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 Confucianism, 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옛날 중국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도덕 사상. 인(仁)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 나라에서는魯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 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의 사상의 진수(
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
논어(
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
孝)이며 제(
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
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
周)의 예악(
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
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
仁義)를 병창(
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
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
德治)로서의
왕도론(
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
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
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
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
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공자에 의해 창시되어
맹자,
순자, 한유,
주자,
왕양명 등으로 이어진 사상 체계로서, 현실 생활에서의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 등의 도덕적 덕목을 중시한다. 사람의 성품은 누구나 착하다는 입장은
유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특히 맹자는 인간의 공통적인 경향성은 선을 지향하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소체(
小體), 정신적인 면을 대체(
大體)라 하고 소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 별 차이가 없으나 대체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독특함 내지 우수성이 있다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선을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시켜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
性)은 이(
理)로서 인의예지(
仁義禮智)의
사단 지성(四端之性)이며, 맹자가 말하는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
惻隱之心(측은지심)], 부끄럽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
羞惡之心(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
辭讓之心(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是非之心(시비지심)]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에서는 이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게는
본능적 '식색(
食色)의 성(
性)'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성리학자들도
인간과 동물은 다 같이 기[
陰陽五行(음양오행)]로서 신체를 이루지만, 인간의 기와 다른 동물의 기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정욕(
情欲)에 의한 불선(
不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선악의 기로에 서게 되어 악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욕구로 지향하는
감성적인 마음을 인심(
人心)이라 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마음을
도심(
道心)이라 한다. 퇴계(退溪)는인심을
7정(
七情)으로 기(
氣)의 발(
發)이라 하였고, 도심을 사단(
四端)으로 이(
理)의 발이라 하였다.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고 천명에 귀의[
天人合一(천인합일)]하기 위해 수양(
修養)이 요구된다. 특히 퇴계는 참되려고 노력하는
인지도(
人之道)를 이(
理)에 대한 경(
敬)에서, 율곡(
栗谷)은 기질의 변화에 의한 입지(
立志)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유교의 근본정신
유교의 인간학적 특징과 학문의 다면성
유교는 공자(孔子)를 조술(祖述)한다. 공자의 사상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유교 학파의 원조인 공자의 사상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공자는 “은대(殷代)의 예(禮)는 하(夏)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손익(損益)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대(周代)의 예는 은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 주(周)를 계승할 이가 있다면 비록 100세가 지나더라도 그 손익한 바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배경은 하은주(夏殷周) 시대이지만, 하(夏)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은주(殷周) 시대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자는 은주 문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관념적 측면과 외면적·경험적 측면을 주체적 자각을 통해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중국 은대의 종교문화는 은 부족(殷部族)의 상고 신앙을 중심으로 조상신 및 귀신 숭배 사상이 성행하였다. 상제(上帝)는 초월적·절대적 존재로서 인간과 만물을 주재하고 천지자연과 길흉화복을 점지해 인간으로 하여금 이를 좇아서 모든 시책을 결단하게 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갑골 복사(甲骨卜辭)에 보이듯이 인간은 상제에 대해 수직적 절대복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중요한 일은 점복(占卜)에 의해 결정되었다.
주대(周代)에서도 초인간적 주재자를 숭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사상(天思想)의 등장과 함께 인간을 중심으로 지상의 사회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절대적 주재자가 ‘상제’에서 ‘천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관념적·무형적 존재의 실체와 권위에 대한 회의가 나타났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했던 공자는 초월적 주재자에 대한 교설(敎說)이나 의식(儀式)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천(天)’ 또는 ‘천명(天命)’에 대해 강한 신념과 외경심을 표시하였다.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그 뜻을 행하는 궁극적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인간은 천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가 되었다.
