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3일 수요일

호미

호미. 鋤. 
국적 > 한국 
논이나 밭을 매는 데에 쓰는 연장.
호미는 쇠날의 앞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하며 한쪽에 가느다란 목이 휘어 꼬부라지고 그 끝에 둥근 나무토막의 자루를 박은 김매는데 쓰는 농기구이다.


재질금속 > 철제(), 초제 > 볏짚
크기길이 33
용도 · 기능산업/생업 > 농업 > 파종경작 > 호미
소장처국립민속박물관

논밭의 김을 매거나 주로 사용하는 한국고유의 연장이다. 우리 호미는 서유구(, 1764∼1827)의 『임원경제지』에서도 동서(, 동쪽나라의 호미)라고 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연장이다. 부등변 삼각형인 날의 한쪽 모서리에 목을 휘어서(용접기가 나오면서 이어대고) 거기에 자루를 박은 독특한 형태의 연장인 호미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호미와 흡사 하다다.
우리나라의 호미는 그 기능과 모양에 따라 논호미와 밭호미로 나눈다.

논호미는 날 끝이 뾰족하고, 날의 위쪽 나비가 약 10cm, ~11cm정도날 길이가 19∼24cm로 날이 크고 넓적하다. 날의 가운데가 불룩하여 호미날로 흙을 찍어 잡아당기면 흙밥이 잘 퍼지면서 논매기와 골타기에 알맞으며 물에 젖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무자루 또는 새끼로 감기도하며 . 같은 논호미라도 남쪽지방의 것은 날 폭이 좁고 끝이 뾰족하기도 하지만 중부지방의 것은 날폭이 넓은편이 많다. 또다른명칭 호매(鋤) 라고도한다.



시대적인 손도구"
영주대장간 호미는 한류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해 세계적 온라인 쇼핑몰인 미국 아마존에서 ‘대박’을 치면서 아마존 원예용품 ‘톱10’ 정도에오르기도! ‘영주대장간 호미(YoungjuDaejanggan ho-mi·사진)’라고 당당히 명성을 날린다. 이베이 등 다른 해외 기타 쇼핑몰 에서도 잘 팔리고있으며 입에서 입소문으로 퍼지기도 하고있다. 정원 가꾸는 방법을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에 등장하면서 뜨기" 시작하고있다. 한국서 4 ~5000원인정도의호미는 한 자루에 해외에선 약14~20달러(2만2600원)정도에 팔린다 고들 한다. 미국에선 삽만 봤지 꺽여서 폭은 위로넓어지면서 약간의반원인"‘('ㄱ'} 모양으로된 한국에서의 이름으로된 호미는 원예 기구로는 처음이고 '손목'에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되는 현지 사용자들의 칭찬이 들리고있다. 
호미를 만든 사람은 60대의 대장장이다. 경북 영주시 영주역 주변. ‘영주대장간’이다. ‘땅·땅·땅’망치질소리 석노기(65)씨가 검은색 그을림이 묻은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불에 달궈진 쇠를 두드리고.... ‘ㄱ’자로 구부러진 호미를 보니 오랜세월 두두리며 땀 흘린 호미. 바로 그 아마존 호미이다. 

대장장이인 석노기씨는“올해로 대장간을 창업한 지 약43년 본인이 호미를 만든 지 52년째된다. 미국에서 호미가 인기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단다”그리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지난해 중순쯤 아마존에서 호미 주문이 갑자기 많이 들어왔어요. 아마존이라고 해서 어떤 숲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체로 호미질하려나 했어요.” 아마존이 쇼핑몰인지 몰랐던 것이다.(석씨의말)

“원래 10여 년 전부터 유통업체를 통해 호주 등 해외에 한 달에 서너 자루 호미를 보내긴 했는데, 지난해 갑자기 주문이 늘어나 놀랐다고한다. 지난해 6개월간 1000개 넘게 수출했으며 올해 들어 3개월간 1000개 정도를 보낸 것 같다고한다. 최근엔 네팔 등 다른 나라에서도 구매 문의가 있었다고 전한다.”  

