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7일 토요일

분열의 역사, 이슬람 국가,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분열의 역사, 갈등의 원인, 이슬람 국가,
이슬람 국가의 대표적인 두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 차이,
아랍 내부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무려 1400년간을 싸우고 있다지만, 지금처럼 수니파와 시아파가 극렬하게 분열된 것은 그리 오랜 역사는 아닙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역사적 분열 원인은 최근에 더욱 불거진 일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두 종교의 접경에서 이웃 간에도 총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왜 있나???
옛날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이 있었지만, 이렇게 극한 대립이 생긴 건 근대의 일입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 초에 이란은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강경 시아파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때 미국은 이란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수니파인 이라크에 무기를 대주며 이란, 이라크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랍엔 무기가 넘쳐났고 이라크는 최강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수니파 정권이었는데 시아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1400년을 싸우는 수니파에 시아파의 차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600년 초에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마호메트)가 죽으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하고, 한쪽은 혈통에 의해 지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수인 수니파의 주장대로 선출직으로 칼리프가 뽑혔습니다. 그러다가 3대 칼리프가 암살되고 시아파의 주장대로 무하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알리와 가족들은 수니파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소수인 시아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인 수니파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700년대의 아바스 왕조, 1500년대 초의 사파위 왕조에서나 시아파가 권력을 잡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중앙아시아에서 돌궐족이라 부르던 투르크족이 아랍으로 들어와, 13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열며 수니파와 시아파를 고루 등용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900년대까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다소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열강의 아랍 간섭에 의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용당했고, 그 상처가 곪아서 결국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이 터진 것입니다

1400년을 싸우는 종교적 시각에서~수니파에 시아파의 차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는 600년대 무하마드의 후계자 결정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4억이 넘는 아랍권 이슬람인들 중 90%는 수니파입니다. 나머지 10%인 시아파는 주로 이란과 남부 이라크에 몰려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시각입니다.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혈통에 의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니파는 자격이 있다면, 능력 있는 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니파는 외국인 칼리프까지도 수용하였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정신적 지도자인 "이맘"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있습니다. 수니파의 이맘은 기독교에서의 목사처럼 자격을 갖추면 예배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아파의 이맘은 수십 년의 수행기간을 거쳐 종교적 완성을 이룬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훨씬 엄격합니다. 그래서 수니파 이슬람은 다양한 지역적 관습과 사상도 받아들고, 시아파 이슬람은 전통적인 종교원리를 고수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수니파가 온건파이고 시아파가 강경파인데 반해,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IS는 수니파이면서 강경파입니다. 이들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축출된 과거 이라크 정권 지지자가 많습니다. 더불어, 시리아 등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이란이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불거진 분열이기도 합니다.
옛날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이 있었지만, 이렇게 극한 대립이 생긴 건 근대의 일입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 초에 이란은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강경 시아파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중동 이슬람의 수니파, 시아파 분포도,

미국은 이란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수니파인 이라크에 무기를 대주며 이란, 이라크 전쟁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랍엔 무기가 넘쳐났고 이라크는 최강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수니파 정권이었는데 시아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나중에는 국제정세가 변하여 이라크의 후세인은 미국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두 번의 걸프전을 일으켜 수니파인 후세인을 축출했습니다. 이런 여파로 이라크의 다음 정권은 시아파에게 돌아갔습니다. 경쟁상대인 이라크가 사라지자, 이란은 아랍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의 갈등은 외세, 강대국의 잘못도 크다,

이란은 이라크와 시리아 등의 시아파에게 원조를 했습니다. 이라크는 이란과 가까운 쪽에는 시아파 정권이, 먼 쪽에는 수니파인 IS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시아파는 소수입니다. 다수인 수니파 입장에서는 소수 시아파 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을 쥐고 수니파를 탄압한다고 느끼기에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600년 초에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무하마드(마호메트)가 죽으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하고, 한쪽은 혈통에 의해 지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졌습니다. 



수니파, 시아파 분열의 기원으로 보는 4대 칼리프 알리,

처음에는 다수인 수니파의 주장대로 선출직으로 칼리프가 뽑혔습니다. 그러다가 3대 칼리프가 암살되고 시아파의 주장대로 무하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알리와 가족들은 수니파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소수인 시아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인 수니파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700년대의 아바스 왕조, 1500년대 초의 사파위 왕조에서나 시아파가 권력을 잡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IS는 시아파에 밀려난 수니파 중 과격 테러단체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돌궐족이라 부르던 투르크족이 아랍으로 들어와, 13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열며 수니파와 시아파를 고루 등용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1900년대까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다소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열강의 아랍 간섭에 의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용당했고, 그 상처가 곪아서 결국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이 터진 것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는 600년대 무하마드의 후계자 결정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4억이 넘는 아랍권 이슬람인들 중 90%는 수니파입니다. 나머지 10%인 시아파는 주로 이란과 남부 이라크에 몰려 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시각입니다. 시아파는 무하마드의 정통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혈통에 의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니파는 자격이 있다면, 능력 있는 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수니파는 외국인 칼리프까지도 수용하였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정신적 지도자인 "이맘"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있습니다. 수니파의 이맘은 기독교에서의 목사처럼 자격을 갖추면 예배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아파의 이맘은 수십 년의 수행기간을 거쳐 종교적 완성을 이룬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훨씬 엄격합니다. 그래서 수니파 이슬람은 다양한 지역적 관습과 사상도 받아들고, 시아파 이슬람은 전통적인 종교원리를 고수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수니파가 온건파이고 시아파가 강경파인데 반해,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인 IS는 수니파이면서 강경파입니다. 이들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축출된 과거 이라크 정권 지지자가 많습니다. 더불어, 시리아 등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이란이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불거진 분열이기도 합니다. 이라크 북부의 강경한 IS는 수니파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아파가 강경하고 호전적인 이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이슬람교의 두종파 수니파와 시아파는1 400년째 극 갈등과 분쟁 대립
1).이슬람교의 칼리프(통치자)의 후계의 계승 갈등과 분쟁
(1).AD.610년. 이슬람교 창시
①AD.570년 무함마트 마호메트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서 태어났다
②AD.610년-AD.632년 창시자 예언자 무함마드 마호메트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서 이슬람 종교를 창시
③AD.632년 이슬람 창시자 이자 예언자였던 무함마드 마호메트가 사망하면서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표면화 되었던 갈등이 오늘날까지 1400년가 지속 되었다

④수니파(비혈통 선출제)와 시아파(혈통 세습제)는 이슬람 국가을 대표하는 이슬람교의 두종파이다,
이러한 이슬람 종교 두종파의 분열과 갈등은,
⑤창시자가 사망한후 가장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칼리프(통치자)의 후계의 계승과 관련된 문제였다
⑥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혈통의 세습으로 후계자 주장하는 소수는 숫자적으로 열세인 친척 이루어진 소수의 측근들이였으며 (훗날 시아파),
⑦다수인 이슬람교을 이끌고 가는 비 혈통의 능력의 후계자 합의로 선출된 다수와의 분쟁으로 (훗날 수니파)
그 결과 두 파벌이 분리 되었고,
⑧오늘날까지 1400년간 중동 이슬람 국가간에 이 두종파 분쟁의 갈등으로 대립하였다   

(2).종교와 통치를 겸한 이슬람교 칼리프 (통치자)의 후계구도의 두 파벌 (선출제 비혈통과 세습제 혈통)
①AD.632년 당시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자녀는 딸들만 있었고 후계자에 대한 유언이 없이 사망하자
②당시 마호메트 친척들의 소수는 혈육의 세습제로 혈족인 조카이자 사위를 후계자로 추대를 주장하였지만 (훗날 시아파로 분류된 종파)
③마호메트 측근의 다수의 여론(비혈통)에 밀려
④당시 이슬람 공동체의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슈라(최초의 이슬람교 의회 제도)는 이즈마 (합의)를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였습니다
⑤코란과 하디스에 의하면 이렇게 선출된 지도자 후계자가 되었다
⑥결국 1대에는만장일치로 선출된 후계자는 비혈통계 무함마드 마호메트의 측근이자 친구이자 연장자였던 아부바르크가 선출 되었습니다
⑦ 1대.2대. 3대.(AD.632년 -AD.656년)  후계자까지는 비혈통계의 능력자 위주의 칼리프가 선출 되었다
⑧4대 (AD.656년-AD.661년)이르러 마호메트 혈통인 조카이자 사위인 알 리가 선출하게 되었다
⑨이로써 무함마드 사후 슈라 의회에서 합의 된 1대부터 4대까지 공식 선출되여 이른바 정통 칼리프 후계자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⑩그러나 마호메트 사후 서서히 두파가   존재하기 시작 하였다, 즉 1대 .2대 .3대까지는 비혈통계에서 칼리프가 선출 되었고 4대에 이르러 마지막    혈통인     알 리가 선출 되었다  

