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을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조선 전기 농민이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온갖 세납(稅納), 즉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 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을 모두 전결세화(田結稅化:可食米)하여 1결(結)에 쌀[白米] 12말[斗]씩을 징수하고,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물품 및 역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입 사용하거나 고용 사역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이(李珥)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조선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다.
전쟁 중에 군량을 조달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1594년(선조 27),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대공수미법을 제안하고 이 제안은 토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하여 그해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2말은 군현에서 사용하였다.
1623년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후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 폐지되었다. 당시 인조와 서인 조정에서는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백성들의 충성심이라고 여겼다.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후, 김육(金堉)·조익(趙翼)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1651년(효종 2) 8월에 충청도에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 1658년(효종 9)에는 전라도 연해지역 27개 군현에 시행되었으며 이어 산군(山郡)에도 1662년(현종 3)에 실시되었다.
경상도는 16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다. 함경도는 전토가 척박하고 군현들간의 사정이 달라 군현별로 징수량과 물종을 다르게 정하는 상정법(詳定法)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정법은 함경도와 비슷한 상황의 황해도와 강원도에 확대되었다. 황해도는 1624년 대동법을 시행하다가 1708년(숙종 34)부터 상정법으로 바꾸고, 강원도는 1710년(숙종 36)부터 상정법을 적용하다가 1747년에 이르러 대동법으로 전환하였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제체제로 전환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로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초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당시 농민들의 삶은 정말 어려웠다. 전쟁으로 경작지 자체가 크게 훼손되어서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대부분 부자 양반들의 몫이었다. 결국 일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어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농산물을 수확한 후에 지주에게 절반이나 되는 지대를 바쳤다. 그리고 국가에다 세금도 내야 했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광해군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백성들의 생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백성들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광해군은 개간 사업을 서둘러 경작지부터 늘렸다. 당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조선 전체를 합쳐도 전쟁 전 전라도 수준에 해당하는 50여만 결에 지나지 않았다. 더불어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조세 수입도 늘렸다. 이 때 부유층에게 돈을 받고 명예직 벼슬을 주는 공명첩 제도도 있었다.이 모든 것이 세금을 확충하여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1623년(인조 1) 강원도, 1651년(효종 2)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 전라도의 산군(山郡), 1666년 함경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어,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주도에는 그곳이 번속(藩屬)으로 여겨진 연유로 해서 실시되지 않았고, 또 평안도에는 민고(民庫)의 운영과 함께 1647년(인조 14)부터 별수법(別收法)이 시행되어 이미 대동법의 효과를 대신하고 있었던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납 제도도 개선했어. 공납은 세금을 각 지역의 토산물로 내게 하는 제도였는데,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어. 마을 단위로 세금을 걷다보니 공물의 대부분을 일반 농민들이 냈거든. 또한 이 제도는 생산되지도 않는 물건을 공물로 바치라고 했어. 국가에서 필요한 물건을 먼저 정해놓고 이를 마을 단위로 나누어 배정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고을에 호랑이 가죽을 공물로 바치라고 명을 내려. 그런데 그 고을에서는 호랑이가 요즘 잡히질 않아. 그러면 사람을 시켜 다른 마을에서 사와야 했다 그것도 비싸게! 호랑이 가죽 값에 사람 인건비까지 더하면 농민이 내야할 공물 부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거지. 기본적으로 부담이 큰 데다가 토산물을 대신 납부해 주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의 폐단까지 나타나 농민들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되었다.
고을 원님을 지냈던 김육이라는 사람은 농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선조에게 ‘대동법’이라는 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 대신 백성들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쌀로 납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고을 원님을 지냈던 김육이라는 사람은 농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선조에게 ‘대동법’이라는 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 대신 백성들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쌀로 납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쌀을 내고, 토지를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다 적은 양의 쌀을 내게 되었다. 이전의 법보다는 훨씬 합리적이었다. 이후 백성들의 부담도 줄어들게 되었는데, 대동법을 담당하는 기구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선혜청’이라고 한 것만 봐도 이 제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대동법은 초기에는 비록 경기도에서만 시험적으로 시행하였지만 대동법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어. 한마디로 ‘공납이 무거워 고향을 떠났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 든다’고 할 정도였다.
대동법은 초기에는 비록 경기도에서만 시험적으로 시행하였지만 대동법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어. 한마디로 ‘공납이 무거워 고향을 떠났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 든다’고 할 정도였다.
이럴 경우 누가 반대하겠니? 이전에는 세금을 납부하지 않던 양반 지주들이 땅이 있다는 이유로 세금을 내게 생겼는데, 당연히 반발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소유한 땅에 대한 세금, 즉 토지세를 냈는데, 이제 와서 또다시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법이 함경도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는 데에는 약 100여 년이나 걸린다. 양반 지주들의 반대는 여전했지만, 이 문제를 개혁할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대동법은 차츰 정착되어 갔다.
