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침범한 사건.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략으로 조선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강화도의 정족 산성에서 물리쳤으며, 이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해 갔다가 최근에야 임대 형식으로 반환했다.
조선 고종 때인 1866년 초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지하며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다. 이를 병인박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중국으로 도망쳐 이 소식을 프랑스군에게 알렸다. 이에 프랑스군 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7척의 함선과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강화도를 침략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뒤, 프랑스인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엄벌하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라며 조선 정부를 위협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부대를 편성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화력이 좋은 신식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에 조선군보다 전력이 훨씬 강했다. 조선군을 이끌게 된 양헌수는 몰래 강화도로 건너가 삼랑성(정족 산성)에 진을 치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정족 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더 이상 강화도를 점거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책 340권과 은 19상자 등을 훔쳐갔다. 그리고 나머지 서적들은 불에 타 버렸다.
프랑스군이 가지고 간 외규장각 도서는 주로 왕실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병인양요 때 가져간 도서들을 반환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했고, 2011년 4차례에 걸쳐 296권의 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강화 삼랑성, 강화도의 정족산에 위치한 산성. 일명 정족산성, 양헌수가 프랑스군을 막아낸 병인양요(1866)의 전승지. 사진은 성 내부에서 바라본 남문과 그 위의 누각인 종해루. 삼국시대(추정), 석축, 둘레 2.3㎞, 사적 제130호.
병인양요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나라의 문을 닫아 거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 금지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서양의 오랑캐가 일으킨 전쟁을 뜻하는 ‘양요’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커진 것이다. 게다가 5년 뒤에는 미국까지 군함을 이끌고 와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조선은 더욱 강력하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해 5월 조선을 탈출한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 Clair Ridel)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 Roze)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그해 5월 조선을 탈출한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 Clair Ridel)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 Roze)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베이징[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청국 총리아문사무(總理衙門事務)의 공한을 통해 프랑스 동태를 알게된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과 변경(邊境) 수비를 강화했다.
9월18일 리델 신부와 한국인 신도 3명의 안내로 로즈 제독이 인솔한 프랑스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9월 25일 강류(江流)·연변만 측량하고 중국으로 퇴거하였다.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일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비롯, 모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芍藥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다.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이를 점령하고, 무기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조선은 이경하(李景夏) ·신헌(申櫶:申觀浩) ·이기조(李基祖) ·이용희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 무장들에게 서울을 위시하여 양화진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 ·정족산성(鼎足山城) 등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일 프랑스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로즈는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기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미리 잠복, 대기중인 한성근의 소부대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로부터 민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11월 7일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참패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로즈 제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족산성 수성장(守城將)인 양헌수가 그해 11월 9일에 “저들은 죽은 자가 6명이고 아군은 죽은 자는 1명입니다”라고 보고하고, 다시 11월 11일에는 “6명의 적들이 남문 밖에서 죽은 것을 우리 군사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어젯밤 촌민(村民)들이 와서는 저놈들이 행군해가면서 또한 죽은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저놈들이 모두 시체를 묶어서 여러 대의 짐바리에 실어갔다고 했습니다. 저놈들이 죽은 수는 50여 명입니다”라고 보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의 기록에서는 당시 전투에서 3명이 죽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斥和碑)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斥和碑)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프랑스군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으나 정족 산성 전투에는 고작 160여 명만을 보냈다. 구식 무기를 가진 조선군을 깔본 탓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조선군에게 패한 뒤 기가 꺾여 달아나고 말았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프랑스군 몰래 정족 산성에 진을 친 다음, 죽기살기로 싸웠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이들을 기리는 승전비와 어떠한 외국 선박도 강화를 통과할 수 없다는 흥선 대원군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구미열강은 이를 계기로 조선을 청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독립한 주권국가로 인식하여,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였다. 프랑스군이 탈취한 많은 서적 ·자료 등은, 뒷날 유럽사람들이 한국 ·동양을 연구하는 데 사용되었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한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 사실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최인서(崔仁瑞)·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하게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 지휘 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의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 승첩(鼎足山城勝捷)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했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가령, 미국정부가 1867년 3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정부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한 예를 들 수 있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양요' 란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난리, 전투라는 의미예요. 병인양요는 병인년(1866년)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이에요.
조선을 다스리던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를 막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선교사들이 이에 협조하지 않았어요. 이에 화가 난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확산 방지를 이유로 삼아 1866년 선교사 9인을 포함해 천주교인 8천여 명을 죽였어요.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는 조선에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하였고,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답니다.
조선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한성근이 문수 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어요. 그러나 강화성이 점령되는 등 우리 측의 피해도 매우 컸지요. 특히 정조가 설치한 외규장각의 많은 도서들을 약탈당했답니다.
1866년(고종 3) 대원군이 일으킨 천주교도 및 외국선교사에 대한 박해사건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서구열강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입한 최초의 사건이다.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월에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불과 몇 달 사이에 프랑스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鐘三)·정의배(丁義培) 등 조선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는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이때 탈출한 리델 신부는 당시 중국의 천진(天律)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다.
조선정벌을 결의한 로즈 제독은 이해 9월 18일 전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극도로 긴장한 조정에서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로 하여금 경인연안을 엄중 경비토록 했다. 프랑스 함대는 3척의 소형함대로 도성으로 공격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 부근의 지형만을 정찰하고 중국으로 물러갔다.
로즈 제독은 같은 해 10월 순양전함 게리에르를 비롯한 모두 7척의 군함에 600명의 해병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 물치도(지금의 작약도) 근처에 나타나, 14일 강화도의 갑곶(甲串)에 상륙하고, 16일에는 강화부(江華府)를 점령, 무기 · 서적 · 식량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약 120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정찰하려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韓聖根)의 소부대에게 공격받아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한 데 이어, 11월 9일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전투에서 천총(千總) 양헌수(梁憲洙)의 포수군에게 30여 명이 사상당하는 참패를 맛보았다.
이 전투의 참패로 로즈 제독은 조선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령했던 강화성에서 철수하면서 장녕전(長寧殿)을 비롯한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막대한 양의 보화 · 서적 · 무기 등을 약탈하여 중국으로 물러갔다.
병인양요의 결과로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구미열강은 조선왕국을 청국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인식하게 되어, 종래의 한 · 청관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군이 탈취해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뒷날 유럽인이 한국과 동양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했다.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2. 충북 기념물 제6호. 흥선대원군이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용호한록(龍湖閒錄)』
- 『동문휘고(同文彙考)』
-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籌辨夷務始末』
- 『병인일기(丙寅日記)』(양헌수)
- 『정족산성접전사실(鼎足山城接戰事實)』(양헌수)
- 『하거집(荷居集)』(양헌수)
-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1980)
- 『근대한미교섭사(近代韓美交涉史)』(김원모, 홍성사, 1979)
- 「로즈함대(艦隊)의 내침(來侵)과 양헌수(梁憲洙)의 항전(抗戰) 1866」(김원모, 『동양학(東洋學)』 13, 1983)
- 「Archives du Ministere des Affaires Etrangeres et Archives Nationales, Marine」(『교회사연구(敎會史硏究)』 2, 한불관계자료, 1979)
- Histoire de l’Eglise de Coree(Dallet, C.,Paris, 1874)
- Une Expe'dition en Coree 1866(Zuber, M.H., 1867)
- L'illustration, Journal Universel(1867)
- U.S.Diplomatic Correspondence(1866)
-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Cable, E.M., Transactions 28, 1938)
- 병인양요 [丙寅洋擾]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용어사전)
- 병인양요 - 선교사 처형을 트집 잡아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 병인양요 [丙寅洋擾]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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