(4).이슬람교 칼리프 정통성 시대
①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 AD.610년-AD.632년 창시자
②1대 아부 바르크 AD.632년-AD.634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③2대 오마르        AD.634년-AD.644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④3대 오스만         AD.644년-AD.656년 수니파 (선출 비혈통)
⑤4대 알리           AD.656년-AD.661년 시아파 (선출     혈통)  

2). 이슬람 교의 칼리프의 직위를 두고 세습제 (혈통계)와 선출제 (비혈통)
(1).4대 선출된 (혈통계) 알리의 칼리프 선출
①이슬람교의 불행은 4대 알 리가 칼리프로 선출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②권력이나 정권 쟁탈의 살해와 음모가 그렇듯이
③마호메트 마지막 혈통인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는 마호메트 측근의 다수세력에 밀려 그 동안  1대-3대까지 칼리프에 오르지 못했다
④그동안 1대에서 2대에서 3대까지 계속적으로 다수의 세력에 밀려 선출되지 못하였고
⑤끝내 4대째에 이르러 긴신히 칼리프에  합의로  선출 되었다  

(2).4대 선출된 알리 칼리프의 혈통 중심이 되자   다수의 비혈통계 반란
이때 알리의 칼리프 선출에 불복한 세력들이 봉기하여 이슬람 제국은 결국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내전 도중 칼리프인 알 리가 반란군에 질질 끌려다니다 분노한 신하가 알리를 암살하였고
②이슬람교 4대 칼리프에 오른 알리는 세력을 규합하여 칼리프(혈통계) 세습제을 하려는 움직임 보였고
⑤그 동안 비혈통계의 칼리프에 올랐던 세력들은 막강하였고
⑥4대 현직의 알리 칼리프 세력에 밀려 세습제에 의한 입지가 좁아질수 있는 위험을 느낀 다수의 세력들은(비혈통계 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추종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⑦그리고 세습제를 추진하고 있는 혈통계 4대 칼리프 알리를 암살합니다

(3).이슬람 종교 두 파벌의 탄생
①4대 칼리프 마지막 마호메트의 혈통인 알 리가 (시아파)
②1대 2대 3대 칼리프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에 (수니파) 의해암살을 당합니다
③마호메트 마지막 혈통인 4대 칼리프 알리의 두아들중 한명도 (시아파)
④ 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측근의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에 (수니파)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⑤혈통계 4대 칼리프 알리의 차남은 (시아파)
⑥1대 2대 3대 전직 칼리프 측근의 비혈통계 다수의 세력 (수니파)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 하게 되지요
⑦이로서 마호메트 혈통의 칼리프계를 추종하는 시아파와
비혈통의 칼리프계의 다수의 세력(수니파)으로 분리 됩니다
⑨그러나 이슬람교 두종파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여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는 계기 됩니다
⑩AD.661년 4대 칼리프 알리 죽음은 그야 말로 창시자 무함마드 직손의 혈통이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⑪그러므로 시아파의 혈통 중심의 통치 적임자는 이땅에서 사라지며 오늘날 이란과 몇몇 부족 만이 간신히 그명맥을 유지하며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⑫ AD.661년 서서히 이슬람제국이 탄생과 팽창을 하며 수니파의 세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4).이슬람 종교 두 파벌의 탄생
①4대째  칼리프 마지막 마호메트의 혈통인 알 리가 (시아파) 신하에 의해
⑩AD.661년 4대 칼리프 알리와 두자녀의  죽음은 그야 말로 창시자 무함마드 직손의 혈통이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⑪그러므로 시아파의 혈통 중심의 통치 적임자는 이땅에서 사라지며 오늘날 이란과 몇몇 부족 만이 간신히 그명맥을 유지하며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⑫ AD.661년 이후 급격히 이슬람제국이 탄생과 팽창을 하며 수니파의 세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5).시아파(혈통계 세습제)와 수니파 (비혈통계의 선출제)
①한에 맺힌 시아파 는 창시자 모함마드 마호메트사후 혈통의 4대 알리 칼리프만이혈통으로  시아파의 원조로 인정할뿐입니다
②그러나 수니파는 합의 의한 선출된 1대-4대 칼리프 모두 (비혈통과 혈통)정통성을 인정합니다
③시아파와 수니파 에서는 창시자 무함마드 마호메트와의 시작으로
12대의 12명의 이맘(종교 지도자)을 추종하는 이란를 비롯하여 대부분과 이라크 이스람교에는 이맘으로 불리우는 이슬람 종교자로 (이란의 호메니옹은 이맘 종교지도자로 모든 권력을 함께 쥐고 있었습니다    

3).이슬람교 종파적 특징
(1).수니파 특징 (비혈통 .능력제 합의 선출 )
①수니파의 대표적인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
②수니파 문자적으로 무함마드의 언행. 관행(수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무슬림 정통파이지만 중동 인구 90%을 차지하는 다수파
③수니파에서의 이맘은 단순히 종교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에 불과 하며 이맘이 될수 있는 자격 또한 별다른 특별함이 없습니다

(2).시아파 특징(혈통 세습. 종교적 이맘(지도자)의 강력한 권위 )
①시아파의 대표적인 나라는 이란
②시아파의 명칭의 기원은 마호메트의 혈통인 칼리프 4대 알리만를 추종하는 사람들 (쉬아트 알리)에서 유래 했으며
③시아파에서의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신성한 존재입니다
④또한 실수를 할수 없는 초인적인 존재로서 이슬람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종교는 물론 정치와 사법권의 모든 소유함을 뜻합니다
⑤(시아파의 이맘이였던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란을 종교을 강화 하였다 )   

(3).IS 수니파 원리주의 (이슬람 정통파)
①IS (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을 어느 관점으로 보십니까 코란과 이슬람의 원리주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행위가 알라 앞에서 정당한것입니다
②IS (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들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2014년6월29일 이슬람국가로 개명한 단체로 그해 6월부터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③서방세계에서는 이들의 약탈 경제와 전쟁 파괴등은 이슬람을 위한 종교 전쟁으로 이를 이슬람전체의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럽은 오랜 역사관으로 동행한 이슬람교을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③그러나 이슬람을 모르는 또 다른 세계 시각에서는 IS 이슬람은 변질된 이슬람이므로 별개이다라며 평화의  이슬람 모습이 아니다라 하지만 이는 이슬람을 전혀 모르는 시각에서입니다
④IS 이슬람 국가의 모습은 이슬람교의 진정한 참 모습이며 정통의 이슬람의 원리주의입니다
⑤그들의 무자비한 처형과 테러 이유의 근거 코란에 기록에 따른 율법을 따른 원칙과 알라의 뜻으로 고수하는 수니파의 원리주의자이며 실제적 이슬람국가을 이룩하려는 정통의 이슬람 국가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2).오늘날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  
(1).이슬람 종교의 두 파벌 .1400년간 싸우는 시아파(혈통 세습)와
수니파 (비혈통 .능력의 선출 )
①오늘날에 들어서면서 수니파의 대표적인 이슬람국가 사우디 아라비아가 자국의 반대 종파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면서 시작된 중동위기가 연일 격화가 되었습니다
②철저한 시아파 대표적인 이란에서 크게 반발하면서
이슬람국가간에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의 분쟁은 역사적으로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③이러한 두종파의 갈등은 AD.632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예언자가 사망하면서 훗날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서 죽어 버립니다
④(비혈통 선출)수니파와 시아파(혈통의 세습제)의 권력구조의 갈등의 본격적 분쟁의 시작은
창시자 마호메트 사후부터 시작 됩니다
⑤마호메트가 사망하자 다수 비혈통 세력들이 소수 혈통의 알리 세력들을 누르며
칼리프 1대 2대 3대를 비혈통들이 선출 하여 통치 했습니다
⑥문제는 4대째 오른 마지막 혈통 알 리가 칼리프에 오릅니다
⑦반란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⑧1대 2대 3대 전임 칼리프 측근의 다수 세력 비혈통의 다수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⑨AD.631년 마호메트의 마지막 혈통 조카이자 사위 였던 4대 칼리프 였던 알리와 큰아들 장남을 암살하고 둘째 아들은 전사시키며 (시아파) 마호메트 혈통을 모두 제거 해버립니다
반란에 성공한 비혈통의 다수의 세력들이 (수니파) 등장하면서부터 종파로 분열 됩니다
역사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와 분쟁은 1400년이나 지속하여 이런 갈등을 겪어 왔고 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종교 갈등과 복잡이해 관계 얽히고 설킨 문제였습니다
중동을 이해하는데 이슬람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되고 이 두종파는 꼭필요합니다  