땅을 많이 가진 양반들은 조직적으로 대동법을 반대하였지만, 광해군은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계속 유지시켰어. 이어서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만나 풀과 나무 등 온갖 생물이 즐거워하는데 유독 우리 백성들만 위태로워 죽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된 도리가 아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가운데 없앨 수 있는 것은 없애고, 굶주린 자들은 착실히 도와 줘서 목숨을 잃는 자가 없도록 하라.
조선 후기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그에 대신해서 제정·실시한 재정제도. 조선왕조에서는 국용의 기반을 전통적인 수취체제에 따라 전세(田稅)·공물·진상·잡세(雜稅)·잡역(雜役: 徭役) 등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 세납의 부과·징수에 따랐던 여러 가지 폐해와,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양반층의 토지점유 확대에 따른 농민층의 몰락은 이들 제도를 더 이상 존속시키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부과기준이 모호하고 물품이 다양했던 공물상납제도(貢物上納制度:貢納制)에 있어 그러하였으니, 이미 16세기 초부터 그의 폐지·개혁이 논의되고 강구되는 실상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공물·진상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하였고, 또 방납인(防納人)들의 이권이 개재되고 있었던 데서 쉽사리 개선되지도 못하였다.
다만, 일부 군현이 사대동(私大同)으로 일컬어지는 자구책(自救策), 즉 군현에 부과된 각종 경납물(京納物)을 관내 전토(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1결에 1말 또는 2말)을 가지고 구입·납부하는 방책을 스스로 마련하여 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납제의 개혁논의는 임진왜란을 겪기까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개혁론의 주종을 이루어 온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주장과 위와 같은 사대동의 관행은 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부터 그 이듬해까지 정부로 하여금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잠시나마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왜란 후 국가기틀을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대동법의 제정·시행으로 이어졌다.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실시된 대공수미법은 각 군현에서 상납하던 모든 물품을 쌀로 환가(換價)하여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도내 전토에 고르게 부과·징수(대체로 1결에 쌀 2말)하게 하고, 이를 호조에서 수납하여 공물과 진상·방물(方物)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시급하였던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 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그 시행세칙[事目·事例]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수세전결(收稅田結)에서 1결당 쌀 16말씩을 부과·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에서 경납물의 구입비용으로 공인(貢人:주로 종래의 방납인)에게 주어 납품하게 하고, 나머지 2말은 수령(守令)에게 주어 그 군현의 공·사 경비로 쓰게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그리고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대동법의 확대실시는 이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남방토적(南方土賊)을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호란(胡亂)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세칙을 새롭게 수정, 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그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 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하는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앞서 실시된 경기도·강원도의 대동법도 이에 준하여 개정하니, 이에서 대동법은 선혜청(宣惠廳)의 관장 아래 하나의 통일된 재정제도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대동법이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군현별로 부과·징수를 상정하는 이른바 상정법(詳定法)의 특이한 규정을 두게 되었을 뿐이다.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납물의 전결세화(田結稅化)를 기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 부과는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하였고, 징수는 쌀을 수단으로 하였다.
수조안에 등록된 전결 가운데서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각종의 급복전(給復田)을 제외한 모든 전결에서 1결당 쌀 12말씩을 부과·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면부출세(免賦出稅)의 전결이나 면부면세(免賦免稅)의 전결, 예를 들면 궁방전(宮房田)·영둔전(營屯田)·아문둔전(衙門屯田)·관둔전(官屯田)·학전(學田) 등에는 대동세가 부과되지 않았고, 다만 아록전(衙祿田)과 공수전(公須田)에서만은 지방관아의 경비가 대동미에서 지급됨에 따라 대동세가 부과되었다.
부과된 대동세는 봄·가을로 6말씩 나누어 징수(뒷날에는 가을에 전액 징수함)하되, 산군에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같은 양의 잡곡이나 소정의 환가(換價)에 기준하여 무명[(綿布], 베[麻布], 화폐[錢]로 바꾸어 내게도 하였다.
단, 무명이나 베로 납부할 경우에는 5승(升) 35척(尺)을 1필(疋)로 하였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쌀 5∼8말이었고, 화폐는 1냥(兩)에 쌀 3말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영조에 걸쳐 6도의 대동세액(大同稅額)이 12말로 통일되기까지는 지역에 따라 부과액과 징수액 방법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고, 또 상정법이 시행된 3도에서는 이 이후에도 다른 도와 매우 상이하였다. 이와 같이 징수된 대동세[大同米, 大同木, 大同錢]는 크게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유치미는 각 영(營)·읍(邑)에 보관하면서 그 영·읍의 관수(官需)·봉름(俸廩)·사객지공(使客支供)·쇄마·월과군기(月課軍器)·제수(祭需)·요역, 상납미의 운송, 향상(享上)의 의례(儀禮)를 존속시키는 뜻에서 설정된 약간의 종묘천신물(宗廟薦新物)과 진상물(進上物)의 상납 등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상납미는 선혜청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 상납하던 원공(元貢:二十八司元貢物)·전공(田貢:田稅條貢物)·별공(別貢:別卜定貢物)·진상·방물(方物)·세폐(歲幣) 등의 구입비와 각종 잡세조(雜稅條) 공물·역가(役價)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상납미의 지출은 선혜청이 직접 계(契)·전(廛)·기인(其人)·주인(主人) 등에게 선급(先給)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해당 관서에 책정된 액수를 주어 각 관서로 하여금 소정의 공인(貢人)에게 납품에 앞서 지급하게 하였고, 유치미의 지출은 영·읍의 관장(官長)이 용목별(用目別)로 책정된 경비 한도 내에서 월별로 나누어 적절히 쓰게 하되, 그 명세서를 매월 선혜청에 보고하게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사용 항목과 운영에 색다른 규정이 가하여지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이처럼 공납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또 면세전(免稅田)의 증가로 인한 세입의 감축과 영세 소작농의 증대로 인한 호역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한 수취제도이자 재정제도였다.
