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5일 토요일

이한열 열사,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이한열 열사,

분류,,


동명의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내용은 이한열(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한열
李韓烈 | Lee Han Yeol

출생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사망1987년 7월 5일 (향년 20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사인6월 항쟁 중 후두부 최루탄 피격과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에 의한 사망
본관전주 이씨
학력광주동산초등학교 (졸업)
광주동성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2] (경영학 / 명예학사)
부모아버지 이병섭, 어머니 배은심[사망]
형제자매누나 3명, 남동생 이훈열
서명
종교개신교

개요. 생애. 영화 <1987>에서. 연세대학교 관련. 여담



개요,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맞은 후, 학생운동의 구호이다.


"이 많은 청년들이 니 가슴에 있는 원한을 풀어주길, 안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안 되면 엄마가 갚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배은심 여사의 조사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 학생운동가이며,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1987년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1987년 7월 5일 사망하여 6.10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생애,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보냈다고 한다.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1985년 광주진흥고등학교(11기)를 졸업한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만큼 중학생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몸소 겪었는데 당시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광주 시내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한 후 이한열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하에 집에 있도록 하였다.
 
이한열은 나중에서야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게 되고 1987년 6.10 민주 항쟁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1986년 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때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는 굉장히 대규모 학과로 1학년 학생만 450명이 넘었다.
 
이한열은 경영학과 C반 소속으로,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던 티셔츠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생전의 모습.
 재학 당시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였으며, 운동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동아리는 1987년 당시 운동권이 인천 5·3 사태 등으로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놓고 학생운동 서클을 만들면 무사하지 못할 시대였기 때문에, 만화나 음악 등등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는 사례가 잦았던 탓도 있다.
 
이한열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동아리가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힘입어 민중 화가를 불러다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한열은 운동권 학생들과 진짜 만화가 좋아 들어온 학생 간 가교 같은 존재였으며,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던 인물이었다.
 
동기들은 "집회 후 항상 학생회관 휴게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위를 기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학생운동과 공부 양쪽에서 성실했고, 사상서만큼이나 영어 공부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해당 동아리는 1989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뒤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이한열 열사 관련 행사 역시 학생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동아리에서 보관 중이던 사료들은 전부 이한열 기념 사업회에 기증되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그날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던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일부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하였고, 이것이 이한열의 뒷머리에 맞아 그의 얼굴에서 가 번졌고, 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척탄통과 비슷한 발사형이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안전 장치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발사를 하지 못하는데 특정 목표물을 명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 모습이 사진에 찍히면서 역사에 남을 사진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때 이한열의 왼쪽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의식이 있을 때는 자기를 들어 옮기는 학생들에게 "쉬었다 가자"고 하기도 했다 한다.
 
이한열의 선후배들은 이런 배려심있는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한열은 6.10 민주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를 보지도 못한 채, 결국 25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부터 27년 전인 4.19 혁명의 발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사망 사건도 고성능 최루탄을 직사한 것 때문이었다.
 
김주열 열사의 경우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직격으로 박힌 끔찍한 모습이었기에 당시 찍힌 사진들 중 얼굴을 가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한열 열사의 경우 뒤통수를 맞았다.

최루탄에 맞은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모습,
 간혹 김주열 열사와 착각해서 이한열 열사도 최루탄을 맞고 바로 죽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상태를 보면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주열 열사와 달리 이한열 열사는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았고, 병원에 옮겨져 약 1개월 동안 생존해있다가 숨졌다.

즉사했건 나중에 죽었건 이한열 열사가 정말 고통스럽게 죽은 것은 변함없으니 크게 유의미한 설명일지는 의문이다.


민중미술가 최병수 씨의 걸개그림.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학생이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희생되는 본 사건이 발생하자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10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6.29 선언 직후 노태우가 병문안을 온 적도 있었다.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위 사진에서 보이듯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우현 총학생회 사회부장은 장례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영정을 들고 있는 우상호 당시 총학생회장과 태극기 를 들고 있는 우현 당시 총학생회 사회부장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 추모객 200만 명 다음 2번째로 많은 행렬이었다.
 