(2).시아파 종주국.  이란,
오늘날 시아파 국가 이란에서는 무함메트 마지막 혈통 알리와 그의 아들의 순교한 순교일
①오늘날 이란은 마지막 혈통의 알리와 장남 후세인  순교일에 가두시위를 하며 슬퍼하며 울고 불고 자신들을 자악하며 순교를 슬퍼합니다
②이란의 시아파 국가에서는 순교일에 마호메트 유일한 혈통 알 리와 장남 후세인이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시아파는 아직도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4대 칼리프인 알 리와 장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③아직도 마지막 혈통  알리가 언제가 돌아온다며 암살자인  수니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④시아파는 이 때부터 지역적으로 따로 떨어져나가며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⑤1400전에 일로 이후 1400년간 계속 갈등하고 있다가 유럽의 열강에 의해 나라별로 갈라졌다고 그 시아파의 대표국가 이란입니다
⑥이란에 가까운 이라크는 시아파가 75% 나머지는 수니파 였으며 후세인은 수니파로 수니파가 정권을 잡았으나 미국에 의해 현제는 시아파가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⑦이슬람 종교의 같은 뿌리는 통치자 권력 칼리프의 세력의 분쟁이 서로 다른 종교 신념으로 수니파와 시아파는 영원히 두 종파로 분리 되었습니다   

(3).중동 이슬람 국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분포
①수니파-사우디 아라비아 . 오만.예멘 . 소말리아 .리비아 . 시리아.터키.요르단.이집트.수단 .차드.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②시아파-이란. 이라크 .바레인 .레바논. 예멘(남)
③수니파의 대표적인 나라가 사우디 아라비아 는 두 성지-메카.메디아. 메카에 카바 신전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성지이기도 하다
④동남아 필리핀 등 먼거리 국가들은 모두다 수니파 종파이다  

(4).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표적인 종교 갈등 사건 전쟁은 어떤 것이 존재 한가 (전쟁에 이용되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
①이슬람교 두 종파의 양대 주요 세력들이 집권세력들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싶을 때 항상 종교 분쟁이라는 카드를 쓰는데 그것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있습니다
②이라크는 표면상 시아파 다수지역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정부는 사담 후세인 소수의 수니파가 이라크정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③전쟁후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지배 하면서 시아파 정부가 되었지만 (그전에 후세인 수니파 정부였다 )
④1차 이라크 전쟁은 쿠웨이트 침공도 역시 소수 정권 후세인 수니파가 시아파 국가를 침공하였다
⑤전쟁과 분쟁이 일어날때마다 먼저 수니아파와 시아파가 등장하게 된다 항시 반대 종파가 먼저 일순위가 된다
⑥시리아 내전에도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반군으로 종파가 대두된다
⑦예멘 내전에도 수니파 정권과 시아파 반군 으로 두 종파가 대두 되여 지역 절반으로 나누어져 남.북 예멘 두정부가 됩니다,

3).국제적 경쟁을 종파 갈등으로 변질시켜 종파적 자존심을 추락시키는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 아라비아
(1).중동의 패권과 두종파와 미국과의 관계,
①사우디 아라비아(수니파)는 이란(시아파)을 견제 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이전에 이라크(수니파)를 지원하는 측면도 있었고 경제 대국 미국과의 우방국가의 관계을 지속하면서 중동에서 패권을 쥐고 있었다
②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적 이슬람교 수니파 85%이상) 수니파 종주국이였다
③모든 중동의 국가들은 경제 대국 미국과 유럽을 싫어하고 배척하였지만  
④미국과 사우디와 경제적 관계와 우호관계에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⑤그 이유는 사우디 대국으로 원조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였고 사우디 아라비아 세력이 경제적으로 크기 때문이였고 미국이 이란의 핵 보유를 제지 하고 이란을 견제하는 역활을 사우디와 공동으로 함으로 사우디가 중동의 패권 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우호 적인 관계가 되여야 하기 때문이였다  
⑥사우디는 세계 수니파의 종주국으로 중동에서 패권을 쥐고 이슬람국가들을 견제를 하였다
⑦특히 사우디 아라비아가 견제 하는 중동국은 특히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눈에 가시였다 
시아파 이란은  핵을 보유하여 수니파 사우디를 제치고  중동의 패권을 시아파의 세력으로 장악하려 하기에
사우디는 이란을 아주 아주 많이 미워했다 거기다가 화확무기 .핵을 만든다고 설치고 다니니 한마디 소화가 안되었다

(2).사우디는 이란과 미국과의 국제적 우호 관계가 성립되려 하자 슬며시 부하가 치밀자 이란의 시아파 종주국의 종교 자존심을 밟아버렸다
사우디는중동국가중에   미국과는 오래동안 제일  좋은 관계로 우방으로 유지하면서 중동의 패권을 잡았다  
그동안 사우디(수니파)는 이란(시아파)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라크 전쟁 이전에 후세인 정권(수니파)에게 힘을 실어주곤 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함께  중동국가중에 이란을 경계하였고 이란은 더욱 중동 패권 세력을 키우려 핵에 집중했다
사우디는 수니파에 종주국이고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종파 관계에서도 대립하였다
그동안 이란은 미국과는 적대 관계였다  미국에서는 이란 핵보유를 막기 위해 경제력을 동원하여  사우디 공동으로 제재와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이란이 그동안 미국과 적대관계을 깨고 (사우디의 우방인 )미국에게 달라붙어서 러브콜를 보냈다
이란은 사우디의 우방인 미국에게 갑자기 미국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미국과 손을 잡고 난리 치는 이란을  사우디 왕실은 이란을 정말 봐줄수 없었다  부하가 있는대로 치밀었다
한편 이란은 그동안 미국의 경제 제재로 어려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이란과 핵협상 타결하며 원조금도 받았고 모든 지원을 받았다
사우디는 이러한 이란을 보기가 역겨웠는지 이란을 골탕을 먹이려는 타켓을 골라 잡은 것이 사우디는 굉장히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카드는 종파였다
⑩사우디 왕실은 다시 한번 사우디와 이란간에 종파 갈등 카드를 꺼내면서 적을 외부가 아닌 내부 다 희생양을 찾은 것이다
⑪사우디 아라비아 내에 시아파 성직자들을 이유를 걸어서 처형시켰다
⑫결국 사우디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명예적 이슬람 종교적 체면을 간접적으로 밟아 버렸지만   

(3).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 처형사건은 작은 일이 아니였다 이란 국민들이 발칵했다  
모든 이란 국민들은  흥분하고 분노했다 1400년전 이란의 시아파 종교적 정서를 들춰낸것이다, 1400년전 시아파의 상처을 후며낸것이였다  
①이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 국가의 종교적 명예 정면으로 실추시키 기위한 방법으로 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종교집단을 처형이란 방법으로 구태연한 방법으로 이란의 종파적 명예를 그대로 짓뭉기며 밟아 버렸던것 사건이였다
②사우디 왕실(수니파)은 마치 1400년전 마지막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알리와 장남 후세인 를 암살한것과 같은 수니파 세력이 한 짓을 흉내낸것이였다 (종파적으로 볼때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
③마치 1400년전 마호메트 마지막 혈통 칼리프 알리와 그의아들을 암살하듯이 사우디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들을 처형 한 것은 종파 전쟁을 예고 한것이였다
④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전 국민들은  해마다 수니파들이 암살한 마지막 마호메트 혈통 알리와 그 아들 후세인을 위하여 순교일에 이란 전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대성통곡을 하며 뒹글르며 몸에 상처를 내며 피를 흘리며 순교 정신을 그리는 이란 국민의 시아파  정서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격이였다
⑤사우디 황실은 (수니파) 1400년이 지난 이때에도 암살하는 짓거리를 또다시 오늘날에도 반복하며 시아파 성직자들을 처형했던것이다 (그들이 사형을 받으려면 적어도 간첩죄가 아니였을까 ) 
⑥종교적 정서상 이란 국민과 정부의 분노는 아마도 핵이 있으면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였을 것이다 (이란은 중동의 시아파의 약세을 극복하려고 중동의   패권을 위하여 오랫동안 핵을 보유하려고 하였지만 미국이 사우디 함께 제재하였다  그래서 사우디는 자신들을 위하여 미국 편이였다
⑦이란이 핵을 갖는 날에는 중동의 패권은 이란으로 넘어가지만 그러면 사우디도 터어키도 너도 나도 핵을 가지려 할것이고 핵 중동시대가 올 것이다
⑧근래에는 터키가 러시아와 수위하여 핵시설을 준공 하고 있다 터키는 중동 패권을 노리고 있으나 미국과의 분쟁으로 경제 제재에 휘말리고 있다  