영주대장간 호미의 주재료는 차량용 스프링이다. 화물차에 들어가는 ‘판 스프링’으로 불리는 쇳. 석씨는 이를 스프링 공장이나 재활용 업체 폐차장에서 가져다 쓴다고도하며 차량용 스프링은 재질 자체가 견고해 호미 재료로 최상이다. 

그는 판스프링을 받아오면 호미 크기에 맞춰 사각형으로 자르고. 그러고 이 사각형 쇳덩어리를 가마 불에 넣었다가 빼내 두드리고, 다시 불에 넣었다가 수차례 빼내 두드린다. 불에는 약7번 정도 두드린다 메질은 수천번 넘게 한다. 호미 형태가 잡히면 겉면을 가공해 매끈하게 만든 뒤 나무 손잡이를 끼운다. 한 자루의 영주대장간 호미의 탄생 과정이다. 

손바닥만 한 쇳덩어리가 중자(230g) 호미 한 자루로 바뀌는 시간은 대략30분 정도다. 그의 호미는 100% 수작업 이며 70대 어르신 한두명이 도와주는 날엔 하루 120여 자루정도 만들정도이며 석씨 혼자선 하루50 ~ 60자루 정도 만들 수 있고도한다. 석씨는 “영주대장간 호미의 인기비결은 손으로 다 만들기 때문에 중국산 등 다른 호미보다 날이 정교하고, 튼튼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석씨는 오른손 손가락이 호미 날처럼 마디가 휘어져 있다. 오랫동안 망치 같은 도구를 잡고 망치질을 하다보니 손가락이 이에 맞춰 휘어져 버린 것! 

초교 졸업 후인 14살 정도부터 대장관 생활을 시작한 석씨는 후계자를 찾고 있지만 그간 시골 대장간에서 ‘수련’하겠다는 젊은 이가없어 포기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아마존 대박 후 호미 제작 기술을 배우겠다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최근 해외교포라는 한 청년이 5월 정도 찾겠다고 연락이왔어며, 다음 달에도 경기도에서 한 청년이 대장간에 오기로 했다. 

논호미는 물이 있는 논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호미자루에 짚을 감은 것이다. 논매기 때 쓰며 물이 묻어도 미끄럽지 않고 부드러워 손바닥이 잘 상하지 않는다.

호미는 씨앗심기, 논이나 밭의 김매기, 북돋우기, 옮겨심기, 흙을 파서 뒤집기 등 다양한 작업에 쓰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기구의 하나이다. 괭이에서 발전한 농기구로 알려져 있으며, 평남 맹산 대평리의 청동기 유적지, 경기도 양평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지에서 호미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농경의 중요한 연장임을 알 수 있다. 호미는 날, 슴베, 자루로 구성된다. 모양은 무딘 쇠날의 앞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하고 한 끝이 휘어져 가늘게 꼬부라진 곳에 둥근 나무자루를 박아 사용한다.

각 지방에 따라 호맹이.호무.홈이.호마니.허메.허미.희미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호 .홈의라고 하였다. 호미는 우선 크게 논호미와 밭호미로 나뉜다. 밭호미는 날 끝이 평평해서 흙 표면의 잡초를 긁는 데 편리하며, 밭작물 재배에 사용되는데 앉아서 쓰는 호미와 서서 사용하는 선호미가 있다. 논호미는 물이 있는 논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어졌다. 밭호미에 비해 자루가 짧고 세모꼴로 끝이 날카로우며 흙에 깊이 꽂아서 뒤집어 흙을 뽑는다. 

밭매기에서는 호미가 1년 내내 두루 쓰이고, 논매기일 경우 음력 7월 무렵에 세 벌 논매기가 끝나면 ‘호미씻이’라고 하여 호미를 씻어서 걸어 두고 농부나 일꾼이 중심이 되어 술을 마시고 흥겹게 하루를 노는 풍습이 있다. 지방과 토질에 따라 호미날의 너비와 두께가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북으로 갈수록 호미날과 자루가 넓고 길며 남쪽일수록 날이 가늘고 자루도 짧아진다. 

