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서인.(조선의 파벌 정치)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의 공자 사당[]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김집·송시열()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호포제()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9년(선조 22) 모반을 기도했다는 동인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이 없자 정철이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서인들은 다시 실각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 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
[인조반정].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과 김집()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후 현종대 왕실 상례()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과 소론()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파벌들=사림파.훈구파.(서인.동인.남인.북인).) 

여기 =

https://youtu.be/NHjc6etIQUM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편안 한마음 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 을 나누는 아름다운 그자체 를 서로 공유 하는것, 서로의 도움을 줄수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