(4).이란과 사우디의 두 종파의 종주국간에 분쟁을 일으킨 사우디 왕실은 사우디 아라비아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했다 그런데 사우디 황실은 이란의 반격으로 휘청하게 된다
①중동에서는 정권을 잡으려면 이슬람 종교가 필요하며 또한 종파가 결정되야 한다
②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대표적인 국가이며 이란은 시아파에 대표적인국가이다
③사우디 아라비아는 수니파 종파이기에 자국내 반대 종파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 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이기 때문이였다)
④이란은 시아파에 대표적인 국가로 모든 국민 시아파를 선택하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냉혹하다
⑤수니파의 대표적인 사우디가 정부가 반대 종파인 자국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여 이란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간접적으로 이란 의 종파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⑥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종교적 심기를 건들이며 이란 국민들이 분노가 폭팔했다 사우디와 단교을 보면 아주 전형적인 종파 갈등을 내세우는 정치적인 미국 개입된 계산이 배후에 깔린 그런 사태라고 볼수 있는데 종파 분쟁의 대표적인 사건이였다
⑦하필 종파 분쟁은 당시 사우디 국왕인 살만 즉위한지 1년이 되었을 때였다  이 국왕은 종파문제로 정치 능력 시험대 오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⑧이 종파 분쟁은 사우디와 이란과 교역 단절 . 항공편.여행 중단. 항공편 끊은 사우디 이란 종파 갈등 심각 하였다
⑨사우디 왕실이 풀어야 할숙제가 많았던 시기로 유가 때문에 정부 보조금도 삭감해야 되고 ,시리아 내전 Is격퇴 문제에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고,
⑩사우디 왕실은 예멘 내전에 출구 전략 없이 너무 깊숙이 개입함으로 안그래도 재정 압박이 있는대 이런 대외 활동에 자금을 사용하게 되었다
 ⑪당시 사우디 국민들의 불만도 높아가고 있던때 였고   살만 국왕 즉위때 약속했던 다음 왕실 멤버들의 다같이 합의를 했던 왕의 승계구도를 다 바꾸게 되는 문제가 이란과 종파문제로 국제 문제 파급으로 급격히 당면하게 되었다 
⑪부랴 부랴 사우디 왕실은 자기 자신의 차남 자신의 왕자를 제2왕세자로 순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⑫그러나  그또한 미봉책으로  왕실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계속적으로 코너에 몰리기 시작했다
⑬그런던차에 업친대 겹친격으로 사우디 성지 메카 순례에 많은 순례자들이 압사 사고가 있으면서 사우디 왕실에 권위가 수니파 종교 국가로 급격히 추락을 하였다 (사우디 황실은 마지막으로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것이다 ) 
⑭초기에 정권을 잡은 사우디 왕실은 정말로 업치데 겹치게 되었다 국제상 심기가 불편하다고 종파 문제로 이란을 건들인 것이 큰 문제였다  

(5).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순례자들의 압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란은 ( 사우디의 시아파 성직자 처형 문제의 보복) 신이 났다 .노골적 사우디 왕실의 비난하며 자신들의 종교 권위를 잃은 만큼 메카의 순례 문제로 사우디 왕실의 권위를 계속적으로 끈질기에 추락 시켰다
①수많은 카바 신전 순례자들이 사우디 메카 몰려들어 깔려 죽는 사고가 연일 일어 났다
②시아파 처형사건으로 비르고 있던 이란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다 순례 수니파 피해자 국가를 부추기며 사우디 왕실을 종교적으로 끈질기게 날마다 공개 비판하였다 사우디 황실은 종교적을 내부나 외부나 곤욕스러웠다
②지난번에도 이란(시아파)은 사우디 아라비아 을 향하여 그것 봐라 니들이(수니파)제대로 관리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수니파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 하며 그게 화평이냐
(암살과 처형과 압사 하는 수니파)은근히 비유하며 중동 온 이스람국가을 향하여 사우디 황실을 연속적인 비난과 피의자 국가에 충돌질하였다
③당시 사방의  이슬람 국가에서 조차 비난이 쇄도하자 1년 밖에 안된 사우디 왕실이 권위가 추락을 했다며 이는 불난집에 부채질한 그 배후에는 이란 정부가 계속적으로 비난히고 충동질 한 것이 뻔하기 때문이였다
④이렇게 중동에서는 1400전부터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분쟁이 1400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끊이질 않을 것이다  

4).미국과 친하면 왜 이슬람국들에게 설득력을 얻어 미국을 공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다른 급진 이슬람 세력들이(강경파 ) 미국을 향한 적개심,
①지금은 지하 내부에있는 급진세력들 테러 리스트들이 미국을 공적으로 삼는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 이 있겠지마는
②근간의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1980년 아프칸 전쟁에서 쏘련 연방이 이슬람주의를 지원하고자 침공했을 때,
③쏘련을 저항하는 이슬람 세력들을 미국이 지원 했을 때 그때 바로 미국 정부와 오사마 빈라덴과 밀월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④문제는 아프칸 전쟁이 끝나고 쏘런과 탈냉전이 시작되니까 소연방의 세력이 크지 않자 미국이 그렇게 열심히 지원해주었던 이슬람 세력을 그냥 내팽겨쳐 놓고 배반을 하고 등을 돌리고 가버립니다 (거기다가 이슬라엘에 지원하고  이스라엘 편에서니 )
⑤그때부터 믿었던 미국이 등을 돌리자 빈라덴은 우리 가장 큰 적은 미국이다며 선포를 합니다
⑥빈라덴은 알카이다 조직을 파키스탄과 아프칸스탄 사이에 세웁니다
⑦미국의 911사태는 빈라덴과 알카이다 조직의 테러였으므로 미국이 테러단체로 전쟁에 들어갑니다
⑧이후 알카이 급진세력들은 다시 IS로 편입하여 연합니다  

(2). 이팔(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주도하는 배경
①이스라엘의 건국에 가장 큰 지지 세력은 영국 프랑스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제국 주의라면  
미국은 20세기와 21세기의 미국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이슬람 급진 주의자들을  또한 미국의 지원을 하였으나 어느시점에 등을 돌렸고
결국 이슬람 극단주의와 미국은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모든 무슬림의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전반적인 사상이 깔려 있는것은 맞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수출한다 하면서 중동국가들에게 비 일관적인 잣대를 댄다
중동국가 라도 사우디 정부 같은 경우에는 우방이라고 솜방망이처럼 배려하며
시리아나 이라크 같은 경우는 없는줄 잘 모르지만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고 하며 여리 이유로 탄폭격을 일삼고 경제 제재를 하며,,,  

5).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1).시아파 이란의 개혁파와 급진파
①이란의 여성들 여성시위대 이란의 여성들은 히잡을 쓰고 정치 활동을 안하던 분들인데 갑자기 하는 배경은 어디 있는것인가
②사실 이란내에서 이런 활동은 사실 사우디 여성보다는 더 활발했던것은 사실입니다
③하지만 여성들을 동원된 것은 이란내에서 입지가 점차 약해지는 급진 강경파들이
④이란내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을 타결시킨 대통령 중심으로한 온건 개혁파가 많은 지지를 얻으니
⑤이것에 위협을 느낀 급진파들이 너무 불보듯 뻔하게 종교적으로 시위대를 동원했고 여성들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여진다
⑥미국을 향한 사회 갈등으로 확산 시키는 것 같습니다,
⑦정치와 종교가 합쳐지면 그 끝이 좋을수가 없습니다,  

(2).이슬람  두종파의 급진 파,
①레바논 시아파 무장 단체 헤즈 볼라 2016년 1월5일 (시아파 테러리스트 -헤즈볼라 하마스 )
②오사마 빈라덴 수니파 알카이다 무장세력
③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 수니파 30% 정권
④이라크 미국 주도하에 정부 시아파 70% 정권 

(3).ls(이슬람주의)의 원리주의  수니파 (정통)
①이라크내 시아파 정권수립에 대한 수니파의 불만으로,
②수니파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과 결탁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1.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시대를 꿰뚫는 키워드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국제 질서를 결정하는 강대국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현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단 하나 꼽으라면 석유입니다.
석유가 현대 세계에서 '이해관계의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석유는 국제 사회에서 부와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석유의 지배는 곧 세계의 지배였습니다.
현대사에서 석유는 정치, 경제, 외교를 움직이는 심층 동인이었습니다. '에너지, 그 이상의 가치'로 작용했습니다. 너무 크고 추상적인 이야기라 아직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꼼꼼하게 채워 넣어서 뚜렷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오늘을 알 수 없고 그런 이유로 내일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역사에 대한 지식은 필수입니다. 특정 분야의 역사를 알면 그 분야에서 하는 일의 위치와 맥락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역사를 모르면 맥락 없는 방법이나 좌표에 맞지 않는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데이터를 모르는 채 미래를 프로그래밍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그림을 모르는 채 미래의 그림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상상력은 자기가 가진 레퍼런스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 마음에 새로운 레퍼런스가 되길 바랍니다.

석유, 오늘을 열다,
(1차 세계대전 ~ 1969년)
근대 석유 산업은 '석유왕'이라 불리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에 의해 미국에서 태동합니다. 그가 1870년 세운 Standard Oil은 미국의 석유 사업을 지배했고, 오늘날에도 ExxonMobil과 Chevron으로 이름을 바꿔 세계 최대 기업으로서 건재하고 있습니다.