오늘날 이 법은 ‘봉건체제의 기본적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로서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제도’로 평가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순정성리학자(純正性理學者)들이 중국 3대(三代:夏·殷·周시대)의 이상사회, 즉 대동(大同)사회를 지향’하여 제정한 정전제(井田制)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김육(金堉)의 말에 따른다면 “농민은 전세와 대동세를 한 차례 납부하기만 하면 세납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오로지 농사에만 힘을 쓸 수 있는” 민생안전의 조치였고, 또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키고 고용증대도 가져올 수 있는 제도였으며, 국가는 국가대로 재정을 확보하면서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대동법은 점차 그 당초의 성과를 잃게 되었다.
원래 상납미는 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쌀 6말)로, 유치미는 가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6말)로 각각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17세기 말엽부터는 해마다 선혜청에서 수조반강(收租頒降:상납미의 소요 예상량을 산정한 다음에 각 군현에서 상납할 수량과 영·읍에 유치할 수량을 책정하여 주는 것)하는 제도가 생겨, 그 수량들이 전적으로 선혜청에 의하여 조정되어 갔다.
그것은 대동법의 실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각 도와 군현들간의 유치미의 다과를 조절하고 대동세를 전국적 차원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에서의 수요가 날로 증대되자, 상납미의 수량만을 거듭 증가시켜 가는 방편으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치미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수령들은 선혜청의 양해 아래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고, 또 이를 기회로 갖가지 탐학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여기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가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될 정도로, 그 시행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대동법의 제정 자체가 지니는 의의나 그 실시가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재정사(財政史)의 측면에서는 잡다한 공(貢)·역(役)을 모두 전결세화하면서 정률(定率:1결당 쌀 12말)로 하고, 그 징수와 지급을 쌀로 하되, 무명이나 베 또는 화폐로도 대신하게 한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수취원(收取源)을 부(富)와 수입의 척도였던 전토에 일률적으로 집중시켜 수익과 담세(擔稅)를 직결시키는 과세상의 진보, 재산과 수익에 비례하는 공평한 조세체계로의 지향, 배부세주의(配賦稅主義)를 폐기하고 정률세주의(定率稅主義)를 채택하는 세제상의 진보 등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징수·지급을 당시 교역의 기준수단이었던 물품화폐(쌀·무명·베 등)나 화폐로 전환시켜 조세의 금납화(金納化)와 화폐재정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정부 소요물자를 공인·시인 등에게 조달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을 크게 촉진시켜 여러 산업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게 하고, 상품·화폐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상·공인층의 성장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와 사회체제가 이완·해체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조선 전기 농민이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온갖 세납(稅納), 즉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 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을 모두 전결세화(田結稅化:可食米)하여 1결(結)에 쌀[白米] 12말[斗]씩을 징수하고,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물품 및 역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입 사용하거나 고용 사역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1623년(인조 1) 강원도, 1651년(효종 2)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 전라도의 산군(山郡), 1666년 함경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어,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주도에는 그곳이 번속(藩屬)으로 여겨진 연유로 해서 실시되지 않았고, 또 평안도에는 민고(民庫)의 운영과 함께 1647년(인조 14)부터 별수법(別收法)이 시행되어 이미 대동법의 효과를 대신하고 있었던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국용의 기반을 전통적인 수취체제에 따라 전세(田稅)·공물·진상·잡세(雜稅)·잡역(雜役: 徭役) 등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 세납의 부과·징수에 따랐던 여러 가지 폐해와,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양반층의 토지점유 확대에 따른 농민층의 몰락은 이들 제도를 더 이상 존속시키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게 하였다.
부과기준이 모호하고 물품이 다양했던 공물상납제도(貢物上納制度:貢納制)에 있어 그러하였으니, 이미 16세기 초부터 그의 폐지·개혁이 논의되고 강구되는 실상을 보여 왔던 것이다.
공물·진상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하였고, 또 방납인(防納人)들의 이권이 개재되고 있었던 데서 쉽사리 개선되지도 못하였다.