공자는 은대의 상고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문화와 주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예제 문화(禮制文化)에 근거해 형이상학적 요소와 사회 역사적 요소를 통합하였다. 공자는 인간성의 주체적 각성을 통해 천사상과 천명사상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공자의 인간관의 핵심은 ‘인사상(仁思想)’이다. ‘인’은 인간의 본질이며 삶 그 자체라고 보았다. 공자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용어인 ‘성(性)’이나 ‘이(理)’라는 용어보다는 ‘도(道)’·‘직(直)’·‘덕(德)’·‘충(忠)’·‘신(信)’·‘의(義)’ 등의 말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낱말들은 인간의 소이(所以)와 당위(當爲)에 관련된 덕목으로 본질적으로는 ‘인(仁)’에 귀속된다고 보았다. 인은 인간의 성취할 바람직한 가능성이며, 어느 일면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유연성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종교성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에서 볼 수 있다. 은주시대에 걸쳐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와 ‘천’은 『시경』·『서경』을 비롯한 오경 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절대신에 대한 숭경(崇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상제는 인간을 감찰하고 화복을 내려주는 무한한 권위를 지닌 절대 타자(絶對他者)로서 인식되었다.
상고에는 ‘상제’와 ‘천’에 대한 신앙이 비슷했지만, 주대로 내려오면서 천의 의미가 변화하였다. ‘천(天)’이라는 글자 속에 이미 ‘대(大)’라는 사람의 뜻이 내포되어 있듯이 초월적 권위가 인간에게 내재함으로써 인간과의 관련성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일컫기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중시해 덕(德)의 개념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제’나 ‘천’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은 공자에 이르러서였다. 공자는 ‘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신성성과 구극성을 인간에게 내재화했다.
‘천‘은 외경적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인간의 성숙(仁)과 주체적 각성(德)에 의해서 ‘천’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천인 관계(天人關係)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파악하였다. 공자는 초월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특정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상제’에 대한 관념은 ‘천’ 속에 수렴되고, 그것은 다시 인격 속에 내재되어 인간의 실질적 태도와 삶 자체가 중요시되었다. ‘하늘’의 문제를 인간의 삶의 행태 속에 수렴시킴으로써 인간 행위를 떠난 상념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시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행하는 제의는 기복 행사(祈福行事)이지만, 유교의 제의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교의 제의는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구복(求福)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유교의 제의는 주술적 요구를 배격하고 세속 세계를 도덕 화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습속, 오사(五祀)나 절사(節祀)와 같은 국가행사나 민간신앙과 습합(習合)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제의는 건실한 윤리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외형적·절차적 관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고무 진신(鼓舞盡神)’하고 ‘신이 명지(神而明之)’하는 신명성(神明性)을 다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적 체험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하며, 내세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초인간적 존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표(言表) 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 내세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인간다움, 즉 도와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공자는 인생에서 인격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성취함으로써만 인생의 의미를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자는 “믿음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篤信好學)”,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참되게 하며(守死善道)”,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라고 말하였다. 누구나 스스로의 본분을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도리를 의미하는 인은 자식을 사랑하고(慈) 부모에게 효도하는(孝) 친자관계(親子關係)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식은 부모의 몸에서 직접 발생한 관계이므로 부모(親)-자식(子)은 무조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본질적 특성은 ‘사랑’과 ’ 존경‘이다.
인간관계는 일반 사물과 다르게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인격이 없으면 인간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과 존경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하면 이기주의적 상업 정신으로 전락하기 쉽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부모가 죽어서도 제사의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사회의 정신적 방향이 정립된다.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는 자신이 생겨난 근원을 반성해(報本追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는 데 있다. 의례는 효성의 정감을 담는 그릇이요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낀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 객관적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세에 살아 있는 이들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기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라고 했고, “내가 직접 제사하지 않으면 제사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吾不與祭如不祭).”라고 하였다. 효는 존경의 마음이 조상뿐만 아니라 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교의 중요한 종교적 덕목이다.