록펠러의 시대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여전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동력있었던 증기기관은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했고, 중동의 석유는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한 시절에 석유를 두고 록펠러보다 큰 꿈을 꾸는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질의 결정으로 인해 석유가 세계의 연료이자 이해관계의 핵심으로 등극하는 석유의 시대가 열립니다. 1911년,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독일과의 해군력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해군 함대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모두 바꾸는 결정을 내립니다. 문제는 당시 영국에 석유 매장량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중동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로렌스로 상징되는 영국의 지원으로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칩니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랍을 이용합니다. 아랍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동의 근현대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국가가 됩니다.
아라비아 반도는 16세기경부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20세기 초반 영국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낸 이후 다양한 부족과 토후국이 난립합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은 사우드Saud 왕가가 주변 부족과 토후족을 정벌하면서 1932년 사우드 왕가의 나라, 즉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라는 독립된 통일 국가를 건국합니다.
영국은 아라비아반도와 이웃한 페르시아 (오늘날 이란)에서도 활약합니다. 1908년 페르시아 남부의 마스제드솔레이만에서 거대한 유전을 발견합니다. 이 발견으로 1909년 페르시아에 BP의 전신인 Anglo-Persian Oil Company라는 석유 회사가 설립됩니다. 이후 이 회사는 이란의 석유 개발을 주도하며 이란의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줍니다.
영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열매로 이 지역의 석유 질서를 주도합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 함대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한 처칠의 결단이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은 중동의 맹주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영국은 쇠퇴해 가는 나라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중요성을 위늦게 알아채고 석유 기업을 진출시키며 영국을 견제하는 국가가 등장합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1940년대 초반 중동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5~1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아직은 중동이 석유의 중심이 아니었고 미국도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도 중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1941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석유와 중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석유는 전쟁 승패에 결정적인 요소였고, 미국은 모든 전선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당시 미국 최고의 지질학자이자 석유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버렛 드골리에를 중동으로 보내 석유 매장량을 조사하게 됩니다. 드골리에 일행은 그 임무를 수행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중동 석유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포상'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영국은 미국이 필요했습니다. 중동을 노리는 소련의 위협을 홀로 방어하기도 힘들었고, 중동 유전 개발에 필요한 자본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중동에 들어와서 영국의 기득권을 상당 부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뛰어난 '스케치 실력'으로 리더쉽을 발휘합니다.

페르시아(이란)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며,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루스벨트 제안은 1944년 영미석유협약 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미국은 사우디에 Aramco라는 석유 회사를 세웁니다. 현재 아람코는 사우디의 국영 석유 회사지만, 당시에는 미국 석유 기업 Socal과 Texaco가 합작해서 세운 100퍼센트 미국 회사였습니다. 아라비아의 미국 회사라는 의미로 이름도 Arabian-American Oil Company, 줄여서 Ar-Am-Co입니다. 이란에서는 BP의 전신인 Anglo-Persian 석유 회사가 독점적으로 사업을 지속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란은 영국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이란은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독일 쪽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연합국은 이란을 공격해 당시 국왕이었던 레자 샤 팔레비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팔레비를 왕위에 앉힙니다.

그러한 방식이 국민을 통제하는 데 유리하다고 본 것입니다.
반영 감정의 더 중요한 이유는 석유였습니다. 1932년 앵글로-페르시안에서 이름을 바꾼 Anglo-Iranian Oil Company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억 5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린 데 반해, 이란은 로열티로 9000만 파운드의 수익만을 가져갑니다.
국민적 반영 감정을 등에 업고 민족주의 성향의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등장합니다. 그는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워 1951년 4월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됩니다. 연합국이 내세웠던 팔레비는 2선으로 물러나고 힘을 잃습니다.
모사데크는 집권 후 곧바로 영국 소유였던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합니다. 영국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기에 즉시 페르시아만에 해군 함대를 파견하고 영국 은행에 예치된 이란 자산을 동결합니다.
제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몇 차례의 제안과 협상이 있었지만, 모사데크 역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정보기관은 모사데크 정권이 소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를 놔둘 경우 이란이 공산화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란이 넘어가면 사우디도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CIA는 영국 정보기관 M16과 함께 쿠데타를 추진합니다.
석유 수출이 막혀 경제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란 군중에게 돈을 풀어 시위를 유도하고 군부를 매수하여 쿠데타를 실행하게 합니다. 결국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 세력과 이란 국왕 팔레비는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합니다.
이란의 팔레비 왕가는 영국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 덕분에 정권을 잡았고, 사우디의 사우드 왕가도 미국의 보호 하에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두 강대국이 형성한 정치적 경제적 한계를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로 여깁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석유 운송로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입니다. 전 세계에서 해상으로 운송되는 원유의 3분의 1이 지나가는 원유 운송의 요충지입니다.
1950년대 후반, 오늘날보다 더 심각한 석유 운송로의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운송로는 수에즈 운하Suez Canal 였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이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서 중동의 석유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통로였습니다.




1875년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가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집트 소유의 운하 지분이 시장에 나옵니다. 이때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지분 44퍼센트를 취득합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운하 운영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갑니다.
이집트에서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후 나세르는 제3세계 국가와 함께 비동맹주의를 주창합니다.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당시 적성국이었던 중공(중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등 미국의 의도와 다르게 움지이자 미국은 아스완댐 건설 지원을 취소합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 자금 확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합니다. 쇠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앤서니 이든은 즉시 프랑스와 함께 군사 대응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위기'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군사 대응은 미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당시는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재선을 노리고 선거를 준비하던 시기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끌어낸 '평화의 사도' 이미지를 구축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나세르 정권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당하기 직전에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선적한 선박을 침몰시켜서 수에즈 운하를 폐쇄합니다. 인양하는데 수개월이 걸리는 거대한 장애물이었기 중동산 석유가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꺼낸 최후의 카드는 원유 공급 계획의 취소였습니다.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원유 공급 중단을 선언하고 즉각 실행합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11월 군사 대응 한 달여 만에 얌전히 군대를 철수합니다.
이렇게 수습된 수에즈 위기는 현대 국제 질서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힘의 이동을 보여 주면서 새로운 질서를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킴으로써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립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을 얻게 된 이집트의 나세르는 1,2차 중동전쟁에서 풀지 못한 아랍의 과제를 완수하려 합니다. 바로 아랍의 통합입니다. 나세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사상의 핵심은 아랍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범아랍주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아랍의 지리적 통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단일한 아랍 국가를 꿈꾸는 아랍 지도자 나세르의 사명은 명확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점령입니다.
그러나 선제공격은 이스라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기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랍국가들은 전쟁 패배로 군사력의 심각한 불균형이 드러나면서 외교적 지위가 약해졌을 뿐 아니라, 석유 무기화에도 실패하여 큰 좌절과 분노를 겪게 됩니다.
영국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 이후에는 서로 타협하여 중동의 사업권을 나눠 가집니다. 이 독점적 사업권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안정적 석유 수급은 영국과 미국의 핵심 이익이 되었고, 그것의 유지가 중동 정세를 좌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것이 Seven sisters입니다. 7개 회사 중 5개는 미국계이고 2개 (쉘과 BP)는 영국계입니다.




두 나라가 중동에서 석유 사업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하며 도전장을 내민 돈키호테 같은 사나이가 이탈리아에서 등장합니다. 마테이는 세븐 시스터즈에 도전하기 위해 1953년 이탈리아에서 Eni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런데 1962년, 마테이는 소련의 파이프라인과 지중해의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려는 시점에 전용기가 추락하는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 헐. 의문의 사고라니.
당시에 세븐 시스터즈와 산유국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무엇보다 유가, 즉 석유 판매 가격이었습니다. 사우디 초대 석유 장관이었던 압둘라 타리키는 당시 세븐 시스터즈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 공시 가격의 결정권을 가져오려 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공개 시장에서 유가가 결정되지 않고 세븐 시스터즈가 일방적으로 원유 공시 가격을 결정했습니다.
주요 산유국은 석유 수입이 미국 사기업의 사무실에서 결정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사우디의 타리키는 베네주엘라의 석유 장관 알폰조에게 연락하여 약속했던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동 3개국이 동참하면서 1960년 9월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즉 OPEC이 결성됩니다.
창설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그 영향력이 미미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OPEC이 창설된 이듬해 케네디 행정부는 '진보를 위한 연대Alliance for Progress'라고 불리는 중남미 경제 원조를 시행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이 정책의 주요 수혜국이 되면서 그 지역의 반미 정서가 옅어집니다. 미국의 이러한 접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추진했던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닮아 있습니다. '서유럽의 경제를 부흥시킴으로써 소련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한 경제 지원 정책' 다만, 케네디 정부의 중남미 경제 원조는 소련이 아닌 쿠바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것.
(2) 중동 산유국의 양대 산맥인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3) 당시 산유국들은 석유 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사업의 모든 부분을 메이저 석유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저 석유 회사에 강하게 도전할 수 없는 구조적인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석유, 무기가 되다1970~1979년