일부 군현이 사대동(私大同)으로 일컬어지는 자구책(自救策), 즉 군현에 부과된 각종 경납물(京納物)을 관내 전토(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1결에 1말 또는 2말)을 가지고 구입·납부하는 방책을 스스로 마련하여 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납제의 개혁논의는 임진왜란을 겪기까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동안 개혁론의 주종을 이루어 온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주장과 위와 같은 사대동의 관행은 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부터 그 이듬해까지 정부로 하여금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잠시나마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왜란 후 국가기틀을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대동법의 제정·시행으로 이어졌다.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실시된 대공수미법은 각 군현에서 상납하던 모든 물품을 쌀로 환가(換價)하여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도내 전토에 고르게 부과·징수(대체로 1결에 쌀 2말)하게 하고, 이를 호조에서 수납하여 공물과 진상·방물(方物)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시급하였던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 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그 시행세칙[事目·事例]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수세전결(收稅田結)에서 1결당 쌀 16말씩을 부과·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에서 경납물의 구입비용으로 공인(貢人:주로 종래의 방납인)에게 주어 납품하게 하고, 나머지 2말은 수령(守令)에게 주어 그 군현의 공·사 경비로 쓰게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그리고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대동법의 확대실시는 이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이른바 남방토적(南方土賊)을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호란(胡亂)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세칙을 새롭게 수정, 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그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 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하는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앞서 실시된 경기도·강원도의 대동법도 이에 준하여 개정하니, 이에서 대동법은 선혜청(宣惠廳)의 관장 아래 하나의 통일된 재정제도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대동법이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군현별로 부과·징수를 상정하는 이른바 상정법(詳定法)의 특이한 규정을 두게 되었을 뿐이다.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납물의 전결세화(田結稅化)를 기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 부과는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하였고, 징수는 쌀을 수단으로 하였다.
수조안에 등록된 전결 가운데서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각종의 급복전(給復田)을 제외한 모든 전결에서 1결당 쌀 12말씩을 부과·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면부출세(免賦出稅)의 전결이나 면부면세(免賦免稅)의 전결, 예를 들면 궁방전(宮房田)·영둔전(營屯田)·아문둔전(衙門屯田)·관둔전(官屯田)·학전(學田) 등에는 대동세가 부과되지 않았고, 다만 아록전(衙祿田)과 공수전(公須田)에서만은 지방관아의 경비가 대동미에서 지급됨에 따라 대동세가 부과되었다.
부과된 대동세는 봄·가을로 6말씩 나누어 징수(뒷날에는 가을에 전액 징수함)하되, 산군에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같은 양의 잡곡이나 소정의 환가(換價)에 기준하여 무명[(綿布], 베[麻布], 화폐[錢]로 바꾸어 내게도 하였다.
무명이나 베로 납부할 경우에는 5승(升) 35척(尺)을 1필(疋)로 하였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쌀 5∼8말이었고, 화폐는 1냥(兩)에 쌀 3말 정도였다.
현종∼영조에 걸쳐 6도의 대동세액(大同稅額)이 12말로 통일되기까지는 지역에 따라 부과액과 징수액 방법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고, 상정법이 시행된 3도에서는 이 이후에도 다른 도와 매우 상이하였다. 이와 같이 징수된 대동세[大同米, 大同木, 大同錢]는 크게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상납미는 선혜청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 상납하던 원공(元貢:二十八司元貢物)·전공(田貢:田稅條貢物)·별공(別貢:別卜定貢物)·진상·방물(方物)·세폐(歲幣) 등의 구입비와 각종 잡세조(雜稅條) 공물·역가(役價)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유치미는 각 영(營)·읍(邑)에 보관하면서 그 영·읍의 관수(官需)·봉름(俸廩)·사객지공(使客支供)·쇄마·월과군기(月課軍器)·제수(祭需)·요역, 상납미의 운송, 향상(享上)의 의례(儀禮)를 존속시키는 뜻에서 설정된 약간의 종묘천신물(宗廟薦新物)과 진상물(進上物)의 상납 등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상납미의 지출은 선혜청이 직접 계(契)·전(廛)·기인(其人)·주인(主人) 등에게 선급(先給)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해당 관서에 책정된 액수를 주어 각 관서로 하여금 소정의 공인(貢人)에게 납품에 앞서 지급하게 하였고, 유치미의 지출은 영·읍의 관장(官長)이 용목별(用目別)로 책정된 경비 한도 내에서 월별로 나누어 적절히 쓰게 하되, 그 명세서를 매월 선혜청에 보고하게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사용 항목과 운영에 색다른 규정이 가하여지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이처럼 공납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또 면세전(免稅田)의 증가로 인한 세입의 감축과 영세 소작농의 증대로 인한 호역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한 수취제도이자 재정제도였다.
오늘날 이 법은 ‘봉건체제의 기본적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로서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제도’로 평가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순정성리학자(純正性理學者)들이 중국 3대(三代:夏·殷·周시대)의 이상사회, 즉 대동(大同)사회를 지향’하여 제정한 정전제(井田制)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김육(金堉)의 말에 따른다면 “농민은 전세와 대동세를 한 차례 납부하기만 하면 세납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오로지 농사에만 힘을 쓸 수 있는” 민생안전의 조치였고,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키고 고용증대도 가져올 수 있는 제도였으며, 국가는 국가대로 재정을 확보하면서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대동법은 점차 그 당초의 성과를 잃게 되었다.