유교의 현실관
공자는 “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한다(修己而安百姓).”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는 자기도야(修身)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한다(平天下)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도는 수도적(修道的) 측면과 행도적(行道的) 측면을 병행하기 때문에, 개인의 수양은 사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유교의 도는 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은자(隱者)의 출세간과 세상에 영합해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속물주의를 거부한다. 유교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성을 수양하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유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밝은 덕을 세상에 밝히는 것(明明德於天下)’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의 현실 지향적 성격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데 특징이 있다. 인간에 내재된 참된 가치를 현실 속에서 보존·함양함으로써 현실에서 현실을 개혁하는 적극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에 대해 『중용』에서는 “높고 밝은 진리를 극진히 하면서 일상 일용을 말미암는다(極高明而道中庸).”라고 했고, 풍우란(馮友蘭)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남(卽世間而出世間)”이라고 하였다.
전 시대의 문화 전통을 집대성했던 공자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 등의 인물들을 고성 왕(古聖王)으로 칭송하였다. 나중에 도학파(道學派)는 이 인물들을 도통으로 숭상하였다.
공자는 주의 문화가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을 개탄하였다. 나중에 공자가 과거를 숭상하는(尙古的) 인물로 묘사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유교에서 “요순을 근본으로 삼고 문무를 본받는다(祖述堯舜 憲章文武).”라고 하는 정신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부정의 표시이며, 현실을 개변시켜 이상적 목표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하대는 ‘충(忠)’을, 은대는 ‘질(質)’을, 주대는 ‘문(文)’을 숭상했는데, 공자는 내용과 현실이 균제 한 문질빈빈(文質彬彬) 한 상태를 가장 바람직하게 보았다.
이러한 개혁과 발전의 논리에 근거하여 공자는 시대에 따라 없앨 것과 새로 보충할 것을 올바로 처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정신을 ‘시중 지도(時中之道)’라고 부른다.
유교의 교화 방법
유교에도 중심 경전이 있지만 일정한 계통을 갖춘 사원이나 교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교 조화된 신앙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후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현을 제향하고 기념하는 성소(聖所)로서 대성전(大成殿)과 같은 사우(祠宇)를 태학(太學)과 향교에 설치하거나, 선현을 추모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터전으로서 서원을 세웠지만, 집단적으로 예배하기 위한 종교적 조직체로 볼 수 없다.
선비들은 국·공립기관인 성균관·향교와 사립 기관인 서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제나 승려와 같은 일정한 종교적 신분이 아닌. 혼인도 하고 가정도 돌보는 일반인으로서 생활을 해나갔다. 오히려 인간의 범상한 생활 자체를 중시하고 고양시키면서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인간에게 있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존중했기 때문에 금욕주의적 멸정론(滅情論)을 부정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삶의 현장에 알맞게 조절(致中和)해 삶을 가꾸고자 하였다. 이상 세계는 현실 세계를 떠날 수 없다고 봄으로써 일상과 이상, 감성과 이성 등의 이원적(二元的) 분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교는 성(聖)·속(俗)은 인간의 삶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뿌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성속이라는 개념 이전의 성속이 하나로 수렴한 상태, 즉 중화를 이룬 상태를 소중하게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개인은 부여받은 순수 정신(理性, 靈魂)을 확립하고 감정을 순화해 각성된 인격 주체를 이루어야 한다. ‘자기를 이기고 예를 지킴(克己復禮)’, ‘생각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誠意正心)’, ‘몸을 닦음(修身)’과 같은 수양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가정의 질서와 행복을 성취하는 일이다. 유교에서 가정은 성과 속이 만나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가정의 장로(長老, 尊長)는 사제 격이며, 어린이(少幼)는 교인인 셈이다. 이는 대소 가족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민생을 보양(保養)하고 교화를 펴기 위한 기반으로서 인도주의 국가의 건설이다. 국가는 인간 생활의 필요에 의해 구성한 조직체이다. ‘군(君)·사(師)·목(牧)’을 통해 기강과 질서를 세우며, 인륜을 가르치며, 의식주를 제공한다.
요·순·우·탕·문·무·주공 등이 통치하던 유교의 이상 국가에서는 교화와 통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하면, ‘나라에 도가 없는 상태(邦無道)’를 맞게 된다.