미국은 1960년대 말까지 자국 석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석유 수입 물량을 제한했습니다. 그 정도로 자국의 석유 생산량이 자급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앞지르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미국은 1968년 파리에서 열린 OECD 회의에서 "미국은 원유 생산 능력의 100퍼센트를 가동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석유 수입 물량 제한도 폐지합니다.
잉여 공급 물량이 소멸하면서 공급 중단은 바로 공급 공백을 초래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아랍은 석유 질서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아랍의 지위가 상승하고 협상력 또한 강해졌습니다.
1969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리비아 카다피는 미국 석유 회사 옥시덴탈을 위협해 석유 수익 반분 원칙을 깬다. 카다피의 성공은 1970년대 석유 질서의 주도권이 메이저 석유 회사에서 중동 산유국으로 옮겨 가는 신호탄이다.
1970년대 두 차례 일어난 오일쇼크는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둘의 배경과 원인이 다릅니다. 1차는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의 주도하에 정교하게 계획되었던 반면, 2차는 이란 혁명으로 인한 중동 정세의 불안과 그로 인한 시장의 공포 그리고 산유국들의 탐욕이 뒤섞이면서 우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1970년 이집트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나세르가 물러나고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다. 사다트는 석유 시장의 변화를 등에 업고 다시 한 번 전쟁을 준비합니다.
사다트는 승리가 불확실하더라도 전쟁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당시 미국의 국무 장관 키신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다트의 목적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영토를 얻는 게 아니었다. 3차 중동전쟁의 참패로 인해 고착화된 이스라엘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태도를 변화시켜야만 협상의 길이라도 열 수 있었다."
사우디의 확답을 받지 못한 채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등은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선제 기습으로 전쟁을 개시합니다. (4차 중동전쟁 또는 욤키푸르 전쟁)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탈환하고 이스라엘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석유 사업의 최대 파트너인 아랍 국가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게 이스라엘을 지원할 작은 명분이 생깁니다. 소련이 이집트에 막대한 군수 물자를 지원한 것인데, 이를 구실로 미국 또한 이스라엘에 대규모 군수 지원을 실시합니다.
미국의 지원은 서서히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습니다. 초반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이스라엘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섭니다.
전세가 역전되자 미국은 소련이 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처럼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키신저는 급히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과 전쟁을 종료하기로 합의합니다.
아랍은 이스라엘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영토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습니다. 1~3차 중동전쟁까지 형편없이 밀렸던 모습이 아닌,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며 긍지를 회복한 것입니다.
아랍의 소득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랍의 강력한 무기인 석유의 힘을 드러낸 것이 더 큰 소득이었습니다.
미국은 석유 무기화의 충격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오일쇼크의 근본 원인이었던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시나이반도 반환에 합의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됩니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는 잃었던 영토를 회복합니다.
캠프 데이비드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도 논의됐는데,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는 팔레스타인과 제한적 자치를 주장하는 이스라엘 간의 입장 차이가 현재까지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집트는 아랍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겨합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과 범아랍권 사이의 갈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문제로 국지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시나이반도 반환을 중재한 1978년 카터와 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소유라고 주장하는 2019년 트럼프의 차이는 석유 생산의 중심이 바뀌면서 국제 역학 관계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줄곧 평화 정책을 지향합니다.
그의 온건한 정책은 아랍권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킵니다.
평화조약 파기를 촉구하는 테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집트는 1979년 아랍연맹애서 반강제적으로 탈퇴합니다. 사다트 또한 1981년 그를 반대하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암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에 석유 지배권을 넘겨준 서구 국가들은 다양한 자구책을 모색합니다.
영국은 북해 유전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Forties 유전에서 스코틀랜드를 잇는 거대한 포티스 송유관도 건설합니다.




미국은 알래스카가 새로운 원유 공급지로 떠오르기를 기대하면서 알래스카 유전 개발과 장거리 송유관 건설에 집중했는데, 이후 알래스카는 미국 원유 생산량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국제 사회가 석유 수급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국제에너지기구 International Energy Agency (IEA)를 창립합니다.
입회 자격으로 90일분 이상의 비축유 확보 의무를 지웁니다.
미국이 주도한 IEA는 중동에 대항한 서구 국가들의 공동 기구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 중 IEA 창립을 강하게 비난하며 가입을 거부한 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가 IEA 가입을 거부한 주된 이유는 세븐 시스터즈가 주도하는 석유 질서에서 배제되었다는 불만이었습니다.
영미에 끌려가지 않을 독립적인 에너지 정책을 구상합니다.
우선 프랑스는 오일쇼크 이후,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원자력 발전에 집중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국방, 식량, 에너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한 국가가 이 세 가지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자주권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방, 식량, 에너지 영역에서의 역량 확보는 경제적 가치 외에 비경제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며 접근해야 합니다.
석유 사업의 주도권은 산유국 정부 또는 산유국의 국영 석유 회사로 옮겨가게 됩니다.
과거에는 석유 회사들이 자기가 발견한 석유의 '소유자Concessionaire)로서 권리를 가졌다면, 이제는 발견된 석유에 대해 수익을 분배하는 '계약자Contractor'의 지위로 격하됩니다.
산유국 정부가 이익의 주체로 부상하면서 산유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국영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자국에서 발생하는 석유 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2007년 3월 <파이낸셜 타임스>는 과거 앵글로-색슨 계열의 세븐 시스터즈를 대체하는 새로운 7개 석유 가스 회사를 New Seven Sisters라고 명명합니다.




중동 국가들은 오일머니의 상당 부분을 무기 구매에 소비합니다.
특히 사우디는 미국 전체 무기 수출액의 20퍼센트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오일머니를 무기 수입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40. 사우디와 이란은 원유 가격 정책에서 큰 의견 차이를 보입니다.
사우디는 시장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하며 유가를 낮게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란과 리비아 등 다른 산유국들은 공급량을 조절하여 높은 유가로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사우디는 물량 중심, 이란은 가격 중심의 정책으로 생각이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사우디 석유장관 야마니는 훗날 석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 데,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는 말입니다.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야마니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에너지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기술 진보가 에너지 공급원을 다양화할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석유 수요를 줄일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사우디의 저유가 정책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이는 2차 오일쇼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사우디는 고유가로 인한 석유 수익의 급증이 사회 분열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고유가를 주장하던 이란에서 이러한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오일머니의 홍수는 혼돈과 부패, 인플레이션 속에서 이란 경제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팔레비 왕가에 대한 반체제 여론을 확산시킵니다. 이란 혁명은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왔고, 그것이 2차 오일쇼크의 출발점이 됩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이란 국왕 팔레비는 미 CIA의 지원을 받아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후 팔레비는 친미 노선을 유지하며 26년간 장기 집권합니다. 1963년 이후에는 서구식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진합니다.
이란은 이슬람 전통이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심을 갖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팔레비는 장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경찰 사바크를 통해 자신의 반대파를 철저히 감시, 고문, 처형해서 국민의 불만이 더욱 증폭됩니다.
팔레비 왕정하에서 석유로 인한 부가 오히려 사회를 병들게 하고 독재를 강화하자 이란 국민들은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비 왕가에 반기를 든 혁명가이자 이란 시아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그 와중인 1977년 말, 호메이니의 아들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암살에 팔레비가 관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혁명의 뇌관이 터집니다. 국왕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을 휩쓰는데, 석유업계 종사자들도 이 시위에 동참합니다. 이로써 이후 약 2년여간 지속된 2차 오일쇼크의 서막이 오릅니다.
결국 1979년 1월 팔레비가 이란을 탈출하면서 이란의 마지막 왕조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를 '이란 혁명' 또는 '이슬람 혁명'이라 부릅니다.
이후 이란은 중국과의 관계를 확대해 나갑니다. 중국이 성장할수록 이란은 원유 시장을 서구에 의존하지 않아도됩니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는 중국이 이란을 거쳐 유럽과 통하게 됩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격해지고 이란과 중국의 협력 관계는 강화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란에 다시 팔레비 같은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미국은 이슬람의 역동성도 과소평가했습니다. 이란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부흥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방과 세속화를 경험한 국민이 엄격한 중세적인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은 현대사에서도 특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슬람 문화의 전통과 정체성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1차 오일쇼크는 중동 산유국의 생산 축소가 그대로 공급 공백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시장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는 조금 달랐습니다. 북해,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등 비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어 생산 중이었기에 이란 혁명으로 석유 공급이 감소해도 다른 지역의 증산으로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2차 오일쇼크라는 거대한 충격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불안과 공포를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불안의 원인으로 사랑, 결핍, 기대(욕망) 등과 더불어 '불확실성'을 꼽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에는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명대사가 나옵니다. 결국 불안과 공포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과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일 것입니다.
(2) 팔레비가 미국의 보호하에 건재할 경우, 1953년 미국이 쿠데타를 지원하여 팔레비가 왕정복고에 성공했듯이 다시 한 번 왕정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메이니는 미국에 팔레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이란 대학생들이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려 15개월이나 지속되며, 2차 오일쇼크 장기화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3) 이란 혁명 직후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합니다. 대체 에너지로서 원자력에 대한 기대치를 대폭 낮춥니다. 그 결과 석유 수요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증가합니다.
1979년 12월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당시 아프간에는 무함마드 타라키가 이끄는 친소련 성향의 인민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입지는 위태로웠습니다. 아프간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자헤딘Mujahidin'이라는 무장 집단을 만들어 아프간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친소련 성향의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소련은 아프간 정권과의 우호적 협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합니다.
석유, 시장을 열다, 1980~1989년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군사 행동에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스팅어 미사일 등 무기와 자금을 무자헤딘에 지원합니다. 소련은 무자헤딘의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소련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을 입습니다. 결국 오랜 소모전은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됩니다.
미국도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훗날 미국을 향한 테러의 씨앗을 뿌립니다. 아프간 전쟁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정신적으로 그들의 신념을 내면화하고 군사적으로 무기 체계를 발전시키는 계기였습니다. 미국은 소련군과 맞서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가운데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세력을 키워 주게 됩니다.
아프간 전쟁은 1989년 소련의 철군으로 끝납니다. 이후 아프간의 공산주의 정부는 4년을 버티지만 결국 무너지고 1996년 반미 성향의 탈레반이 권력을 장악합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치욕적인 철군과 막대한 피해를 남기며 소련 붕괴에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탈레반과 알카에다라는 반미 세력이 이 전쟁을 통해 성장하며 훗날 911 테러와 아프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발단이 됩니다.
아프간의 역사는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2018년 시리아에서도 반복됩니다.러시아는 반미-사회주의 성향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고, 미국은 이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을 지원합니다. 냉전 시대가 끝났음에도 시리아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석유 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합니다. 1980년 9월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핵심적인 이유로 두 가지가 꼽힙니다.
(1) 이란 혁명의 확산에 대한 우려입니다. 시아파인 호메이니가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것과 그 정권이 강성해지는 것은 이웃나라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후세인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2) 영토 분쟁입니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역에 샤트 알아랍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의 하류는 석유 수출 통로로 이용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인데 1937년 이래로 이라크가 점유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가 강 영유권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 양보합니다.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Kurd 때문이었습니다.

