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2일 일요일

히말라야, [ Himalayas], 한국 기록,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

히말라야, [ Himalayas], 한국 기록,

초등 우리나라도 갖고 있다~!?
인도 대륙 북쪽에서 중앙아시아 고원 남쪽을 동서로 길게 연결하는 만년설의 산맥.
히말라야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말로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다.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총길이 2,400km.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의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2개 낱말이 결합된 복합어이다. 처음에는 갠지스강() 연변의 수원()지대를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넓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히말라야산맥은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활 모양을 그리며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네팔·시킴·부탄·티베트 남부를 뻗어내리면서 몇 갈래의 산계로 나누어진다. 맨 앞쪽의 힌두스탄 평원에 면하면서 비교적 낮은 시왈리크산맥과 그 뒤쪽에 있는 소()히말라야산맥, 산맥의 주축에 해당하는 대()히말라야산맥의 3개의 산계로 나눌 수 있다. 대히말라야산맥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최고봉이 솟아 있으나, 줄곧 연속되지는 않고 거대한 산괴를 이루면서 군데군데 깊은 계곡으로 단절되어 있다. 이 가운데 카라코람산맥을 히말라야산맥과 구분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말라야산맥은 ‘눈의 거처’라는 뜻에 어긋나지 않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긴 주요 산맥순위산맥 명길이(km)위치
1
7,000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
2
4,800
미국, 캐나다
3
3,542
남동극 순상지, 남서극 대륙
4
3,059
호주
5
2,576
부탄, 인도, 네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중국, 미얀마
아시아 대륙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는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지역으로 총 연장 2,50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히말라야는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 네팔, 시킴, 부탄 및 티베트 남부를 뻗어내리면서 몇 개의 산계로 나누어진다. 히말라야의 지역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힌두쿠시, 힌두라지의 산맥이나 파미르, 티베트의 쿤룬 산맥이 히말라야에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히말라야라 부르는 지역은 동쪽의 브라마푸트라 강에서 시작, 서쪽의 인더스 강에 이르는 장장 2,500킬로미터, 남북으로 폭 200~300킬로미터의 산맥을 가리킨다. 즉 동쪽 부탄의 남차바르와(7,756m)에서 서쪽의 낭가파르바트(8,126m)까지 이어지는 이 산맥이 가장 정통한 의미의 히말라야 산맥이며, 그레이트 히말라야라고도 부른다. 이 협의의 히말라야는 동쪽에서부터 아삼(Assam) 히말라야, 부탄 시킴(Bhutan Sikim) 히말라야, 네팔(Nepal) 히말라야, 가르왈(Garhwal)히말라야, 펀잡(Punjab) 히말라야로 나뉜다.

아삼 히말라야는 인도 북동쪽 브라마푸트라 강에서 부탄의 마나스 강까지 이어지는 400킬로미터의 산맥이다. 이 지역은 히말라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밀림 지대가 많아 접근이 어렵고 벵갈 만과 근접해서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 많다.

부탄 시킴 히말라야는 부탄의 동북부 산지에서 인도 시킴 주를 거쳐 네팔 동부 경계까지 400킬로미터 구간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7,000미터급 봉우리 15개가 있으며, 동쪽 아삼 히말라야에서 고도가 높아지면서 부탄 히말라야 최고봉 쿨라캉리(7,554m)로 이어지며 서쪽의 시킴 히말라야로 연결된다. 부탄의 산은 남북간 고도차와 지형의 기복이 심하고 몬순 기간 중 비가 많아 밀림을 울창하게 하여 접근이 어렵다. 이 지역은 인도에서 티베트로 넘어가는 통로로 1921년부터 7차례나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이 지역을 통해 티베트를 횡단하는 캐러밴을 했다. 시킴 히말라야는 서쪽에 세계 3위 고봉 칸첸중가를 사이에 두고 네팔 히말라야와 나뉜다.

히말라야

네팔 히말라야에는 8,000미터 이상의 14개 고봉 중 8개 봉이 솟아 있으며, 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 등이 있고, 6,000~7,000미터급의 수많은 고봉들이 네팔과 중국의 국경선상을 동서에 걸쳐 장장 800킬로미터나 펼쳐져 히말라야 전체 길이의 3분의 1을 차치한다. 이 거대한 산맥은 남북으로 네팔과 중국의 티베트 고원, 동쪽은 시킴 히말라야, 서쪽은 인도의 가르왈 히말라야와 연결된다.

가르왈 히말라야는 네팔 서쪽 국경에 있는 칼리 강에서 인도의 수틀레지 강까지 길이 320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이다. 인도 최고봉이자 성역인 난다데비(7,816m)와 카메트(7,756m)를 가진 산역이다. 이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 중 접근이 쉽고 아름다운 암봉들이 많아 일찍부터 등반 활동이 시작된 곳이다. 이 지역의 동부는 난다코트(6,861m), 트리슐(7,120m), 창가방(6,864m), 두나기리(7,066m) 등이 있다. 또 이 지역의 강고트리 산군에는 차우캄바(7,138m)를 포함 바기라티(6,856m), 쉬블링(6,543m) 등 6,000~7,000미터급의 유명 암봉들이 밀집해 있다.