따라서 성인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교화의 기능을 현인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어떠한 경우이든 국가 경영에서 통치 기능과 교화 기능은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의 근본 취지가 여기에 있다.
공자는 스스로 ‘성인’의 명호(名號)를 사양하였다. 종교를 창설한 교조는 아니었지만, 10 철(十哲)·72현(七十二賢)·3,000 제자라 불리는 많은 문도를 배출했으며, 2,500년의 유교 전통에서 ‘만세 종사(萬世宗師)’로서 숭앙을 받고 있다.
공자는 주대의 지식인 계층인 사인 출신(士人出身)이었다. 사인은 지배 귀족으로서의 통치 계층도 아니요, 생산자로서의 서인(庶人)도 아닌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를 행하고자 ‘천하를 돌았으나(轍環天下)’ 뜻을 펴지 못하고 향리로 돌아와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부귀 빈천을 가리지 않고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유교는 공자를 종사(宗師)로 하여 조정이나 향리에서 정사를 도모하고 생활 관습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학파(官學派)의 정치 참여와 사림파(士林派)의 교육 정신도 공자의 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윤리사상
공자는 인(仁)을 비롯해 덕(德)·예(禮)·의(義)·지(知)·신(信)·용(勇)·충(忠)·서(恕)·효(孝)·제(弟)·경(敬) 등 많은 윤리적 덕목을 말하였다. 공자는 그의 언행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구체적 사례에 따라 말하였을 뿐 실지의 삶을 떠난 추상적 관념의 체계를 서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 설한 가르침(設敎)은 맹자에 의해 더욱 자세하게 밝혀졌다(明敎).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의 총체적 표현이요, 전인성(全人性)을 뜻한다. 인을 추구하는 군자는 인의 극치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인 개념은 인자(仁慈)라든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지·용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의혹하지 않고(不惑) 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으며(不憂)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不懼).”라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안연(顔淵)에게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했고, 자장(子張)에게는 ‘공(恭)·관(寬)·신(信)·민(敏)·혜(惠)’라 했으며, 중궁(仲弓)에게는 “문밖에 나설 때는 큰 손님맞이하듯,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제사 받들 듯할 것이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대답하였다. 유교는 효제와 충서를 중요시한다. 전자는 친애 즉 효도와 존경의 원리이고, 후자는 진실 즉 성실과 이해의 원리이다.
효는 만행의 근본으로 경애·자애·우애의 뿌리이다. 종적으로 어버이에 대한 경애로부터 멀리 조상에까지 보본 추원 하며, 횡적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애휼(愛恤)을 확대해 타인의 부모와 자녀에까지 미루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유교에서도 보편적인 사랑으로서의 인류애를 말하지만, 방법적으로 자기의 가장 절실한 부모 형제와의 관계를 토대로 궁극적으로 사해 동포에까지 추급(推及)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충서는 충실성과 이해심이다. 공자는 ‘충신을 주로 한다(主忠信)’고 하여 거짓 없는 성실과 믿음을 다할 것을 말했고, 남의 처지와 심경을 나의 것으로 헤아리는 ‘서’의 마음을 중시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모든 것에 통하는 하나의 도(一貫之道)’를 “충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대학』에 의하면, 유교 윤리가 제가·치국·평천하로 연결되어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정에서는 효·제·자가 바탕이 되며, 이것을 미루어 효는 임금을 섬기는(事君) 도, 제는 어른을 섬기는(事長) 도, 그리고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使衆) 도가 된다고 보았다.