이란은 이라크를 견제하고자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무장 독립 투쟁을 지원합니다. 이라크는 이 지원의 중단을 대가로 샤트 알아랍강의 영유권을 양보했습니다. 양보라고 표현했지만 이라크 입장에서는 협박에 의한 강탈에 가까웠습니다.
(3) 미국이 이라크를 부추겨서 전쟁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은 호메이니를 축출하고 싶었고 그래서 이라크에 무기 지원을 하며 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OPEC의 인위적인 고유가 정책은 비OPEC 국가의 생산량 증대를 야기하며 OPEC의 시장 지배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지속적인 가격 인상으로 OPEC 공식 가격의 신뢰성과 수용성이 추락하자, 시장은 새로운 기준 유가의 등장을 요구합니다. 바로 이때 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알리는 바람이 뉴욕에서 불어옵니다. 1983년 3월, 오늘날까지 유가 뉴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뉴욕상품거래소의 WTI 선물 유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53. 이제 석유는 특수한 지위를 갖는 재화에서 시장의 원리에 지배받는 평범한 '상품Commodity'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동 산유국 모두가 석유의 상품화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석유가 특별하기를 바랐고, 시장이 아닌 OPEC의 영향하에서 거래되기를 바랐습니다. 석유가 시장 질서로 편입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 즉 시장과 금융을 주도하는 미국에게 석유의 자산 가치를 결정할 권리를 넘겨준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54. 석유가 금융 상품이 되면서 풍부한 유동성이 창출됩니다. 석유 실물을 수반하지 않는 페이퍼 거래의 규모가 실물 거래의 비중을 압도합니다. 페어퍼 거래가 실물 거래의 10~20배 수준으로 이루어지면서 석유의 금융 상품화가 정착됩니다. 그 결과 석유 파생 상품 등 금융 거래가 실물 시장의 유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됩니다.
55. 지난 60여 년간의 장기 유가 그래프를 보면 유가가 폭락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볼 수 있는데, 그중에도 현저한 수직 낙하가 두 번 정도 있습니다. 1986년에는 사우디가, 2014년에는 OPEC이 물량 조정을 포기하고 '점유율 전쟁'을 하면서 유가 급락이 촉발되었습니다. 그럼 왜 산유국들은 점유율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1) 국가와 국민의 부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중동과 아프리카 산유국은 대부분 국가 수입원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 미래의 불확실성입니다. 산유국 입장에서는 석유 감산과 그로 인한 점유율 감소가 있더라도 미래에 언젠가 그 물량만큼 더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감산 결정은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3) 점유율은 한 번 잃으면 쉽게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우디는 넷백net back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고객을 유인합니다. 넷백은 휘발유, 등유, 경유 등의 가격을 기초로 하여 유가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공식 판매 가격에 기초한 기존 거래 전통을 깨는 파격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최종 제품유 가격에서 역산하여 정유업체의 마진을 확보하는 방식이었기에 정유업계는 사우디 워유를 위험 없이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거래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잃어버린 점유율을 회복하는 데 10년 이상 걸립니다.
이후 사우디는 점유율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우디 국영 회사인 아람코는 1988년 미국 텍사코의 정유 회사 지분 50퍼센트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1991년 쌍용 정유 (현재 S-OIL)의 지분 35퍼센트를 취득합니다. 이후 지분을 63.4퍼센트까지 늘려 최대 주주가 되면서 한국 정유 회사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2019년 4월에도 아람코는 또 다른 한국 정유 회사인 현대오일뱅크의 지분 17퍼센트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미국에 한국 시장 점유율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아람코의 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람코가 에스오일과 현대오일뱅크의 지분을 사들인 건 결국 안정적인 판매망 확보를 위한 것. 석유, 오늘을 결정하다, 1990년 ~ 현재 1988년 이라크 전쟁이 끝났습니다. 1990년 8월 후세인은 다시 전쟁을 결심합니다. 이라크는 생산 쿼터 등을 문제 삼으며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고, 쿠웨이트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점령됩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중동의 헤게모니가 미국에 우호적인 사우디 중심에서 반미 국가인 이라크 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낳았습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 생산량을 합치면 사우디에 필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의 지휘하에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이란 작전명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걸프전 직전 후세인의 계산으로는 미국은 역내 세력 균형 차원에서 이라크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쿠웨이트 침공을 구실로 이라크를 붕괴시킨다면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역내 세력 균형이 깨지면서 이란이 중동의 최강자로 군림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궤멸시키고도 후세인 정권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세인 정권은 수니파지만, 이라크 국민의 과반수는 이란과 같은 시아파였기 때무입니다.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다면 이란-이라크-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가 수니파의 사우디를 압도하면서 역내 균형이 깨질 수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친미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길 기대했지만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는 막대한 비용과 피해를 뒤로하고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킵니다.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 소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선언합니다. 이로써 미국-소련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주도하는 단일 질서의 시대가 열립니다.
미국 우선America First인지, 아니면 세계 우선World First인지의 기로에서 미국은 후자, 즉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선택합니다.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영국과 미국이 1970~1980년대 추구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통해 정부 역할 최소화,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 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구축됩니다.
이런 조건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는 거대 다국적 기업입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은 정부의 힘이 축소되고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수익과 비용을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석유 기업이 주도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메이저 석유 회사들의 초대형 인수합병이 잇따라 이루어지면서 엑손모빌, 셰브런, BP, 토탈Total과 같은 초대형 다국적 석유 기업이 등장합니다.
이 시기에 서구 자본이 특히 집중했던 곳은 중앙아시아였습니다. 아제르바이잔, 투크르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등은 막대한 석유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의 진출이 막혀 있던 곳이었으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황금의 샘으로 떠오릅니다. 1990년대에 미국, 유럽, 중국, 러시아 등이 중앙아시아의 석유 사업권을 놓고 벌인 경쟁은 '뉴 그레이트 게임New Great Game'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아르제바이잔의 바쿠와 인근 지역은 1920년 러시아 볼셰비키군이 점령한 이후로 소련 석유 산업의 출발점이자 주무대였습니다.
중앙아시아는 해안과 접하지 않은 내륙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석유 사업이 서구에 의미가 있으려면 거대한 송유관이 필요했습니다. 1993년 송유관에 대한 기초 문서가 서명된 이후, 12년의 준비와 건설 기간 끝에 2005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에서 시작하여 조지아의 트빌리시Tbilisi를 거쳐 터키의 지중해 연안 도시 제이한Ceyhan을 연결하는 BTC 송유관이 완공됩니다.




​영국의 BP가 이 송유관의 최대 지분(30.1%)을 확보하여 운영권을 손에 넣는 모습은 19세기 영국이 세계 경영을 하던 때에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로서 운영권을 행사하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미국은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중앙아시아 내륙의 해상권이라 할 BTC 송유관의 건설과 운영에도 관여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 질서를 공고히 했습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원리주의 성향을 지닌 이슬람교도의 분노도 커집니다. 그들은 아랍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그러한 분노가 응집되어 나타난 결과는 개인 또는 집단이 폭력을 도구로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무자헤딘과 헤즈볼라에 이어 1990년대에 알카에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IS로 알려진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정면으로 미국과 겨룰 수 없었고 국가도 아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습니다. 취할 수 있는 군사적 옵션은 테러였습니다.
2000년대 가장 충격적인 테러의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국가 사우디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빈 라덴은 1988년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결성하였습니다. 빈 라덴이 미국을 상대로 지하드(성전)을 결심한 계기는 미군의 사우디 주둔이었습니다. 미군 주둔은 항상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사우드 왕가를 미국의 종복agent이라 규정한 빈 라덴은 이후 사우디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며 1991년 수단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수단을 거점으로 알카에다를 운영하면서 건설업 등의 수익 사업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미국에 대한 테러를 실행합니다.