펀잡 히말라야는 가르왈 히말라야의 서쪽이며, 수틀레지 강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550킬로미터의 산악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세계 9위봉 낭가파르바트가 웅자를 드러내고 카시미르 분지가 이곳에 속한다. 펀잡은 다섯 개의 강을 의미하며 인더스 강의 5대 지류 중 4개가 이 지역을 흐른다. 펀잡 히말라야에는 최고봉 낭가파르바트와 눈(7,135m), 쿤(7,077m) 등이 있다. 한 개의 8,000미터급 산과 두 개의 7,000미터급, 6,000미터급의 산이 여러 개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히말라야 산맥은 펀잡 히말라야에서 끝이 난다. 인더스 강이 이 산줄기를 카라코람 산맥과 명확하게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코람 산맥은 지리적으로 양자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자는 견해도 있다. 좀더 넓게 본다면 중앙아시아의 만년설을 이고 있는 모든 고봉군을 히말라야로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고봉이 밀집한 산맥은 6개다. 히말라야·카라코람·힌두쿠시·쿤룬·톈산·파미르 산맥 등이다. 파미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는 이들 산맥을 넓은 개념의 히말라야로 묶어 하나의 등반 대상지로 파악하자는 것이 광역 히말라야다.

카라코람(Karakoram) 산맥은 중앙아시아 남쪽과 인도 북서쪽에서 동서 500킬로미터, 남북 150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진 큰 장벽이며,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이룬다. 터키어로 카라는 ‘검은색’을, 코람은 ‘돌’을 의미한다. 이 산역에는 8,000미터급 4개 봉과 수많은 6,000~7,000미터급 산이 모여 있다. 세계 제2위 고봉인 K2(8,611m)를 위시하여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룸Ⅰ(8,068m) 등이 솟아 있으며, 인더스 강 지류의 샤이요그 강에서 길기트 강 부근의 25개 산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 산악계의 전설적 인물 조지 맬러리(1886~1924)가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을 앞두고 미국에서 강연할 때다. 한 청중이 “왜 그렇게 위험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어하죠?”라고 묻자, 그는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고 짧게 답변했다. 이 말은 산에 가는 이유를 한마디로 함축한 불후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스포츠로서의 등산이 인류 역사에 처음 기록된 것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을 등정하면서부터다. 프랑스의 미셸 파카르와 포터였던 자크 발마는 1786년 8월 몽블랑 첫 등정의 스타트를 끊었다. 이는 근대 등반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포츠 등산을 의미하는 알피니즘(Alpinism)의 어원은 알프스(Alps)에서 파생했다. 알피니즘은 높고, 험난하고, 새로운 산에 도전하는 산악정신을 뜻한다. 알피니스트(Alpinist)는 알피니즘으로 무장한 탐험과 등반을 즐기는 등산가를 말한다.


아시아 대륙의 남쪽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다. 해발 7200m가 넘는 고봉이 무려 100여 개가 있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해발 8848m)를 포함해 해발 고도 8000m를 넘는 산(독립 봉우리)도 무려 14개나 된다. 이른바 14좌(座, 땅 위에 거대하게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14 Eight Thousanders’라고 부른다. 1949년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8000m 거봉 등반이 본격적으로 점화됐다.

8000m급 고봉 14개를 모두 오른 최초의 인물은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다. 그는 14좌 완등이란 개념을 처음 만들어냈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8125m) 등정을 시작으로 1986년 로체(8516m) 정상에서 대장정의 방점을 찍었다.

전 세계적으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사람은 약 26명(2011. 11)이다. 이들이 기록 달성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3여 년. 메스너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였던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1987년 세계 두 번째로 14좌를 완등했다. 이탈리아의 세르조 마르티니는 꼬박 24년에 걸쳐 최장수 14좌 완등(2000)을 마무리했다.

한국의 14좌 완등자 수는 5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엄홍길(2000), 박영석(2001), 한왕용(2003), 오은선(2010), 김재수(2011) 등이 그 주인공이다. 다만 2010년 안나푸르나를 끝으로 14좌 완등을 선언한 여성 산악인 오은선의 등반 기록은 지난 2009년 칸첸중가 등정 여부가 논란 중에 있다. 오은선을 제외해도 4명으로 세계 최다를 자랑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히말라야 등반사가 반세기 정도 앞서 있지만 14좌 영웅이 없다. 일본 산악인 가운데는 1970년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우에무라 나오미(植村直己, 1941~1984)를 꼽을 만하다. 그는 1978년 단독으로 북극점에 도달해 세계적인 유명 산악인이 됐다. 그러나 1984년 북미의 매킨리봉을 단독으로 등반하고 하산하던 중 실종됐다. 그 후 이렇다 할 산악 영웅이 나오지 않고 있다. 14좌는 고사하고 10개 봉 이상을 오른 사람도 없다.