가정의 윤리는 곧 사회 국가의 윤리로 연결되는 바탕이다. 그 기본 원리를 ‘서’라 하여 자기의 진실한 소망에 비추어 타인에게 한결같이 베풀기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곧 ‘혈구 지도(絜矩之道: 자로 헤아리는 방식)’이다.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남도 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바는 남도 싫어할 것이니, 자기의 본심을 헤아려 남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요순을 좇고, 걸주(傑紂)를 좇지 않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민중을 얻을 수 있으며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논리이다. 지도자 자신이 이러한 가치 정향(價値定向)의 의식적 기반이 얼마나 튼튼히 되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중용』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 두고 있으며, 인성은 천명에서 유래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지(知)와 행(行)에 과불급이 없는 이상적 상태를 중용이라고 하였다. 상황에 적절한 도를 추구하는 중용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성(誠)’의 덕목이 요구된다. ‘성’은 존재의 원리이며 존재의 방식으로 자기완성이자 타인 완성이다.
성은 내외 양면의 통합 원리이며, 인간의 주체적 참여에 의해 객관적 상황을 알맞게 처리함을 말한다. 이러한 내외 합일의 원리는 인간관계를 통해 달성된다. 『중용』에는 ‘삼달 덕(三達德)’과 ‘오달도(五達道)’라 하여,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형제(昆弟)·붕우(朋友)’ 등을 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내면적 실천덕목으로서 지·인·용을 일컫는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공자의 윤리사상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맹자에 이르러 보다 이론화되었다. 맹자의 사덕(四德:仁義禮智)·사단(四端: 惻隱·羞惡·辭讓·是非)은 윤리설의 기반이 되어 후세의 성리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정치사상'
유교에서는 사람에 토대를 두고 정치제도를 완비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인간다운 생을 누리도록 하며 이를 수호함을 말한다. 그래서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의 안부를 먼저 묻고 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람에 근거한 사람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공자는 ‘안인(安人)’과 ‘안 백성(安百姓)’을 말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재 배출에 힘썼다.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성취함이 지대한 임무였고, 이를 저해하는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인의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정치사상의 취지이다.
유교에서는 위정자들이 바람직한 자질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였다. 위정자들이 본래의 사명을 망각·일탈하지 않도록 뚜렷한 목적의식을 확인시키고 본래의 사명을 일깨워야 한다. 공자는 살상과 투도(偸盜)가 없는 정치를 추구했고, 맹자 또한 백성의 안업(安業)과 인륜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덕치와 왕도로써 인도주의 국가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유교의 정치사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인격을 존중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의 주체적 가치가 존중되지 못하던 당시에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는 매우 계몽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어 뭇별이 그것을 향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감화로써 다스리는 것이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다.
공자는 “명령으로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망을 피하려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지만 양심과 인격(德)으로 이끌고 자율적 정신(禮)으로써 질서 있게 하면 백성들이 잘못을 부끄러워해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공자는 타율적 명령과 형벌에 의한 강제가 아닌, 양심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한 인도주의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맹자가 살던 당시에는 부국강병과 패권 국가만을 추구하였다. 이에 맹자는 세력과 부만을 추구하기에 앞서 백성을 근본으로 인의(仁義)의 정치를 실현할 것을 여러 왕들에게 권유하였다. 맹자가 말했던 민본주의와 인의에 의한 왕도정치는 유교 정치원리의 근본정신이다. 나아가 유교는 이권다툼만을 하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겸양과 애휼 보민(愛恤保民)의 정치 원리를 제시하였다.
국가가 잘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군사적 요소보다는 백성들의 신뢰가 가장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인의’에 입각해 신뢰를 강화하고 통치자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인간 존중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의 양대 지주로서 예와 악을 꼽을 수 있다. 예는─문물제도 일반을 일컫기도 하지만─ 이성적 질서의 측면이고, 악은 정서적 자유의 측면이다.
예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경건한 엄숙성을 강조하고, 악은 정서적이기 때문에 화열(和悅)을 중시한다. 예는 자기반성적이고 악은 감정을 발산한다. 구심적인 예와 원심적인 악의 양면을 기초로 생활 방식을 운영하면 자유와 질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개체와 집단의 조화를 추구한다. 공자는 “군자는 널리 소통하되 편당 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 하되 널리 소통하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고 하였다. 사사로운 편당 성(偏黨性)을 버리고 보편적으로 널리 소통함을 뜻한다. 전체적인 조화는 개체의 특수성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군자는 화합하되 일률적이지 않고, 소인은 똑같이 하되 조화롭지 못하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하였다.
