고(最高)의 인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 #세한도(歲寒圖)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詩)와 산문(散文)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 #금석학(金石學)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天才)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었다 #김정희만큼 호(號)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號)를 바꿔가며 사용하였다 #천재(天才)의 출생인 만큼 탄생설화(誕生說話) #추사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養子)로 입양되었다 #큰댁으로의 양자(養子) 입양은 조선 후기 양반 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1800년 15세의 나이에 '한산 이씨'와 결혼한 김정희(金正喜)는 이 시기를 전후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부딪친다 #이미 10대 초반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였고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805년에는 부인인 '한산 이씨'와 사별(死別)했고 #스승인 박제가(朴齊家)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의 10대 시절은 끊이지 않는 집안 흉사(凶事) #고통과 외로운 나날의 연속 #하늘이 내린자질 #어린 김정희의 천재성(天才性)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7살 때의 일이다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 붙인 ' 입춘첩(立春帖) '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채제공(蔡濟恭)은 문을 두드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물었다 #친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글씨의 주인공을 안 '채제공'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名筆)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 #대동기문(大東奇聞) #김정희는 어린시절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보냈다 #월성위궁'은 영조(英祖)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김정희(金正喜)가 서울 집이 아닌 충남 예산(禮山)에서 출생한것 #그때 당시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하여 잠시 이주한 것이라고 한다 #월성위궁 #매죽헌(梅竹軒) #김한신'이 평생 모은 서고(書庫) #수많은 장서(藏書) #김정희의 학문세계 #아버지 '김노경 #아들의 자질(資質) #북학파(北學派)의 거두(巨頭)이었던 박제가(朴齊家) 밑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스승이었던 ' 박제가 #역시 어릴 적 김정희의 '입춘첩(立春帖)' 글씨를 보고 #일화 #청조문화의 동점(東漸) #김정희'에서 후지츠까 #청나라 금석학(金石學)을 연구 #그는 당시 조선에도 이 학문이 전파되어 #박제가 #유득공 #김정희 #많은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놀랐다 #그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왔다 #서울에 도착한 '후지츠까'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실학자(實學者)들의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추사(秋史) 관계 책과 글씨 편지는 닥치는대로 모았다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 #청조문화의 동점(東漸) #김정희'에서 후지츠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 #제주유배지 #다산(정약용) #추사(김정희) #초의(장의순(張意恂) #우리나라의 차문화(茶文化)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역사도 짧고 그다지 성하지 못한 현실이다 #고래(古來) #식혜니 숭늉이니 약수 따위 마실 우리 것이 많아서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도(茶道)를 확립한 사람이 조선 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횻일 정도이니 차문화(茶文化)에서는 매우 후진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차(茶)보다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서양풍이 압도적이다 #차문화를 얘기할 때 다성(茶聖)이라는 초의선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 .. 1786~1866)은 왕조의 혜택을 그다지 받지 못하면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의 배불(배불의 유교신앙(儒敎信仰) #5대 왕조시대에 걸쳐 다사다난하게 스님으로 장수(長壽 80세)하며 살다 간 인물이다 #흥성(興城) 장씨(張氏)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출생하여 #1800년에 출가 #일생 대처(帶妻)하지 않아 절손(絶孫) #1824년 해남 대둔사(大芚寺 .. 지금의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頭輪山) 자락에 일지암(一枝庵)을 만들어 #1866년 입적(入寂)할 때까지 기거하였다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와는 1815년 처음 상경하여 30세에 초대면하고 평생 교유하였고 #20여 년이나 년장(年長)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801년 다산(茶山)이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8년이나 지난 1809년 강진의 백련사(白蓮社)에서 다산과 초대면하고부터 #초의선사가 극진히 모시는 선배 내지 스승과 제자격의 교유가 있었다 #추사(秋史)가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것은 1840년 9월2일의 일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18일 만인 9월20일 대둔사(大芚寺)에 도착 #저녁 무렵 일지암(一枝庵)으로 초의(草衣)스님을 찾았다 #이들은산차(山茶)를 앞에 두고 밤을 세워 시국을 논하고 #달마(達磨)의 관심법(觀心法) #혈맥론(血脈論)을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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