한국은 등반 강국이지만 아쉽게도 초등 기록은 없다. 초등은 모두 외국인의 몫이다. 히말라야 초등은 모두 1950~60년대에 이뤄졌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첫 에베레스트 초등은 1970년대다. 14좌 중 프랑스 원정대가 1950년 안나푸르나(8091m)를 가장 먼저 초등했고, 쉐칭 등 중국인들이 1964년 시샤팡마(8027m)를 초등하면서 14좌 초등의 대업을 완성했다.

신비로운 설산 히말라야가 한국인의 안방 속으로 처음 들어온 것은 1977년이다. 고상돈(1979년 사망)이 그해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8000m 거봉 등정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히말라야 14좌 등정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선각자였다. 당시 한국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10번째 국가로서 세계 8번째 등정이었다. 등정자 순위로는 초등 이래 57번째. 고상돈은 새벽 5시 30분 제5캠프를 떠나 7시간 20분 만에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그는 “여기는 정상이다. 더 오를 데가 없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고상돈 원정대는 귀국 후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한국 여성으로는 지현옥이 1993년 에베레스트를 첫 등정했다. 지현옥은 1988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한국 여성으로선 처음 오른 이후 1993년 에베레스트도 한국 여성 최초로 올랐다. 그러나 지현옥은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길에 실종되고 말았다. 14좌의 영웅 박영석도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하산 도중에 실종돼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14좌 완등을 마친 데 이어 남극점과 북극점을 도보 도달에 성공, ‘산악 그랜드 슬램’의 위업을 달성한 대한민국 산악계의 대들보였다.

히말라야(Himalayas,

안나푸르나는 세계 10위의 고봉으로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포근한 여성적 이미지와 달리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최고봉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사고가 많다. 하지만 에베레스트가 워낙 많은 팀이 도전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는 안나푸르나가 최악의 산인 셈이다. 안나푸르나 주봉에 도전한 총 22개의 한국 원정대 가운데 8개 팀이 등정에 성공했고(성공률 36.3%), 대원 8명과 셰르파 10명 등 모두 18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히말라야(Himalayas)는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의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을 의미한다. 네팔, 인도, 파키스탄, 중국, 부탄에 걸쳐 있는 대습곡 산맥인 히말라야산맥은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활 모양을 그리며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 네팔, 시킴, 부탄, 티베트 남부까지 뻗어 있다.
히말라야 14좌,
히말라야 14좌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중에서도 하늘의 별에 견줘 '자이언트'로 불리는 높은 봉우리들 중 14개를 지칭한다. 에베레스트(8,848m), K2(8,613m), 칸첸중가(8,588m), 로체(8,518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9m), 마나슬루(8,165m), 낭가파르밧(8,128m), 안나푸르나(8,092m), 가셔브롬1·2봉(8,070m, 8,036m), 브로드피크(8,048m), 시샤팡마(8,046m) 등이 있다. 이 봉우리들은 대다수가 네팔,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지역에 있으며 시샤팡마는 중국 티베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8,000m급 고봉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950년 프랑스 원정대의 안나푸르나 등정이다. 그리고 프랑스 원정대에 의한 '인류 최초의 8,000m급 등정'이 달성되고 3년 후인 1953년,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이며, 2010년 기준으로 총 20명의 산악인이 완등했다. 이 중 우리나라의 엄홍길, 고(故)박영석, 한왕용, 오은선이 포함돼 있다.(오은선 대장의 14좌 완등 기록은 2009년 칸첸중가 등정에 관한 사실 여부로 논란이 있었다. 대한산악연맹은 그가 칸첸중가 등정에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히말라야 16좌,
히말라야 16좌란 공인된 8,000m급 14좌와 비공인 2개 봉우리를 말한다. 비공인 2개 봉우리는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로, 이들은 독립된 산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위성봉이면서도 독립봉 성격이 강해 세계 산악계는 이들을 점차 독립봉으로 인정해가는 추세이다. 한편 지난 2000년 7월 국내 처음이자 세계에서는 8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엄홍길 대장은 2004년 4월 얄룽캉 등반에 성공하였으며, 4번의 시도 끝에 2007년 로체샤르 등정에도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고봉 등정을 이룬 인물이 되었다.
출처 & 참고문한,
[히말라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모자이크 세계지리
[현암사
[히말라야산맥 [Himalayas] (두산백과)
[히말라야 [Himalayas] (등산상식사전, 2010. 10. 7., 이용대, 한국등산연구소)
[히말라야 초등 기록을 우리나라도 갖고 있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
테그 >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스크리트어 #최고봉 #에베레스트 #한국 원정대 #최악의 산인 #산악 #그랜드 슬램 #셰르파 #가르왈