유교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개인의 존립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 집단에 예속시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도 아니며, 동시에 개인을 위주로 사회·국가를 무시하는 개인적 방임주의도 아니다. ‘나라에 도가 있다면(邦有道)’ 즉 질서와 자유가 있다면, ‘가까이 있는 이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들이 오고자 할 것(近者悅 遠者來)’이다. 훌륭한 국가는 훌륭한 개인들을 보호하는 고향이어야 한다. 개인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국가를 소중히 여기고, 국가를 수호하고자 의인·열사가 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도 이와 동일한 원리의 적용이 요망된다.
유교는 정치를 명실상부하게 운영하기 위해 정명 사상(正名思想)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 正也)”이라고 했듯이 정명이란 명분과 사실이 일치함을 말한다. “임금(君)은 임금답고, 신하(臣)는 신하 다우며, 부모(父)는 부답고, 자식(子)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것이 뒤바뀌면 기강이 무너지고, 기강이 무너지면 백성이 살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춘추』는 노나라 242년간(서기전 722∼481)의 정치사를 시비(是非)한 비판서로 유교의 정명 사상에 기초해 여러 사례들을 해석하였다.
한국 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상고시대와 유교
유교는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여러 나라의 사회 문화와 가치관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 인접해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군사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다.
한국 상고시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해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분야는 한중 양국의 현존하는 여러 문헌과 금석학·갑골학·고고인류학·민속학 등의 방증자료를 통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흔히 한국 사상을 말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 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대학(大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 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 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 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 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 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같은 조에 기자(箕子)에 관한 기사가 들어 있고, 이어서 위만조선·마한·부여 등 여러 나라를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조선·후조선·기자조선을 일컫고, 다시 위만의 기사를 기록한 뒤 삼국이 성립하기까지 열국의 분열상을 적어놓고 있다.
삼국 이전의 고조선을 상고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하늘과 조상을 모시는 숭천 경조(崇天敬祖)의 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각기 지역적 특색이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보장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중국에서 도교(道敎)를 들여왔다. 당태종이 도사 서달(敍達) 등 8인을 보내오자 이들을 유불(儒佛)보다 높이 대접하였다. 이들은 중국식 도교를 전파하고 고구려의 힘을 약하게 하려고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고래의 유풍을 변화시키고 파괴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혹은 영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或鑿破靈石).”는 기록이 나온다. ‘영석’에 대해 “민간에서는 ‘도제 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 성제(聖帝)께서 이 돌을 타고 상제를 조현(朝見)했기 때문이다.”라고 주(註)를 달았다.
먼 옛날 상제가 하늘과 교통 하는 자리로서 신성한 바위를 택해 ‘영석’·‘조천석’ 또는 ‘도제 암’이라 하였으며, 훗날 영석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의 도사들은 왜 ‘영석’을 파괴했으며, 또한 옛 성제란 어느 시대의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 내용을 이색(李穡)의 시 「서경(西京)」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갈 수 있다. “성(城) 머리 노수는 햇빛을 가리는데/산정(山頂) 높은 누각은 멀리 바람을 이끄누나/듣건대 하늘 조회 드림에 일찍이 바위 있었다 하니/단군의 영상(英爽)하심이 군웅의 머리 되시도다(城頭老樹猶遮日山頂高樓遠引風 聞說朝天曾有石 檀君英爽冠群雄).”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삼국유사』의 옛 성제와 「서경」의 ‘단군’을 일치시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 조에 보면, 동 11년 단군사(檀君祠)를 세웠는데 여기에 동명사(東明祠)를 합사 했다고 하면서 단군을 서편, 동명을 동편으로 모셔 모두 남면(南面)하도록 하고 봄과 가을마다 제향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 은탄(白銀灘)에 조수에 따라 바위가 드러났다 잠겼다 하는데 이름을 ‘조천석’이라 하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동명이 기린을 타고 굴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 천상에 주사(奏事)한다고 하였다. 이승휴(李承休)는 ‘천상을 왕래해 천정(天政)을 참예(參詣) 하니, 조천석 상의 기린 자취가 그것이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사례를 통해 보더라도 외래의 도사들이 파괴하려 했던 고유한 전통의 상징물인 ‘영석’ 또는 ‘조천석’의 유서가 매우 오래되고, 아래로는 동명왕으로부터 멀리 상고의 단군에 이르기까지 추원(追遠)해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신앙과 습속이 원래로부터 일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래의 제천 행사와 공동체 의식도 이와 연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일실 되어 이름만 전하는 『해동 고기(海東古記)』·『삼한 고기(三韓古記)』·『단군기(檀君記)』·『신지 비사(神誌秘詞)』을 비롯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이란 본디 선인 왕검의 집이었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분명히 기록되었다.