사용하는 지방의 자연적인 조건과 농작물에 따라 보습형, 낫형, 세모형 등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보습형은 중부지방에서 많이 쓰이며, 쟁기의 보습처럼 날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하다. 낫형은 전남 및 경남.제주도 등지에서 쓰이는데, 낫과 같이 폭에 비하여 길이가 길며 그 끝이 예리하여 자갈밭이나 저항물이 많은 밭에서 쓰인다. 

남부의 낫형 호미는 중부에서 쓰이는 보습형에 비해 날이 적으며, 날과 호미가 이루는 각도가 완만한 편이다. 충청 및 중부 이북지방에서 주로 쓰는 세모형은 우리나라 호미 중 날과 자루가 제일 길며 풀을 깎는데 편리하다. 이러한 호미의 형태적 다양성은 토질, 작물, 경작방법에 따른 적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15∼20cm의 발이 4개가 달려 마치 쇠스랑 연장도 또 다른이름 ‘논호미’라고도 하는데 주로 호남지방에서 논에서 볏골 사이의 흙을 뒤집고 거기에 난 김을 매는데 사용했다. ‘간수메’라고도 불리는 이 호미는 발의 중간이 굽어 땅을 찍어 흙을 일구기가 쉽다.

밭호미 또는 논호미와는 달리 형태가 매우 다양함도 많다. 밭호미에는 논호미와 같이 뾰족한 쪽이 날 끝이 되는 외 귀호미 와 삼각형의 한 변이 날 끝인 양귀호미가 있다.

외귀호미는 중부이남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해안 지방의 것일수록 날이 작고 뾰족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가 많은 지방일수록 두드러져서 ‘골갱이’라고 불리는 제주도 호미는 마치 갈고리처럼 날이 예리하고 작다. 비가 많은 지역에서는 김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부 이북의 산간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양귀호미는 삼각형의 날의 한 변이 바닥이 되므로 날 끝(귀)이 양쪽에 있어 ‘양귀호미’라고 부른다. 일반 호미보다 자루가 길고, 날도 크고 무겁다. 양귀호미의 날 끝이 평평한 것은 비가 적게 오는 곳에서는 김의 뿌리가 깊지 않아 겉흙을 긁는 것만으로도 김매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루가 길고 날이 무거운 것은 돌이 많고 흙이 거친 밭에서 쓰기 위함이다.

옛날에는 호미가 자루가 긴 호미()와 짧은 호미()가 있었는데 짧은 호미라 하더라도 『해동농서』의 어느지방에서 부르는 명칭‘호매()’나 『기산풍속화』의 호미 를 보면 지금의 호미보다는 훨씬 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전의 긴 자루 호미는 서서 김을 매는 호미로서 뒤에 ‘가지잎괭이’나 ‘수수잎괭이’와 같이 ‘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또다른 농사일에쓰는 이름 괭이 도있다.