라면,우리의 최고 먹거리,1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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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우리의 최고 먹거리,1
라면은 원래 중국의 밀가루 요리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에 출병한 일본병사들이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이다. 처음에는 돼지뼈로 만든 스프를 사용했지만, 점차 일본적인 것으로 변화하여 미소(みそ : 된장)를 사용하는 것 등 여러 종류의 라면이 생겨났다. 현재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는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안도 시로후쿠()'라는 사람이 술집에서 튀김요리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밀가루를 가늘게 만들어 기름에 튀기는 라면 제조법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 기름에 튀기면 국수 속의 수분은 증발하고 국수는 익으면서 속에 구멍이 생기는데, 이 상태로 건조시켰다가 필요할 때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작은 구멍에 물이 들어가면서 본래의 상태로 풀어지게 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해 가을 일본의 닛신()식품이 국수 발에 간단한 양념국물을 가미한 조미면()을 '끓는 물에 2분'이면 먹을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시판한 것이 인스턴트 라면의 효시이다. 그 후 1959년 에스코크, 1960년 묘우조()식품에서 치킨라면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본격적인 라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라면은 조미면으로 면 자체에 양념을 가미한 것이었지만 시일이 경과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묘우조식품에서 1961년 스프를 분말화하여 별도로 첨부하면서 지금의 라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서 3분이면 OK라는 선전 문구 아래 현재는 세계적으로 연간 437억의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인스턴트 라면은 간편히 먹을 수 있는 보존식품으로 20세기 음식문화를 크게 변화시킨 혁명적인 식품이라 할 수 있다.
국수를 증숙시킨 후 기름에 튀겨서 만든 유탕면에 분말 수프를 별첨한 인스턴트식품.
라면의 기원은 1870년대 일본 요코하마 중화거리, 고베 난킨마치 등의 중국요리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과 1922년 삿포로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돼지뼈, 닭고기, 야채,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에 수프로 양념을 하여 삶은 중화면()과 함께 먹는 것이 대체적이다.  

라면이 많은 인기를 끌자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서 보관하기 쉽도록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가미하여 먹은 것을 인스턴트라면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인스턴트라면이 처음 출시된 것은 1958년으로 산시쇼쿠산(サンシㅡ:현재 닛신식품)에서 생산한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이 시작이었다.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가 면을 기름으로 튀기는 것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1963년 9월 15일에 한국 최초의 라면으로 출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식량난 타개를 목적으로, 주식인 을 대체하여, 쉽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공급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이 제품은 삼양식품의 설립자인 전중윤 회장이 일본의 《묘-죠-쇼쿠힌(일본어: 明星食品 명성식품[*])》에서 라면 기계 2대를 들여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닭고기 스프와 제품의 주황색 표지에 중량 100g에 10의 가격으로 처음 선보였다. 3년간 시행 착오를 거쳐 대한민국의 시장 점유율 1위로 대표 라면으로 사랑을 받았으나, 1989년 《공업용 쇠기름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사건
공업용 쇠기름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공업용 쇠기름 사건입니다.
제6공화국(대통령 노태우)에 접어들어, 1989년 11월 3일 라면에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한다는 투서를 받고, 검찰이 《보건범죄 단속에 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으로 삼양식품과 관련 업체 5개사 대표를 구속 입건하였다. 검찰은 삼양라면이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쇠기름을 사용해 라면 등을 만들어 시판했다”고 발표했고, 언론은 ‘공업용우지’라는 선정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1989년 11월 6일 보건사회부장관 김종인이 라면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내렸고, 11월 28일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기업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생산판매가 중단되면서, 직원들의 퇴사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여 회사의 존폐 위기에 몰렸다.
2009년 9월 최초의 맛을 재현한 닭고기 국물맛 삼양라면이 '더 클래식'이라는 부제를 붙여 따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단종되었다.
2010년 3월 23일 창업주인 전중윤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전인장 회장이 취임했다.
삼양라면 구매운동,
2008년 6월 라면 제조사인 삼양식품과 농심에서 생산하는 라면제품에 각각 이물질이 발견되어 물의를 일으켰다. 6월 13일 삼양식품의 용기라면 ‘큰컵 맛있는 라면’에서 금속성 너트(암나사)가 발견되었고, 6월 17일 농심 신라면에서 바퀴벌레 이물질이 나왔다고 보고되었다.
도리어 누리꾼들은 "삼양라면을 먹읍시다"라고 호소하고 '삼양라면 구매운동'이 누리꾼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인스턴트라면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60년경으로, 현재 여러 식품회사에서는 각각 특색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 시판한다. 라면은 건조식품이므로 수분이 많은 식품에 비해 단위 중량당 영양분이 많으며, 튀긴 식품이므로 지방이 많아 120g당 500kcal의 열량을 내는 고()칼로리 식품이다.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도 다양하다.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법은???
① 배합공정:소맥분과 배합수를 혼합하여 반죽을 만든다.
② 면대형성:롤러로 압연하여 면대를 만든다.
③ 제면공정:제면기로 국수 모양을 만들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절하여 라면 특유의 꼬불꼬불한 형태로 만든다.
④ 증숙공정:스팀 박스를 통과시키면서 α화(호화)시킨다.
⑤ 성형공정: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납형 케이스에 넣는다.
⑥ 유탕공정:150℃ 정도에서 튀기고 수분을 휘발시킨다.
⑦ 냉각공정:상온으로 냉각시킨다.
⑧ 수프제조공정:주원료를 고압처리하여 진공농축, 진공건조시킨 다음 각 원료를 혼합하여 포장한다.
⑨ 포장공정:수프를 첨부하여 완제품으로 포장한다.
우리가 아는 ‘라면’ 이름을 한번 열거해 보자. ‘너구리라면, 된장라면, 삼양라면, 쇠고기라면, 신라면, 열라면, 장터라면, 참라면, 해피라면’ 등등 그 수가 엄청나다. ‘라면’ 생산이 그만큼 활발하다는 증거이다. 그 생산량으로만 본다면 단연 우리나라는 ‘라면’의 종주국으로 자처할 만하다.