고려의 백문보(白文寶)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600년이 되었다.”라고 했으며, 권근(權近)은 명 태조에게 단군의 “역년(歷年)이 천년이 넘었다.”라고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서거정(徐巨正)의 『동국통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그리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의 중요한 사서 문전을 보면, 우리의 선인들은 적어도 고려시대(麗代)나 조선시대 때 단군조선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고조 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 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에 보면 그 첫머리에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어 풍운을 헤쳤을까, 하느님의 손이시니 이름은 단군이라 하시니라(初誰開國啓風雲 帝釋之孫名檀君).”라고 하였다. 그의 웅거(雄據)한 영역을 표시해 『본기』의 내용으로 주를 붙여 “조선 지역을 거(據) 하사 왕이 되셨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 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夫餘)·예(濊)·맥(貊)이 모두 단군의 수(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이색의 시에 ‘단군 영상관 군웅(檀君英爽冠群雄)’이라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도 본래 동방에는 ‘구이(九夷)’가 있었을 뿐 군장(君長)이 없었으나, 신인(神人)이 하강함에 국인(國人)이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열어 구이를 통어(統御)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간 것이 단군조선이었다고 추측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문헌에 의거해 고조선의 사상적 인식에 도움이 되는 측면을 보고자 한다.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한국과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고, 고구려도 기자사(箕子祠)를 두어 숭배했다는 점에서 우리 선인들은 기자조선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禮義)·전 잠(田蠶)·직작(織作) 등과 팔 조교(八條敎)를 가르쳐서 의식(衣食) 등의 생활을 개선하고 인륜 도덕으로 교화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아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었으며, 부인이 정신(貞信)하고 음벽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앞서 고찰한 대로 이미 단군조선의 개국 이전부터 동방에는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구족(九族)이 있었는데, 단군이 임금이 되어 군재(君宰)하고 영솔(領率)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절요』에 “동방에 견이·방이……등 구이가 있었으되 처음에는 군장이 없었다(東方有畎夷……等九夷 而初無君長).”라고 했으며, 『동사강목』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었다. 견이(畎夷)·방이(方夷)·우이(于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라고 일컬으니 모두 토착민이었다.”라고 하여 구이의 선주민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그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혹 변(弁)을 쓰고 비단을 입었으며, 그릇으로 조도(俎豆)를 사용하였다. 하나라 임금 태강(太康)이 실국(失國)함에 비로소 반(叛)하였다.”라고 하였다.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 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의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왕검 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 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 봐,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 경조 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 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삼국의 발전과 유교 고구려의 유교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 시대 즉 위만 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 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 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에는 일찍이 100권에 달하는 사서로 『유기(留記)』를 편찬한 바 있고, 영양왕 때(600)에는 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사(古史)를 축소해 『신집(新集)』 5권을 수찬 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유기』·『신집』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서 찬수 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 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상류의 귀족층은 ‘대학’에서 교육했고, 민간의 일반 서민에게는 어디에나 공회당과 같은 학원을 세워서 경서와 무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빈천하고, 짐승이나 먹이는 집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대옥(大屋)을 지어 이를 경당(扃堂)이라 불렀으며, 미혼의 자제들이 주야로 이곳에서 글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교 경전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양하고 강용(强勇)한 상무 정신(尙武精神)을 수련함으로써 고구려는 강대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오경(五經)·삼사(三史)·『삼국지(三國志)』·『진춘추(晉春秋)』가 있었다(北史).” 