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1일 월요일

안시성, 安市城.


이 칭 :
안시성()
시 대 :
고구려
소재지 :
중국 요령성() 해성시()
규 모 :
둘레 3km
중국 요령성 해성시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산성이다. 요동지역에 설치된 고구려의 지방성의 하나.
성 안에서는 고구려시대의 유물은 물론 요(遼) 금(金) 대의 화폐와 철제품도 출토되고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시대의 산성().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에 있던 산성.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 동북의 탕지보()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 또는 《아방강역고()》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이라 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창다철도[]의 하이청[]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5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지역 방어를 위하여 요하 유역에 안시성을 비롯하여 요동성·건안성·개모성·백암성·비사성·신성 등을 축조하였는데, 이 은 요동성과 건안성의 중간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산성이 위치한 지형은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은데,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산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는데, 기초는 돌로 쌓고 그 위에 토석으로 골격을 쌓은 위에 흙으로 다져 덮은 방식이다. 성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산성인데, 성벽의 총길이는 본성이 3km 정도이고, 외성과 합하면 총 4.5km 정도이다. 본성에는 성문이 동·서·남·북에 각각 4개가 설치되었는데, 평지와 연결된 서남문이 정문이다. 성벽을 따라 곳곳에 치()와 각대()가 설치되었으며, 성 안에는 계단 형태의 평탄한 대지가 여러 곳에 있다. 산성의 동남쪽 모서리 바깥으로는 인공적으로 쌓은 작은 토산이 있다.