이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 2천여 영령' + 25명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상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한 명연설. 문익환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영화 1987에 실리기도 했다.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으나, 효과는 엄청 났고 소름이 끼친다는 평이 자자한 명연설이다.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 역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100만여 명은 연좌 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 국민운동본부 지도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등도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광화문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으며 6.10 민주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한열 열사 사후 33년인 2020년에 이한열 열사의 유고 시집 《한열: 그대 고운 이름이여》가 발간되었다.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이한열학생위원회'(열의걸음)가 주축이 되어 발간 작업을 수행하였고 초판 500쇄가 발행되었다.

 

영화 <1987>에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27일에 6월 항쟁을 다루는 영화 <1987>이 개봉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노력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김윤석하정우 등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여기서 특별출연으로 나오는 강동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았는데, 영화 내내 그저 잘생긴 운동권 대학생 정도로만 묘사되다 영화 막바지에 가서야 이한열 열사였음이 밝혀지기 때문에 나름 반전 요소가 되었다.

특히 영화 막바지에 연세대 정문에서 뒤통수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피가 흐르는 모습까지 당시 상황과 일치할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해당 장면을 찍은 사진이 극중 신문 1면에 실려있는데, 본 문서 상단의 실제 사진과 상당히 비슷하다.
 
여기서의 이한열은 단순히 교과서에 실린 열사로서의 모습이 아닌, 그보다는 누군가의 풋풋한 첫사랑,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 그리고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인간적인 이한열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여기서 궁금한 이야기 Y에서의 주장을 반영했는지, 영화에서는 전경이 의도적으로 최루탄 발사각을 낮추는 모습이 나온다.
 
몇몇 전경은 처음부터 직사로 조준하고 있고, 곡사로 조준하고 있던 전경들도 지휘관이 헬멧을 툭툭 치며 지나가자 이내 직사로 조준한다.
 
이때 경찰에 사용하던 발사기는 SY-44라고 불리는 베넬리사 혹은 주로 레밍턴 M870 산탄총을 사용하는 최루탄 발사기였는데 탄두의 질량이 질량이다 보니직사로 사격할 시 인명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 경찰에서도 나름 자체적인 안전장치를 달아 놨다.
 
하지만 당시 일선 전의경 출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온갖 편법을 사용하면 직사로 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맞으면 당연히 사람이 다쳤지만, 전의경들 입장에선 시위대가 순식간에 와해되었기 때문에 이만큼 좋은 게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한열의 사망으로 인해 이 문제가 이슈가 되자 훨씬 작은 중량의 탄두를 발사하는 4연발 신형 발사기를 도입했다.
 
다만 이후에도 SY-44가 쓰였다는 전경들의 후일담이나 사진 등을 보면 교체는 지지부진했던 듯하다.

다만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 후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아도 되느냐는 논란이 생겼다.
 
실제로 네이버 영화 사이트에서 <1987>의 평점은, "친일파 후손이 이한열 열사 역을 맡다니!"라며 1점을 주는 사람들과 "본인이 외증조부 친일파 논란에 대해 사과했고 반성했다.
 
본인이 친일파 자손 되고 싶어서 태어났냐? 앞으로의 본인 행실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라며 10점 주는 사람들의 키배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영화 평점이 개봉하기도 전에 6점대를 달리는 등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외증조부의 만행을 강동원 본인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애당초 연좌제의 금지는 열사가 희생해 쟁취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전재다.

강동원은 단순히 영화만 촬영한 게 아니라 이한열 열사 묘소, 이한열 기념관을 수차례 들르며 본인의 배역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관련,

연세대학교 안에는 이한열 동산과 기념비가 있다.
 