그러나 ‘라면’은 우리 고유의 음식이 아니라 일본 음식이다. 물론 중국이 원조라는 설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인스턴트(즉석) 라면은 일본에서 처음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일본 라면이 지금의 우리 라면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본 라면은 면발이 국수보다 더 굵고 국물이 그렇게 맵지 않다. 그래서 맵고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이 라면을 ‘라멘’이라 부른다. ‘라멘’이란 말은 순수 일본어가 아니라 중국어 ‘라미엔()’에서 변한 말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게 보면 일본어 ‘라멘’은 중국어 차용어가 된다. ‘라미엔()’은 면발을 한 줄, 두 줄, 네 줄, 여덟 줄 등의 방식으로 늘려 빼는 방법으로 만든 면을 가리킨다. 이 면을 튀겨 건조시키면 지금의 라면과 유사한 고칼로리 식품이 된다. 일설에 의하면,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이 건조된 식품을 전투용 비상식량으로 대용했는데, 그 건조 식품이 중국군 포로를 통해 일본에 전해지면서 비로소 일본에서 라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라미엔()’이라는 중국어까지 일본어로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중국의 ‘라미엔()’을 모델 삼아 기름에 튀긴 면을 건조시킨 다음 뜨거운 물에 풀어 먹는 지금의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지금과 같은 ‘라면’의 역사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라면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63년이다.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선보이면서 이 땅에서도 라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면’이라는 먹을거리와 함께 그 이름도 함께 들어왔을 터인데, 일본어 속의 차용어인 ‘라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라면’으로 받아들였다. ‘라면’의 ‘라’는 ‘’에 대한 중국식 발음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면, ‘면’은 ‘’에 대한 한국식 한자음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굳이 따진다면 ‘라면’이라는 말은 ‘중국어’와 ‘한자어’가 결합된 어형이 된다. ‘자장면()’이라는 단어의 조어 구조와 같아서 흥미롭다.

삼양식품이 일본에서 라면을 들여온 이유는 1960년대 당시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에서였다. 그런데 ‘삼양라면’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오랫동안 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인스턴트 밀가루 식품에 대한 거부감은 어찌 보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라면’이라는 말을 ‘綿(나면)’으로 오해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옷감이나 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라면에 대한 오해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홍보를 해도 ‘라면’이 팔리지 않자, 회사 측에서는 대로변에 점포를 설치하고 조리하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방식으로 홍보 활동을 펼쳤고, 또 공공장소를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시식()을 권하는 방식으로 라면의 맛과 장점을 알리기 시작했다. 마침 1965년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이 나오게 되면서 ‘라면’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라졌다. 싼값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라면의 최대 강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라면’ 없이는 못 사는 세월이 된 것이다.
생성시기
일본-1958년 8월 25일
한국-1963년 9월 15일

유래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로, 그는 1958년 8월 25일에 국수를 기름에 튀긴 라면을 개발해냈다.

중국의 건면()에서 라면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의 라면과는 달랐을 것이다. 안도 모모후쿠가 라면을 개발할 당시 미군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가 매우 흔했는데 일본인들은 밀가루 음식에 익숙하지 않아 잘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인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국수를 기름에 튀겨 국수 속의 수분을 제거하고, 이후 뜨거운 물에 넣으면 국수의 모양을 되찾는 라면을 개발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9월 15일 일본 기술을 도입한 삼양식품에서 처음 생산했다. 그후 급격히 발달하여 1970년대 중반에는 국내 연간 생산량이 10억 개에 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종래의 끓여 먹는 제품에서 더운 물만 부으면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즉석라면이 등장하여 즉석 식품의 주역이 되었다.
우리나라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는 농심(農心)이다.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오른 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농심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면이다. 롯데라면은 1965년 처음 선보였다. 당시 신춘호(辛春浩) 회장이 이끄는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롯데라면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삼양라면과 함께 인기를 끌다 1974년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따지고 보면 대표 상품인 신라면의 원조가 롯데라면인 셈이다.