호미를 예전에는 ‘호매’(『훈몽자회』 · 『재물보』 · 『해동농서』) · ‘호미’(『역어류해』 · 『사류박해』) · ‘흐미’(『물보』)로 부르다가 19세기에 들어서 ‘호미’(『농정촬요』)라고 했다. 한문으로는 (『농사직설』 · 『금양잡록』 · 『한정록』 · 『산림경제』 · 『고사신서』 · 『과농소초』) · (『사시찬요초』 · 『색경』 · 『산림경제』) · (『역어류해』 · 『방언류석』), (『재물보』 · 『임원경제지』 · 『물보』 · 『사류박해』) · (『훈몽자회』) · (『과농소초』 · 『재물보』 · 『임원경제지』)로 적었다. 긴자루 호미는 (『색경』 · 『재물보』) · (『훈몽자회』 · 『역어류해』 · 『사류박해』)라 하고 짧은자루 호미는 (『색경』 · 『북학의』)라고 했다.
쇠날의 앞은 뾰족하고 위는 넓적한데, 이 한 끝에서 목이 휘어 꼬부라져서 넘어간 부분에 둥근 나무토막을 박아 자루로 삼는 농기구이다. 호미의 모양은 그것이 사용되는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과 농업경영의 특질 등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우리나라 호미의 형태는 크게 보습형, 낫형, 세모형 등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보습형은 쟁기의 보습처럼 날끝이 뾰족하고 위는 넓적한 것으로 날 끝을 흙에 박아 젖히면 흙이 쉽게 뒤집어져서 논을 매는 데에 적당하여 논호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루에 흙이 묻으면 매우 미끄러우므로, 나무자루 대신 짚을 감거나 나무자루에 베헝겊을 둘러서 쓰는 일도 있다. 
보습형호미는 경기도?충청도를 비롯한 중부지방과 전라북도의 일부 지역에서 많이 사용한다. 낫형은 날이 낫처럼 너비에 비하여 길이가 길며 그 끝이 날카로워 자갈 등의 저항물이 많은 데에서 쓰기에 편리하여 밭호미라고도 부르고 주로 경상남도?제주도?전라남도 도서지방 및 산간지대에서 많이 사용한다. 
세모형은 장삼각형으로서 양변에 비하여 바닥의 길이가 긴 호미로 우리나라 호미 중에서 날은 물론 자루도 제일 길다. 이러한 장점으로 보리?옥수수?밀과 같이 이랑이 넓은 밭의 풀을 매는 데에 편리하지만, 흙을 떠 엎는 힘이 약하여 논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호미는 자루가 길어 서서 작업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세모형 호미는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에서 많이 쓰인다.

보습형 호미(무게 400g 내외)로는 남자 한 사람이 하루에 300여 평의 논을 맬 수 있으며, 날은 해마다 벼려서 쓴다. 논농사에 있어 논을 매는 일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므로 이는 보통 두레조직을 이용하거나 품앗이로 한다. 세 번째 논매기가 끝난 뒤에는 ‘호미씻이’ 혹은 ‘풋구 먹는다’, ‘초염 먹는다’고 하여 농사일의 한 고비가 지난 것을 자축하기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농악을 울리며 하루를 쉰다.

지금의 호미는 지방에 따라 ‘호맹이’ · ‘호메이’ · ‘호무’ · ‘홈미’ · ‘호마니’ · ‘허메’ · ‘허미’ · ‘희미’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호미의 모양에 따라 경지기 · 막지기 · 곧지기 · 귀호미 · 날호미 · 평호미 · 동자호미 · 부패호미 · 볏쇠호미 · 수수잎호미 · 깻잎호미 · 용강호미 · 벼루개 · 각쟁이 · 골갱이 · 벽채 따위가 있다. 호미로 하루 300여 평의 논을 맬 수 있다.
"함경도 지역의 호미" 사각형식도있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12월 그를 ‘최고장인’으로 선정했다.
** 도구 이름이 지나다 보면 바뀌는것이아닌지???

농기구의종류"


한국의 문화유산을 수집·보관하여 일반인에게 전시하고, 유적·유물 등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설립된 박물관

『해동농서』
한국의 농업유물(농협중앙회 농협박물관, 1997년)
한국민속대사전-호미-(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1년)
농기구(1990년)
한국농기구고(韓國農器具攷, 1986년)
호미 (한국의 농기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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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일 화요일