신촌에 민주화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어머니 배은심이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을 사용해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는 매년 학생회의 주도로 6월에 중앙도서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연세대학교 안에는 이한열 동산과 기념비
 특히 2008년 촛불시위 열기가 한창일 때에는 6월 10일 세종로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노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캠퍼스가 생긴 현재에는 국제캠퍼스에서도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위의 최병수의 걸개그림이 국제캠퍼스 종합관 벽에 걸렸으며, 생협 앞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향이 놓이는 등 뜨거운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캠퍼스에 걸린 이한열 열사 추모 현수막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는, 출연자 물뚝심송이 연세대 학생이었을 때 이 현장 근처에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딴지라디오 시절 61화 '역사=나' 편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 피해자가 이한열이었는지도, 최루탄을 직사로 맞아서 쓰러졌다는 내용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 학생들이 경찰의 시신 탈취 증거인멸 목적의 병상 습격을 막기 위해 순번을 짜고 세브란스병원을 지켰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공포와 분노를 함께 느끼면서 6월 항쟁의 현장을 겪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국제캠퍼스 1기숙사 생활협동조합 앞에 놓인 이한열 열사의 영정,
2015년 여름,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제1공학관 리모델링을 위해 짐을 들어내다 학생회 창고에서 피묻은 연세대 화학공학과 과기가 발견되었다. 
 
형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질 때의 피가 묻은 학생회기였다. (일설엔 이 기로 이한열 열사를 지혈했다고도 한다.)
 
해당 기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으며, 기념 사업회는 보존 처리 후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에는 이한열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관심 있는 위키러라면 방문해볼 것을 권장한다. 

열사의 생전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장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장례 행렬 때 사용되었던 이한열 열사 초상화도 이한열 기념관에 있으며, 6월 10일을 전후로 연세대학교에 전시된다.
 
단, 지금의 영정 사진은 1987년 당시의 것이 아니고 2007년에 새로 제작된 것이다.
 
정확히 지금의 초상화는 3번째로 다시 만든 것이다.
 
1987년 당시 초상화는 그 이듬해인 1988년 9월에 누군가에 의해 뿌려진 검은 라카 스프레이로 인해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그려진 초상화도 2004년 6월에 누군가에 의해 칼로 찢겨져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초상화도 걸개그림와 마찬가지로 최병수가 그렸다.

2016년 이한열 열사 추모식 때 연세대학교 정문 앞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던 위치에 동판을 설치하여 이곳에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여담,

이한열 열사의 묘는 광주광역시의 망월동 옛 5.18 묘역에 있다.
 
안치환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라는 곡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이다.
 
박종철 열사의 기념비가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있는 것처럼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는 모교 광주진흥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있다.
 
광주진흥고등학교 송암관 앞에는 이한열 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한열 열사 흉상과 추모식
 
이한열 열사가 세상을 떠나고 34년이 지난 최근까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열사의 형제들이 좋은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지만 사양하였다.
 
그 이유는,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면 아들의 넋이 집을 찾지 못하고 헤멜 것 같아서라고.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배우 신현준이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이한열 열사가 사망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다"고 월간  1996년 4월호에서 인터뷰했다. 
 
당시 5공정권 심판 등 정치권에 큰 불신을 가지던 시기라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배우 박철민이 그의 중학교 동창이다.
 
박철민의 기억에 따르면, 중학교 친구 이한열은 학교에 흔히 있는 착한 모범생 친구였던 듯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데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절대 꺾지 않는 학생"이라 증언하고 있다.
 
2017년 5월 이한열 열사의 피격 전후 사진이 최초 공개되었다. 참고
 
사망 30주기를 맞은 동년 6월 9일 밤,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쓰러졌던 당일 찼던 전자 손목시계를 찾고자 하는 내용이 전파를 탔다. 
 
1988년 당시 수배 학생이 이한열의 사촌형에게 "이한열의 시계를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주겠다"는 말을 전하였으나, 그 학생은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였으며 현재도 그의 전자 손목시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관련 링크 
 
여담으로 해당 손목시계는 피격 사진을 눈여겨 본 자들이 거의 없었는 지 걸개그림에서도 빠져 있었다.
 
묘비에 "聖徒 烈士全州李韓烈之墓(성도 열사전주이한열지묘)"라고 써져 있다.
 