또한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한서』·『후한서』·『진춘추』·『옥편』·『자통(字統)』·『자림(字林)』이 있었으며, 『문선(文選)』을 특히 소중히 여겼다.”라고 한다. 그 내용은 경전(經)·사학(史)·문자학·문장학이었는데, 경학이 으뜸이자 기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를 보면, 『시경』 관저장(關雎章)과 내용·형식이 흡사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정치 이념과 후사(後嗣)에게 주는 고명(顧命) 등은 『서경』의 요전(堯典)이나 『상서(商書)』에 보이는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그밖에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류에 나오는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오경과 관계되는 요소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오경 이외에 삼전(三傳)·삼례(三禮)에 이르기까지 행위 규범·사회 제도·정부 조직·율령 반포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경전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예속과 유교 문화와의 상관성을 지적해볼 수 있다. 혼인을 할 때 고구려에서는 재물의 교환을 수치스럽게 여겨 재폐(財幣)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례에서도 부모와 부상(夫喪)에 대해 빈소를 차리고 3년 상을 지낸 것은 유교의 『의례』와 상통한다.
고구려 이전부터 구상제도(久喪制度)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시기적으로 앞서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를 보면 고구려의 예속이 유교 문화와 연관성을 가지고 발달해갔음을 살필 수 있다.
백제의 유교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邑落)이 잡거(雜居)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禁令)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 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천신 신앙·귀신 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 지례(郊祀之禮)와 종묘 제도의 방식으로 형태 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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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 『제왕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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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유학 사상』(황의동, 서광사, 1995)
- 『한국철학의 심층 분석』(정병련, 전남대학교, 1995)
- 『인성 물성론』(한국사상사 연구회, 한길사, 1994)
- 『한국 유학사상』Ⅰ∼Ⅴ(최영성, 아세아문화사, 1994)
- 『유교 대사전』(유교 대사전 편찬위원회, 박영사, 1990)
- 『원시 유교』(김승혜, 민음사, 1990)
- 『한국유학사』(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9)
- 『한국 유교사회 사론』(이태진, 지식산업사, 1989)
- 『고려 유학사』(김충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8)
- 『동양철학 연구』(류승국 -동방 학술연구원, 1988)
- 『유교의 천사상』(김 능근, 숭실대 출판부, 1988)
- 『한국 사상과 현대』(류승국, 동방문화연구원, 1988)
- 『한국철학사』(한국철학회, 동명사, 1987)
- 『한국 유학 사략』(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6)
- 『한국 종교 사상사』-유교 편(금장태,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
- 『한국사상사 대계』Ⅳ(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한국 동양철학회, 연세대출판부, 1982)
- 『유교와 한국 사상』(금장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 『한국철학사』(유명종, 일신사, 1980)
- 『조선 유교 연원』(장지연 저, 유정동 역, 삼성문화문고, 1979)
- 『한국철학 연구』(한국철학회, 1978)
- 『동서 교섭과 한국 근대사상』(금장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77)
- 『한국사상사 논고』-유학 편(박종홍, 서문당, 1977)
- 『한국의 유교』(류승국,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6)
-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윤 남한, 집문당, 1974)
-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 『한국민족 사상사 대계』(아세아 학술연구회, 형설출판사, 1971)
- 『한국사신론』(이기백, 일 조각, 1967)
- 『담원 국학 산고』(정인보, 문교사, 1955)
-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 『조선사 대관』(이병도, 동지사, 1948)
- 유교 [儒敎]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유교 [儒敎]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
- 유교 [Confucianism, 儒敎] (두산백과)
- 유교 [儒敎] - 조선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 (한국사 개념사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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