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수용하라.
기뻐하면 기뻐할 일만 생겨난다
힘든 것에는 뜻이 있다.
감사함으로 수용하라.
믿음의 열도를 10배로 늘여라.
100배의 수확이 보장된다
모두를 위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나를 위하는 지름길이다
진리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
길 한번 잘못들면 평생 후회한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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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 했다는 기념비
느보산은 모세가 죽어서 묻혔다고 알려진 산 입니다,
요르단 이지만 여기는 기독교 성지로 카톨릭 수사분들이 직접 관리 합니다,
위인들의 옆모습 얼굴들
모세를 기린다는 이야기가 이슬람어로도 쓰여 있는게 신기 합니다,
모세의 무덤을 덮었을거로 추측 되는 돌
모세도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여기서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40만 혹은 200만 유대인이(학자에 따라 다릅니다) 여기서 한달간 통곡을 하며 머물렀다고 합니다,
성경이나 이야기로 들을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여기에서 보니 그들의 막막함과 슬픔이 실감 납니다,
넓고 넓은 황량한 광야 믿고 따르던 지도자의 죽음 이제 약속의 땅을 앞두고 있는 설레임과 두려움 한달간 통곡하고도 남을 슬픔이 하늘을 덮을듯 합니다,
모세가 들고 다녔다는 지팡이와 놋뱀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형상화 했다고 합니다,
모세는 저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 이집트를 탈출 했고 바위를 때려 물을 솟게 했고 고생스런 피난 길을 벗어나 다시 이집트로 가자거나 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반역자들을 처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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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짚
다양한 쓰임새,
한국의 전통장의기초가되는 메주,
옛날에는 지붕도 짚이엿다,
소먹이 ,
장어구이,
활동하는데쓰는도구들,
월동, 바람막이,
짚신,
민족전통 벼짚공예...
옛날에는 여러곳에 쓰임새가 많았다,
옛날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상이 담겨져있는 이 도구들이 이제는 사용되지 않고 겨우 집안 한켠 장식품 정도로 되고있다. 더욱 슬픈것은 배워주려고 해도 배워줄 젊은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 하는 모습에 우리의 전통 하나가 잊혀져가는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이 틀림없지만 도시화와 산업화가 되며서 우리 주변에서 급속히 사라져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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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패산삼
황절산삼-초가을 부터 서리가 내릴 때 까지 야생에서 발견되는 산심
고패산삼-봄에 산삼 싹이 올라오면서 잎이 피지 않은 상태로 고사리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산삼
봄에 첫 싹이 틀 때 모습이 고사리 같아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약 싹이 올라오고 1주 가량 지나면 영양분이 뿌리 위쪽에 있는 잎과 열매 쪽으로 몰려가기에
싹이 올라오고 더 커지기 전에 영양분이 뿌리쪽에 많을 때 캐서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싹만 조금 올라오는 크기라서 발견하기가 힘들어 가치가 귀하다고 한다.
(뿌리만이 아니라 전체를 다 먹으면 어차피 좋다고 하긴 합니다.)
삼이 땅속에서 막 싹을 틔우는 즉 잎이 아직 펴 지지 못하고 마치 고패같이 생겼다 하여 [고패삼]이라 부른다,
삼은 약초의 정점에 있는 식물이다. 희소성도 크고 성장 속도도 느려서 전문 약초꾼도 산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앞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하는 약초로 유명하다. 실제로 평생 산을 다녀도 심마니들의 꿈인 ‘하늘이 심었다’고 알려진 천종산삼을 만나지 못하고 은퇴하는 심마니도 수두룩하다. 이런 그들에게 천종산삼 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산삼이 바로 고패산삼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2년만에 첯 싹이 돋게 되는데 이때는 잎이 3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3행(삼행)이라한다
2년만에 싹이 트는 이유는 씨앗 껍질이 두터워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고 인삼농사를 하려면 껍질을 벗겨
싹트는 시기를 1년 앞당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껍질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런 씨앗껍질 벗긴것은 (개갑)한
씨앗이라 한다,
3년쩨 나오는 가지가 2개 달린것으로 가지가 각각 있다 하여 각구 또는 2구(이구)라 부른다
원래 산삼은 3년째에 각지가 2개로 되면서 가지 한곳에는 잎이 5장이나 가지 하나에는 잎이 3장으로 나오고
이듬해에 가서야 가지 2개모두 잎을 5장씩 달게 된다,
가지가 1개일때는 잎의 수를 보고 3행,오행으로 구분하나 가지가 2개 이상이 되면 이제부터는 가지수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
사진의 삼은 가지가 3개이니 당연 3구[삼구]라 부른다,
이때도 가지가 2개에서 이듬해 3개로 될때 가지마다 잎을 5장씩 다는것이 아니라 가지 한곳엔 잎이 3장으로
돋고 이듬해에 모두 5장이 되는것이다,
3구에서 한해를 더 먹어 이제 가지를 하나 더 뻗어 가지가 4개가 딘다, 이름하여 4구[사구]
잎을 자세히 보면 가지 하나는 잎이 3장인게 보일것이다, 그런다음 내년에는 가지마다 잎이 5장이 된다.
삼은 첫열매 다는 시기에 3~5개 열고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가 늘어난다,
대개 7월초순부터 익기 시작하여 8월초순이면 모두 익어 떨어지나 지역이나 온도 습도등 장소에 따라
8월말까지 열매가 익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7월이 지나면 사실상 열매 보기가 힘들다.