경영학과가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으로 분리된 건 2000년대 초반이고, 이한열 재학 당시에는 상경대학 산하였다.
 
1995년 10월 20일 별세. 향년 63세.[사망] 
 
2022년 1월 9일 별세. 향년 82세.
 
강원대학교 지질·지구물리학부 지구물리학 전공 교수 모교인 광주진흥고등학교에 세워진 추모비에 적힌 약력에 따르면 전라남도 곡성군 출생으로 나와 있다.
 
한편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된 학생증을 보면 본적이 화순군으로 되어 있다. 
 
당시 전남에서는 공부 좀 잘한다 하면 광주에 유학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이 내용은 NHK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이한열 어머니의 증언과 함께 방영되었다.
 
이 사진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사진 기자가 촬영하였고, 중앙일보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 사진에 선정되어 6.10 민주 항쟁 항목에 있는 "아! 나의 조국" 사진과 함께 선정되었다.
 
매년 이한열 열사 추모 기간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이나 학생회관 건물에 걸리게 되는데 그림의 세로 방향 크기는 건물 3층 정도로 크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 중이며, 6월 9일 무렵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어놓고 추모 행사를 진행했으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리모델링 이후로 중앙도서관 옥상에 올라가기가 어려워진 관계로 2014년부터는 학생회관에 걸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에 개교한 1학년 및 몇몇 학과의 이원화 캠퍼스인 국제캠퍼스에도 동일한 그림을 제작하여 같은 시기에 걸고 있다.
 
처음에는 전단 크기로 찍어낸 작은 판화였으나, 걸개그림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에 판화를 크게 확대해 천에 스케치하고 먹줄을 튀겨 선을 잡은 그림이다.
 
학생회관 2층에 펼쳐놓고 작업했으며, 학생 수십 명이 달려붙어 대략 하루만에 완성했는데, 인근 봉제 공장 공단에 가서 걸개그림을 매달기 위해 재봉을 해왔다고 한다.
 
2019년 6월에도 걸렸었으며, 2020년에는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새로운 걸개그림을 인쇄하여 걸게 되었다. 
 
 
 

87년 6월 이한열 열사 피격 전후 사진 최초 공개,

당시 한국 방문했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

6월 항쟁 30주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사진 제공,
“미국 돌아온 후에야 이한열의 모습 담긴 줄 알아”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당시 경영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고, 도서관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종창씨가 뒤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찾은 사진기자 네이선 벤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 굴다리 위에서 이 모습을 포착했다. 네이선 벤 제공,

1987년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시위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2점이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방문했던 사진기자 네이선 벤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쪽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피격되기 직전의 모습. 왼쪽 흰 현수막 뒤에 영문자로 ‘연세’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파란색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보인다. 네이선 벤 제공,

네이선 벤 기자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1987년 6월9일 낮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 당하기 직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왼쪽 하단)과, 피격 직후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보인다.


피격 직후의 상황을 담은 두 번째 사진엔 최루탄의 뿌연 연기로 아수라장이 된 백양로에서 이종창(연세대 86학번)씨가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모두 연세대학교 정문 앞 굴다리 위에서 찍혔다.


당시 사진을 찍은 네이선 벤은 <한겨레>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88올림픽을 맞아 한국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1987년 2월~1988년 1월까지 한국을 방문했는데, 우연히도 시위 시기와 겹쳐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시내 대학 중에서도 연세대학교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많이 일어났다고 기억한 그는 “이한열이 피격된 당시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줄 몰랐지만, 이후 민주화운동이 이어지면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벤은 미국으로 돌아와 사진을 인화한 뒤에야 자신이 찍은 카메라에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당시 상황이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번에 새로 공개된 이한열 열사 포착 사진 2점을 포함해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사진, 이한열 열사 물품 등을 전시하는 ‘이한열 30주기 특별 전시’를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1층 기획전시실과 이한열기념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동시에 열리는 특별 전시는 오는 6월7일부터 7월9일까지 한 달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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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appyday-2100.tistory.com/1480 [살맛 나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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