대동법 , 大同法. 1

대동법 , 大同法. 1
실시와 확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조 때(1569년) 이이(李珥)가 공납을 쌀로 내는 것을 건의했으나 실시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산물 대신 쌀로 납부하기를 장려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고 나서 100년 만에야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지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민들은 특산품을 현물 대신 쌀이나 베, 돈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이라는 상인에게 돈을 주고 사들이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공납의 폐해가 심각해졌을 때 광해군이 즉위했어요.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재청했다. 그리하여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인조가 즉위하고(1626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까지 실시되기도 했다,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이 곧 백성들의 충성심이라고 여긴 인조와 신하들은 대동법 확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효종 즉위 후, 김육 · 조익 등이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농민들의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유형원은 "세금을 조금 줄여 준다고 해결될 단계는 지났습니다. 농민에게 토지가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지주 전호 제야 말로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고 있던 1623년, 김육은 충청도 음성이라는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 그는 위로는 임금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잘 보살펴 훌륭한 원님이 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하였다. 하지만 음성에 도착한 김육은 고을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보며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대부분 제 땅이 아닌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가을걷이의 절반은 지주에게 바쳐야만 하였다. 추수가 막 끝난 가을에도 굶주림은 계속되었고, 나라에 낼 세금을 마련하려고 다음 해 농사에 씨앗으로 써야 할 곡식마저 써 버리기 일쑤였다. 김육은 먹고살 길이 없어서 구걸하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수없이 만났다. 
김육(1580~1658) [김육은 원님으로서 농민의 생활을 보살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
김육은 조세 제도의 개혁, 동전 사용 등 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바탕 위에서 나라 살림을 돌볼 수 있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다. 작은 고을 원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제도적인 문제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금 제도를 고쳐야만 농민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앙 관직에 나가게 된 김육은 조세 제도의 대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공물 내는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하였다. 공물 납부를 둘러싼 폐해가 심했기 때문이다. 공물을 둘러싼 부정과 비리 탓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깔개 하나가 무려 무명 200 필과 맞먹을 정도였다. 김육은 소유한 토지의 면적에 따라 공물을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을 확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대동법이 확대될 경우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많은 관리들도 그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면 세금이 잘 걷히고, 그러면 나라 살림도 차차 나아질 것'이라며 호패법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김육은 '호패법은 먹고살 길이 없는 농민들을 도적으로 만들 뿐'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 마을에 100집이 있다면 그 가운데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집은 한둘에 지나지 않고, 건너뛰어서라도 겨우 끼니를 이어 가는 집이 열 집 정도이며, 나머지는 겨울이 지나기도 전에 아침저녁 연기가 끊어진 채 굶주림에 울부짖는다."

김육의 주장으로 전라, 충청 지역까지 대동법이 확대되어 조금 나아진 농촌의 모습이 이 정도였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지, 두 학자의 해결책을 들어 보자.
유형원(1622~1673); 관직을 멀리하고 전라도 부안에서 날로 어려워지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직접 지켜보면서 사회 개혁론 정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이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면 백성의 세금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거나, 상민들만 부담하는 군포를 양반에게도 물린다면 백성의 생활도 나아질 것입니다. 
땅마다 임자가 있고, 땅이 없는 사람은 땅을 빌려 경작하는 지주 전호제야말로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 이것을 바꿔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땅을 많이 가진 지주들 중에는 땅을 놀리는 사람도 있는데,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할 땅이 없습니다. 농민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송시열(1607~1689): 대표적인 유학자로 효종의 스승이다.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정은 물론 학자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 대동법이 확대된 뒤에도 농민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내린 결론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토지 제도를 고쳐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려 농민의 세 부담을 줄여 주자'는 방안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요란하게 출발한 개혁의 움직임은 대동법이 적용되는 지역을 늘리는 정도에서 끝났다. 결국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나, 땅 없는 농민들의 어려움은 아무도 살펴 주지 않았다. 지주들은 자신들이 내야 할 토지세를 소작농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서도 새로운 세금을 자꾸 만들었기 때문에 농민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대동법 실시 전보다 더 비참하다'라고 할 정도로 나빠졌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 어떤 고을은 '절반이 비었다'라고 보고될 정도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실학이라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였다.
역사가 송시열,,,
유형원의 주장을 서로 비교해 보자. 그리고 어느 한쪽의 입장을 선택하여 지지하는 글을 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