이 성은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645년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고구려 정부는 고연수·고혜진 등으로 하여금 15만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당군과의 정면 대결에 크게 패배하고 항복하였다. 고립된 안시성은 3개월에 걸친 당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끝까지 성을 지켜냈다. 결국 9월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고 식량이 떨어진 당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였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이에 반대한 사람이지만, 연개소문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또 이 전투에서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고려 말부터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지금의 만주 푸순[] 부근)과 건안성(:지금의 만주 가이핑[])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국내성()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군대 15만 명이 출병하였으나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였다.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은 안시성에서 마침내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 성주 양만춘(/)은 군사와 주민들의 힘을 일치단결시켜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 싸움’이다. 고구려 멸망(668) 후에는 검모잠()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안시성()의 원이름을 ‘안촌홀()’이라고 하였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종래 의견이 분분하였다.『금사()』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 동북의 탕지보()에 비정하기도 한다.
해성시 동남쪽 8km의 영성자둔() 영성자촌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의 지리적 위치는 발해만 방면에서 수암()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며, 평원지대에서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산성이 위치한 지형은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은데, 성안에 계곡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산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는데, 축조방식은 무순()의 고이산성()과 마찬가지로, 기초는 돌로 쌓고 그 위에 토석으로 골격을 쌓은 위에 흙으로 다져 덮은 방식이다.
성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산성인데, 외성은 본성의 서쪽에 접하여 구축되었다. 본성과 외성이 만나는 곳에는 치(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형태의 각대()가 시설되어 있다.
외성이 평지와 연결되는 부분에는 본래 성벽과 성문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서 파괴되었다. 성벽의 총 길이는 본성이 3km 정도이고, 외성과 합하면 총 4.5km 정도이다.
본성에는 성문이 동서남북에 각각 4개가 설치되었는데, 평지와 연결된 서남문이 정문이다. 서남문지는 안쪽으로 들어간 옹문()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문지 양쪽에는 높은 토벽이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되어 있다. 서남문의 남쪽에는 계곡물이 흘러나가는 수구()가 한 곳 있다.
성벽을 따라 곳곳에 치와 각대가 설치되었으며, 성문과 치의 안쪽으로는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구축되어 있다. 북문지 동편의 대지에는 건물지가 남아 있는데, 5세기 중엽의 고구려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산성의 축조 시기를 짐작케 한다.
성안에는 계단상의 대지가 여러 곳에 시설되어 있으며, 서벽 안쪽의 경사면에는 장대()가 남아 있고, 5곳 이상의 건물지 초석도 확인된다. 성안에는 수뢰()라고 부르는 돌로 쌓은 유적지가 3곳이 있는데, 길림시() 용담산성()에 보이는 수뢰·한뢰()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성안에서는 고구려시대의 유물은 물론 요()·금()대의 화폐와 철제품도 출토되고 있다. 산성의 동남쪽 모서리 바깥으로는 인공적으로 쌓은 작은 토산이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비정된다.
『이계집()』이나 『아방강역고()』에서는 만주의 봉황성()에 비정하기도 한다.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본 것은 17세기 이후 연행사(使)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 관한 민간전승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명나라에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책들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 작품들에 설인귀() 영웅담의 무대인 봉황산과 역사연의()의 무대인 안시성 및 안시성주로서 양만춘()의 활약이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 연행로상에 봉황산성이 있었고, 이러한 작품들을 접했던 연행사들이 자연스럽게 안시성을 떠올리게 되면서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병자호란() 이후 민족의식의 확대와 함께 크게 유행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17세기 중엽부터 남구만(), 김창업() 등에 의해 이미 봉황성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명일통지()』등에 나타나는 지리적인 문제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박지원()이나 안정복() 역시『당서()』및『한서()』지리지 기록 등을 인용하여 봉황성설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며, 안시성은 개주() 일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는 만주 봉천성() 해성()의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산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요하()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인 신성(: 지금의 만주 부근)·요동성(: 지금의 만주 )·건안성(: 지금의 만주 )·개모성(: 지금의 만주  부근)·백암성(: 지금의 만주  동남)·비사성(: 지금의 ) 등 중에서 전략적 비중이 요동성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다.
안시성은 신성과 건안성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므로,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일시에 적의 수중에 함락된다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방의 여러 성들의 방어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 지금의 만주  남쪽에 있는 )·국내성( : 지금의 만주 )을 비롯한 전국의 성들 수호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645년(보장왕 4)고구려의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지형이 험하고 정예 병력이 배치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15만의 병력을 동원해 출병했으나, 안시성 8리() 되는 지점에서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였다.
645년에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전투이다. 고구려군은 백성들과 힘을 합쳐 용감하게 싸워 안시성을 지켜 냈다.고립된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당군 진영에서는 안시성 공격을 포기하고, 건안성을 공격하자는 건의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나라 장수 이세적()은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므로, 자칫 안시성을 통과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보급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안시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이세적의 건의대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동남 모서리에 흙으로 산을 쌓고 공격했으나, 성 안의 고구려 군대도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나라군대는 공성()기구를 모두 동원해 성벽을 파괴시켰으나, 일부 파괴된 성벽에는 목책()을 세웠으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산성들의 방어력이 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671년 7월에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게 함락되고 고구려부흥운동도 크게 약화되었다.
645년(보장왕 4)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에서 벌인 공방전.
644년 당나라 태종()은 상당한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 침공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군량·선박·각종 공성구() 등을 준비하는 한편,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고구려 변경지대의 형세를 정탐했다. 이어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구려 침공을 실천에 옮겼다.
645년 4월 1일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의 선봉은 회원진( : 지금의 광녕 부근)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 : 지금의 신민 부근)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혼란시키기 위해 신성( : 지금의 무순 배관산성)·건안성( : 지금의 개평) 등 여러 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이 계획이 실패하자 전군을 집결시켜 4월 15일부터 개모성( : 무순 고성자 토성)을 공격, 26일에 이를 함락시켰다.
이때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천연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비사성( 또는  : 지금의 대련만 배안)을 공격, 5월 2일 이를 함락시켰다.
한편 태종도 요하를 건너와 이세적의 군대와 합류하여 19일간에 걸친 집요한 공격 끝에 5월 17일 요동성( : 지금의 요양)을 함락하고, 이어서 6월 10일에는 백암성(: 지금의 )을 빼앗았다.
백암성 함락 후 당군은 수뇌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여 다음 공격목표를 안시성( : 지금의 해성 동남 영성자산성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임)으로 정하고, 6월 20일 안시성으로 쳐들어갔다.
고구려에서는 이에 맞서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군을 가볍게 보고 성급하게 정면대결을 벌이다가 당군의 포위공격을 당했으며, 결국 살아남은 3만 6,800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하였다.
안시성 구원군의 군세에 두려움을 금치 못했던 태종은 뜻밖의 놀라운 전과를 올리자 이는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승리에 도취했고, 그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반해 고구려는 안시성 구원군이 패배한데다가 남으로는 신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또 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설연타()와 제휴하여 당을 견제해 보려는 외교적 노력마저 실패함으로써 안시성 지원능력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안시성의 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은 고연수 등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당시 가장 위력적인 성 공격무기였던 포거( : 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와 충거( : 성벽을 파괴하는 돌격용 수레)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해 왔다. 
안시성측은 이를 번번이 물리쳤고, 무너진 성벽도 재빨리 수리하는 등 확고한 자세로 방어에 임하였다.
안시성의 이 같은 완강한 저항에 당황한 당은 태종의 본영을 여러 번 바꾸어가면서, 또 안시성을 함락하는 날 남자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하면서 안시성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공격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고연수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을 그냥 두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방비가 약한 오골성()을 점령한 다음 곧장 평양으로 진공하자는 논의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자가 친히 싸움터에 나왔으니 안시성을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은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당의 안시성 공격은 계속 강행되었다.
한편, 장량이 이끄는 수군의 건안성 공격마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초조해진 당은 이 싸움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이세적으로 하여금 하루에도 6, 7회씩 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토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 사이로 빠져 나와 토산을 점령하였다.
당은 토성을 탈환하기 위해 3일간 극렬한 공격을 폈으나 실패했으며, 그 결과 당의 작전은 전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겨울이 되어 날씨도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으므로, 당은 할 수 없이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그 해 9월 18일 서둘러 퇴각하였다.
중국 측 문헌에는 645년 당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개의 성을 빼앗고 4만 명 이상을 전사시킨 반면 당군의 전사자는 2,000명에 불과했다며 대전과를 거둔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태종이 안시성에서 퇴각한 지 3일 만에 황급히 요수를 건넌 것이나 철군 후 고구려 침공을 몹시 후회했던 점으로 미루어, 당의 타격은 기록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막대한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같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자의 이름이 『삼국사기』 등의 안시성전투에 관한 기본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래의 야사에는 양만춘( 또는 滿)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이 싸움에서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고려 후기의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여당전쟁