삼은 다른 풀이 돋기전에 나오기 시작하기에 5월에 가장 눈에 잘 띠고 숲이 우거지면 보이지 않다가
열매가 익으면 빨간 빛깔이 선명히 눈에 들어와 이시기엔 또 잘보인다 그래서 심마니들이 5월과 7월이
가장 심보기가 좋은 철이라 한다.
산에 들어가면 여러형태의 산삼이 있는데 최소한 위 사진처럼 너덜너덜해진 산삼을 찿을수 있어야
하고 서리 내린뒤 산에가서 시든 낙엽을 보고 찿을수 있는 안목까지는 길러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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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申崇謙 ]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무관(武官)이자 서예가이다.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다. 광해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다. 본래 궁예(弓裔)의 막료였는데, 918년 배현경(裵玄景) 복지겸(卜智謙) · 홍유(洪儒)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신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태조가 말하는 대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그러자 태조가 크게 칭찬하며 평주라는 본관(本貫)을 내려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세(租稅)를 받게 하였는데, 이 땅을 "궁위(弓位)"라고 불렀다.
927년 공산동수 전투에서, 김락(金樂)과 전이갑(全以甲) · 전의갑(全義甲) 형제와 함께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된 태조를 구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으로 변장하여 숨을 거두었고 왕건은 머리가 잘린 시신에 금으로 만든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를 지내주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신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정오품에 해당하는 원윤(元尹)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건립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다. 해서체(楷書體) 초년작품을 보면, "단(短)" 자(字) 등에서 예서의 획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글자가 매우 정확하다. 또한 종렬(縱列)이 다소 난경(蘭徑)을 걷는 듯하지만, 한자 한자에 매우 충실하였다. 대체적으로, 구양순(歐陽詢) 서풍과 연관이 깊고 "숭(崇)"자 등에서는 조맹부(趙孟頫)의 특징이 보인다.
신숭겸장군유적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고,면적은 7,804㎡이다.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1등에 책록된 공신.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이 곳은 고려 태조때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 장군(?∼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태봉의 기장으로 있으면서 배현경 등과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이 되어 927년(태조 10년)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에서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장군은 왕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 장군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으며, 이틈을 탄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한다.
태조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예장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묘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후 지묘사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폐사되었으나 1607년(조선 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 표충단, 충열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으며,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르고,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 산은 왕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지명이외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의 자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파군재
동화사
보물 제243호 - 동화사 입구마애불좌상-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제247호 -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제244호 -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제254호 - 동화사 당간지주-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제248호 -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고려 초의 무신.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고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했다.
신숭겸장군
출생-사망본관별칭
? ~ 927
평산
초명 능산, 시호 장절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생으로, 《고려사》에는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재 평산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이 순절한 곳이다. 신숭겸은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았다. 동시에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927년(태조 10)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公山)에서 싸웠으나 크게 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다. 이를 틈타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 전사한 자리인 이곳에는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함께 폐사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새로 지어 지켜오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른다.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부르며, 표충사의 뒷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대구에는 이 싸움에서 유래된 안심, 해안, 반야월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용산재 및 덕양사,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서원. 전라남도 기념물 제56호. 평산신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개국의 1등 공신인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병장수였다. 그런데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 지 몇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다. 왕건이 이 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왕건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왕건을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웠다. 그리고 신숭겸이 순절한 이 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하고, 토지를 내려 이 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1607년(선조 40)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를 세워 장군을 모셨으며, 1672년(현종 13)에 표충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에 후손들이 재사를 지어 이 곳을 지켜오던 중 1993년에 표충사를 복원하였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지난 74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 장절공의 충절을 기리는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으며, 순절단(殉節壇)과 충렬비(忠烈碑)등이 있다.
[장절공]
신숭겸장군을 '장절공'이라고 하는데 '장절'은 태조 왕건이 신숭겸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군에게 내린 시호이다. 시호란 '큰일을 한 인물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국가가 내려주거나 다음 임금이 그 앞 임금에게 내려준 이름' 을 말한다. '장절(壯節)'이란 뜻은 '절의가 굳세다.', 곧 '마음이 아주 곧고 꿋꿋하며 의리가 있다'는 뜻이며, 여기서 '공(公)'은 신숭겸 장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충절비]
신승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으로, 표충재 동편 석축 위에 있다. 1607년(선조40)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외손 유영순이 영남 유림, 후손들과 의논하여 장절공 사우를 지을 때 같이 세웠으며, 예조판서 신흠은 글을 짓고, 여주목사 김현성을 글씨를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1781년에 비각이 허물어지고 비가 넘어진 것을 관민이 힘을 모아 다음해 8월에 바로 세웠으며, 같은 해에 비각도 고쳐 세웠다. 지금있는 비각은 1979년 대구시에서 고쳤다. 용머리에 거북 받침이 인상적이다.
[표충재와 동재 서재]
표충재는 뒤로 높다랗게 사당을 업고, 순절단이 내려다보이는 왕산 중턱에 있다. 표충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중심 건물과 동재와 서재가 있다. 표충사는 일명 표충서원으로 불리면서 유림에서 지켜오다가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에는 순절단을 단소로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었다. 여러해 동안 영남 족친들이 건축비를 모아서 1888년(고종 25)에 표충사 옛터에 완공했다. 표충재 현판은 충익공 신정희가 썼다. 표충재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숭겸 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여 건립된 강당인 '상절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