원래 상납미는 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쌀 6말)로, 유치미는 가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6말)로 각각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17세기 말엽부터는 해마다 선혜청에서 수조반강(收租頒降:상납미의 소요 예상량을 산정한 다음에 각 군현에서 상납할 수량과 영·읍에 유치할 수량을 책정하여 주는 것)하는 제도가 생겨, 그 수량들이 전적으로 선혜청에 의하여 조정되어 갔다.
그것은 대동법의 실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각 도와 군현들간의 유치미의 다과를 조절하고 대동세를 전국적 차원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에서의 수요가 날로 증대되자, 상납미의 수량만을 거듭 증가시켜 가는 방편으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치미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수령들은 선혜청의 양해 아래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고, 또 이를 기회로 갖가지 탐학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여기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가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될 정도로, 그 시행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대동법의 제정 자체가 지니는 의의나 그 실시가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재정사(財政史)의 측면에서는 잡다한 공(貢)·역(役)을 모두 전결세화하면서 정률(定率:1결당 쌀 12말)로 하고, 그 징수와 지급을 쌀로 하되, 무명이나 베 또는 화폐로도 대신하게 한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수취원(收取源)을 부(富)와 수입의 척도였던 전토에 일률적으로 집중시켜 수익과 담세(擔稅)를 직결시키는 과세상의 진보, 재산과 수익에 비례하는 공평한 조세체계로의 지향, 배부세주의(配賦稅主義)를 폐기하고 정률세주의(定率稅主義)를 채택하는 세제상의 진보 등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징수·지급을 당시 교역의 기준수단이었던 물품화폐(쌀·무명·베 등)나 화폐로 전환시켜 조세의 금납화(金納化)와 화폐재정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정부 소요물자를 공인·시인 등에게 조달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을 크게 촉진시켜 여러 산업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게 하고, 상품·화폐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상·공인층의 성장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와 사회체제가 이완·해체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공납, Tributary System, A Tributary Payment , 貢納.
전근대 사회의 수취는 중국 당의 세제인 조·용·조(租庸調)를 골간으로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형을 보이는데 토지세인 조(租)와 역역동원(力役動員)인 용(庸)과 함께 수취체제의 중요한 구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공납으로서 조(調)였다.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공납제(貢納制)는 일찍부터 적용이 되어 국가의 녹봉이나 관부운영비, 각종 제사 비용, 외교비용, 전쟁·군비 등에 소요되는 각종 현물을 수취하였다.
당나라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중에서 개별 민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여 징수한 조(調)에 해당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소급된다고 하지만,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로 베[麻布]와 비단 같은 직물과 과실류를 바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949년(광종 즉위)에 각 주현에서 중앙정부에 내야 할 공물인 세공(歲貢)의 수를 정하였고, 1041년(정종 7)에 그 품목을 조정하였는데, 이때 세공으로 정해진 것은 쌀 ·조 ·황금 ·백은 ·베 ·명주 ·면포 ·백적동(白赤銅) ·철 ·소금 ·실 ·꿀 ·쇠가죽 ·쇠심줄[筋角] 등이었다. 1066년(문종 20) 해마다 일정하게 내는 상공(常貢)과 특산물을 수시로 내는 별공(別貢)으로 구분하였고, 쇠가죽 ·쇠심줄 같은 것은 쌀 ·베로 대신 납부할 수 있게 하였다.
상공은 미리 정해진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주현에 할당하여 왕실 ·궁원(宮院) 및 정부의 각 기관 등에 매년 납부하게 하였으며, 각 주현에서는 이 공물을 민호에게 분배하여 거두었다. 이때 민호는 남자 장정수를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누었다.
이 시기에는 상공보다도 수시로 별공을 거두면서 관리가 심하게 가렴주구하여 공납이 농민의 가장 큰 부담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전국 각 지방에 특수한 촌락인 소(所)를 설치하여 금 ·은 ·동 ·철 ·도자기 ·약재 ·해산물 ·말 ·종이 ·먹 등이나 특수한 수공업품을 제작하여 헌납하게 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에 마련된 공납제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1392년(태조 1) 10월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여 각 지방의 토산물을 기준으로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하고, 그 장부인 공안(貢案)을 마련하여 조선시대 공납제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이때 새로 제정된 공납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태종대에 들어와서이다.
조선 전기의 조세 제도는 크게 조세, 공납, 역으로 이뤄졌어요. 처음에 조세는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수확량의 10분의 1을 냈어요. 세종 대왕 때는 흉년에는 조금 내고 풍년에는 많이 내는 식으로 바뀌기도 했지요. 역은 몸으로 일을 해서 세금을 내는 거예요. 성을 쌓거나 도로를 정비하거나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걸로 세금을 내는 거지요.
백성들을 유독 힘들게 했던 세금은 공납이었어요. 공납은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중앙 정부에 바치는 것이었는데, 중앙에서 지방 관아에 부과하면 지방 관아는 백성들에게 배분해서 내게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부과하다 보니 지방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예요. 기후 환경이나 여러 상황 때문에 특산물이 나지 않으면 백성들은 매우 곤란해졌어요.