"당나라군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성문을 열지 못했다. 이에 당 태종은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게 했다. 흙산 위에서 성 안쪽을 향해 공격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흙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으로 흙산을 빼앗긴 뒤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다.
수나라에 이어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된 당은 호시탐탐 고구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제27대 임금인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이를 트집 잡아 쳐들어왔다.
당의 임금인 태종은 이세적을 선봉 장수로 내세운 뒤 직접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의 육군과 수군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했고 개모성과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들은 기세를 몰아 안시성으로 향했다. 안시성은 험준한 곳에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고, 주변에는 무기의 재료가 되는 철광석이 풍부한 데다 기름진 땅이 있어 식량 걱정이 없었다.
당의 군대가 안시성으로 향하자 고구려도 더 이상 요충지를 빼앗길 수 없어 지원에 나섰다. 고구려 조정은 고연수와 고혜진이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말갈 병사 15만 명을 보내 안시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라군을 얕잡아 보고 성급하게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당의 군대는 안시성을 향한 총공격에 나섰다.
안시성은 호락호락 성문을 열지 않았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성주 양만춘의 지휘 아래 백성들과 힘을 합쳐 당나라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냈다. 거듭되는 적군의 공격을 번번이 물리치면서 기세도 높아졌다. 도저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당나라군은 50만 명을 동원해 안시성의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흙산의 한 부분이 무너지면서 되레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진전 없이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군사들은 지쳐 갔고,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철수를 명령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심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삼국사기》나 중국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책들에는 ‘양만춘’이라고 전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도 안시성 성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어쩔 수 없이 안시성의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했다고 한다.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당은 직접 평양성을 공격하려는 생각도 했지만,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해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다가 실패했다.
안시성의 성주와 백성들이 당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안시성이 견고하게 쌓아진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백성들이 단합하여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도 군사들과 백성들이 단결하였기 때문이에요.

고구려는 비록 안시성 싸움에서 당나라를 물리쳤지만, 수나라, 당나라와 연이어 전쟁을 한 까닭에 국력이 약해져 삼국간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안시성 싸움은 약 3개월간 이어졌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과 백성들은 힘을 모아 끈질기게 싸웠고, 그 결과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던 당의 군대를 물리쳤다.

출처 & 참고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이계집(耳溪集)』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당서(唐書)』
『금사(金史)』
「연행로상(燕行路上)의 공간 탐색, 봉황산성(鳳凰山城)」(이승수, 『정신문화연구』103, 2006)
『삼국사기(三國史記)』
『목은집(牧隱集)』
『목정만필(目汀漫筆)』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구(冊府元龜)』
『고구려대수당전쟁사(高句麗對隋唐戰爭史)』(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고구려(高句麗)와 수당(隋唐)과의 전쟁(戰爭)」(이만열, 『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8)
「고구려대수당항전(高句麗對隋唐抗戰)」(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高句麗の安市城の位置に就いて」(島田好, 『歷史地理』49-1, 1927)
「隋唐二朝の高句麗遠征の地理」(松井等, 『滿洲歷史地理』1, 1913)
안시성전투 [安市城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漢代安市縣與高句麗安市城非一地考」(閻方章, 『地名學硏究』1, 1984)
「高句麗の安市城の位置に就いて」(島田好, 『歷史地理』49-1, 1927)
영성자산성 [英城子山城] (한국민족문화대)
안시성전투 [安市城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시성 싸움 - 고구려가 당나라군의 침공을 물리친 전투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편안 한마음 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 을 나누는 아름다운 그자체 를 서로 공유 하는것, 서로의 도움을 줄수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