미국은 테러의 배후에 알카에다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수단 정부로 하여금 빈 라덴에게 거처를 제공하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합니다. 결국 빈 라덴은 수단에서도 추방됩니다. 빈 라덴의 다음 행선지는 아프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자 물라 오마르를 만납니다. 친미 성향의 사우디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과 철저한 반미를 지향하는 빈 라덴의 공존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아프간에서 온 빈 라덴은 CNN, ABC 등 서구 언론과 빈번하게 인터뷰하며 이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합니다.
탈레반의 비호 아래 빈 라덴은 오랫동안 구상한 테러를 치밀하게 진행합니다. 바로 2001년 911 테러입니다.
911테러에서 나타난 분노의 기원,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슬람과 서구의 반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국주의 시절부터 이어진 침탈의 역사입니다. 중동과 아랍은 20세기 석유 개발의 역사에서 부의 상당 부분을 서구가 빼앗아 갔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아랍의 '토지'라고 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교도의 국가를 건설한 것도 테러의 주요 이유입니다.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한 아들 조지 부시는 취임 직후 석유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시도합니다. 2001년 5월 완성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510만~580만 배럴 수준으로 감소합니다. 반면 원유 소비량은 2580만 배럴까지 증가합니다. 미국의 에너지 안보 뿐 아니라 패권, 나아가 존립마저 흔들 수 있는 심각한 예측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걸프 지역에 미국의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이 걸려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보고서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의 본질은 손실의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원인은 금융의 개방성과 확산성이었습니다.
미국 내 위기가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확산된 것은 미국이 자본의 경계를 없애고 전 세계 금융 시장을 개방하여 달러라는 국제 통화에 연계시킨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당시 미 연준의 해결책도 간단했습니다. 금융 시스템에 달러라는 '국제 통화'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중세 이후 인류의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고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으로 '신용에 기반한 금융'을 꼽습니다. 금융은 '재능과 자원의 뷸균형을 해소'함으로써 무덤으로 가야만 했던 인류의 수많은 잠재 재능을 실현합니다. 금융을 통한 기회와 성취는 자본주의의 큰 장점입니다.
<21>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18세기 이후 "자본 수익률이 실물 경제 성장률보다 지속적으로 높았다"고 주장합니다. 피케티의 주장처럼 실물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자본이 커지면, 전체 생산물 중 자본 소득자가 가져가는 비중이 커집니다.
금융 자본에는 투자와 대부에 대한 보상으로 제빵사의 '부를 이전'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금융 자본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미국의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은 자본 시장 개방에 긴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자본 시장 개방과 세계화를 정책으로 요구합니다. 국제 통화의 확립과 금융의 세계화는 거대 자본이 부를 효과적으로 이전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으로 흘러가는 달러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미국은 이를 되돌릴 메커니즘, 즉 금융의 리사이클링financial recycling이 필요했습니다. 뉴욕대학 중동연구센터 교수 티머시 미첼은 유출된 달러의 흐름을 되돌리는 금융 리사이클링에 가장 적합한 재화는 무기였다고 말합니다. 중동에서 전쟁과 갈등은 무기 수요를 꾸준히 창출했습니다.
산유국은 여러 이유로 미국보다 자본 수익률이 높을 수 없습니다. 토마 피케티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경우, 오일머니를 통해 엄청난 자본을 형성할 수 있지만 국가의 안전과 체제 보장을 미국에 위탁한 이상, 불가피하게 수익률이 낮은 미국 국채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의 나라들은 대규모의 달러를 낮은 수익률로 투자하거나 보유해야 하는 구조적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피케티의 이론을 적용하면 외국의 자본 수익률은 발권국의 자본 수익률을 능가할 수 없고 그것이 지속되면 부의 편중은 심화됩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 화이트와 영국 대표 케인스가 참석한 가운데 달러를 국제 통화로 화되 금의 가치에 고정시킨다고 결정합니다. 이 원칙에 기초하여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합니다. 환율 유지와 전후 복구 지원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도 함께 설립됩니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위기를 맞습니다. 미국은 서유럽 경제 지원 계획인 마셜 플랜과 베트남전 수행 등으로 막대한 달러를 해외에 풀어야 했습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 등이 미국과의 교역에서 달성한 무역 수지 흑자는 달러의 과잉 유출을 불러옵니다. 이에 따라 1971년 닉슨은 달러의 금 태환 포기를 선언하며 전후 통화 질서를 이끌어 온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말을 고합니다.
닉슨은 석유의 결제 통화로 달러만 사용해 줄 것을 사우디 왕실에 요청합니다. 미국 재무 장관 윌리엄 사이먼이 1974년 사우디 국왕 파이살을 방문하여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채를 대거 매입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우디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은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발생한 달러의 과잉 유출 상황을 해결합니다. 금 대신 석유라는 교환 수단을 확보한 달러는 국제 통화 지위를 유지합니다.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은 생산력과 구매력을 함께 확대하지 않으면 미국 내 제조업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외 시장이 확대되려면 유럽 경제를 빠른 속도로 복구해야 했습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 이후, 미국은 1947년부터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서유럽 경제 원조를 실행합니다. 194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미국과 서유럽의 집단 안보 체제도 만들어집니다. 마셜 플랜은 공산주의 체제의 확산을 막는 목적도 있었지만 유럽 경제를 빠르게 부흥시켜서 미국이 주도하는 '확대 재생산 체제'에 시동을 거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웃 제빵사가 빵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어 전체적인 부를 증가시키고, 동시에 그 빵을 중간 재료로 하여 더 부가가치가 높은 케이크와 햄버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상황이 변합니다.
확대 재생산이 한계에 부딪혔는데, 금융은 비대해져서 오히려 제조업의 성장을 저해합니다. 미국의 금융은 실패하고 다른 국가들은 기술 격차를 좁혀 옵니다. 특히 중국은 기술을 모방하기도 하고 새롭게 발전시키기도 하며 제조업을 급속히 발전시킵니다. 특히 인공지능과 5G 통신기술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을 끌어갈 분야에서 미국의 우위를 위협할 만한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중국은 금융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금융 통제에서 한발 비껴서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을 안고 미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세계화가 올바른 전략인지 고민합니다. 이 때 뜻밖의 상황이 연출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침내 '셰일 오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 연준은 금융 위기 수습을 위해 양적 완화를 추진합니다. 특히 2009년부터 2015년까지 0~0.25퍼센트의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 시기에 프래킹fracking의 가능성을 본 셰일업체들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때마침 유가도 100달러를 돌파합니다. 금리와 유가가 셰일 산업의 성장을 돕습니다.
셰일 오일의 새로운 전기는 텍사스의 석유 중소기업 회장인 조지 미첼에 의해 마련됩니다. 그는 '수압 파쇄법'을 통해 셰일층에서 가스와 원유를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새로운 석유의 등장에 중동 산유국은 긴장합니다. 셰일 붐이 일어난 2014년 중반 이후 OPEC 산유국은 원유를 증산합니다. OPEC의 증산으로 유가는 폭락하고, 결국 많은 수의 셰일업체들이 도산합니다.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기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셰일 혁명의 속도를 조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비 문제는 수출을 통해 일부 해결한다고 해도 운송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석유는 대부분 송유관으로 수송되므로 송유관이 증설되지 않으면 운송할 방법이 없습니다.
셰일 오일의 급증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태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세계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1) 2017년 말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했습니다.
(2) 2018년 이후에는 이란과 기존 핵 합의를 파기하고 더욱 엄격한 핵 합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3) 셰일 오일로 강해진 경제 체력을 바탕으로, 출혈을 감수하며 중국과 무역 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4)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2018년 12월 트럼프는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
* 2월 29일, 아프간은 극단주의 무장조직이 미국과 동맹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미국은 그 대가로 아프간에 파병된 미국과 NATO 국제동맹군을 14개월 안에 모두 철군하기로 했다.

국제정치학의 석학 존 미어샤이머는 역외 균형 전략이 "미국의 전통적 힘에 기반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없던 그 자신감이 오늘날 발현되는 이유는 부와 힘의 원천인 석유가 미국에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중동국가  #두종파 #시아파 #수니파 #테러리스트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사담 후세인 #IS #이슬람주의#원리주의 #히잡 #개혁파 #강경파 #시위대 #급진파 #레바논 #오사마 빈라덴 #알카이다 #무장세력 #911테러단체 #아프칸 전쟁 #사회 갈등 #파키스탄 #아프칸스탄 #창시자 #모함마드 #마호메트사후 #혈통 #4대 알리 #칼리프만이혈통 #정권수립 #이슬람주의 #살상무기 #성직자 #제국주의 #이팔(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걸프전 #셰일 혁명 #넷백net back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편안 한마음 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 을 나누는 아름다운 그자체 를 서로 공유 하는것, 서로의 도움을 줄수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