1963년도 최초의 삼양라면 ⓒ삼양식품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농심이 아니다. 1호 라면은 삼양(三養)라면이다.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나왔다. 삼양라면의 탄생은 전중윤(全仲潤) 삼양식품 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돌며 시장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1963년, 드디어 우리나라 토종 1호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중량 100g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그러나 초기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라면이 한 끼 식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도 생소했다. 라면의 ‘면’을 무슨 섬유나 실의 명칭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삼양라면 초기 광고 ⓒ삼양식품,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라면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6년 연 240만 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 개로 늘어났고, 몇 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이 3000만 달러였는데, 이 중 9%에 해당하는 270만 달러가 삼양라면을 판 것이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1989년 11월에 ‘우지(牛脂)라면’ 파동이 일어나면서 삼양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라면 판매와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1000여 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삼양라면은 법정 투쟁에 나서 1997년 8월, 무려 7년 9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상처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결국 절대강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후 한동안 고객들의 외면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잘못알고있는점: 6·25전쟁 직후 부모와 집을 잃은 고아들은 미군부대에서 나누어 주는 우유 가루나 라면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곤 했다.
출처& 참고문헌,
건강한 식품선택을 위한 식품라벨 꼼꼼 가이드
doopedia.co.kr
[라면 (두산백과)
[https://happyday-2100.tistory.com/365 [살맛 나는세상]
[라면 (새로운 일본의 이해, 2005.., )
[라면 - 라면? 라멘? 라미엔?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농심이 우리나라 라면을 처음 만들었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
[라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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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우리 최고의 먹거리,

“사람과 동물 자연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는 좋은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 과 아픔없이 웃음만 안고 삶을 영위하는 세상살이 야말로...<script async src="//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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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우리 최고의 먹거리,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식품,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수프를 따로 넣는다.
세계라면협회(IRMA)에 의하면 2009년 기준 전 세계에서 연간 1천억 개의 인스턴트 라면이 소비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인스턴트 라면은 쌀과 빵에 이은 인류의 식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리가 쉽고 유통기한이 길기 때문에 구호물자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빈민들에게 라면은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주식이다.
“인스턴트 라면을 끓일 물만 있으면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을 수 있다지만, 인스턴트 라면을 주면 그 무엇도 가르쳐줄 필요 없이 평생 먹을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소비하는 나라는 단연 중국으로 연간 408억 개의 라면을 먹는다고 한다. 그에 이어 인도네시아 139억 개, 일본 53억 개, 베트남 43억 개, 미국 40억 개이고 그를 이어 우리나라가 34억 개로 6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1인당 소비량에서는 수십 년간 한국이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소비량 69개(전체 소비량으로 세계 1위인 중국의 1인당 소비량은 32개로 반절에 못 미친다)!
2009년 우리나라, 라면 종주국이 되다, (한ㆍ중ㆍ일,)
2009년 한국 라면의 수출량은 약 1억 4천만 달러로 중국, 일본, 미국을 크게 웃돈다. 상하이에서 한국 라면의 브랜드 인지도는 90% 이상이고, 러시아에서는 ‘팔도 도시락’이라는 제품이 라면 시장 점유율의 60%를 차지해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용기 라면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될 정도다. 심지어 라면의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을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는 라면 종주국이다.
아시아 삼국 라면의 시초를 두고 논쟁,
“라면의 시초가 일본이나 중국이란 말이 있지만 지금 팔리고 있는 한국식 인스턴트 라면은 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납면’이나 ‘라멘’은 라면과 다르다. 라면의 종주국은 한국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시초임을 주장하며 자존심 싸움을 하는 한ㆍ중ㆍ일이기에 라면의 종주국이 어디냐는 논쟁 역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과연 라면은 어떤 식으로 시작된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오게 된 것일까?
오랫동안 상하지 않으면서 싸게 팔리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들어 인류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그의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언론은 그를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삼양라면'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
우리나라의 인스턴트 라면이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도 모모후쿠가 제조특허를 독점하지 않은 덕에, 그리고 일본의 ‘묘조라면(Myojo Food)’ 사장이 노하우를 전부 이전해 준 덕에 1963년 삼양의 전중윤 회장은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출시할 수 있었다.

전중윤 회장, 인스턴트 라면으로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하겠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미군의 음식 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여 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들어왔지만 사람들의 입맛에 제대로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던 당시는 패전 직후 일본의 상황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을 도입한다면 식량 자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전중윤 회장의 생각이었다.
삼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국수를 증숙시킨 뒤 기름으로 튀긴 꼬불꼬불한 유탕면과 국물을 만드는 수프가 첨부돼 있다. 1966년 3월 21이라는 제조일자, “최고의 맛, 정확한 양, 최선의 서비스”라는 문구가 써 있다. 이 라면은 일본의 명성식품주식회사와 기술 제휴하여 만든 제품으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애용되던 제품이다.

한국식 라면이 만들어진 계기가되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국민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라면을 섬유의 한 종류로 오해해서 먹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삼양식품은 캠페인 성격의 시식을 실시하고 라면 알리기 운동에 나섰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일본식의 담백한 국물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삼양라면에 흥미를 보였다.
“한국 사람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군.”


