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북위 33~43°, 동경 124~132°, 남북으로 950㎞에 걸쳐 길게 뻗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22만㎢인 반도국가로서 온대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북쪽은 압록강·두만강으로 중국대륙과 경계를 이루어 교류가 활발하였고, 남쪽으로는 대마도를 건너 일본과 접하고 있다.
동서남북의 지리적인 요인과 기후 조건이 지역적인 차이가 있고, 일년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이로 인해 지역별, 계절별 산물이 각각 특색을 가지고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식생활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특성을 살린 음식들이 고루 잘 발달되어 왔다.
각 영토의 경계가 역사적인 시대 변천에 따라 달라졌고, 왕조에 따라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누어져 각 고장마다 문화와 사람들의 성품도 뚜렷하게 다르다.
우리나라 식생활 문화는 13세기 이전까지는 북쪽의 국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계기로 남쪽의 국가, 19세기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와 발달을 이루어 왔다.
곡물농사에 적합한 기후와 풍토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생활을 하였던 삼국시대 후기부터 밥을 주식으로 반찬을 먹는 식생활 형태를 형성하였고, 채소를 소금에 절여먹는 김치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숭배하는 정책으로 인해 식생활에서 육식은 쇠퇴하고 채소 음식과 차(茶)가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북쪽의 여러 국가(송·여진·몽고)와의 교역이 활발하여 소금·후추·설탕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우리의 상추쌈과 약과는 원나라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효를 근본으로 조상을 중요시하고 가부장제도에 따른 식생활을 중요시 하였다. 현재와 같은 한국의 전통 식생활은
조선시대에 체계가 확립되었다. 또한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옥수수·땅콩·호박·토마토·고구마·감자·고추 등이 유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유림문화가 형성되어 성행하였고 농법이 발달되면서 농촌사회의 부농층이 형성되어 향토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각 지방의 특색 있는 고유한 향토음식이 발달되었다.
조선시대 행정조직은 전국을 팔도로 나누어 북부지방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중부지방은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남부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었다.
이렇게 분류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좁은 지형으로 남북간 기후의 차이가 크고, 북쪽지방은 주로 산악지대, 남쪽지방은 평야지대가 많아 각각의 자연 조건에 따라 생산되는 산물의 특성에 맞게 독특하고 소박한 향토음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지형적인 각 도별 음식의 특징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 그 지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조리법으로 토속음식을 만들었다.
지금은 인적·물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음식의 차이가 적어 졌지만, 아직도 각 도마다 특색있는 향토음식이 전승되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중부와 남부의 내륙지방은 쌀밥과 보리밥, 절인 생선이나 말린 생선, 해안이나 도서지방은 신선한 생선·조개류·해조류, 북부지방은 잡곡을 이용한 음식이 많다.
지방마다의 특색있는 음식의 맛은 기후와 관계가 깊다.
기온이 낮은 북부지방은 간이 싱겁고 매운맛이 덜하며, 젓갈을 많이 쓰지 않아 맛이 담백하고, 음식의 종류는 적지만 크기가 크고 양은 푸짐하다.
남쪽으로 갈수록 기온이 높아져 음식의 간과 매운맛이 강하고, 고추와 젓갈을 많이 쓰는 경향이 나타난다.
봄철의 장 담그기, 초여름의 젓갈 담그기, 초가을의 나물 말리기, 장아찌 담그기, 초겨울의 김장 담그기, 메주 쑤기 등의 연중 행사는 바로 계절의 변화와 뚜렷한 환경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의 화려했던 궁중음식이 있었고 이는 기품있는 반가의 음식과 교류되었다.
그중에서도 왕조의 도읍지였던 서울·개성·평양·전주의 음식이 가장 다양하고 화려하다.
각 지방의 향교나 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림문화가 발전하였다.
당대의 명문가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가가 있는 지방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조선조의 유교적, 토속적인 민속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