한 포수의 이야기가 전해저오는데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깔개 1개를 공납으로 바쳐야 하는 포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수가 사는 지역에서는 더 이상 호랑이가 잡히지 않았고, 포수는 공납을 바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때 관청의 서리가 이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호랑이 가죽 깔개를 대신 내 주는 대가로 포수에게 무명 200필을 요구했다. 무명 200필은 호랑이 가죽 깔개 몇 개를 살 수 있는 양이었지만 포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서리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공납의 폐해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공납 때문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자신이 내야 하는 공물을 이웃이나 친척에게 미뤄 버리고 도망을 갔는데, 그런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이러다 보니 백성들은 힘들고, 국가 수입은 감소되고,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상황이 되었다.
1408년(태종 8) 9월에 제주, 1413년 11월에 함경 ·평안도에서 내야 할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함으로써 전국에 걸친 공납제가 마련되었다. 각 지방의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할 때는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그 지방의 생산물로 부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중앙정부의 1년 경비를 참작하도록 하였다. 남자 장정수를 기준으로 공물을 부과하던 것이, 고려 말, 조선 초 농사기술의 발달로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경작할 수 있게 되고 농업생산력도 크게 증대되면서, 보다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한다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공납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먼저 중앙정부에서 각 군현에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장부인 공안을 보내면 각 지방에서는 부과된 공물을 백성에게 직접 징수하거나 향리 장인(匠人) 및 지방관청 소속 노비 또는 상번한 군사 등을 사역하여 마련하였다. 대개 민간에서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직물류 ·수산물 ·과실류 ·목재류 등은 일반 백성이 내게 하고, 모피류 ·수육류 및 재배해야 하는 약재 등은 지방관청에서 마련하여 공물 상납하는 일을 맡는 하급관리인 공리(貢吏)에게 정부의 관청에 직접 내게 하였다.
그뒤 세조 ·성종 연간에 여러 차례 공안을 개정하였고, 세조대에 국가의 지출명세서인 횡간(橫看)을 제정함으로써 조선 초기 공납제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성종대에는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공납과정에서의 중앙관청 관리의 농간을 제거하고자 공납제를 일부 개선하였다.
정비된 공납제는 그 제도 및 운영과정에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였다. 공물의 품목과 수량이 장기적으로 고정되어, 다음해의 것을 앞당겨 징수하는 인납(引納) 및 본래의 용도와 달리 사용하는 별용(別用) 등이 이루어졌고, 또한 여기에 별공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공물로 지정되기도 하여, 심한 경우에는 산간지대에 해산물을 배당하거나, 평야지대에 사냥한 짐승과 그 가죽 등을 배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공안의 개정을 통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조정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다.
이 밖에 공물을 상납하는 과정에서 관리가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그 지방에서 마련한 공물을 받지 않거나[點退], 관리와 상인이 결탁하여 대신 납부하고 농민으로부터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防納] 등의 비리행위가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못하였고, 그 뒤 선조대에 이이(李珥)가 공물을 쌀로 대신 거두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본래 현물을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공납제는 자연경제가 지배적인 전근대사회에서 국가재정 및 지배계층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공업의 일정한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면서도 아직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미숙한 단계에서 실시되다가, 상품화폐경제가 어느 정도 발달한 16세기에 가서는 공물을 당시 교역의 수단이던 물품화폐, 즉 쌀 ·베로 거두는 대동법(大同法)으로 전환되었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 부체제(部體制) 단계의 수취제도는 공납제에 기초하였다. 고대사회에서 공납은 정치체의 수장이 수확제에서 천신(天神)이나 농업신(農業神)을 제향(祭享)할 때 처음 수확한 곡물을 바치던 전통에서 기원하였고 공여된 공납물은 원칙적으로 공동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공공의 비용으로 소비되었다고 한다. 공납의 부과는 곡식이나 포 또는 각 지역의 특산물로서 각부 단위로 부담이 지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주변 부속세력에 대한 수취는 아마도 종래의 지배자를 대표로 하여 집단의 생산력과 인구수를 감안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공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인(人)’을 단위로 곡식을 내는 조(租)와 명주·베 등으로 내는 조(調)가 있었고 ‘유인(遊人)’은 따로 3년에 한번 10명이 함께 베를 내는 조(調)를 부담하였으며 3등호로 구분되어 차등 징수된 조(租)는 ‘인(人)’ 또는 ‘유인(遊人)’에게 부과된 호조(戶調)이거나 ‘유인’이 부담하는 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공납은 조(租)로서 쌀을 거두고, 조(調)로서 베·견사·삼베 등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고구려의 ‘유인’과 같이 ‘인(人)’과 구별되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수취 방식은 대체로 고구려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비시기에 접어들어 지방제도가 재정비됨에 따라, 조(租)·조(調)를 부과하고 수취·운송·보관하는 과정은 군(郡)·성(城)·촌(村)의 단계로 내려가면서 단계적으로 할당되어 최종적으로 개별 가호(家戶)에게 거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경우는 공물 납부를 보여주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구려·백제와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의 조(調)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공물은 공연(孔烟) 단위로 명주[絹], 베[布] 등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뽕나무·잣나무·가래나무 등의 그루 수와 3년 사이에 더 심거나 죽은 나무 수의 내역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조(調)의 수취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 촌마다 설정되어 공동으로 경작했던 마전(麻田)에서 생산된 삼[麻]도 조(調)로 수취되었다. 