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辛未洋擾 .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1871년(고종 8) 미국군함이 강화도에 쳐들어옴으로써 일어난 사건.
1866년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후 미국정부는 이를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북경 주재 미국공사 로(F. Law)에게 훈령하여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출동케 했다.
로 공사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와 함께 기함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71년 4월 3일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즉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 지대는 소함정 4척을 이끌고 강화해협을 측량하기 위해 강화부의 관문인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섰다. 이에 강화수병이 맹렬한 포격을 퍼붓자 피차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했다. 백병전까지 포함되었던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여 아군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하고, 미군 측도 매키(McKee) 해군중위 이하 3명이 전사,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한 다음,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했다. 백병전까지 포함되었던 이 싸움은 대단히 치열하여 아군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등 53명이 전사하고, 미군 측도 매키(McKee) 해군중위 이하 3명이 전사,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첨사(僉使) 이염(李濂)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선박을 물리치자, 미국 측도 이 이상의 공격이 무모함을 깨닫고 5월 16일(양력 7월 3일) 40여 일 만에 불법침입한 우리 해역에서 물러갔다. 이 결과 대원군은 척양척화(斥洋斥和)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어 온 나라 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한층 굳게 했다.
광성보에서 이틀에 걸쳐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조선군은 무기의 수준이 떨어지고 군사의 수도 적었지만 어재연과 어재순 형제의 지휘에 따라 용감하게 싸웠다. 탄환과 화살이 떨어진 후에는 맨손으로 싸울 정도였다.
광성보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포대가 있는 곳이었다. 미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광성보를 공격했고, 조선군도 이에 맞서 포를 쏘고 화살을 퍼부었다. 광성보의 용두돈대에는 지금도 당시의 포가 보존되어 있다.
광성보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포대가 있는 곳이었다. 미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광성보를 공격했고, 조선군도 이에 맞서 포를 쏘고 화살을 퍼부었다. 광성보의 용두돈대에는 지금도 당시의 포가 보존되어 있다.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란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서해에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 배가 불태워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한 일을 뜻한다.
기회를 엿보던 미국은 1871년에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5년 전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강제로 조선의 문호를 열고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은 모두 5척의 군함과 1,200여 명의 병력을 보냈다. 우두머리는 아시아 함대의 사령관인 로저스였다. 미국은 먼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곧바로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은 조선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서울로 가는 물길을 조사하겠다며 강화도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 수로에 다른 나라 배가 마음대로 드나들자, 방어를 맡고 있던 조선의 손돌목 포대는 이들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 그러자 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구실로 강화도를 공격해 왔다.
단숨에 강화도의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강화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대가 있는 광성보를 공격했다. 광성보의 조선군은 미군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한동안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끝내 광성보는 미군에게 점령당했다. 미군은 광성보까지 손에 넣었으나 예상 외로 완강한 조선군의 저항에 놀라 주춤했다. 그리고 더 이상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강화도에서 물러났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등을 겪으며 조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서양에 대한 거부감은 신미양요로 인해 더욱 커졌다. 또한 조선을 위협하던 미군이 결국 강화도에서 철수하자 흥선 대원군은 자신감을 얻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 곳곳에 ‘서양과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라는 내용을 담은 척화비를 세웠고, 조선 사회에는 서양 배척 풍조가 한층 강해졌다.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였다.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나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6월 2일(음력 4월 15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음력 4월 24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는 미국의 포함외교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871년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배외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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