라면에주재료들,

맵고 짠 한국식 라면,

그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작비 문제로 사용하지 못한 고춧가루를 투입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쌀을 아끼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후 캠페인과 정책은 시너지를 이루며 라면 붐을 일으킨다.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맵고 짠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의 탄생이었다. 중량 100g, 가격 10원에 출시된 삼양라면을 통해 삼양사는 6년간 매출액 면에서 300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쌀 소비도 늘어나다,

삼양의 성공이 시발점이 되어 롯데공업(농심),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도 라면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라면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라면을 대체 식품이라기보다 기호식품으로 인식하게 되고,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덕에 오히려 쌀의 소비가 늘어나 혼분식 장려 정책은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우지파동’으로 라면 고급화와 다양화의 길을 걷다,

라면의 붐은 1989년 면을 공업용 쇠기름으로 튀겼다는 보도로 촉발된 ‘우지파동’에 의해 위기를 맞이한다. 삼양과 오뚜기는 폐업 직전까지 몰리고 비단 특정 회사만이 아닌 라면 전체에 신뢰를 잃은 소비자 때문에 라면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라면 파동은 기업들이 라면의 고급화ㆍ다양화를 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220개 종의 라인업과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이루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삼양라면,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든 한국,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 되다,
라면은 분명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납면과 라멘과 라면은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분화된 상태로, 그것의 계보를 따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장 늦게 라면을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출국이라는 점, 그리고 라면의 시초였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라면 수입국이라는 점을 그 계보와 나란히 놓고 본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870년 일본에서 라멘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
라면은 중국 음식으로 한자로는 ‘납면(拉麵)’이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노면(老麵), 유면(柳麵)이라고도 했다. 납면을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라멘’이 된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대 요코하마 등 일본의 개항장에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라멘을 노점에서 만들어 팔면서 일본에 라멘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라멘이란 명칭이 아니었고 ‘지나(支那)소바’ 혹은 ‘남경(南京)소바’라고 불렸다.
라멘, 일본의 전통 음식이 아니다,
라멘은 닭 뼈, 돼지 뼈, 멸치, 가다랑어포 등을 우려내고 여러 소스를 가미한 육수에 중화면이라는 국수를 말아 먹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중화요리로 구분되었다.
라멘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라멘집이 생기기 전까지는 중화요리 집에서만 라멘을 다뤘다는 점, 중국 본토 란저우에 그와 유사한 납면(, 라미엔)이라는 국수가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아왔다는 점 등을 봤을 때 라멘은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인들이 만들던 납면은 수타면을 가늘게 뽑아내던 형식으로 굵은 면발의 일본라멘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납면은 일본식 라멘으로 변형된 것이다.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
일본식 라멘은 우리가 자주 먹는 인스턴트 라면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라멘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전후의 일본은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넘쳐났다. 그 시절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는 밀가루를 원료로 한 식품을 개발하면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온 뒤 전쟁과 패전의 배고픔을 겪었던 그에게는 사업 기회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류가 배고픔을 극복할까?’라는 커다란 그림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에게 이것은 사업의 기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성전(聖戰)이기도 했다. 그러나 쌀을 중심으로 한 식습관의 벽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는 사업 실패와 탈세 혐의기소 등으로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라면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 안도 모모후쿠, 일본인,
좌절 속에서 자살을 결심한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마시자는 생각에 조그만 선술집을 찾았다.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채 마시는 마지막 술.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서 자작을 하던 그는 멍하니 식당 주인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 모모후쿠의 동상,

주방장은 어묵을 튀기고 있었는데, 밀가루 반죽을 입힌 어묵이 기름에 빠지자 밀가루 속 수분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모습을 보며 안도는 방금 전까지 자살하고 싶었다는 마음 따위는 까맣게 잊고 회사로 달려갔다.
“면을 기름에 튀기면 건조되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물을 부으면 다시 원래 상태로 풀어질 테지?”
그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닛싱(日淸) 치킨 라멘’이라는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상품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화에는 반론도 있다. 이미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타이완 출신의 안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1971년 ‘컵,, ’이라는 최초의 컵라면 개발,
라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납면에서 유래된 중화풍의 라멘과는 면과 맛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는 식품이었다. 하지만 닛싱 치킨 라멘의 출시 이후 지나 소바, 남경 소바 등으로 불리던 비 인스턴트 라면(즉, 일본식 라멘) 또한 라멘이란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미국의 인스턴트 라면 소비자들이 컵에 면을 넣고 포크로 먹는 것을 보고 1971년 ‘컵 누들’이라는 최초의 컵라면을 개발하는 등 인스턴트 라면의 대중화와 정립에 있어 인스턴트라면 역사의 처음과 끝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다,


세계최초의 컵라면과 치킨 라면,

그의 경영 철학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먹는 것에 관계하는 일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성직(聖職)이다. 먹는 것이 풍족하게 될 때야말로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는 식족세평(食足世平), ‘세상을 위해 먹는 것을 만든다’는 식창위세(食創爲世).
실제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특허 등을 독점하지 않고 국내외 업체에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경영 철학에 부합하는 행보를 걸어왔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91세가 되던 2001년에는 우주에서 먹을 수 있는 우주식 라면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실제로 2005년 7월 일본인 우주비행사 노구치 소이치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 스테이션에서 사상 처음으로 라면을 먹는 중계 장면을 보고 안도가 감개무량해 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라면재료설명???
• 팜유
기름야자 열매로 만든 식물성 기름으로 마가린, 쇼트닝 등의 원료가 된다.