한편『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도 여러 종류의 비단, 실, 우황, 인삼, 가발,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의 명주, 바다표범 가죽, 금, 은, 개, 소금, 기름 등이 보이는데, 이들 품목 또한 각 지역의 특산물로서 조(調)의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호, 즉 공연 단위로 수취한 조(調)의 부과 기준은 확실하지 않지만 공연이 9등호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공연의 등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뉘어 차별적으로 징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신라 국가에서는 각 촌에 포함된 공연의 등급을 합하여 그 촌의 경제적 능력을 합산해낸 계연(計烟)을 토대로 촌마다 조(調)를 할당해서 부과하고, 촌에서는 각 공연 별로 호등의 등급만큼 거두어들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호등이 높은 지배층이 많은 양의 조(調)를 부담해야만 했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이러한 수취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즉 공연의 호등에 관계없이 각 공연마다 같은 액수의 공물이 부과되었다거나, 호등별로 차등을 두어 징수하더라도 그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기본세는 조(租)·포(布)·역(役) 삼세(三稅)인데 국가에서는 이 삼세를 군현 단위로 전부·공물·역의 형태로 징수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이러한 기본세목 이외에 상요(常徭)·잡공(雜貢)을 비롯하여 치탄공(雉炭貢)·염세포(鹽稅布)·직세(職稅)·선세(船稅)·어량세(魚梁稅) 등의 잡세(雜稅)가 보인다. 그 중 잡공은 조(調)의 명목으로, 상요는 역(庸)의 명목으로 부가된 현물세였다. 고려의 공납은 대체로 군현 내 농민들이 조·용·조 삼세를 기본으로 충당되는 현물세공으로 인식되었다.
고려전기의 수취는 대체로 일세일공(一歲一貢)하던 상공(常貢)과 아울러 부정기적으로 징수되던 별공(別貢)이 있었는데 일반 군현민에게는 조(租)·포(調)·역(庸) 삼세를 부과한 반면 부곡민(部曲民)에게는 삼세 이외에 특수한 역이 부과되었다. 공납은 일반 군현민이 부담하고 있었던 현물세와 부곡 지역민의 납공물로 이루어졌다. 1041년(정종 7) 정월 주부의 세공액을 정한 사료에 의하면, 각 군현의 한 해 납공물은 미(米) 300석(碩), 조(租) 400곡(斛), 황금 11냥, 백은(白銀) 2근, 포(布) 50필, 철 300근, 소금 300석, 사면(絲綿) 40근, 유밀(油蜜) 1석으로 규정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 군현 내의 농민이 부담할 수 있는 품목은 미곡과 포류(布類) 정도였고 나머지는 소[所:수공업을 전담하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거주지]의 거주민이 납공하고 있던 각종 전업적 생산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요컨대 고려전기 공물은 군현민의 포류와 소의 산물을 일세일공하게 되어 있었던 상공과 그밖에 필요에 따라 불시에 각종 물품이 부과되던 별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공납제는 12∼13세기에 걸친 지배체제의 동요, 전시과(田柴科)의 붕괴, 군현제의 변화 등 사회변동과 장기간의 몽고 침략을 배경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고려전기 기본 수취 항목이었던 조·포·역 삼세는 고종(高宗) 이후로 삼세(三稅)·상요(常徭)·잡공(雜貢)으로 개편된다. 삼세의 경우 이를 일반적 부세로서 조·용·조 삼세로 보는 견해와 단순히 전조(田租)로 보는 견해가 있고 상요와 잡공에 대해서도 이를 고려 전시기를 통해 공부(貢賦)를 구성하고 있었던 현물세로 보는 견해와 고려후기 어느 시점에 삼세 외에 부가된 현물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대체로 삼세는 조·용·조를, 상요·잡공은 그 외의 부가세였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므로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전기의 조·용·조가 삼세로 통합되고 상요·잡공이 부가세로서 함께 부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상요는 대개 잡공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력내지는 공역(貢役)의 물납화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잡공은 조선시대 토공(土貢)과 동일한 실체로서 그 품목은 대체로 자연채취물이나 수공업제품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요와 잡공이 함께 부과된 배경에는 12세기 이후 군현제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전국적인 부곡제(部曲制) 해체 현상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부곡지역의 광범위한 해체현상은 군현단위의 정액수취를 원칙으로 하였던 수취제의 특성상 과거에 소(所)로부터 충당되던 각종 전업적 산물이나 부곡지역이 지던 특수한 역을 일반 군현에 부과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토지를 매개로 조·용·조를 수취하고 잡공이라는 명목으로 과거 소에서 납공하던 물품의 대부분을 일반 군현민에게 함께 부과함에 따라 공물수취는 공부와 잡공체계로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군현민의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공물의 비롯한 현물세의 대납(代納)이 일반화된 것 역시 고려후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중기부터 나타나며 원간섭기(元干涉期)에 접어들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각사(各司)의 공물을 비롯하여 양창(兩倉)의 녹전(祿轉)까지도 대납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아가 방납(防納)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공물대납의 문제는 공물수납 과정의 문제점에서 야기된 것으로 그것은 당시의 국가 및 지방의 재정상황, 상업·수공업의 발달, 상인층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고려 말에는 공물의 대납이 더욱 성행하였고 이로 인한 폐단이 심해졌는데 국가에서는 공물대납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상평제용고(常平濟用庫)의 설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공납은 지방의 행정조직을 통하여 촌락 농민에게 분정(分定), 수취되었다. 실제 수취과정은 군현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군현, 군현에서 촌락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군현이 소관 촌락 내의 납공물을 수취하여 중앙으로 상납하는 중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수취된 군현의 각종 공물은 조운(漕運)에 의해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운반되었다.
4) 조선시대
조선왕조의 공물은 공안(貢案)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 이외에 수요가 발생할 때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이 있었음은 고려와 마찬가지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공물의 내역은 농업생산물을 비롯하여 가내수공업제품, 해산물, 과실류, 광산물, 조수류 등이 망라되어 있다. 공물의 부과는 해당지역의 결수(結數)와 호구수(戶口數)가 참작되었지만 그 기준은 분명하지 않았고, 수취과정도 지방관과 향리(鄕吏)에 맡겨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한편 진상(進上)은 국왕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예헌(禮獻)’의 방식으로 상납하는 것으로서 공물과 마찬가지로 군현 단위로 배정되어 민호에 부과되었다.
공물과 진상은 관에서 마련하는 것(官備)과 민호가 갖추어내는 것(民備)이 있었는데 민호의 부담으로 돌아오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물·진상은 그 자체의 부담뿐 아니라 운반·수송에 소요되는 노동력도 요역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다. 그 부과도 지역의 산물을 배정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한번 공물로 정해져서 공안에 오르면 이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를 구하기 어려울 경우 상납물품을 구입하여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이 공물의 대리납부, 즉 방납(防納)을 가져왔다. 상인이나 하급관리, 권세가 등은 방납구조에 기생하여 폭리를 취하였고 그 반대편에는 소농민(小農民)의 몰락이 이어졌다.
공납제 개혁문제가 조야의 중대현안으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이 공물을 쌀로 대납하는 방안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방 차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여 공물가격을 미곡의 형태로 수취하여 방납을 통해 납부하는 관행이 확산되었는데 이를 사대동(私大同)이라 한다. 대동법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대동의 관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이었다. 대동법의 선구적 형태는 임란중인 1594년(선조27) 군량조달을 목적으로 유성룡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채택된 ‘대공수미법’이었다.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李元翼) 등의 건의로 경기지역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충청·전라·경상도 등으로 확대되어 1708년(숙종34)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되었다. 남부지역과는 달리 함경·강원·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 평안도에는 수미법(收米法)이 채택되었는데 본질적으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다.
대동법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어났고 그 시행도 1세기가 소요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세화(地稅化)된 대동을 부담해야 하는 지주층과 방납구조에 기생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던 방납인들의 반대가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전(量田)의 미비로 토지파악도 충실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동법은 가호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진상·잡역 부담의 상당 부분을 토지세로 편입시킨 것으로써 방납의 폐단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에 직면하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재정 및 수취제도 개혁이었다. 대동미는 대략 결당 12두 정도였는데 미곡의 생산이 적은 지역은 전(錢)·목(木) 등으로 대납(代納)하기도 했다. 선혜청(宣惠廳)은 각처에서 대동미·대동목·대동전을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물·진상의 상당 부분이 지세화 하였으며 각종 역역(力役)의 물납화(物納化)·금납화(金納化)를 촉진하였다. 국가재정도 상대적으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종래 방납인에서 합법적인 공물납부 청부인으로 떠오른 공인층은 대상인(大商人)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는 상업과 수공업 분야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합된 대동미는 처음에는 유치미(留置米)의 명목으로 지방관아의 경비로 절반이 비축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상납되었으나 18세기 이후 중앙재정의 수요 증가로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지방유치분이 감소하는 추세가 급격히 진행된다. 이는 이후 지방재정의 곤란을 초래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 시대 공납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바치는 제도. 공납이란 농민들이 각 지방의 특산물을 민호(民戶)를 기준으로 현물로 납부하는 제도이다. 공납의 문제점은 수송과 저장의 어려움, 부과의 불공평, 생산되지 않는 품목을 부과하는 것, 방납의 폐단 등이다. 16세기에 이이와 유성룡 등은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납부하는 수미법을 주장하였으나 정책으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이후 1608년 광해군 때 이원익의 건의에 의해 공납을 쌀로 받는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실시되었고, 1708년 숙종 때 전국에 걸쳐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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