• 변성전분
식품의 점도와 촉감을 향상시킨다. 식품가공 시 일정한 품질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

• 난각칼슘
달걀껍데기에서 얻는 칼슘으로 라면 면발의 질을 높인다.

• 호박산이나트륨
특유의 조개맛이 나는 조미료다.

• 5-리보뉴클레오티드이나트륨
향미 증진제로 L-글루타민산나트륨과 혼합하면 소량일지라도 맛과 향이 크게 증가한다. 복합조미료의 경우 이 둘을 혼합해 첨가하는 경우가 많다. 1일 섭취허용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라면 이야기,
우리나라 국민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 라면에 첨가된 MSG조미료, 지나치게 높은 염분, 열량 등이 알려지며 라면 섭취에 대한 걱정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하여 식품산업체에서는 나트륨 함량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식품라벨 읽기,
[식품유형] 열량 섭취를 주의해야 하는 사람은 유탕면류를 피한다.
유탕면은 기름에 튀겼기 때문에 비유탕면에 비해 고열량이다. 열량섭취에 주의해야 하는 사람은 한번 데쳐내어 섭취하거나 비유탕면을 선택한다.

[원재료명] 나트륨 함량을 살펴보아 저염 라면을 선택한다.
서울환경연합이 밝힌 라면 한 개당 평균 나트륨 함량은 2,075mg으로 우리나라 1일 성인 섭취 상한선인 3,500mg의 59%에 해당하며, 세계보건기구에서 정한 1,968mg을 훌쩍 넘어선다. 라면 한 개를 먹는 것만으로도 1일 상한선을 넘어서는 나트륨을 섭취하게 되므로 영양성분표에서 나트륨 함량을 꼭 확인하자.

[유통기한] 라면도 유통기한이 있다.
변성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제품이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라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최장 5개월로, 그 이상이 되면 유탕면류의 경우 기름의 산패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선택 포인트,
• 유탕면류의 선택을 피하자.
• 나트륨 함량이 적은 라면을 선택하자.
• 유통기한을 반드시 확인하자.
라면에 대해 알아보자,
식품유형에 따른 라면의 종류
식품유형에 따른 라면의 종류유탕면건면생면,
밀가루를 반죽하고 증숙시킨 뒤 기름에 튀겨 만든 면으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라면이다.
고온에서 단시간 건조시킨 것으로 생면 그대로의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다.
기름에 튀기지 않아 깔끔하면서도 담백하다. 보관방법과 유통기한에 유의해야 한다.
• 스프라면 스프의 성분
고기 맛을 내기 위해 육류에서 추출한 농축액을 분말로 만들어 첨가하거나 고기 향미료를 넣는다. 국내에서는 육류의 뼈에서 추출한 액체 성분을 농축한 후 향신료를 첨가해 스프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감칠맛을 내는 화학조미료인 MSG와 구수한 맛을 내는 핵산조미료인 IMP, GMP 등도 스프의 7~16%를 차지하고 있다. 맛 분말, 풍미분, 향미증진제, 시즈닝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이들 또한 화학조미료의 일종이다.

라면 스프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성분은 정제소금과 간장분말이다. 라면 하나가 성인 1일 나트륨 섭취 상한선의 75~95%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라면 조리 시 되도록 스프의 양을 줄이고, 라면 국물을 모두 마시는 것은 삼간다.

컵라면
봉지라면에 비해 짜고 강한 맛을 낸다. 따라서 같은 라면일지라도 봉지라면보다 컵라면의 나트륨 함량이 더 높다. 컵라면을 먹을 때는 곁들여 먹는 김치나 단무지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강한 맛으로 이를 보충한다.

• 면
뜨거운 물을 부어 익혀먹는 조리 방법에 따라 쉽게 면이 익어야 하기 때문에 봉지라면에 비해 밀가루 함량이 낮고 전분 햠량이 높으며 면발의 굵기 또한 가늘다. 라면엔 감자초산전분, 타피오카초산전분 등의 변성전분이 사용되는데 면발을 쫄깃쫄깃하게 하며 덜 풀어지게 한다.


라면 안 내용물,

지방과 나트륨을 줄이는 라면 끓이기 노하우
지방과 나트륨을 줄이는 라면 끓이기 노하우Step 1Step 2Step 3
끓는 물에 데쳐 기름기를 뺀 면을 사용한다.
나트륨을 줄이기 위해 스프 양을 줄인다.
파, 양파 등을 넣어 식이섬유와 비타민을 보충하고 달걀이나 연두부로 단백질을 보충한다.
건강한 식품선택을 위한 식품라벨,,

출처 &참고문헌
[라면 (건강한 식품선택을 위한 식품라벨 꼼꼼 가이드, 2012.,,)
사물의 민낯
[라면 -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사물의 민낯, 2012. 4. 16., 김지룡, 갈릴레오 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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